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에 올린 적이 있는 글로
돌아가신 선친의 삶을 돌아보며 썼던 글입니다.
선친께서는 평생을 낙도에서 교직생활을 하신 분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삶은 제 어머니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자식들에게도 불편을 주었지요.
그래서 저는 젊었을 때에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칠십 가까워 헤아려 보지만
아직도 충분히 제 아버지가 걸었던 삶 전부를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어쩌면 특이해 보이는 선친의 삶을 포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짧은 내용이지만 제 딸이 할아버지를 찾을 수 있는 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오래전에 쓴 글입니다)
1 代.
대문간으로 시선을 고정한 체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새운 徐 씨는 바깥의 인기척에 소스라쳐 대청마루에서 벌떡 일어났다.
젖먹이를 품에 안은 며느리의 얼굴이 그새 하얗게 질렸다.
무슨 일일까?
날이 밝기엔 아직 멀었지만 불을 밝힐 수 없으니 조바심이 더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조심스레 내다보니 어슴푸레한 대문간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은 뒷골목 안쪽의 李 씨다.
수협의 경매인인 李 씨는 두리번거리며 대문 안으로 들어서길 꺼리며 수협 건물 선창 쪽에 여러 주검이
즐비하더라는 말만 대문 사이로 남긴 체 총총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황망 간에 徐 씨는 그만 대문간에서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만다.
마산과 진해 쪽에서 전투가 치열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수삼일 전에는 읍내로 들어오는 길목의 진동 고개에서도 밤새 총소리가 울렸다고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인민군이 낙동강은 쉽게 건너지 못할 것이라며 희망 담긴 위로들을 나누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틀 전 불쑥 인민군대가 읍내에 그만 들이닥친 것이다.
별다른 저항도 없었다.
후퇴를 거듭했던 국군은 낙동강 사수에만 전력을 기울였던 탓에 인민군의 우회침투를 예상하지 못했다.
거리낌 없이 군청과 경찰서를 장악한 인민군은 큰아들이 근무하는 읍내의 학교에 진을 쳤다.
마구잡이로 사람을 해한다는 소문은 집집마다 대문을 걸어 잠그게 했고
피난민들이 전하는 – 경찰, 군청 직원, 교원들의 피해가 심했다는 흉흉한 말은 그런 가족들을 떨게 했다.
전날 아침을 떠는 둥 마는 둥 학교가 어떻게 되었는지 근처라도 가본다며 집을 나선 큰 아들이 밤이 새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사달이 난 것이 틀림없어니 아들의 학교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은 한시가 급하다.
대문 단속을 시키려는 徐 씨 곁에 어느새 쫓아 나온 며느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같이 가겠다고 한다.
"애야, 큰일 날 소리 말아라
젊은 네가 더구나 말도 서툴면서
인민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데 그기가 어디라고 간다는 말이냐"
손사래를 쳤지만
젖먹이를 덜 쳐 업고 따라나서는 며느리를 말릴 수 없는 노릇이다.
이른 아침이지만 팔월 날씨는 벌써 후덥지근하다.
사거리의 군청을 지나 중앙시장을 가로질러 멀찌감치 학교가 보이는 곳까지 오는 동안 주변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걸어 닫았다.
이따금 총을 멘 인민군 몇만 보일 뿐 평소 북적거리던 시장 쪽은 인적이 끊겼다.
얼굴과 목덜미로 날씨 때문만은 아닌 진땀이 쉴 새 없이 쏟아 오른다.
까맣게 변한 핏자국이 곳곳에 엉켜 붙은 운동장 한쪽 구석에 아들은 거적을 덮어쓰고 땅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풀썩 주저앉아버린 며느리와 젖먹이 손녀를 되돌아볼 사이도 없이
함부로 버려져 밤새 피를 쏟으며 거적에 덮여 있었을 아들을 두 팔로 감싸 안은 徐 씨는
아득해지는 정신줄을 거머잡으며 울부짖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주변이 노랗게 보일만큼 혼절할 듯 울부짖던 서 씨는 가느다란 신음과 숨결을 느꼈다.
죽었다고 생각하여 거적에 둘둘 말아 내다 버린 아들의 숨이 붙어있는 것이다.
徐 씨는 자신도 모르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부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부처님을 찾았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숨어 버리거나 도망을 가버려 먼 친척뻘인 일흔 넘은 노인이 손수레를 끌고 거적에 덮인 아들을 싣고 왔다.
길거리에서 당장이라도 숨을 거둘 것만 같아 고무신도 팽개치고 맨발로 달음박질을 쳤다.
학교 정문에서 붙잡힌 아들은 총의 개머리판으로 정신을 잃을 만큼 두들겨 맞았고
교사 신분이 들통나 인민군 장교 앞으로 끌려갔다.
강제로 끌려 온 젊은 여자들과 교무실에서 술판을 벌리고 있던 인민군 장교는 아들에게 술을 몇 잔 권했지만
아들이 술잔을 사양하자 갑자기 발길질과 욕을 퍼부어며 그냥 총을 몇 발 쏘았다고 했다.
아들은 꼬박 반년을 누워 있었다.
복부와 허벅지의 총상은 그런대로 아물었지만, 어깨 쪽의 상처는 쉬 아물지 않아 오랫동안 힘들어했다.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하여 우리말이 서툰 며느리가 교육청과 어떻게 이야기가 되었는지
낙도의 학교로 요양을 할 겸 자원하여 아들네는 떠났고
그렇게 아들은 남해의 여러 조그마한 낙도의 학교들을 거치며 사십여 년 세월을 보냈었다.
식장 갈 시간이 되었다는 큰손자의 두런거림에 徐 씨는 먼 상념에서 벗어난다.
오늘은 아들이 정년 퇴임을 하는 날이다.
2 代.
호롱불 밝힐 등유까지 뭍에서 가져와야 하는 불편한 일상이었지만
남편은 서서히 건강을 회복했고 섬 생활에서 활기를 찾아갔다.
부임하는 낙도마다 농장에서 구한 칠면조 알을 닭에서 부화시켜 학교 실습장을 채우고 꿀을 치며
재래종 염소 대신 흰 염소를 키워 고구마로 끼니를 대신하는 학교 아이들에게 羊乳를 데워 먹였다.
섬 주민들과 학교 아이들의 생활은 한결같이 열악했다.
위급한 병이 아니면 병원 치료가 쉽지 않은 도서벽지의 주민들은 작은 병을 큰 병으로 키웠으며
겨우내 목욕 한번 할 수 없는 아이들의 머리와 몸에서는 이가 들끓었다.
한결같이 버짐과 부스럼 같은 피부병을 달고 사는 아이들을 지켜볼 수 없다며
남편은 한의원이셨던 시조부의 유품을 챙겨 와서 틈틈이 한의학을 공부했고
시조부께서 남긴 처방대로 주민들에게 흔했던 천식, 관절통을 위해 丸藥을 만들고
종기와 부스럼에 좋다는 고약 과 연고 등을 조제했다.
해어진 옷을 입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위해 마산의 방직공장에서 얻어온 자투리 옷감으로
아이들의 옷을 짓느라 나의 작은 손재봉틀은 얼마나 바빴던가.
그렇지만 오늘 金 씨는 심란한 마음을 주체하기가 쉽지 않다.
다가올 봄에 국민학교 사 학년이 되는 아들이 부산의 시숙 댁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이다.
시원스러운 성격의 시숙은 남편보다 두 해 뒤에 같은 사범학교를 마쳤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일찌감치 교육행정 쪽으로 진로를 바꾼 매사에 적극적인 분이다.
조그마한 섬보다는 일찍부터 대도시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시숙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아들이 눈칫밥을 먹지는 않을까, 또한 전쟁 중에 태어나 중학생이 된 딸을 본가의 시어머니에게 맡겨야 하는
이곳 도서벽지의 생활이 아들을 맡기고 되돌아오는 발걸음을 한결 무겁게 한다.
"어머니, 시간 되었습니다"
긴 상념을 깨우는 아들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남편과 많이 닮았다고 金 씨는 생각한다.
오늘은 남편의 정년 퇴임 날이다.
3 代.
여름방학이다.
집으로 가는 날이니 날아갈 것만 같다.
옷가지와 책, 작은 어머니가 챙겨 주신 것으로 가득한 가방 두 개를 마루 한쪽에 잘 챙겨 놓았으니 오늘 밤만 자고 나면 출발이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들 모두 많이 보고 싶다.
그러나 여름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던 이유는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셨습니까?
저는 월요일.. 토요일 학교에서 무엇을 했고..
어떤 친구와 잘 지내고..
다음 소식드릴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라는
매주의 생활을 편지로 써보네라는 아버지의 엄명에서 당분간 벗어나는 해방감이 크기 때문이다.
생소한 느낌이다.
매미 소리가 시끄러운 잡초 무성한 오솔길에서 진하게 풍겨오는 풀내음이 신선하기는 하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몇 칸 되지 않은 校舍와 조그마한 방이 두 개뿐인 사택의 낡은 모습은 몹시 낯설다.
까맣게 그을린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은 더욱 낯설고 혼란스럽다.
작은 아버지 어머니는 저렇게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아니었다.
한 학년이 스물 반도 넘어 이부제 수업으로 종일 와글거렸던 교실과
작은 아버지의 넓은 거실의 높다란 대문과는 너무나 달라 보여 한참을 어리둥절해한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호흡이 곤란하며 까맣게 얼굴이 변해가는 응급상황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늦은 밤 가까스로 해양 경찰선을 이용하여 육지에서 수술할 수 있었던 기흉이라는 위급한 상황을 겪으셨다.
직장이 서울이라는 핑계로 수술이 끝난 후에야 찾아뵈었던 불효를 범했고
병상에 계시는 아버지께 육지로 전근하셨으면 한다는 말씀을 어렵게 드렸다.
그럼에도 별말씀이 없으시던 아버지께서는 온 가족의 바람대로 마침내 사십 년간의 낙도 생활을 청산하시고
본가가 있는 시내 (전쟁 후 市로 승격)의 학교로 되돌아오셨다.
그게 오륙 년 전의 일.
오늘은 아버지의 정년 퇴임날이다.
4 代.
퇴임식이 시작되었다.
무릎에 앉았던 네 살배기 딸아이가 귀에 대고 살며시 속삭인다.
"아빠, 할머니가 울어"
아버지 곁에 나란히 않아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시는 어머니를 건너보며 무릎에 앉은 딸아이를 꼭 껴안았다.
"그래, 할머니께서 우시는구나
할머니께서 우실 만큼 사십오 년은 긴 시간이란다"
1988년 6월 1일
오늘은 아버지께서 사십오 년간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시는 날이다.
(참고)
이 글에서 언급된 통영 전투는
인민군이 1950년 8월 6일 진동-마산 간의 도로를 차단한 후
8월 16일 1개 대대(약 650명)가 고성을 거쳐 통영시가지를 완전히 장악했지만
8월 19일 국군 해병 제1대대에 의해 통영에 주둔한 적군을 완전히 섬멸하고 탈환한 작전이다 - 위키 참조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네, 석촌님 고맙습니다
염 상섭 선생님의 삼대보다도
더 감동 깊게 읽습니다
간결하면서도
감정 설명에 세세히 ..
단풍들것네님 글 참 좋습니다
발걸음 고마워요
원래는 조금 긴 글이지만 보정해서 짧게 했습니다.
나쁘지 않다시니 감사합니다
이 글과는 관련 없지만, 며칠 부산스럽게 해드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 덧붙입니다
@단풍들것네
미안키는요..
언제든 두팔 벌려
환영입니다.
네 인생 이야기 잘 읽어 습니다
맞습니다.
인생 이야기이지요,
빠짐없이 읽어 주시니 고맙습니다
우리나라 각가정의 닮은듯 다른 연대기 모습~
한도 많고 사연 많은 우리나라 역사가 원인인것 같아요~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사연많은 우리역사 맞는 말씀이군요
어떤가요, 캐나다 여행은 즐거웠을것으로 여깁니다,
소고기도 마음껏 드셨겠지요 ㅎ
고맙습니다
참으로 차분하게 비슷한삶이나
다른 4대의 스토리
감명 깊게 잘보았어요 ^^
나날이 감성있고 좋은글에 감사드립니다
여행하고 오신거 잘하신듯요
ㅎ
제 여행도 알고 계시니 뜨끔합니다
빠짐없이 제 글 읽어주시니 고마운 일입니다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편의 대하소설을 읽는것 같습니다 ㆍ
힘든 세상을 살아오신 부모님이십니다 ㆍ
여느 부모님 모두 같을겁니다
제 부모님 세대는
전부 힘들고 살아오신 분들이지요
의견 고맙습니다
대를 이어 가는 핏줄 누가 감히 끊으리요
동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피를 토하듯 살아오신 선조들
가족력들 단풍님 잘 읽었습니다
부모님들 대부분 비슷할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제 아버지의 삶이 당시 같은 교직분들과는 많이 달랐으니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이제 두분 모두 안계십니다. 고맙습니다
마음 깊숙히 안겨오는
진실된 삶의 숨은 모습입니다.
아마도, 혼란스럽던 사회상에서
자신과 가족들을 이끌고 나가시는 두분의 모습이
생략되었지만, 마음에 남았습니다.
찡하며,
단풍님의 가족사가 담긴 글
잘 읽었습니다.
여기에서 꽁꽃님 댓글 대하니
또 다른 느낌입니다 ㅎ
여러분들이 하루에도 몇편씩 올리는 글
전부 읽기에 힘드실텐데
수고 끼쳐서 미안함 마음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같은
섬 출신이라 더
가슴이 아프군요
어머님이 고생많이 하셨네요
아버님도 전쟁의 상흔에서 몹시도 고통스러웠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네요
잘 읽었습니다
ㅎ 석우님과는 거의 동향이지요
이제 낙도에는 학교가 거의 없다고 하데요
그만큼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저쪽 번개 참석하면 숱한 시선 집중될텐데 우찌 견딜낑고 모르겠네요
슬도 애북 하시는 모양인데 살금살금 마시라요~~ 뗑긴다고 양껏 들이키지 마시고 ~ 걱정이유
환갑 지난 할매가 무신 술을 그리 마실까
이뿐 어가씨면 모릴까~ 에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