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지 않고 살다 죽을래요.'
자랑인 듯 농담인 듯 말하며 살아왔다. 자신에게는 다짐하는 심정이었고 주변인들에게는 '나 그런 사람이에요.'를 확인시키는 의미일 수 있겠다. 철이 든다는 건 무엇인가. 아마도 사람이 되어간다는 말로 요약될 것이다. 철없다는 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어린 시절이다. 노래 가사에도 '아름다운 철없던 시절'이란 구절이 있다. 세속에 때묻지 않은 순수한 시기, 본능에 충실한 시기 즉, 심신에 다가드는 오감에 가감 없이 즉시 반응하는 어린이나 또는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구는 사람도 철없는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 나는 철없는 어른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좋아서 일부러 지향해 온 것은 아니나 지나온 70 여년 인생에서 변화해가는 성장과정을 단계별로 거쳐 이제는 사람 꼴이 되어있어야 할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열네 살 어린이 수준에 멈추어 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열네 살'이다.
‘철들다’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다.’ 로 풀이되어있다. 나의 철없음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시켜주는 해석이다. 나는 사리 분별을 잘 하지 못하고 오지랖으로 나대거나 소소한 일들의 민감한 사안에 바른 판단을 해내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나 주변인들은 그 철없음의 피해자들이 되어 평생 손해를 보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아마도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가 감당해야 했던 나의 철부지 행동을 한 가지만 밝혀보자. 결혼 3년차 아직은 신혼인 어느 날 밤,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던 내가 훌쩍거리며 울더란다. 남편이 이유를 물었을 때 나는 어떤 남자 선배의 아름다운 미소가 갑자기 너무 보고 싶다며 더욱 큰소리로 울먹였던 기억이 난다. 그 순간 남편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하지만 그가 한 행동은 조용히 나를 안아주며 “내가 더 잘 해줄게 그만 울어.” 하며 달래주었다.
일생동안 철없는 짓의 나쁜 점을 깨닫지 못한 나의 무모함을 알게 해준 사람이 생겼다. 사귄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새 친구를 만났을 때 나는 환호했다. 어르신들과 함께 살아온 실버타운 생활 6년 동안 막내로 귀여움을 받긴 했어도 숨 한 번 크게 내쉬기가 쉽지 않았던 터에 한 살 어린 부산댁이 들어와 아주 반가웠다. 여성스럽고 조신하며 조용한 스타일인 그녀는 나와는 대조적이다. 나의 일방적인 짝사랑은 거칠 것 없이 커져 만난 지 6개월도 안 되어 '그 마음, 내 마음'으로 믿어버리게 되었다. 보기만 해도 웃음지어지는 그녀를 보며 큰 위안처를 만난 것 같았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함께 지냈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해서는 안 될 무지한 행동을 하였다. 내 휴대폰에 녹음해 두어야 할 노래가 있어 그녀의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한 일이다. 내 철없음의 소치가 일말의 미안함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잠깐 휴대폰 좀 빌려줘."하고 손을 내밀었다. 순간 그녀가 당황하여
"휴대폰? 아, 안되는데." 하며 망설이더니 무얼 하려느냐, 이 자리에서 쓰라며 단서조항을 내건다. 나 같으면 100번도 더 아무 생각 없이 내어줄 일이어서 망설이는 그녀가 이상해보였다. 단순히 노래 한 곡 켜서 내 휴대폰에 옮겨 담고 돌려줄 것인데 그게 그렇게 망설일 일인가. 하지만 사사로운 정보가 집약되어있는 휴대폰을 빌려달라는 것은 모자라도 너무 모자란 몰상식이었음을 나는 깨닫지 못하였다.
20일 쯤 후 식당에서 점심 식판을 들고 그녀와 합석을 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휴대폰 사건으로 마음이 상하여 절연을 할까 고민했다며 일부러 피하기도 했는데 느끼지 못했느냐, 휴대폰은 빌려서도 안 되고 빌려주어도 안 되는 물건인데 당당하게 거절하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았단다. 적잖이 놀랐다. 우선 나의 그릇된 사고방식이 부끄럽고 미안했으며 그녀가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과 그 많은 날들을 고민했을 시간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안했다. 나의 철없음을 빌며 용서를 구하였다. 지금이라도 그 일을 말해주어 정말 고맙노라 머리를 조아렸다.
어찌보면 휴대폰 사건은 철이 없다기보다 몰상식한 일이어서 미성숙 인간의 표본을 보인 예일지도 모른다. 기본조차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나의 마흔 살 시절의 만용 한 자락이 떠오른다. 당시 직장의 최고상사에게 결제를 받으러 갔다가 큰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치는 어른에게 “소리를 낮추세요. 목소리 크다고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하며 맞섰던 일이다. 결국 더 큰 소란을 불러왔지만 후회스럽진 않았다. 나이들며 인격 수양이 되어진 양, 할 말도 참고 물러서는 비겁한 어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도 난 비겁한 어른보다 철없는 아이처럼 살고 싶었다. 선배에게 대드는 서른 살 후배를 보면 속으로 응원을 했다. 그래야지, 할 말은 하는 거야, 그게 서른이고 마흔이지. 그렇지 않아도 인생 50부터는 눈치보고 전후좌우 살피느라 너그러운 어른처럼 행세를 해야 하므로 많이 피곤해지거든. 그런 게 철드는 거라면 난 사절하겠어. 좋으면 활짝 웃고 아프면 울 거야.
하지만 오늘 나는 깨달았다. 철들지 않고 사는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아플 수도 있다는 걸. 어쩌면 내 멋대로 살겠다는 그 생각은 자유롭고 싶은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이전에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고 실천에 옮겨야겠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 하나를 붙잡고 앞으로나마 이젠 철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철들자 망령나지 않도록 조심도 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