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티모 4,10-17ㄴ; 루카 10,1-9
+ 오소서, 성령님
여러 해 전에, 서품을 앞둔 부제님 한 분이,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서품 성구로 하려고 하는데 괜찮냐고 제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 부제님의 세례명이 루카였는데, 아마 서품 성구에 ‘루카’라는 단어가 들어가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 ‘루카’라는 단어는 세 번 나오는데요, 그중 저 말씀이 그래도 가장 적당할 것 같아서 저는 ‘좋은 것 같다’고 동의해 주었습니다.
서품 식장에는 새 신부님들의 서품 성구를 현수막으로 만들어서 걸어 놓는데요, 서품식 날, 미사 시작 전에 제 주위에 서 있던 신부들이 그 현수막을 보더니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저게 뭐야.”라며 한마디씩 했습니다.
공범이었던 저는, 제가 동의해줬다는 말은 안 하고, “좋은데 왜 그래?”라며 새신부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아직도 그 말씀을 서품 성구로 삼길 잘하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을 쓰셨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루카는 바오로 사도의 전교 여행에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루카 복음이 성모님과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또 루카가 실제 성모님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전승도 있어서 루카를 화가라 여기기도 합니다. 또한 콜로새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의사 루카”(콜로 4,14)라는 구절 때문에 루카가 의사였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세 가지 전승 모두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승들에 대해, 루카는 바오로 사도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는 영적 여정에 우리를 동반해 주고,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습을 화가처럼 세밀하고 아름답게 전해주며,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을, 복음서를 통해 전해주는 ‘영적 의사’라 이해하면 어떨까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인 티모테오 2서는 사도 바오로께서 직접 쓰신 서간이라는 견해도 있고, 바오로 사도의 이름을 빌려 후대에 바오로 사도의 제자가 썼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제자가 쓴 것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요, 어떻든 오늘 독서 말씀에는 처형되시기 전, 갇혀 계시던 바오로 사도의 심경이 담겨 있습니다.
“데마스, 크레스켄스, 티토는 나를 떠났고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하고 물으시는 마음이 여기에서도 느껴지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님을 떠나기도 하고 복음 선포의 길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 때에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유스티노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우리도 바오로 사도로부터,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시는데요, 어떤 사본에는 일흔 제자라 되어 있습니다. 70 또는 72는 당시 알려진 이방인 나라의 숫자였는데요, 이를 감안하여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데 이어, 이방인들에게 일흔 또는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신다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Pablo T. Gadenz, The Gospel of Luke,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8, 199)
한편, 70은 모세가 일흔 명의 원로들을 임명하여 주님의 영이 그 위에 내리도록 기도했다는 구절과 연관이 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Luke Timothy Johnson, The Gospel of Luke,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1, 167) 또한, 70에는 아무런 상징적 의미가 없다는 해석도 있습니다.(Darrell L. Bock, Luke, Grand Rapids: Baker Academic 1996, 994)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일흔두 제자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말씀과 함께 파견되어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어떠한 모양으로든 예수님을 전하게 됩니다. 내가 하는 말이, 내가 하는 행동이, 그리고 오늘 나의 삶이 하나의 예수님의 초상이 되어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에, 그리고 이 세상에 전해질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이 하나의 그림이 된다면, 나는 오늘 어떤 예수님의 초상을 그려서 세상에 전해줄까요?
프란치스코 데 주바란( Francisco de Zurbarán),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그리는 성 루카, 1650년 경
출처: Saint Luke Painting the Crucifixion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