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의 두번째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네로의 자결로 단절된 뒤 베스파시아누스가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황제로 이어진 내란을 종결시키고 서기 69년 황제가 되어 플라비우스 왕조를 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대반란을 빠르게 진압할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인 티투스에게 예루살렘을 신속히 함락하도록 지시하여 5개월의 포위전 끝에 AD 70년 9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유대반란은 최후의 항전을 벌인
마사다 요새가 함락되는 AD 73년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지만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사실상 끝난 것이었다. 함락된 예루살렘은 신전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지며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유대전쟁 동안 사망한 유대인이 무려 11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유대전쟁이 마무리 되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비로소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AD 70년 10월 로마에 입성하고 로마 황제로서의 직무를 시작하였다. 여기서 마사다 항전에 대한 부연 설명하고자 한다. 유대전쟁은 그리스계 로마인과 유대인들 사이에 세금 납부 등으로 벌어진 갈등으로 촉발되었다.
마사다는 에루살렘으로 동남쪽으로 약 100km, 사해의 서쪽으로 약 4km 지점 사막 한가운데 높이 약434m 우뚝솟았으며, 꼭대기는 평평한 바위산이다. 평균 너비는 120m, 길이 620m, 둘레 1,300m의 평지였다. 이곳을 공격하는 군대는 방어군에게 쉽게 노출되어 공략이 쉽지않았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으로 정복될 것 같지않아 보였다.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다. 마사다는 원래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장군들이 지배하던 시절부터 요새로 주목받았고 매사에 의심이 많던 헤롯왕(Herod))은 그가 지배하는 유대왕국에 대한 유대인의 위협과
그들을 이집트에 복속시키려는 클레오파트라의 위협에 대비해 이곳을 자신의 궁전이자 피신처로 건설했다. 궁전은 물론 무기고와 식량 창고, 대규모의 물 저장시설도 갖춰 장기간 버틸 수 있는 시설을 충분히 갖췄다. 그의 말년에 유대왕국은 로마제국의 직활령이 되었다. 서기 72년 로마제국의 총독 플라비우스 실바(Flavius Silva)는 유대인의 마지막 거점인 마사다를 점령하기 위해 로마 제10군단을 이끌고 본격 정벌에 나섰다. 9,000여 명의 정규군과 6,000여 명의 노역자로 마사다 외부에 8개 진지와 성벽을 설치하는 등 유대인의 탈출을 원천 봉쇄하였다.
마사다의 유대인들이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15배 이상의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2년 이상 버텼다. 실바 장군은 마사다 서쪽 접근로 근처에 있는 바위지대에 돌과 흙을 다져 거대한 경사로를 쌓아 올려 공략키로 했다. 마침내 높이 30m, 길이 80m의 경사로를 만들었다. 공성탑과 화살이나 바윗돌을 날릴 수 있는.발리스타(Ballista))도 제작했다. 로마군은 본격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경사로 위로 공성탑을 끌어 올리고 발리스타 등으로 25kg이나 되는 돌을 날려보냈다.
마사다 성벽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은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벤 야이르(Eleazar Ben Yair)는 연설을 했다. '자유롭게 죽음을 택하자. 그리하여 적에게는 시체 밖에 남겨주지 않도록 하자. 이것은 승리한 적에게 실질적으로 패배를 안겨주는 일이요, 먼 훗날 우리 자손들의 승리를 보장하는 길이다. 우리 모두 자유라는 수의를 입자.' 각 가족의 가장들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칼로 찔러 죽인 다음 모든 남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제비로 10명을 뽑았다. 이들이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고 종국에는 서로를 죽이고 죽어갔다.
어린아이까지 포함하여 960명이었다. 성을 부수고 들어간 로마군은 유대인들의 시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것으로 66년부터 시작된 1차 유대전쟁은 끝을 맺었다.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No More Masada' 라는 슬로건 아래 다시는 나라가 잃지 않는 각오를 다진다. 군에 입대하는 장병들은 해당 부대에서 마사다까지 행군해 일출 직전에 도착하여 일출을 보며 선서로써 각오를 새롭게 한다. 요새푸스(Flavius Josephus)의 유대전쟁사에 의하면 노파 1명, 어린이 5명, 벤 야이르의 친척 노인 1명 등 모두 7명이 생존해 이 이야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비극적 전설 같은 사실이 오늘날 까지 전승화 되고 이스라엘인들의 불멸의 성지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와의 세 차례 전쟁 이후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까지 무려 1875년 동안 떠돌이 민족으로 살았다. 로마군이 마사다 공격시 돌과 흙을 쌓아 공격한 전법은 서기 644년 당태종이 50만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 공격시 안시성 옆에 높은 흙산을 쌓아 공격한 방법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차이점은 로마군은 승리했지만 당태종은 포기하고 퇴각했다는 점이다.
이제부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로 돌아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평민 출신이었다. 그래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와 같은 특권을 부여받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의 명령권에 관한 법률을 원로원에 제정하도록 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공식적인 호칭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로 사용하였고 그 아들인 티투스도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아 후계자임을 천명하면서 플라비우스(Flavius) 왕조가 시작 되었다.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평민 출신 황제 답게
로마 원로원의 의석을 로마의 귀족 뿐만 아니라 갈리아,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반도 출신에게도 개방하였고 각종 세금을 신설하여 네로가 탕진한 국고를 보충하도록 하였으며,오늘날까지 유명한 콜로세움 경기장을 로마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AD 7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티투스가 다음 황제가 되었다. 티투스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유대전쟁을 마무리했을 만큼 군사적인 능력이 출중했다. 원로원과 시민들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여러가지 재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AD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팔로 부유한 캄파니아 일대가 큰 피해를 입어 폼페이시가 땅속으로 매몰되었다.
이어 이듬해에는 로마 대화재가 발생했으며, AD 81년에는 페스트까지 창궐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티투수는 평소에 밤낮 바뀐 사생활로 유명했기에 2년 내내 터진 자연재해와 전염병 퇴치로 인한 과로로 AD 81년 불과 재위 2년만에 사망했다. 티투수 사후 동생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마티우누스가 물려받았다. 제 9대 황제로 즉위한 도마티우누스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대신 원로원을 약화 시키기 위해 로마 속주 총독을 원로원 의원이 아닌 에퀴테스에게 맡도록 변경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브리타니아(영국)에 대해서는
칼레도니아(지금의 스코틀랜드)까지 군대를 진군시켰고 AD 93년 도나우강 건너편의 다키아족이 국경을 칩입하자 이를 직접 격퇴햇다. 그러나 AD 88년 다키아족이 2차로 침공하자 로마 1개 군단 궤멸되엇고, 군단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어려움을 겪은 끝에 AD 89년 막대한 금품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다키아족 왕 데케발루스와 강화를 맺으면서 그 위상이 많이 실추되고 말았다. 도미티아누스는 엄격한 법 집행과 공평함을 원칙으로 로마 공화정기부터 쉽게 해소되지 않던 불법, 편법들과 부정부패가 상당수 사라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스스로를 절대시하고 원로원을 무시해 황제와 원로원간의 대립각을 심화시켰다. 상황이 험악해지는 가운데 도미티아누스는 공포정치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서기 93년 게르마니아 총독이 반란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후 원로원을 내란죄로 기소 후 고문법을 개발해 가혹하게 탄압해서 원로원과 로마 상류층, 지식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설상가상 도미티아누스는 개인적인 가정사로 복잡하여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였다. 결국 AD 96년 도미티아누스는 공안정국의 와중에 황궁에서 암살되었다.
플라비우스 왕조는 30년도 채 안되는 짧은 치세를 뒤로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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