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에 들려오는 소리 / 이임순
보름 전에 고추며 가지 토마토를 심었다. 물을 주면서 보니 고랑 한가운데 빈 자리가 있다. 건너편에도 지주만 달랑 세운 곳이 있다. 밭에만 가면 유독 두 곳에 눈길이 머문다. 같이 거름하고 두둑도 만들었는데 왜 우리만 밥을 주지 않느냐고 항의라도 하는 것 같다. 사다 심어야지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여러 날이 훌쩍 지났다.
땅심을 받은 고추나무에 하얀 꽃이 피더니 진 자리에 흔적을 남긴다. 손톱만 하던 고추가 나날이 커 대롱거린다. 그 모습이 좋아 보고 있으니 곁에서 두런거리는 것 같다. 이 나무 저 나무에 달린 열매를 보다 눈총 세례를 느낀다. 정신이 번쩍 든다. 밭에서 서둘러 나와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늘 붐비던 농약방이 한가하다. 가게 입구에서 모종에 물을 주던 주인이 “오늘은 뭐가 필요하세요?” 한다. 고추 두 나무를 달라 하니 땜방 할 것이냐고 묻는다. 늦은 감이 있으나 호박 모종도 산다, 서리맞은 풋호박에 새우 넣어 된장국 끓여 늦가을 입맛을 돋우고 싶어서다.
밭에 가면서 빈 음료병에 물을 담아 늦게 심은 고추나무에 준다. 처음에는 땅심을 받아 짙푸른 빛깔을 띠는 나무와 달리 두 나무는 언제 크지 싶었다. 식물도 사랑을 받는 만큼 성장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며칠 전에는 꽃이 피었는데 오늘은 고추 모양을 갖추었다. 아픈 자식에 눈길이 더 가듯이 식물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래도 두 나무는 내게 특별 대우를 받는다. 한 번 아픈 손가락은 상처가 나아도 아픈 손가락이듯 그들도 그렇다.
내 성격이 유별난 것일까? 약하고 어린 것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쩌면 나를 보는 것 같아 그런지 모른다. 소심한 성격인 나는 입맛이 까다로웠다. 지금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성격도 입맛도 많이 바꿨다.
이웃에 큰집이 있었다. 놀 때도 큰집 마당에서 사촌들과 많이 어울렸고 학교가 끝나면 할아버지부터 뵈러 갔다. 그분은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내가 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마당에 들어서면 쪽문을 열고 손짓을 하셨다. 방으로 들어가면 당신 간식을 내게 주셨다. 맛있게 먹고 나면 무엇이든 이렇게 먹어야 한다며 밥도 한 숟갈씩 듬뿍 떠먹어야 복이 들어온다고 했다. 예뻐하는 만큼 잔소리를 하며 관심을 쏟았다. 사촌들이 내 맘에 들지 않아 고자질하면 할아버지가 그랬다. 좋아도 사촌이고 싫어도 동기간이니 사이좋게 어울려야 한다고.
내가 자라면서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까다로운 입맛을 고치고 심성도 길러 주었다. 무엇이든 잘 먹는 사촌들과 달리 젓가락으로 세듯 먹으면 오던 복도 되돌아간다며 맛이 있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사촌들과 어울려 놀다 다툼이 생기면 빙 둘러앉혀 놓고 시시비비를 가려주었다. 그리고 늘 양보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야 정도 생기고 우애도 있다면서 그런 날이면 큰어머니로 하여금 특별식을 만들게 했다. 부침개를 크게 지져 접시에 내오면 서로 옆 사람에게 먹여주었다. 그것이 우리 할아버지의 사랑법이었다.
할아버지는 5남 1녀를 슬하에 두었다. 막내아들만 직장 때문에 ‘진도’에 살고 나머지 아들은 한동네에 살았다. 그러니 사촌이 많았다. 큰집 마당은 언제나 떠들썩했고 활기가 넘쳤다. 손자가 한 명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꼭 챙겼다. 몸이라도 아프면 찾아가서 머리를 짚으며 열이 있는지 없는지 살폈다. 지금도 사촌 간에 우애가 있는 것은 할아버지가 우리를 보살피고 서로 챙긴 것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늘 인자한 것은 아니었다. 싸움을 하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여지없이 내리쳤고 거짓말이라도 하는 날에는 목소리가 담을 넘도록 호되게 꾸짖었다. 못하는 것은 배워가면서 하면 되는데 거짓말은 할수록 느는 것이라며 나쁜 짓이라 했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으면 엄하게 벌을 내렸다. 큰집에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죄의 무게에 따라 벌의 양이 달랐다.
금지가 풀려 다시 큰집에 가면 할아버지가 곁에 앉혀 두고 잘못한 이유를 스스로 깨달았는지 살폈다. 뉘우치지 않았으면 다시 벌을 내렸다. 그때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함께 할아버지 앞에 무릎 꿇었다. 잘 보살피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할아버지가 주시는 당근을 받았다.
할아버지의 심성 교육은 삶의 지침이 되었다.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습관 또한 당신한테서 배운 교훈이다. 내 것이라고 나만 먹는 것보다 나누면 더 맛이 있다고 하셨다. 혼자보다 둘이 놀면 더 재미있으면서 협력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작물을 심다 보면 빠질 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았을 때는 얼른 보충해 주어야 한다는 것도 할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지주만 서 있는 옆에 고추를 심으니 곁에 빙긋이 웃고 계신 듯했다.
시작보다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바람결에 들려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