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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주일설교.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장 15절 ~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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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달에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진실로 진실로”가 나오는 구절들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었고, 제가 코로나로 인해 한 주 쉬어서 9월 다섯 번째 주일 말씀으로 준비한 요한복음 마지막 21장에 나오는 진실로 진실로 내용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9월 중 들었던 네 번의 설교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다.
첫째 주는, 요한 복음 8장으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룝게 하리라”는 말씀으로, 진리되신 예수님을 진짜로 알아야만 진리가 주는 의, 믿음, 소망에 대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진리를 아는 방법은 “진실로 진실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안에 거하고(붙들고, 실천하고), 제자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으며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고, 듣고, 배우는 일에 집중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우리도 할 수 있고,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고, 나중에는 “진실로 진실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주는, “진실로 진실로 나는 양의 문이라”는 말씀으로, 절도자나 강도처럼 담을 넘지 아니하고 양의 문이신 예수님만을 통과하여 출입하고 목자의 음성만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 자기(구원자)에게 속한 양 무리들이며, 양의 문으로 출입하도록 허락 받기 위하여 항상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진짜 목자의 음성을 듣고, 구별할 줄 알아서 “진실로 진실로” 양의 문을 향하여 인도함 받는 양 무리들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섯째 주는, “진실로 진실로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며, 예수님에게 나아갈 방법도 모르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 하기에, 성령이 주시는 확고한 믿음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담대히 구하면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네 번에 걸친 “진실로 진실로”말씀들을 기억하시고, 오늘 말씀 까지 추가하여, 내 일평생 요한 복음에 나오는 진실로 진실로 들려 주신 말씀들은 꼭 기억하고, 묵상하고, 계속 더 깊은 깨달음으로 나아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진실로 진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입니다. 본문 15~17절을 읽어 드립니다.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아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신 내용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헬라어 페트로스, 아람어 게바, 반석)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붙여 주신 헬라식 이름이고 그의 원래 이름은 시몬(히브리어, 하나님께서 들으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굳이 히브리식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예수님을 모르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 죄인으로 살던 과거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어진 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반석처럼 믿음이 굳건하지 못하여서 세 번 부인하던 일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 이런 등등의 이유를 말하기도 합니다. 다 추론이 가능한 내용들입니다.
이 말씀 본문을 묵상해 보면 그 때마다 주시는 감동이 각자에게 다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는 이번 말씀을 준비하고 묵상하면서 베드로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전해 주시는 두 가지의 느낌이 떠올렸습니다.
하나는,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네가 이미 그러한 행동에 대해 통곡하고 울며 잘못을 뉘우친 것을 다 알고 있으며, 너의 연약함을 내가 알고 있기에 너의 진실한 회개가 내 귀에 들린 대로 네가 부인한 사건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묻지도 않을 것이며, 그것을 다 용서할 것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너는 나를 절대로 부인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도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나를 부인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구나, 네가 나를 세 번 부인 한 것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반대로 나를 세 번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너를 향한 내 사랑의 마음을 영원히 멈추지 아니할 것이며,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나를 부인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시인하는 자로 앞장서도록 세워 줄 것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서 세 번 사랑한다는 대답을 들으신 후에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허락하신 문을 베드로는 항시 출입하도록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회개하면 어떤 죄라도 할지라도 다 용서함 받습니다. 아무리 무너진 관계라고 해도 사랑의 힘은 반드시 용서 되고, 회복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진실로 십자가 앞에 엎드려 사랑한다는 고백을 드리면, 양의 문으로 출입하고,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제자)로서의 권한과 권세를 감당하도록 부름을 받게 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은 예수님을 철저하게 부인하는 자였지만, 이제 반석으로 불리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주님이 크게 쓰시는 자의 인생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인생이 이렇게 사랑의 고백을 말하는 자들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 무리가 되고, 양들을 이끄는 목자(제자)의 삶으로 인도함 받는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도 이 본문을 읽으실 때, 내 자신이 베드로가 되어서 “주님 제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주님을 진실로 진실로 사랑합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진실로 진실로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는 고백을 겸손하게 드려 보십시오.
그렇게 하시는 분들에게 생각하지 못한 하늘의 평안과 은혜와 기쁨이 넘치고, 모든 사명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순종과 헌신의 마음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세 번의 물음이 있고 난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진실로 진실로 라는 말씀을 사용하시면서 그가 감당해야 할 평생의 사명을 내려 주십니다. 18~19절 말씀을 읽어 드립니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아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예수님으로부터 진짜 이런 말씀을 직접 듣는 다면 숨이 꽉 막히고 가슴이 쪼그라드는 기막힌 감정이 들 겁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세 번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이 말씀을 들려 주시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는 19절에 나온 것처럼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순교)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죽음으로 순종을 보인 것처럼, 이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씩이나 고백 하였으니, 예수님이 가신 죽음과 순종의 길을 베드로도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요, 삶입니다.
네가 정말 나를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 진심 이라면, 너는 내 명령에 따라 네가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갈지라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네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며, 그로 인해 나는 너를 영원한 곳에서 영원토록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라고 말씀 하신 겁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의 심경 변화는 다음 장면에서 나올 때 말씀 드리기로 하고, 지금은 베드로가 지나왔던 믿음의 타임 라인을 살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 믿음의 선봉에 서는 맏형격이었지만 그의 믿음은 들쑥날쑥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를 처음 부르셨을 때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눅 5:8) 라는 믿음의 고백을 드리면서 제자로서의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위를 건너시는 예수님을 따라 물위를 걷다가 바다에 빠진 후에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작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의 상태는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최고수준의 신앙고백을 드렸으나 곧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라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순수했지만 분별하고 원숙함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만 더 말씀드리면,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욥바에 거주하는 무두장이(가죽세공) 시몬의 집에 머물러 잇을 때 환상으로 부정한 동물들을 보고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행 10:13)는 말씀을 세 번 듣습니다. 이로 인해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식사도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할례받은이들)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급히 피하다가 바울로부터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갈 2:14) 라는 책망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듣게되는 창피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다가 세 번이나 부인한 사건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믿음 타임라인을 보면 그의 믿음은 온탕과 냉탕, 최고점과 최저점, 잔잔함과 풍랑을 오가듯 요동쳤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최종적으로 “내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비록 베드로의 현재 믿음이 성숙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바로 이 말씀대로 베드로가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는 순종의 역사를 이룰 사람인 것을 예수님은 다 아셨기 때문입니다.
젊어서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다닌다는 말씀은, 신앙적으로 믿음이 자라나지 않는 초보 단계, 미성숙 단계에서는 베드로의 과거와 같은 들쑥 날쑥 믿음의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 젖먹이 신앙, 야채나 풀만 먹는 믿음이라는 성경 표현이 있듯이 누구에게나 자기가 원하는(젊은이와 같은) 곳으로 마음 대로 다니는 신앙의 타임라인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늙어서(신앙의 성숙함을 이루어서)는 남이 네 팔(베드로의 팔)을 벌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들쑥날쑥 신앙에서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렀더니(늙은이의 신앙) 박해자들이 베드로의 팔을 벌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았습니다. 말씀 그대로 된 것입니다.
전설(외경, 베드로행전 35장)에 의하면 베드로가 로마에서 전도하다가 박해를 피해 로마 성 밖으로 나려는데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쿠오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 라고 묻자,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에오 로맘 이테룸 크루키피기 Eo Romam iterum crucifigi)”라는 말씀을 듣고 크게 뉘우쳐서 다시 로마로 들어가 복음 전도하다 결국 십자가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도 실행되지 않는 것이 없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며, 베드로의 최후를 보면 자기가 원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그렇게 말씀대로 되어버렸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더라도 예수님은 당장에 믿음이 100% 풀 충전된자를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인생처럼, 넘어지고, 숨고, 배반하고, 머뭇거리는 자일자라도 그에게 믿음의 씨앗을 심어서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고, 수확을 거두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들 다루어 가시는 방법이 이러합니다. 젊은신앙의 시절에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다니려고 하고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도하심 보다 자기 욕망, 자기 주장, 자기 의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와 같은 인물에게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우리의 자아와 언행을 다스려서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늙은 신앙, 원숙한 신앙으로 변화 하고 성장시켜 가실 것이고, 시간이 되면 그 때부터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원하시는 일에 완전히 헌신하고 충성하고 순종하도록 복종하게 만드십니다.
이러한 과정이 길과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를 부르시고 따라오도록 이끄시는 인도하심의 타임 라인입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자리에 있다면, 우리 모두는 베드로와 같이 믿음의 타임라인중에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든지 그 믿음의 여정을 지나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이 있었는지, 들렸는지, 대답한 적이 있는지부터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것이 소명, 부르심이고,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하여 내 믿음이 타임 라인이 젊은이에 머물러 있는지, 늙은이로 변모해 가고 있는지도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 점검과 확인의 정답은 “순종”입니다. 내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죄와 거짓을 물리치고 거룩하고 구별 되게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고 순종하고 있는지, 그리고 작은 것에 충성하려 누가 보고 있지 않더라도 묵묵히 순종하고 있는지, 일상의 연행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려고 주의하며 순종하고 있는지, 칭찬 받고 인정 맏을 만한 믿음의 열매들을 맺어져 가려고 성령의 인도함에 순종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면 됩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다니는가, 내가 원하지 않지만 성령이 이끄시는 곳으로 다니고 있는가, 성령이 원하시는 대답과 행동을 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진단해 보시면 내 믿음의 타임라인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찾아 오셔서 질문을 던지실 수가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갑자기 찾아오셔서 “네가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렵니까? 그리고 “네가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라고 내게 말씀해 오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 하시렵니까?
오늘 본문에 베드로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한 번 짚어 보겠습니다. 19~23절을 읽어 드립니다.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아멘.
“네가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는 말씀이 19절에서와 같이 베드로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고, 베드로는 그렇게 죽어야만 예수님께 영광 돌릴 것이라고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의 심정은 이 자리를 피해서 당장 도망가고 싶은 마음 하나 뿐이었을 겁니다.
이 말씀(죽음)을 하시고 곧바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의 최종 목표는 죽기까지 순종할 것을 각오하여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더라도 끝까지 따라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르시고,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귀하고, 대단한 순종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슬픔과 고뇌속에서 눈물과 땀방울로 기도하셨던 것처럼, 이 땅에서 사역자로, 헌신자로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은 순종의 눈물입니다. 원하지 아니하지만 데려 가시기 때문에 우는 겁니다. 데려가신다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에 그 대상자는 순종하려고 눈물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 순간에 눈물흘리기 보다 지금 하시는 말씀을 짐짓 외면하고 다른 곳으로 주의를 환기시켜 화제를 돌리고 싶어했습니다. 베드로는 말을 돌리고 싶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요한(19절-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자, 폼에 잇던 자, 가룟유다에게 예수님을 파는 자가 누구냐고 묻던 자)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운전하다 경찰관에게 단속을 당하면 왜 나만 잡아요, 저기 저 사람도 위반 했는데 라고 변명하는 것을 많이 보죠, 또 요즘 정치인들이 무슨 잘못을 하면 누구도 그렇지 않았나고 하면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많이 보시죠. 이런 경우처럼 베드로도 자신은 죽게 되었는데 왜 요한은 가만히 두느냐라고 다른 사람을 끌어들인 겁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단호하게 말씀 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하셨습니다. 요한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너는 너에게 주어진 일만 기억하면 돼 라고 잘라서 말하신 겁니다.
부르심과 소명은 각자에게 다 다르게 적용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이 왜 나를 부르시셨는지, 이른 바 소명 의식이 뚜렷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두 번 세 번에 걸쳐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반복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나를 부르신 이유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들은 대상자였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회피하고, 주저하는 행동을 했을 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은 누구나 가능 할 수 있으나, 아무나 실행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지금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진실로 진실로 깨닫게 하시고 들려 주시려는 말씀이 있을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베드로와 같이 엄청난 잘못(죄악)을 저른 과거가 있다고 할지라도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진실로 진실로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물음에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네가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너를 데려가리라, 나를 따르라는 사명과 순종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복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직은 젊은이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대로 가버리는 행동을 할지라도, 베드로처럼 요한을 끌고 들어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회피하려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 각자를 부르신 뜻대로, 사명 감당하는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라면 이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라는 구절의 마지막 설교를 통하여 진실로 진실로 우리 모두에게, 회개와 믿음의 고백과 부르심과 사명과 순종에 대해서 특별한 은혜의 말씀을 내려 주셨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며, 회개하지 않는 불안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날마다 회개하고, 날마다 믿음을 확증하며 살아가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더라도 순종의 눈물을 흘리며 묵묵히 십자가의 길로 나아갑니다.
“네가 나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느냐, 네가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너를 데려 가리라,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 이냐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이 진실로 진실로, 나에게 내려 주시는 부르심과 사명을 요구하시는 말씀임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시고, 작은 일에 충성하고, 날마다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성령 충만한 순종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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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도록 부르신다고 하여도, 순종으로 반응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