9월 2일 충남대 박물관에서 열린 한국고대사학회 제8회 하계세미나에서 한중연 신종원 교수가 삼국의 불교 초전자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전진왕 부견이 고구려에 사신과 함께 승 순도를 보냈는데, 이 때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왔다. 2년 뒤 승 아도가 왔는데 소수림왕 5년에 성문사와 이불란사를 지어 순도와 아도를 각각 살게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불교유입 내용이다.
그런데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는 또 “미추왕 2년(263) 아도가 고구려에서 왔는데 그는 조위인 아굴마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아도라는 인물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록이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이 기사에 대하여 “시대만 빠를 뿐 아도의 행적이 계림잡전의 묵호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아도와 묵호자는 동일인이며, 소수림왕 2년(374)에 고구려에 온 아도가 곧 아도비의 아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현대 불교학자들은 두 아도는 정말로 동일한 인물일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만약 아도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 즉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라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종원 교수는 한국고대사학회에서 삼국의 불교 초전자와 초기 불교의 성격을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아도(아두)가 동일 인물이 아니며 아두삼마라는 삼국유사의 표기는 신라전도승의 대명사와도 같이 쓰였다”고 설명했다. 즉 아도가 아기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이방인 즉 승려들을 지칭하는 대명사였다는 것이다.
신종원 교수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아도삼마에서 삼마가 사미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도는 승려 지칭하는 일반명사
이 해석은 한국 고대인들이 승려라는 이방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아도 혹은 아두, 즉 어린 아이처럼 빡빡머리를 한 이들이 불교를 전해주었을 때 고대인들의 눈에는 아주 신기하게 보였던 것이다.
한국고대사학회는 9월 2일 충남대 박물관에서 열린 제8회 하계세미나의 주제를 ‘한국 고대사 속의 이방인-인문 교류와 문화적 역동성’으로 정하고, 한국 고대사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의 모습을 집중 조명했다.
한국역사에 등장하는 불교, 일본, 그리고 서역은 어떤 모습으로 한반도에 다가왔을까.
로마 유리제품 대거 유입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빈약한 문헌자료로는 고대사회에서 외래 문물의 수입을 제한적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이들의 교류는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유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다.
동양대 이한상 교수는 「신라무덤에서 발견되는 서역계 문물」을 통해 신라와 서역의 교류현황을 살펴보았다.
5∼6세기경 경주의 대형무덤에서는 찬란한 황금장식과 함께 서역산으로 추정되는 각종 유리용기와 장식보검, 감옥팔찌를 비롯해 왜의 돌팔찌와 하지기(토사기), 고구려산으로 보이는 녹유호와 귀걸이, 중국산 흑갈유소병 등 외래물품이 다수 출토되었다. 여기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리제품이다. 그 중에는 소위 로만글라스로 불리는 유리용기와 상감유리옥이 섞여 있다.
이한상 교수는 “신라분묘에서 출토되는 대다수의 유리용기는 로만글라스 후기의 작품이며 제작기법으로 보아 지중에 연안지역에서 제작된 것이고, 제작기법이 조악한 몇 점은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또 “신라인들의 무덤 속에서 나타나는 로만글라스 등의 유물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난다”는 점을 들어 로마 유리 장인들이 직접 이주해왔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김창석 강원대 교수는 「8∼10세기 이슬람 제종족의 신라 내왕(來往)과 그 배경」에서 고대사회 이슬람에 대한 기록들을 추적했다.
이슬람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에 등장하는 대식국 즉 아라비아인들에 관한 기록이다. 고려사 현종 15년조에는 대식국의 열라자 등 10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또한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 한국사에는 처용이라는 이름의 검은 얼굴을 지닌 동해 용왕의 아들이 등장한다.
역신을 물리쳤다는 처용이 실제로는 약품을 주로 취급하던 이슬림 상인의 이야기가 설화화 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김교수의 설명이다.
처용은 약품 전해준 무슬림
김창석 교수는 “이슬람인들이 취급한 희귀한 상품, 약재와 향료·공예품은 왕실과 골품귀족들에게 필요한 물품이었고 이들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일부 상인과 예인(藝人)들의 정착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또한 “고려는 송이나 페르시아, 소그드의 문물을 수입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적극적이고 문화적 존숭의 대상으로 생각했던데 반해 신라는 이들 이슬람 국가들을 단발적인 교역의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고대사 속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의 모습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희미한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출토유물과 2차사료들에 등장하는 외래교류의 기사는 그 희미한 발자국들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료들이다. 이 분야의 연구는 앞으로 한국사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중요한 키워드라는 것이 이날 참가자들의 공통된 목소리였다.
첫댓글 올려 주신글 잘 읽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도가 아두! ? 불교 역사가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중국보다 앞선다면? 직 수입 이라면 가야의 역사도 재 조명 해야 할것 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처용이 약품을 전해준 무슬림--이채롭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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