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MBTI 검사를 해보았다. 20여년전 검사에선 뚜렷한 ENFP의 성향이였으나 공무원 생활 20여년만에 ISFP의 성향을 보이고 있어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나도 이제 계획과 매뉴얼이 좌우하는 삶에 확실히 적응했구나”라며....
처음 과제를 작성할 때에는 뭔가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학교나 학생과 함께 했던 경험담을 생각하기 위해 꽤 시간을 들여 생각했으나, 내가 생각했던 직관적 선택이 지금에 와서는 어떠한 방향으로 흘렀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 고민은 깊어졌고, 그러다 현재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관찰 가능한 소재를 찾게 되었다. 바로 나의 연애 & 결혼 이야기이다.
2005년 만으로도 30이 넘어가는 그해
새해 첫날부터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네가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것이 몹시도 창피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원래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시는 스타일이셨지만, 새해 첫날부터 듣기엔 상당히 당황스런 덕담이었다. 그러면서 엄마는 은근 슬쩍 몇 개의 선자리를 말씀하셨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소개팅을 빙자한 선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매우 지루하고,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 생각되는 절차들이었다. 잘 모르는 분과 만나 통성명을 하고 궁금하지도 않는 이것 저것을 물어보고 침묵의 시간을 어찌할지 몰라 하는 순간들이 싫었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도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이제 이 정도 의무방어면 어느 정도 노력은 한거겠지?’ 라는 생각이 들 때쯤 집에서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살고 계신 분을 소개 받게 되었다. 그냥 무난한 만남이었다. 부평역 아웃백에서 (지금은 그 자리에 삼겹살 집이 자리하고 있지만) 8시쯤 만나기로 했던 그 날은 야간자율학습 시작까지 챙기고 가도 늦지 않을 것 같아 아이들과 함께 석식을 먹고 느긋하게 길을 나섰다. 의무방어의 끝이 보이는 시점이기도 하여 첫만남부터 그는 투움바 파스타, 나는 생맥주 한잔을 시키고 약 1시간 30분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집도 각자 따로 갔다. 가까운데 뭘 바려다주냐는 나의 무적의 논리에 “그래도 될까요?”라는 짧은 답변만 하는 그를 남겨두고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왔다. 그닥 기억에 남는 이벤트도 없었고, 기말고사 문제 내는 것이 더 시급했던 시점이라 나쁘지 않은 인상만을 남기고 ‘동네 주민’으로 남을 수 있는 그런 만남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데스트니~’라는 운명의 노래가 울리지도 않았고, 이상형도 없었지만 평소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과도 거리가 먼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그 동네주민의 포지션이 생각보다 영향력이 컸다. 이런 저런 핑계로 연락을 해오면 가까운데 있다보니 1~2시간씩 같이 하게 되었고 천천히 들어보니 건전한 생각에 세심한 배려, 무엇보다 긍정적 사고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평소 뭔가 해결할 일이 있으면 실패한 후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한 후 일을 시작하는 스타일인데, 이 사람은 하다 안되더라도 배우는게 있겠지라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만난지 6개월쯤 지나서 이 사람과 결혼을 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객관적 상황은 그리 좋진 않았다.
엄마의 지인이 소개시켜 준 자리이긴 하지만 늘 엄마가 강조했던, 교회 다니는 댁, 부모님 성품 좋은 집이라는 두가지 조건만 보시고 해준 자리였는지 경제적인 상황까지 속속 알지는 못하셨던 것 같다. 결혼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몇가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첫째, 상대방의 경제적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당시 친구들은 경기도 근처에 소형 아파트라도 자가로 사면서 결혼하던 시절이라 상대적으로 내가 더 초라하게 느껴졌고, 결혼을 위해 지출하는 부분도 내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친구들의 객관적 판단은 ‘결혼 비추’에 가까웠다.
둘째, 연세도 많고 노후 준비가 안되어 있는 시부모님은? 이라는 문제도 생각보다 심각했었다. 두 집안 다 1남1녀의 자녀를 두고 있어 막연하게나마 부모님 노후는 아들이.... 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이 부분도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결혼 비추’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나에게도 갈등의 시간들이었다. 엄마는 ‘그래도 집에서 아들 장가가는데 전세집은 얻어주겠지?’라는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를 막연하게 믿고 있었고, 친구들은 객관적 상황에 비추어 조금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충고해 주었다. 하지만 왠지 지금 이 결정이 아니면 안될 것 같은.... 연애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표현으로는 운명이고, 이 과제의 취지에 맞게 쓴다면 직관에 의한 선택으로 나는 결혼을 추진했다. 2006년 4월 말 결혼을 최종 결정하고 그해 7월 1일 결혼을 했다. 만난지 9개월만에....
현재는 마지막 소개팅 남이 남편이 되어 두명의 아이를 낳고, 15년째 잘먹고 잘살고 있다. 물론 우리 부부에게도 몇번의 위기가 닥치긴 했지만, 그건 모두 외부적 요인이었고 남편과의 생활은 한번도 문제 된 적이 없었다. (아. 물론 음식을 먹을 때 소리를 많이 낸다거나, 옷을 아무데나 벗어 놓아 일방적으로 내가 지적하고, 그가 수긍하는 구조는 싸움의 범주에 넣지 않겠다.) 늘 내 생각을 존중해 주고,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굳건한 지지를 해주며,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남편을 볼 때마다 그 때 내가 조금 더 ‘합리적 결정’을 했다면 지금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싶을 때가 많다. 돌이켜보면 우리 부부는 큰 결정이 필요할 때 많은 데이터를 참고하기 보단 그 때 당시의 판단을 믿고 추진하는 편이다. 집을 살 때나 투자를 할 때조차.... 그렇다고 모든 직관적 판단이 꼭 좋은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대표적인 것이 비트코인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지금도 가슴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통해 직관적 판단이 필요할 때와 합리적 계획이 필요할 때를 경험하며 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