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탈근대화의 발상
보자기
자본주의는 물건의 소유에서부터 시작된다. 상자, 장롱, 창고 등은 자본주의가 낳은 알들이다. 소유할수록 상자는 커진다. 집도 커다란 상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본주의의 발달은 움직이는 상자를 만들려는 꿈으로부터 시작된다. 단순한 소유의 축적이 아니라 그것을 안으로 끌어 들이거나 밖으로 운반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시장의 원리가 생겨난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가방을 만들었고 한국인(동양인)들은 보자기를 탄생시켰다. 가방의 원형은 상자다. 그러니까 들고 다닐 수 있는 상자가 곧 가방인 것이다. 기능만을 첨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한눈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가방의 원형은 궤짝을 들고 다닐 수 있도록 손잡이를 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물건을 많이 넣었을 때나 적게 넣었을 때나 혹은 아예 물건을 넣지 않았을 때라 할지라도 가방 자체의 크기와 형태는 변하지 않는다. 들어 있는 것과 관계없이 가방은 어디까지나 가방인 것이다.
하지만 보자기는 싸는 물건의 부피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며 물건의 성질에 따라 그 형태도 달라진다. 때로는 보자기 밖으로 북어 대가리 같은 것이 삐져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사주단자처럼 반듯하고 단정하게 아름다운 균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풀어버리면, 그리고 쌀 것이 없으면 3차원의 형태가 2차원의 평면으로 돌아간다. 가방과는 달리 싸는 물건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네모난 것을 싸면 네모꼴이 되고 둥근 것을 싸면 둥글어진다.
가방과 보자기의 차이는 단일성과 다의성이라는 기능면에서도 드러난다. 가방에 걸리는 동사는 '넣다'이지만 보자기 는 '싸다', '쓰다', '두르다', '덮다', '씌우다', '가리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도둑이 '쓰고' 들어와서 '싸 가지고' 가는 것이 보자기다. 그러다가 철조망에 굵혀 피가 흐르면 이번에는 그것을 끌러 '매'면 되는 것이다. 복면도 되고 가방도 되고 붕대도 된다.
이 융통성과 다기능. 만약에 모든 인간의 도구가 보자기와 같은 신축 자재의 기능과 콘셉트로 변하게 된다면 현대의 문명은 좀 더 융통성 있게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 자동차도 사람이 탈 때와 내릴 때 그 모양이 달라졌을 것이다. 타고 내릴 때마다 보자기처럼 개켜지는 자동차가 있다면 얼마나 편할 것인가!
만약 모든 도구, 모든 시설들이 가방이 아니라 보자기처럼 디자인되어 유무상통의 철학을 담게 된다면 앞으로의 인류 문명은 좀 더 인간적이고 좀 더 편하지 않겠는가. 보자기에는 탈근대화의 발상이 숨어 있다.
우리 문화 박물지 중에서
이어령 지음
첫댓글 보자기와 가방의 차이점을 새삼 알게 되는 글이네요
우리네 인생사도 보자기처럼 융통성이 있게 살아가야 할 듯 하네요~
저부터 실천해야겠죠?
이 책 최고의 글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