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 속 궁금한 이야기 1
- 역사적 사실과 역사 드라마의 차이-
조선 국왕의 평균 수명은 오십도 안 되는 마흔 일곱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 되지는 않았지만, 조선 왕들의 수명이 짧은 이유가 왕들이 수 많은 어여쁜 궁녀들에 둘러 쌓여 남자의 기를 많이 빼앗기고 지냈기 때문이라는 속설이 있다. 그리고 일반인 대부분은 이 말을 진실로 믿는다. TV 사극드라마에서도 이런 왕의 모습을 상상시키는 장면을 많이 보여 준다.
야사에 의하면 조선 말기 헌종, 철종은 이 예에 해당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헌종은 요즘 말로 꽃미남이라고 불릴 정도로 매우 잘생긴 외모를 지녔다고 전해진다. 또 헌종은 궐의 아름다운 궁녀들과 모두 관계를 할 정도로 색을 밝혔다고도 한다. 그래서 23세의 젋은 나이로 일찍 요절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게 색을 밝혔다는 헌종은 아이러니하게도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정조의 직계가 헌종대에 이르러 끊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강화도에서 평범하게 살던 이원범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철종이다. 젋은 혈기가 왕성한 강화도 촌 놈이 궁궐에 들어와 수 백명의 궁녀에게 둘러 쌓여 살다보니 색을 너무 밝혀 철종도 후사도 없이 33세의 나이에 죽고 만다.
이러한 일은 조선 국왕뿐만 아니라 세계 대부분 왕들도 마찬 가지 이야기들이 떠돌기는 한다.
그러나 이게 사실일까?
우선 그러려면 모든 궁녀가 왕을 유혹할 만큼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궁녀 선발은 조금의 용모단정은 봤을지 모르지만 성적으로 매력적인 면을 보지 않았다.
특히 왕비를 뽑을 때는 더 그랬다. 왕비의 덕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문이나 여성으로서 덕성과 출산력이었다. 성적 매력있는 여자는 요사하다고 해서 아예 제외되었다. 그래서 왕들이 장희빈이나 숙빈최씨 같이 절세미녀가 궁녀로 들어 오면 눈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왕권을 제대로 행사한 연산군이나 숙종 정도나 가능했다.
그리고 사진기가 발명되고 나서 찍힌 조선의 궁녀라는 사진과 청 말기 서태후와 황후들의 사진을 보면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아 왔고 상상했던 아름다운 궁녀나 황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아래 사진 참고)
아래 사진에 나오는 궁녀나 황후라면 왕이나 황제들이 눈 길 조차 안 주었을 거 같다.^^
그래서 연산군은 흥청을 만들어 대신들을 팔도에 내려 보내 예쁜 여자들을 뽑아오게 하여 궁궐에 살게 하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왕은 뭐든지 마음대로 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정해진 계획에 따라 하루하루 매우 바쁘게 보냈다. 거의 일반인들은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된 일과의 연속이었다.
왕은 늦잠을 잘 수도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어른들께 문안을 드려야 했다. 또 신하들과 한자리에 모여 조회를 해야 했다. 왕은 나랏일을 돌보는 틈틈이 공부도 해야 했다. 학식이 높은 신하들과 함께 유교의 뜻과 이치를 적어 놓은 책을 익히고 토론했다. 이것을 '경연'이라고 한다. 경연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열렸다. 오전, 오후는 물론 저녁을 먹고 난 뒤에도 경연에 참여해야 했다. 가끔 체력 단련을 위해 사냥을 하거나 활을 쏘기도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어른들께 문안을 드려야 했다. 결국 왕은 11시쯤 돼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또한 왕은 나라를 돌보는 엄중한 책임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하고, 웃어른이 아프면 직접 약을 올려 효도의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나랏일을 돌보아야 했던 왕의 일과는 결코 궁녀들을 쫒아 다닐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왕의 동침과 관련하여 사극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드라마 속에서는 동이와 숙종의 동침이 애틋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왕의 침실에서는 그런 애틋함에 기초한 상황이 연출되기 힘들었다.
역사적 사실로 왕의 동침은, 다닥다닥 붙은 주변의 방들에서 들려오는 상궁들의 숨소리는 물론 그들의 잔소리까지 의식하면서 '차기 대권주자들의 생산'이라는 목적을 위해 진행되는 일종의 '공식 행사' 같은 것이었다.
왕과 왕비나 후궁 그리고 궁내 여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동침했는지를 알려주는 자세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한말의 후궁이나 상궁들의 증언을 통해 1987년에 발행된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실린 이 증언들은 주로 왕과 왕후의 동침에 관한 것이지만, 이를 통해 왕과 후궁 혹은 왕과 궁녀의 동침까지도 일정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동침할 파트너와 동침 날짜 선정은 대전 상궁 몫이었다. 물론 가끔은 왕이 마음 내키는대로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대전 상궁이 정해주는 일정에 따랐다.
왕의 동침을 관장하는 대전 상궁은 사전에 일진(日辰)을 본다. 특정일에 어느 여인의 운세가 왕의 운세와 잘 맞는지를 판단하여 파트너를 결정한다. 이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요소는, 왕이 누구와 동침해야 왕자를 낳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왕이 어떤 여인과 함께하고 싶어 하는가는 우선적인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왕이 잠자리를 갖는 동안에는 방문만 닫아줄 뿐, 사방의 방들에 포진한 상궁들이 왕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때로는 제지를 가했다. ( 아래 사진에 나온 글 참고)
왕의 잠자리는, 엄밀히 말하면, 1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가 아니라, 1명의 남자와 최대 9명의 여자가 함께 하는 것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왜냐하면, 총 9개의 방이 우물 정(井)자 형태로 연결된 대형 침실 중에서 중앙의 방에는 왕과 여인이 들어가고 미닫이문으로 서로 붙은 8개의 방에는 숙직 궁녀가 한 명씩 들어가기 때문이다. 약간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침실의 기본적인 구조였다.
TV 속에 나오는 왕의 침실은 그나마 넓은 편이다. 경복궁 강녕전의 침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왕과 여인이 함께 지내는 공간은 두 사람이 좀 편하게 누울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바로 옆방에 대기한 상궁들이 왕의 숨소리를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숙직 상궁들의 방을 연결하는 미닫이문은 항상 열어두었다는 점이다. 왕의 방과 숙직 상궁의 방을 연결하는 문만 닫아둘 뿐이었다. 이는 숙직 상궁들이 서로의 행동을 관찰 내지는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을 것이다
그럼, 숙직 상궁들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을까? 그들의 임무는 왕을 시중드는 한편 왕의 성관계를 '보좌'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성관계 도중에도 왕에게 이러저러한 조언을 했다고 한다. 왕이 어린 경우에는 이들의 역할이 한층 더 컸을 것이다. 왕이 너무 '심취'한 경우에는 "옥체를 생각하시어 이제 그만하십시오!"라며 왕을 제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숙직 상궁들을 두어 왕을 보좌하도록 한 것은 왕의 잠자리가 쾌락 그 이상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왕이 여인을 가까이하는 것은 성적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자의 생산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지나치게 쾌락에 빠져 건강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이들은 언제라도 왕을 제지할 권한과 책임이 있었다. 이들은 왕의 성관계가 왕자 생산이라는 목적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왕의 행동을 관리할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글들을 참고하여 정리한 바와 같이, 왕의 잠자리 날짜나 파트너를 결정할 때는 물론이고 왕이 잠자리를 가질 때에도 왕자 생산이 언제나 최우선적 목표였다. 왕과 여인의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칙상 후사(後嗣)의 생산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이 관계 속에서 왕의 쾌락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신하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쾌락추구가 당연히 허용되었지만, 국왕에게는 원칙상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과 역사 드라마는 큰 차이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