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새 달력 첫 날
김남조
깨끗하구나
얼려서 소독하는
겨울산천
너무 크고 추웠던
어릴 적 예배당 같은 세상에
새 달력 첫날
오직 숙연하다
천지간
눈물나는 추위의
겨울음악 울리느니
얼음물에 몸 담그어 일하는
겨울 나룻배와
수정 화살을 거슬러 오르는
겨울 등반대의
그 노래이리라
추운 날씨
모든 날에
추운 날씨 한 평생에도
꿈꾸며 길가는 사람
나는 되고 니노니
불빛 있는 인가와
그곳에서 만날 친구들을
꿈꾸며 걷는 이
나는 되고 지노니
새 달력 첫 날
이것 아니고는 살아 못낼
사랑과 인내
먼 소망과
인동의 서원을
시린 두 손으로
이날에 바친다
29.새
김남조
새는 가련함 아니여도
새는 찬란한 깃털 어니여도
새는 노래 아니여도
무수히 시로 읊어짐 아니여도
심지어
신의 신비한 촛불
따스한 맥박 아니여도
탱크만치 육중하거나
흉물이거나
무개성하거나
적개심을 유발하거나 하여간에
절대의 한 순간
숨겨 지니던 날개를 퍼득여
창공으로 솟아 오른다면
이로써 완벽한 새요
여타는 전혀 상관이 없다
30.새로운 공부
김남조
마술을 배울까나
거미줄 사이로
하얗게 늙은 호롱불,
욕탕만한 가마솥에
먹물 한 솥을 설설 끓이며
뭔가 아직도 모자라서
이상한 약초 몇 가지 더 넣으며
혼 내줄 사람과
도와줄 이를
따로이 가슴서랍에 챙겨 잠그고
빗소리보다 습습하게
주문을 외는
동화속의 마술할머니
마술을 배울까나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먹물 가마솥에
좋은 풀도 많이 넣는
마술 할머니
내가 그녀의 제자 되어
새로운 공부에 열중해 볼까나
유년의 날
써커스의 말 탄 소녀를 본후
온세상 노을뿐이던
흥분과 부러움을
적막한 이 세월에
되돌려 올까나
마술을 배울까나
31.새벽 외출
김남조
영원에서 영원까지
누리의 나그네신 분
간밤 추운 잠을
십자가 형틀에서 채우시고
희부연 여명엔
못과 가시관을 풀어
새날의 나그네길 떠나가시네
이천 년 하루같이
새벽 외출
외톨이 과객으로 다니시며
세상의 황량함
품어 뎁히시고
울음과 사랑으로
가슴 거듭 찢기시며
깊은 밤
십자가 위에 돌아오시어
엷은 잠 청하시느니
아아 송구한 내 사랑은
어이 풀까나
이 새벽에도
빙설의 지평 위를
청솔바람 소리로 넘어가시는
주의 발소리
뇌수에 울려 들리네
32.새벽에
김남조
나의 고통은
성숙하기도 전에
풍화부터 하는가
간밤엔
눈물 없이 잠들어
평온한 새벽을 이에 맞노니
연민할지어다
나의 몰골이여
다른 사람들은
고난으로
새 삶의 효모와 바꾸고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맨몸 으깨어
피와 땀으로 참회하고
준열히 진실에 순절하되
목숨 질겨서
그 몇 번 살아 남는 것을
나의 고통은
절상 순간에
이미 얼얼하게 졸면서
죄와 가책에도
아프면서 졸면서
결국엔
지난밤도 백치처럼 잠들어
청명한 이 새벽에
죽고 싶도록
남루할 뿐이노니
33.새벽전등
김남조
간밤에 잠자지 못한 이와
아주 조금 잠을 잔 이들이
새소리보다 먼저 부스럭거리며
새벽전등을 켠다
이 거대한 도시 곳곳에
불면의 도랑은 비릿하게
더 깊은 골로 패이고
이제 집집마다
눈물겨운 광명이 비추일 것이나
미소짓는 자, 많지 못하리라
여명黎明에 피어나는 태극기들,
독립 반세기라 한 달 간
태극기를 내걸지자는 약속에
백오십 만 실직 가정도
이리했으려니와
희망과의 악수인 건 아니다
참으로 누구의 생명이
이 많은 이를 살게 할 것이며
누구의 영혼이
이들을 의연毅然하게 할 것이며
그 누가 십자가에 못박히겠는가
심각한 시절이여
잠을 설친 이들이 새벽전등을 켠다
34.생명
김남조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먼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이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은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35.소녀를 위하여
김남조
그가 네 영혼을 부른다면
음성 그 아니,
손짓 그 아니어도
들을 수 있으리
그가 네 이름의 글씨 쓴다면
생시 그 아니,
꿈속 그 아니어도
온 마음으로 읽으리
그가 너를 찾을 땐
태어나기 전
다른 별에서
항시 함께 있던 습관
예까지 묻어온 메아리려니
그가 너를 부른다
지금 그 자리에서
대답하여라
36.송(頌)
김남조
그가 돌아왔다
돌아와
그의 옛집 사립문으로 들었느니
단지 이 사실이
밤마다 나의 枕上에
촛불을 밝힌다
말하지 말자
말하지 말자
제 몸 사루는 불빛도
침묵뿐인걸
그저
온마음 더워오고
내 영혼 눈물지우느니
이슬에 씻기우는
온누리
밤의 아름다움
천지간 편안하고
차마 과분한
별빛 소나기
그가 돌아왔다
37.슬픔에게
김남조
정적에도
자물쇠가 있는가
문 닫고 장막 드리우니
잘은 모르는
관 속의 고요로구나
밤에서 밤으로
어둠에 어둠 겹치는
유별난 시공을
너에게 요람으로 주노니
느릿느릿 흔들리면서
모쪼록
소리내진 말아라
오히려 백옥의 살결
따스해서 눈물나는
아기나 하나 낳으려무나
소리 없이 반짝이는
눈물 빛 사리라도 맺으려무나
나의 슬픔이여
38.시인(詩人)
김남조
1
수정水晶의 각角을 쪼개면서
차아로 이 일에
겁 먹으면서
2
벗어라
땡볕이나 빙판에서도 벗어라
조명照明을 두고 벗어라
칼날을 딛고도 벗어
청결한 속살을 보여라
아가케를 거쳐
에로스를 실하게
아울러 明燈명등에 육박해라
그 아니면
죽어라
3
진정한 玉옥과 같은
진정한 詩人시인
우리시대
이 목마름
4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하여
그 공막空寞 그 靜菽정숙에
첫 풀잎 돋아남을
문득
보게 되거라
그대여
39.시인에게
김남조
그대의 시집 옆에
나의 시집을 나란히 둔다
사람은 저마다
바다 가운데 섬과 같다는데
우리의 책은
어떤 외로움일는지
바람은 지나간 자리에
다시 와 보는가
우리는 그 바람을 알아보는가
시인이여
모든 존재엔
오지와 심연,
피안까지 있으므로
그 불가사의에 지쳐
평생의 시업이
겁먹는 일로 고작이다
나의 시를 읽어 다오
미혹과 고백의 골은 깊고
애환 낱낱이 선명하다
물론 첫새벽 기도처럼
그대의 시를 읽으리라
다함 없이 축원을 비쳐 주리라
시인이여
우리는 저마다
운명적인 시우를 만나야 한다
서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혼의 목마름도 진맥하여
피와 이슬을 마시게 할
그 경건한 의사가
시인들말고
다른 누구이겠는가
좋고 나쁜 것이
함께 뭉쳐 폭발하는
이 물량의 시대에
유일한 결핍 하나뿐인 겸손은
마음에 눈 내리는 추위
그리고
이로 인해 절망하는
이들 앞에
시인은 진실로 진실로 죄인이다
시인이여
막막하고 쓸쓸하여
오늘 나의 작은 배가
그대의 섬에 기항한다
40.심장이 아프다
김남조
“내가 아프다”고 심장이 말했으나
고요가 성숙되지 못해 그 음성 아슴했다
한참 후일에
“내가 아프다 아주 많이”라고
심장이 말할 때
고요가 성숙되었기에
이를 알아들었다
심장이 말한다
교향곡의 음표들처럼
한 곡의 장중한 음악 안에
심장은
화살에 꿰뚫린 아픔으로 녹아들어
저마다의 음계와 음색이 된다고
그러나 심연의 연주여서
고요해야만 들린다고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
그리고 삶은 진실로
이만한 가치라고
41.아버지
김남조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버지가 지어준 아들의 이름
그 좋은 이름으로
아버지가 불러주면
아들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아버지는 얼마나 눈물겨운지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아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세상의 으뜸같이 귀중하여라
달무리 둘러둘러 아름다워라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은
세상 끝에서 끝까지 잘 들리고
하늘에서 땅까지도 잘 들린다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생모시 찢어내며 가슴 아파라
42.아침 기도
김남조
목마른 긴 밤과
미명의 새벽길을 지나며
싹이 트는 씨앗에게 인사합니다.
사랑이 눈물 흐르게 하듯이
생명들도 그러하기에
일일이 인사합니다.
주님,
아직도 제게 주실
허락이 남았다면
주님께 한 여자가 해드렸듯이
눈물과 향유와 미끈거리는 검은 모발로써
저도 한 사람의 발을
말없이 오래오래
닦아주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엔
이 한 가지 소원으로
기도 드립니다.
43.아침 은총
김남조
아침 샘터에 간다
잠의 두 팔에 혼곤히 안겨 있는
단 샘에
공중의 이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이날의
첫 두레박으로
순수의 우물, 한 꺼풀의 물빛 보옥들을
길어올린다
샘터를 떠나
그분께 간다
그분 머리맡께에 정갈한 물을 둔다
단지,
아침 광경에 눈뜨실 쯤엔
나는 언제나 없다
은총이여
生金보다 귀한
아침 햇살에
그분의 온몸이 성하고 빛나심을
날이 날마다
고맙게 지켜본다
44.안식
김남조
이제 그는 쉰다
처음으로 안식하는 이를 위해
그의 집에
고요와 평안 넉넉하고
겨우 깨달아
그의 아내도
바쁜 세상으로부터 돌아와
손을 씻으니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바쁜 일이라곤 없어라
그가 보던 것
간절히 바라보고
그가 만지던 것
오래오래 어루만지는 사이
막힘 없이 흐르는 시간
가슴 안의 구명으로
솔솔 빠져나가고
머릿속에 붐비는 피도
옥양목 흰빛으로
솰솰 새어나가누나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남루한 그녀 영혼도
빨아 헹구어
희디하얗게 표백한다면
절대의 절대적 절망
이 숯덩이도
벼루에 먹 갈리듯
풀어질 날 있으리니
슬퍼 말아라
슬픔은 소리내고 싶은 것
조용하여라
달빛 자욱한 듯이
온 집안 가득히
그가 쉬고 있다
45.안식을 위하여
김남조
겨울나무 옆에
나도 나무로 서 있다
겨울나무 추위 옆에
나도 추위로 서 있다
추운 이들
함께 있구나 여길 때
추위의 위안 물결 인다 하리라
겨울나무 옆에 서서
적멸한 그 평안
숙연히 본받고 지노니
휴식 모자라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는
내 자식들이
쉬라고 쉬라고 엄마를 조르는
그 당부 측은히
헤아린다 하리라
안식의 정령이어
산 이와 죽은 이를
한 품에 안아 주십사 비노니
겨울바람의 풍금
느릿느릿 울려 주십사고도 비노니
큰 촛불, 작은 촛불처럼
겨울나무와 내가
나란히 기도한다 하리라
46.어떤 소년
김남조
꽃 배달처럼
나의 병실을 찾아온
소년에게
내 처지 지금 감방 같다 했더니
그 아이 말이
저는 어디 있으나
황무지며 사막이예요. 란다
넌 좀 낙관주위가 돼야겠어
놀라는 내 대꾸에
그건 비관주의보단 더 나쁜 거예요
헤프고 바보그럽고
맥빠져 있으니까요, 란다
아이야
천길 벼랑에서
밑바닥 굽어본 일
벌써 있었더냐
온몸의
뇌관이 저려들면서
허공에 두 손드는
시퍼런 투항도 해보았더냐
더하기로는
심장 한가운데를 쑤시던
사람 하나가
날개 달아
네 몸 두고 날아갔느냐
.... 아이야
첫댓글 아! 시의 경건합이여...
내일은 일일문학회 갑진년 첫 월례회....
함께 하여 새봄 맞으려 수목원에 가야하는데...
바쁜 일에 발목이 잡혀 함께하지 못하니 슬프다...
이동민 선생님! 갑진년 새봄 잘 맞이 해주십시오. 죄송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