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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검이 필요하다 –마라와 엘림에서(출15장22-27)
성경본문: 출애급기15:22-17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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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여러분 중에 심한 갈증을 경험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얼마나 힘드셨나요?
혹시 여러분이 먹었던 물 중의 가장 맛있게 먹었던, 생각나는 기억이 있으신가요?
혹시 이스라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신가요?
다음의 글은 이미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분의 글이다.
“마라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엘림에 도착했다. 엘림(Elim)은 현재의 와디 카란델(Wadi Charandel)로 추정하는데 마라와 엘림은 가깝게 연결된 지역이었다.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진을 친 곳으로(출15:27,16:1,민 33:9∼10) 샘물 열두 곳이 있었으며 큰 종려나무가 70그루나 있었던 오아시스이다.
나는 돕가를 답사한 후 이곳 와디 카란델의 오아시스와 함께 엘림으로 주장되는 또 다른 지역인 바바(Baba) 계곡의 오아시스를 찾게 되었다. 바바란 사랑이란 뜻이다.
이곳은 홍해에서 내륙으로 25㎞ 정도 들어간 곳이지만, 신기하게도 골짜기는 소금으로 뒤덮여 있었다. 더욱 신비로운 것은 이 소금이 덮인 골짜기에 들어오는 순간 짜고 달콤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이 골짜기에는 마나라고 불리는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함께 간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 이 마나는 성경에 언급되는 만나(마나의 히브리어)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것으로 요리를 해먹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란 나는 나뭇가지를 훑어 맛을 보니 신기하게도 짜고 단 맛이 났다.
성경에 보면 엘림에서 내린 만나는 깟씨 같고 그 맛이 꿀 섞은 과자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만나라는 나무는 성경에서 만나를 표현한 깟씨라는 식물과 모양이 비슷하고 만나를 내린 엘림으로 주장되는 카란델과 이곳 바바계곡에서만 자라고 있다.
더욱이 소금 위에서도 자라는 이 만나라는 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셨던 만나에는 충분한 양의 소금기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이 신기한 만나라는 나뭇가지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오늘은 모세가 쓴물을 단물로 만든 마라와 만나를 내려준 엘림을 둘러본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특히 생각지도 않은 만나라는 나무를 보게 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달은 귀한 날이었다.수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40년 동안 염분을 섭취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충분한 염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살다 보면 많은 어려움과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을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 이스라엘을 먹이신 것처럼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오묘한 역사로 그의 자녀를 풀무불 같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로 향하게 하심을 깨달은 귀한 날이었다.
점검 1 - 은혜가 떨어질 때!
어떤 전도사가 페이스북에 올려 놓은 글입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내가 외로울 때마다 늘 내 곁에 있어주던 당신.당신 없이 내가 살 수 있었을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있었듯이 나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와 주셨던 당신.당신을 떠난 지금 가끔씩 생각납니다.
나도 한땐 좋았었는데.
그대 이름 이젠 입에 담기도 어색하지만, 다시 한 번 부르짖어 봅니다.
그리운 이름이여.
그대 이름은 담. 배.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 혹은 ‘은혜 가운데 산다!’라고 하지만 이러한 감정이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은혜가 떨어질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은혜를 알기 전, 우리의 육신이 가장 편안하고 익숙했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왜 이 전도사가 그런 글을 썼을까?
아마도 우리가 모두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솔직한 감정의 고백은 아닐까?
또한, 우리가 오늘 접하게 되는 마라와 엘림의 사건이 우리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행복한 감정이 그렇게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에서 감정적으로 절정의 때가 출애굽기 15장이 아니겠습니까?
홍해에서 승리를 맛보고, 그들을 뒤쫓아 오던 애굽 군사들이 다 수장 된 후 부른 승리의 노래가 바로 며칠 전인데 말입니다.
단지 사흘을 걸었다고 그들의 행복이 끝이 난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보세요.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수르’라는 말은 ‘바위’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홍해를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넜지만, 수르라는 곳은 바위를 걷는 것과 같이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물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들이 사흘 길을 갔지만, 물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사흘 길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가져온 물이 다 떨어질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수르의 과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의지하던 것을 다 바닥나게 하시고 비우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수르의 과정을 지나가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척이나 괴롭고 힘들지요.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배우는 작업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물질을 비우게 하십니다.
물질이 그들이 의지하는 우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업이 망합니다.
물질적으로 큰 손해를 봅니다. 물질이 없어집니다.
이러한 일을 당하고 난 뒤에야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자신하고 의지하던 그들의 건강을 비우십니다. 그들이 건강을 잃고서야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질병이 생깁니다. 병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육체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변화 그제야 일어납니다. 늦었지만 그것도 다행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자신 있게 하던 일을 비우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 분야에서 경험도 있습니다. 능력도 있습니다. 지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못 하게 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자신 있게 해 왔던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거두어 가십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 일이 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도착한 곳은 그들이 이름을 붙인 ‘마라’였습니다. ‘마라’라는 말은 ‘쓰다’, ‘괴롭다’는 말입니다.
23~24절입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물이 문제였습니다.
사막 길 여행에서 가장 절박한 필요는 물이 아닙니까? 사흘을 물을 마시지 못한 그 백성의 타는 목마름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침내 백성의 원망이 시작됩니다. 지도자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를 또한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거기서 우물을 발견합니다.
얼마나 흥분했을까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더러는 이 마실 수 없는 그 물을 마신 후 토하고 병들어 눕기 시작합니다.
이 고통의 경험을 안겨다 준 곳이 바로 ‘마라’라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마라’라는 의미가 바로 ‘쓴맛’ 영어로는 ‘bitterness’, ‘쓰디쓴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사흘간을 여행합니다.
이 많은 백성이 여행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많이 걸어야 약 20~25km 정도 그러니까 약 60~75km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마라라는 땅이 위치했을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하면 수에즈 운하의 해저 터널을 통과하여 약 15km 정도를 남행하면 대추 야자나무가 무성한 오아시스 마을에 도착하는데 이곳을 지금도 ‘아윤 무사’(Ayun musa) ‘모세의 우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은 ‘아인 호와라’(Ayn Howara)로 불리는 지역입니다.
이곳에는 지금도 우물이 있으나 바다에서 멀지 않아 쓰고 짜서 마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큰 기적을 경험하고 인생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으로 살만 하다고 느꼈는데 사흘 만에 지치고 목말라 병들어 누운 이들의 고백이 무엇이었겠습니다.
누군가 아주 멋진 표현을 썼습니다.
‘인생 도처 유 청산’(인생 도처에 푸른 산이 있구나!)이 아닌 ‘인생 도처 유 마라’(인생 도처에 고통이 있구나!)가 아니었겠습니까?
인생 ‘마라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힘들고 목말랐던 수르를 지나서 이제야 물을 발견했습니다. 문제가 해결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물이 써서 마시지를 못합니다. 이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원망'입니다.
“애굽에는 물은 있는데 우리를 건져내서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하는구나, 도대체 하나님은 병 주고 약주나, 약주고 병 주는구나”.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합니다.
23~24절입니다.“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또 하나의 반응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기도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쓴 물이 단 물로 변합니다.
25절입니다.“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백성은 원망했고, 모세는 부르짖어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지도자와 백성의 차이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모세가 일반 백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마라의 쓴 물 앞에서 기도했다는 것이죠. 그 상황에서 모세인들 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원망은 백해무익합니다.
원망은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원망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왜 기도해야 하나요?
기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앉아서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표현입니다. ‘발 달린 기도!’
부르짖어 기도하는 기도에 우리는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니 부르짖고 난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모세가 기도한 후 음성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참 재미있지요?
마라의 쓴 물 앞에서 모세의 위대함과 백성의 우둔함이 드러납니다.
본문 25절에 나와 있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라는 말씀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모세가 워낙 신령하고 위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을 수도 있고, 그가 기도하고 난 후 눈을 들어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나무를 보게 됩니다.
그 나무가 바로 해독 작용을 하는 나무였을 것입니다.
저는 종종 그런 소리를 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인에 주목하십시오.
기도하고 난 후에 떠오르는 지혜, 기도하고 난 후에 만나게 하시는 사람, 기도하고 난 후에 읽은 말씀과 들은 설교에 민감하십시오!
기도하기 전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지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주시는 축복입니다.
저에게도 습관이 있습니다. 기도실에 갈 때는 꼭 펜과 노트를 들고 가는 것입니다.
발 달린 기도는 기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난 후에 말씀대로 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기도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합니다.”
점검 2 - 계속 갈 수 있겠는가?
오늘 이곳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25절과 26절을 보세요.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5절에 보면 “그들을 시험하실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문맥상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신 후에 “그들을 시험하셨는지” 아니면 그들을 시험하시기 위해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셨는지 저에게는 조금 모호합니다.
하지만 마라의 쓴 물 앞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점검하고 계신 것만은 분명합니다.
무엇을 점검하나요?
점검의 품목은 26절에 보니까, “순종”이었습니다. 순종의 결과는 애굽에서 겪었던 질병을 하나도 겪지 아니하도록 약속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 유명한 말씀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 시점에서 순종을 확인하지 않고는 긴 여정을 가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풍족한 고센 땅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광야로 따라 나온 이유가 무엇인가요?
물질적인 안락함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겨우 3일 길을 가며 불평하고 옛 생활을 추억하게 되자 ‘출애굽의 목적’을 재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마라의 쓴 물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 순종하고 따라 나왔는데, 그 위험한 순간에 홍해를 건넜는데 “별 볼 일 없다!”라는 것이죠.
이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이전보다 풍족하게 잘 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풍족함은 ‘독약’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인간들이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이들에게 순종은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을 통과해야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있습니다. 이 시험을 통과해야 그들에게 주어진 건강이 유익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시험은 왜 주어지나요?
시험을 좋아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므로 시험을 통과하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축복을 받는 것보다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를 만드시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이 시험의 시간을 거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험을 통해 우리의 부족함을 발견하기 때문에 보완하게 됩니다.
또한, 시험을 통과하면서 주어지는 자신감은 또 다른 시험을 이기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엘림’의 경험은 아주 중요합니다.
앞부분에서 잠깐 엘림에 대하여 설명을 했습니다. 마라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오아시스가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생명과도 같은 비옥함.
광야를 지나는 중에 마라도 있고, 엘림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라에서도 엘림에서도 여전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마라의 쓴 물에서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기도하라는 것”
엘림의 풍족함 역시 이스라엘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엘림을 만나면 “찬양하고 감사하면 됩니다.”
많은 경우, 인생의 시련의 장에서 부르짖어 기도했어도, 말씀에 대한 순종을 결단했어도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는 크게 변화가 따라주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광야의 낮은 여전히 덥습니다. 광야의 밤은 여전히 춥습니다. 물은 여전히 넉넉하지 못합니다. 미래의 전망은 불투명합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기도를 들으신 주님, 말씀을 주신 주님, 그 주님을 믿고 믿음으로 인생의 광야를 계속 걸으셔야 합니다.
이미 함께 하심을 그분은 징조로 보여주지 않으셨습니까?
홍해가 열리던 그 광경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마라의 우물의 물이 변하던 그 순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이 모든 기적의 주인이 여전히 함께 하시다면 그분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십시오.
일어나 다시 약속의 땅을 향한 순례를 계속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를 떠나 남방 약 10km에 왔을 때 도달한 곳이 엘림이라는 곳이었습니다.(아마도 ‘Wadi Ghurundel’로 추정/지도 참조)마라에서 불과 10km 남방에 위치한 이곳은 전혀 그 백성이 예측할 수 없었던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자, 이 정도면 사막의 광야에서는 환상의 오아시스라 할 만하지 않습니까?
사막에서는 물 샘 하나도 귀한데 물 샘이 무려 열두 개, 그늘을 만드는 한 그루의 종려나무도 귀한데 무려 일흔 그루의 나무, 자 이런 놀라운 오아시스가 불과 10km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 마라에서 그들은 불평했습니다. 원망했습니다.
왜입니까? 단순합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은 우리를 위해 예비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엘림을 우리가 몰랐어도 하나님은 미리 엘림을 아시고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엘림은 마라를 통해서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라에 주저앉아 계신 성도들이 계신가요?
조금만 참으십시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우리는 엘림에 도달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좋아하는 청교도들의 인사법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믿음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견디고 당시의 사회 속에서 오해당하고 핍박당하고 소외당하는 고통의 삶을 견디던 시절 요즈음 서양 사람들의 보편적인 명언으로 쓰이는 한 메시지가 탄생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The Best is yet to come)
이 말의 원조가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삶이 힘드십니까? 이렇게 자신에게 외쳐 보십시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고단하게 사는 이웃들이 보이십니까?
그 곁에 조용히 다가가 이렇게 말해 주시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이 말을 오늘의 본문식으로 바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아직 엘림에 오지 않았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일어나 다시 한 번 외치고 여행을 계속하십시다.
“우리는 아직 엘림에 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마라에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엘림에서 우리의 신앙을 확신하고 다시 광야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마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의 하나이고, 엘림도 하나님의 예비하심 가운데 하나인 것을 믿기에 다시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