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2535
10월1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2_V62hKEE0&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t=0s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1)부디 너무 쓸쓸하게 보내지 마시길>
또 다시 추석입니다. 이번 연휴는 고향에 못 가시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쓸쓸히 홀로 명절을 맞이하는 분들도 많으시겠지요.
부디 너무 쓸쓸하게 보내지 마시길, 지나치게 신세한탄 하며 보내지 마시길 기도드립니다.
저희 아이들 가운데도 가족, 친지들과 함께 명절을 한 번 보내는 것이 소원인 아이들이 여럿 있는데, 그 간절한 소원 한번 들어주지 않는군요.
어려운 사정을 알지만 “죄송하지만 이번 추석에는 제발 보내지 말아 달라”는 말을 듣고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려니 하라”
“우리와 함께 재미있게 지내자”며 어깨를 두드려주지만 너무나 화가 납니다.
‘왜 명절 같은 것을 만들어가지고 우리 아이들 마음 아프게 하나’ 원망도 됩니다. 집에 못가서 마음 아픈 아이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해 줄 수 있을까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우리 수사님들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손에 쥔 것이 별로 없는 수도자들, 늘 받기만 하는 저희가 이웃과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나눔이 무엇인가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잘못타고 난 아이들, 부모 잘 못 만나 고생 많은 우리 아이들, 어린 시절부터 갖은 고생을 다해온 불쌍한 아이들, 그 아이들을 친 자식처럼 여기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선물로 여기고, 그 아이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추석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 친지들 가운데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걸맞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관대한 나눔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또한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는 부자를 향해 엄중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사실 재물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은 우리 삶을 불편하게 만들고,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부여하신 능력과 달란트를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정직하고 깨끗하게 부(富)를 축척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산이 어느 정도 있어야 봉사활동도 할 수 있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재물에 대한 과도한 욕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전 생애를 오직 재산 축척에만 몰두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전노처럼 돈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재물을 하느님의 위치에 올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물은 때로 마약과도 같아서 우리 인간의 오관 기능을 마비시키고 판단 능력을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결국 재물은 우리를 거룩함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해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속을 가장 잘 대표하는 재물이 우리 영혼에 끼치는 이런 악영향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재물을 지혜롭게 잘 사용할 것을 강하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사실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우리의 생애는 덧없이 시들고, 우리는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때 우리가 모아두었던 재산은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쌓아온 재물이 아니라 우리가 이웃과 세상,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했던 나눔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행하고 있는 소리 없는 나눔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실 봉헌인 것입니다.
매일 우리가 그토록 중요시 여기는 우리의 재물에 죽고,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자존심에 죽고, 나만의 영역에 죽고, 내 울타리에 죽을 때, 우리의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잘 왔노라’하시며 우리를 환영하실 것입니다.
누구나가 다 고상한 죽음, 남 보기에 민망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합니다. 더 나아가서 고귀한 죽음, 향기로운 죽음, 이웃들의 뇌리에 강한 긍정적인 각인을 하는 죽음을 맞이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그런 죽음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매일 부단히 죽는 사람들, 매일 자아포기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 부단히 자기 혁신을 위한 아픔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
<(2)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단히 자신만의 왕국을 포기해야 합니다!>
작년 여름 홀로 한달 간에 걸쳐 국내 성지순례를 떠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순간이었지만, 숙소 문제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어떤 날은 고마운 지인 댁에서 신세를 졌습니다. 어떤 날은 텐트를 치고 잤습니다. 어떤 날은 찜질방에서 새우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아주 좋은 장소가 눈에 띄어, 텐트를 치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주인이라는 분이 나타나셔서, 당장 나가라시더군요. 한밤 중에 주섬주섬 텐트를 걷는데 기분이 참 그렇더군요. 당시 나만의 공간이 따로 마련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그 작은 공간 마저 포기하라시니, 너무하신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습니다.
사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안정된 주거 조건 속에서 복음 선포활동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떠돌아다니셨습니다.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카파르나움에서 베타니아로, 베타니아에서 예리코로,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렇게 떠돌고 계시던 예수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 복음 9장 57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주 특별한 말씀, 무척이나 알쏭달쏭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씀, 꽤나 슬픈 말씀을 건네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복음 9장 58절)
공생활 기간 내내 펼쳐진 예수님의 행적을 뒤따라가 보니, 예수님 말씀은 정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오래 머무신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꼭 붙들 때 마다, 나는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시며, 결연히 팔을 뿌리치며,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곰곰히 따지고 보니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유다 광야의 여우 한 마리, 갈릴래아 호숫가 나무 위에 깃들며 살던 하늘의 새 한 마리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이었더라면, 경치 좋고 기후도 좋은 갈릴래아 호숫가에 커다란 대저택 하나를 짓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고통받은 백성들을 당신의 발로 직접 찾아다니셨습니다. 당신 치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하는 환자들을 일일이 방문하셨습니다. 당신이 극진히 사랑하는 양떼를 찾아가기 위해 떠돌이 생활,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놀랍게도 공생활 여정의 마지막 순간에도 정확히 이루어졌습니다. 당신 사명의 종착지인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의미심장한 예언은 마무리되었습니다.
통상 임종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던 방에서, 그게 아니라면 병원 침대 위에서 머리를 바닥에 대고 세상을 뜹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공중에서, 그 어디에도, 그 존귀한 당신의 머리를 대지 못한 채, 그렇게 운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애 내내는 물론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놀라운 청빈과 겸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단히 자신만의 왕국,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포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언제든 어디로든 기꺼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명절은 자녀에게 감사를 교육하는 장이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ztCU240A6MU
---------------------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축제의 시기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함께 모이는 것도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가족끼리 오랜만에 모이지 못하고 사람들이 더 많은 곳에 놀러 가는 것도 썩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힘든 상황이지만 우리나라의 큰 명절을 잘 지키며 힘을 얻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축제를 지내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축제라도 어떤 때는 뒤끝이 좋지 않고, 어떤 때는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뒤끝이 좋은 축제를 지향해야 합니다. 뒤끝이 좋지 않은 축제 안에는 항상 인간의 욕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946년 미국의 한 의과대학 2학년생 ‘모턴’은 실험을 하던 중 강력한 마취기능을 가진 에테르라는 약물을 만들어냈습니다. 마취 없이 수술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에테르의 발견은 외과 수술 역사상 획기적인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발견해 낸 사람은 축제를 즐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에 에테르 특허를 신청하려 했던 모턴은 그의 지도교수인 ‘웰치’와 그에게 실험실을 내어준 화학과 교수 ‘잭슨’에게 저지를 당했습니다. 서로 자신의 이름이 의학 역사에 기록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명은 결국 법정 싸움까지 갔고 축제가 되어야 했던 이 발명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잭슨은 정신병에 걸렸고, 웰치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모턴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마취시키는 물질을 개발해 낸 그들이 명예욕으로 곪은 정신은 마취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참조: 『멈추어야 할 때 나아가야 할 때 돌아봐야 할 때』, 쑤쑤, 유튜브 채널: 책 읽는 다락방]
아무리 축젯날이 되어도 인간의 욕심이 개입하면 축제가 비극으로 끝납니다. 물론 장례식은 축제는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어떤 장례식에서는 돈 문제로 가족들이 다투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모습은 아닌듯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말합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듯이, 돈을 사랑하면 믿음에서 멀어지고 결국 고통으로 끝나고 맙니다. 아마 모든 것이 가장 풍성할 때 추수감사절이나 추석 명절이 있는 이유는 돈에 대한 욕심이 가장 줄어드는 풍요의 시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브라질은 삼바축제로 엄청난 관광소득을 올리는 나라입니다. 매년 2월에 열리는 이 축제에 약 4천만 명이 몰립니다. 그러니 경제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는 축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올해 2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확산할 위험에 있었습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축제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축제가 끝나는 무렵에 첫 확진자가 발생했고, 현재 확진자가 470만 명을 넘었습니다. 사망자도 14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코로나는 그저 감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도 걸리고 가족도 걸렸습니다. 그런데도 마스크 없이 사람들을 만나는 등 거친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겉만 보고 이렇게 말해서는 온전한 판단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삼바 축제가 코로나 확산의 주범이라는 명확한 근거도 없습니다. 다만 그런 축제를 지내는 정신이 코로나 확산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제가 오염되었음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보통 삼바축제라고 하는 ‘카니발’은 ‘카르네 발레’(Carne val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카르네 발레는 ‘고기여 안녕!’이라는 뜻입니다.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전에 당분간 고기를 먹을 수 없으니 그 전에 충분히 먹어두려고 하는 가톨릭 전통이 축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로 시작된 이 축제가 그 정신은 사라지고 돈과 쾌락의 축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뒤끝이 좋지는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명절과 축제의 참된 의미를 되살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 전통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전통에서 ‘축제’는 자신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해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그 기억을 자손들에게 전해주는 ‘교육’적인 차원이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식 때마다 자녀들이 그 예식은 왜 행하는 것이냐고 부모에게 묻고, 부모는 하느님께서 이래저래서 그 감사를 잊지 않기 위해 이런 예식을 행하는 것이라고 자녀를 교육합니다. 교육하면서도 부모 자신도 더 배우고 기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2천 년간 나라 없이 떠돌면서도 이런 축제 기간을 중요시 여기며 후대에도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잊지 않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 없이 살면서도 축제를 통해 하느님은 감사한 분이심을 자녀들에게 교육했기 때문에 지금의 이스라엘이 있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설과 추석이라는 좋은 명절이 있습니다. 설에는 세배하며 감사하고 추석에는 풍요로움이 있게 해 준 조상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왜 그런 제사를 지내야 하고 성묘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하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부모와 조상들의 덕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 제주도에 30만 명이 몰린다고 합니다. 제주도 주민은 자녀들에게도 이번 명절엔 오지 말라고 했는데, 30만 명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아름다운 전통의 축제 정신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명절이 어떤 교육보다 자녀들에게 큰 교육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부모를 공경하고 물려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을 여러 번의 명절을 거치며 배워왔던 것 같습니다. 놀러 가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이런 특별한 때야만 가능합니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감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부모도 자신들도 없었음을 깨닫게 하십시오. 그 감사가 진정한 예배로 이루어질 때, 명절은 기쁘게 끝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명절이 자녀에게 감사를 교육하는 장으로 길이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2,15-21 :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그 동안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또한 우리에게 생명을 얻고, 생명의 길을 가도록 신앙을 전해주시고, 이 땅을 물려주신 조상들의, 또 친지들의 영혼들을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
우리 조상들은 오늘 추석을 지내면서 일 년 동안 제 때에 비를 주시고, 태양을 비추어 주시어 오곡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심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또 조상들의 은덕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지내온 분들이다. 그리하여 이 날은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술과 음식을 서로 나누며 지냈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는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로 많은 분들이 가기도 했지만, 또한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이때를 기해서 자리를 함께 한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더욱 가족들 간에 화목한 사랑의 성가정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이렇게 서로 가족들이 만나는 것은 기쁘고도 감사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도 언제나 감사드리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하루 동안의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고, 한 주간을 마치면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면서 감사드리고, 한 달을 감사하면서 지난 날 모두를 감사드릴 수 있는, 그래서 오늘 추석,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더 잘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드리면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형제들, 은인들과 친척들 모두를 기억해 드릴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신앙 안에 우리의 모든 형제였던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있어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고,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기로 하여야 하겠다.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바칠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면서 그 외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더불어 주실 것을 믿으며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진 바를 이웃과 나누며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다짐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쁨이 넘치는 한가위가 되도록 하자.
오늘 복음에서 이 부자가 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가? 세상의 재물이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이다. 자기의 재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그 순간에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영적으로 파산을 했다고 하셨으며, 하느님의 눈에는 그가 전혀 부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비극은 육체적 죽음보다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무엇이건 좋은 것이다. 주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옛 성인은 재물이란 것이 ‘사용하는’데 있는 것이지, ‘소유하는’데 있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주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조상들과 부모 형제 친척 은인들이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시도록 기도하자. 또한 지난 1년간의 모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지금 우리와 함께 이 참 제사를 봉헌하지 못하며, 이 기쁨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 잠깐 머리 숙여 눈을 감고, 그분들을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각자 기도 드리자.
=====================
《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하느님께서는 왜 부자를 두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시며 그의 목숨을 되찾아 가시려 하실까요? 사실 그가 특별히 죄를 지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데 말이지요. 가령 일꾼들을 무임금으로 부렸다던가, 탈세하였다는 식의 불의한 모습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땀을 흘려 수고하였고 그 결과로 많은 소출을 거두게 되었으니, 어떤 면에서 그는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 눈으로 볼 때 열심히 일한 만큼 안락과 편안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부자가 자신에게 던진 질문을 다시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이에 대하여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는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더 큰 곳간을 짓고 모든 곡식과 재산을 쌓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소출이 있기까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제물을 바칠 것이고, 자신을 도와준 일꾼들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하며 평소에 주는 품삯에 상여금을 얹어 줄 것입니다. 또 주변 이웃과 친지, 특히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에게도 자선을 베풀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에 등장한 부자는 탐욕의 노예였기에 어리석게도 하느님과 이웃에게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눈길이 쏠려 있었습니다.
한가위입니다.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맺어 주신 햇곡식과 햇과일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3-6)
인간이라는 존재는 먼지보다 나을 것이 없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원성을 인간들이 나누어 받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복음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면 하느님의 영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시편 8,4-7)
믿음 없는 자들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같은 말을 하면서 마치 무엇이나 된 것처럼 우쭐거리지만,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교만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을 이렇게 높여 주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필리 2,12ㄷ-16ㄱ)
신앙인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신호등과 같은 등불이 되라는 뜻인데, 이 말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마태 5,13-16) 예수님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5-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야고보서에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야고 4,13-16)
여기서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말을,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라는 ‘어리석은 부자’의 말은, “재산이 많이 쌓여 있으니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자.”라는 뜻인데, 그가 생각한 ‘여러 해’는 그의 헛된 욕심이고, 허세이고, 쓸데없는 자랑이고, 악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시간은 ‘오늘 밤이 되기 전 몇 시간’입니다. 그 ‘몇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만일에 그가 그 몇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즉 회개하지 않고 그냥 낭비해 버린다면, 그의 인생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라는 하느님 말씀은, 우리 목숨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라는 말씀은, 지금 내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는(하느님 앞에서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목숨과 인생은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잠깐 동안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재산, 명예, 권력, 무엇이든지 간에 다 마찬가지입니다.
<몇 시간 전이라도 미리 예고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루카 12,46) 하느님 앞으로 불려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지금 살아서 회개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의 것이니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어리석은 교만과 허세를 버리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날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사진을 모아 놓은 앨범을 보곤 합니다. 군대에 있을 때 후배들이 만들어 준 ‘추억록’이라는 앨범이 있습니다. 신학생 때 동창들과 함께 했던 앨범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간직하신 몇 장 안 되는 사진도 있습니다. 동생 수녀님과 고양이를 앞에 두고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저는 6살, 수녀님은 4살 때인 것 같습니다. 형들과 장화를 신고 뒤뜰에서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저는 4살, 작은 형은 7살, 큰 형은 9살 때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시간이 흘러 빛바랜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예전에는 사진을 찍을 일이 많지 않았고, 찍었던 사진들도 이사를 다니면서 없어지곤 하였습니다. 사진기에 필름을 넣고 뚜껑을 닫고, 사진을 찍으면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그렇게 바빴는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는 본당 별로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이 8권의 앨범에 사제생활 29년이 담겨있습니다. 보좌 신부 때의 사진에서는 열정과 순수함을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주일학교 교사, 청년, 주일학교 학생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행사에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사진 속의 모습은 모두 밝고, 즐거워 보였습니다. 젊은 날이었고,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으로 나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본당 신부 때의 사진에는 여유와 웃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어른들과 함께한 사진이 많았습니다. 사목위원, 노인대학, 구역 봉사자, 성가대, 전례 봉사자, 구청직원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식사하는 자리, 마이크 잡는 모습이 많았습니다. 본당에는 행사가 많고, 사람 좋아하는 저는 가능하면 함께 했습니다. 교구청에 있을 때는 사진 찍을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사목이기보다는 직장과 같았습니다. 교구장님과 교구청 신부님들과 함께 낚시 가서 찍은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5년 동안 교구청에 있으면서 1번 여행을 같이 갔습니다. 그만큼 각자의 자리가 바빴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사진 찍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저장하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에는 너무 많은 사진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안 보게 됩니다. 스마트폰 때문인지, 게을러서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앨범도 만들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지만 나의 삶이 저장되는 곳이 있습니다. 나의 글이 저장되는 곳이 있습니다. 인터넷의 공간입니다. 제가 있던 본당 홈페이지에, 교구청 성소국의 홈페이지에 저의 글과 사진이 저장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기억하는 자리에, 기억하지 못하는 자리에 삶의 추억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내가 저장하는 곳의 추억과 기억들은 더 오래 간직할 수 있고,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원하지 않아도 계속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걱정되거나 두려워서는 아니지만 이왕 세상에 왔으니 좋은 추억을 남기면 좋겠습니다. 따듯한 추억을 남기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위로해 주었던 추억을 남기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가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들 보내고 계시는지요? 여성분들은 음식 준비를 하시느라 바쁘실 것입니다. 남성분들은 모처럼 가족들과 만나서 한잔 하시느라 즐거우실 것입니다. 남성분들이 설거지를 도와 드린다면 더욱 행복한 추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윷놀이, 고스톱을 하는 것도 좋지만 모처럼 대화를 나누고, 시간이 있으면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은 둥근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번 추석을 지내면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습니다. 고향 가는 모든 분들이 가족들과 정겨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안전하게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도 자기가 살던 곳으로 가서 다시 안 오면 좋겠습니다. 치료약과 백신이 개발되면 좋겠습니다. 예전처럼 일상의 기쁨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추석을 지내면서 마음으로 바라는 것들을 하느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쌓아 놓은 많은 추억과 기억들이 어쩌면 하늘에도 앨범으로 기록되는 것은 아닐까? 부자가 세상의 창고를 세우고 재물을 보관하며 즐거워했지만, 우리가 쌓아야 할 것은 하늘의 창고가 아닐까?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창고에 보물을 쌓으려하지 마십시오.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안전한 하늘의 창고에 보물을 쌓아야 합니다. 모든 재물과 물질의 진정한 소유주는 바로 하느님이심을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재물과 물질을 이웃과 나누며 우리 마음의 창고에 사랑과 희생 그리고 나눔과 섬김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추석을 맞이하면서 무엇보다도 조상과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풍요와 여유로움의 이면에는 땀 흘리는 노력과 수고가 있었음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겠습니다. 아울러 말뿐인 사랑보다는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추석이 감사와 고마움의 축제가 되고, 풍요와 기쁨의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조상을 공경하며 가족과 이웃과 화목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곳간>
루카 12,15-21 (탐욕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나의 곳간>
나의 피땀 어린
나의 결실은
당신의 피땀 함께 깃든
당신의 결실
소중한 나의 결실을
정성껏 모아놓을
나의 곳간은
바로 당신
=====================
[대전교구 백성수 시몬 신부님]
<“감사” “기억” “친교”>
한가위! 어릴 때의 추억은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온 가족이 모여 송편 빚고, 오랜만에 친인척을 만나 함께 성묘 다니고, 때로는 새 옷도 얻어 입었던 그저 즐거운 날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랜만에 친인척을 만나도 어릴 때 같지 않고 송편을 먹어도 그때 맛이 아니다. 그리고 조상들의 주검 앞에 자신의 죽음이 비춰지는 엄숙한 성묘 시간이 되고 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좋은 날, 한가위입니다. 모든 가정에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히 내리시길 빕니다. 한가위의 정신은 “감사”와 “기억” 그리고 “친교”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 생명을 자신의 살과 피, 그리고 뼈로 지금의 우리가 있도록 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파스카 사건을 기억하면서 민족의 정체를 지키며 살듯이, 우리는 조상님들이 남겨주신 정신들을 기억하며 오늘을 사는 데에 또 다른 힘과 지표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가족친지들과 함께 하는 만찬을 통한 친교가 새롭고도 풍요한 관계를 이루는 소중한 은총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감사” 와 “기억” 그리고 “친교”의 구체적 표현이 바로 제사(미사)와 성묘입니다. 그러므로 가벼운 이유로 함께하지 않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제사(미사)와 성묘를 미리 앞당겨 지내버리는 모습은 하느님과 조상님들께 정말 죄스런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재화에 목숨을 맡기지 말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맡기면서 세상을 살라고 하십니다. 노후를 위해 지금 재화를 부지런히 모으고, 그 모은 재물에 마음 흐믓해하는 사이에 우리의 몸은 늙고 병들어서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한가위는 하느님과 조상님들 사이에서 생명과 죽음을 묵상하고, 다가올 우리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을 향하는 새로운 깨달음의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오늘 한가위는 하느님과 조상님들을 위한 날이 되고 우리에게는 은총의 날이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예로부터 한가위 밤이면 보름달을 보고 소망을 빌곤 하였습니다. 달은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처럼 차고 기울고 사라졌다가는 또다시 나오지 않습니까? 달은 마치 탄생, 성장, 쇠퇴, 죽음, 그리고 또다시 태어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종교성을 띠게 됩니다.
아울러 한가위에는 한 해의 결실에 감사드리곤 했지요. 우리도 보름달을 바라보며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떠올렸으면 합니다. 보름달이 어두운 밤길을 비춰 주듯이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어두운 면을 밝게 비춰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한가위에는 떨어져 살던 가족들을 만나려고 고향으로 갑니다. 이는 새로운 힘을 받기 위함이지요.
신앙인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우리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의 품입니다. 하느님 나라입니다. 한가위를 맞아 우리 삶의 근원과 최종 목적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또한, 한가위에는 돌아가신 이들을 기리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 추억만을 회상하는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과거 사건이 지닌 의미를 오늘의 삶 안에서 되살려 내는 것이지요. 그가 나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살아 움직이게끔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조상을 비롯하여 먼저 가신 이들을 기억하는 일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가 됩니다. 동시에 온 집안을 한 식구로 묶는 구심점도 되는 것이지요.
비록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그들이 피운 꽃에 이어 지금 우리가 꽃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또 우리의 다음 세대가 우리를 대신해서 꽃을 피울 것입니다.
=====================
[인천교구 박진양 베드로 신부님]
즐거운 한가위 명절 보내고 계십니까? 한가위 속담에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윗날만 같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가위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기에 많은 음식을 장만해서 잘 먹고, 즐거운 놀이를 하며 지내게 되므로 늘 이 날만 같았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때에는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일에만 시달렸던 백성들의 소망을 대변했던 말이었다고도 합니다. 또한, 송편을 빚어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풍성한 한가위 명절에 자신들만 챙겼던 것이 아니라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과 조상님들께도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한가위 명절을 맞아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맺은 결실은 전부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들입니다.
물론 내가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도움과 하느님의 도우심이 더 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한가위 명절에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우리 가족들과 조상님들께도 감사를 드리면서 위령미사를 봉헌합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가 태어나고 이만큼 살 수 있게 된 것은 나 혼자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닙니다. 조상님과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부자를 보면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언제나 저런 말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나온 부자에게서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면 감사드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곡식과 재물이 많았던 부자의 창고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쌓아두고 있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겠지만 그럴 시간까지는 없었나 봅니다. 만약에 부자가 자신의 삶에 만족했었다면 하느님께서 목숨을 거두시기까지 자신의 재물에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에 만족한 사람이 진정으로 감사할 줄 압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색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었다면 하느님께서 조금 더 이 세상에 있도록 허락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은 점점 발전하지만, 아직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생활에서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가위 명절만이라도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윗날만 같아라.’라는 마음으로 하느님과 조상님들께 감사를 드리시는 풍성한 명절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친구와 놀다 보면 종종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구름 사이를 지나는 비행기를 보면서, 이 비행기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마치 명나라 때의 장편소설 『서유기(西遊記)』에서 손오공이 타고 다니는 구름인 근두운을 타고 있는 느낌이 아닐까 싶었지요.
부제 때, 졸업 여행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었지요. 긴장되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꿈꾸었던 비행기를 탄다는 생각에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서 드디어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어땠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생각처럼 근두운을 타는 느낌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구름 사이를 지나가는 멋진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구름을 통과할 때는 마치 옅은 연기 사이를 지나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실제와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그런데 생각이 실제에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실망에 이르게 될 때가 참 많습니다. 또 이로 인해 갖지 않을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울 때도 많아집니다.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탐욕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의 한 형태로 우리가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랑보다는 나의 욕심을 채울 탐욕에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지금 약간의 손해가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랑 대신 탐욕을 취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선물 받은 것을 쌓아 둘 뿐이었지요. 지금의 행복이 재물을 쌓아 두는 것에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물 받는 것을 나누는 것만이 탐욕의 죄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특히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이들은 준비 없이 최후를 맞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것이란 재물이 아니라 덕행을 사랑하는 것이며, 생명과 구원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가난한 사람의 모습일까요?
오늘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 중의 하나인 한가위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고 수확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이웃과 서로 나누며 살아왔던 조상님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본받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자신감을 북돋우는 최고의 방법>
자신감을 키워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그 최고의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전문가들의 표현에 의하면, 나의 능력을 믿고 지지해 줄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족, 친구, 선생님 등 나의 응원자가 있으면 자신감을 느끼게 되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의 변화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탁할 사람이 없다고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선생님도 그리고 그밖에 어떤 사람도 자신을 응원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눈물 흘리십니다.
이를 이 분야의 전문가에게 묻자, 이렇게 대답해줍니다. “부탁할 사람이 없다면, 스마트폰의 시리나 빅스비 등의 개인 인공지능 비서에게 도움을 청해보세요. 이것도 괜찮습니다.”
우선, 도움을 청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서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 말을 듣고자 할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서라도 말입니다. 이런 노력만으로도 자신감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혜로운 삶>
-찬양, 종말, 이웃-
오늘은 참 좋은 날입니다. 두루두루 경사가 겹친 축복 충만한 날입니다. 10월 묵주기도 성월이자 전교의 달 첫날, 첫주일이자 성녀 소화 데레사 학자 기념일이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 추석입니다.
제가 늘 감동하는 바는 가톨릭 교회 전례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전례의 아름다움이요, 전례의 은총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삶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한가위 하루를 활짝 연 성무일도시 새벽 초대송과 찬미가, 그리고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과 시편은 얼마나 한가위 축제에 잘 어울리고 아름다운지요!
-“한가위를 맞이하여 오곡백과를 지어내신 주님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올해도 우리일손 축복하여서 이모든 곡식들을 거두어들여
우리삶 이어가게 힘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드리세
마음을 곱게곱게 가다듬어서 이세상 열매들을 추수하면서
천상의 주님잔치 참여하는날 고운옷 차려입게 보살피소서.”
-“오곡백과가 땅에서 났으니, 우리주 하느님이 복을 주심이로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 창생이 하느님을 높여 기리게 하소서.”-
온통 찬미와 감사로 가득한 아름다운 축제일인 오늘 한가위 추석이 우리를 한껏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고무시킵니다. 무엇이 아름다운 삶입니까? 지혜로운 삶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배울 삶은 지혜로운 삶이자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탐욕을 경계하라’는 말씀과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 두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음 주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우리의 탐욕을 경계하게 하고 어리석음을 일깨워 줍니다. 역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오늘 복음의 예화가 꿈중에 이뤄진 일이라면 어리석은 부자는 꿈을 깨는 순간 회개하여 하느님과 이웃에 활짝 개방하여 나눴지 싶습니다. 문득 부자 스쿠르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스크루지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돈욕심이 아주 많은 고리대금업자로 남에게 늘 인색하게 굴었으나, 어느날 밤 죽은 친구의 유령과 함께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본 뒤 깨달음을 얻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는 인물입니다.
좌우간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는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역시 무지의 병, 무지의 죄를 깨닫습니다. 탐욕에 눈 먼 무지의 어리석은 부자는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녹색평론 잡지 표지 그림 안에 글귀가 좋아 나눕니다.
“내 목소리부터 낮춰야 새들의 노래도, 벌레들의 소리도 들린다. 그래야만 풀들의 웃음과 울음도 들리고, 세상이 진실로 풍요로워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끊임없이 갉아 먹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세상 모두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관계속에 살아갑니다. 지옥은 장소 개념이기 보다는 관계 개념입니다. 연결되어 있지 않고 끊어져 있는 고립단절의 관계라면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바로 오늘 어리석은 부자의 상황이 그러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단절이요, 이웃으로부터의 단절이요, 참 자기로부터의 단절이요, 역사로부터의 단절입니다. 더불어가 아닌 혼자의 삶입니다. 완전히 이기적인 자기 안에 갇힌 수인의 삶같습니다.
저는 오늘 2개의 독서와 말씀을 묵상중 십자가 안의 원이 떠올랐습니다. 십자가 수직선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 찬양이고. 십자가 수평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사를 상징하고, 십자가의 중심을 에워싸고 있는 원은 오늘 지금 여기서 이웃과 더불어의 삶을 상징합니다. 바로 지혜로운 사람은 이 세 차원의 삶을 삽니다. 이에 대해 자세히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이런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십자가 형상으로 하면 하늘과 땅을 잇는 수직선입니다. 바로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하늘길이, 하늘문이 닫혔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가 전무합니다. 완전히 하느님과 연결이 끊긴 단절된 삶입니다. 하여 어리석은 부자는 하늘에 쌓아야 할 보물을 땅에 쌓고 독백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고 즐겨라.”
완전히 육적인 삶입니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영적 삶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습니다. 참 무지한 현실주의의 육적 만족의 탐욕의 삶입니다. 이렇게 산다면 참으로 인생 허무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지 않습니다. 제1독서 요엘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주셨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바로 어릭석은 부자에겐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찬양이 없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삶은 찬미와 감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과거와 현재, 미래의 종말을 아우르는 깊고 넓은 안목의 시야입니다.
이런 시야를 지닐 때 지혜로운 삶입니다. 십자가 형상으로 하면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수평선입니다. 복음의 탐욕에 눈먼 어리석은 부자는 완전히 이런 시야가 차단되어 있습니다.
과거는 물론 미래도 없고 온통 현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종말 의식이 전무합니다. 언젠가 있을 죽음의 종말을, 심판과 죽음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땅에 재물을 쌓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묵시록이 우리의 종말의식을 일깨웁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행복하다’ 기록하여라.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천사의 보고후 사람의 아들이 수확하는 장면은 역시 그대로 최후심판의 상징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재산을 다루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게 해 주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탐욕은 인간의 기본적 도리와 품위가 무너질 정도의 지나친 욕심을 가리킵니다. 탐욕이 지나간 자리에는 분배와 소유의 균형이 깨어지고 착취와 손해의 상처가 남지요. 누군가의 이득이 누군가의 상실을 부릅니다. 그래서 탐욕은 얻은 재산의 수량 문제가 아니라, 탐욕한 만큼 누군가 공격받고 소외됨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과도히 탐욕을 부리는 이의 존엄성도 실은 당하는 이 못지않게 훼손됩니다. 소유의 쾌락에 들떠 천박해지고 무도해지고 병드는 영혼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따름이지요.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색하게도, 많은 이들은 생명이 재산에 달려 있다고 여깁니다. 돈으로 첨단 과학과 의학의 결실을 우선 점유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이야기이긴 하지요.
하지만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는 명백히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은 육적 생명뿐 아니라 영적 생명까지 포함하니까요. 오늘 비유 속 부자의 잘못은 그가 영적 생명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자신을 위해 모은 재화란 제 만족을 위해 쌓은 지상 재화를 의미하지요. 그 재산을 허락하신 만물의 주인을 잊고 모든 것이 제 것인 양 즐기고 누리면서, 협력하고 양보하고 기여한 이웃들의 몫을 염두에 두지 않은 실책입니다. 그들의 가난에 무심히 눈 감은 탓에, 그 부유한 이의 천상 곳간은 기초가 놓일 땅조차 얻지 못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인간을 배불리고 풍요롭게 하는 모든 열매들이 어디서 오는지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요엘 2,23)
땅의 곡식과 과일은 주님께서 내려 주신 비를 먹고 자랍니다. 그리고 사람은 주님의 은총과 도움, 축복을 먹고 자라지요. 세상에는 이 진실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이와 망각하는 이가 있을 뿐입니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요엘 2,26)
이것이 사람의 도리입니다. 애써 일한 보람으로 한껏 배불리 먹어도 좋고 신나게 즐겨도 좋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좀 더 부여된 주님의 은총을 당연하다고 여겨서는 안 되지요. 자격 없고 합당치 못한 나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에 놀라워하고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그분께는 찬양이 필요하지 않지만, 감사와 찬양은 이를 바치는 이의 영혼이 숨을 쉬는데 꼭 필요한 양분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의인들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묵시 14,13)
주님에게서 받은 것에 대해 우리가 올린 탄성과 감사와 찬양은, 심판하시는 분 앞에 서게 될 우리를 따라옵니다. 이미 우리 영혼에 아로새겨졌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감사의 마음으로 사심 없이 내어준 자선과 희사의 자취는 심판하시는 분의 심장에 인장처럼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지상의 가난한 이웃들을 거쳐, 거쳐서 결국 그분이 받으셨고 그분이 누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의 빈부의 격차는 소유한 물질로 생기지만, 영혼의 격차는 비우고 나누고 내어준 자취로 생기기 마련입니다.
흔히들 풍요와 결실의 한가위라고 하지만, 올해 추석은 예년의 흥겨움을 떠올릴 때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실직과 병고와 소외를 겪는 이들이 늘어가고, 단절과 고립이 키우는 마음의 병 역시 중차대한 현실이지요. 가난한 이들이 더욱 처절한 빈곤의 늪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에,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시는 오늘 되면 좋겠습니다. 국가와 사회, 교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굶주리고 외로워하는 이웃, 형제는 없는지요... 올 추석은 국가적, 세계적 위기 속에서도 더 따뜻한 사랑이 피어나길 소망합니다. 없이 살아도 성체와 성혈로 배부르고 흥겨운 우리가 그 작은 불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가위 명절을 축하드립니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 준 조상들과 부모님들께 감사하며 보름달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두루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보름달처럼 휘영청 밝고, 아름다운 멋지고, 축복 가득 찬 한가위 되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라는 <입당송>으로 시작하여, <본기도>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고 하고, <제2독서>에서는 때가 될 때, 구름 위에 앉아계시는 분이 땅 위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들려줍니다. <복음 환호송>에서는 “뿌릴 씨 울며 들고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고 노래하고, <복음>에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것을 깨우쳐줍니다. 곧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인류역사는 베풂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창조와 축복과 선사로 시작된 역사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외아드님을 건네주심으로 구원을 베푸시고, 우리는 그 베풂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은총에 은총을 덧입은 이들로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보은지정의 감사). 또한 그렇게 하여 은혜를 입고 이미 새 생명으로 태어난 구원된 존재라는 사실에 더 더욱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존재론적 감사)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만난 모든 것들 안에서 저희와 동행하시며 승리로 이끄시는 당신의 현존과 활동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종말론적 감사)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전례>는 이 모든 은혜를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부자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비유 안의 이 “어리석은 자”(αφρων: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인 부자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마치 자기 손에 있는 것인 양 “여러 해”를 계획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을 통해, 탐욕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이는 재물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와 의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재물에 의탁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것인 양 여겼고 이웃들에게 무관심하고, 마치 자신이 자기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인 양 오만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21)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자신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33) 입니다. 곧 자신이 하느님의 재물이 되고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소유가 되면서 주님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입니다.”(안토니오 더블유). 그러니 자신의 재물보다 자신의 영혼을 관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재물이 무엇인가를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 꽉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주님,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오늘,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자신에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 당신께 부유한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12,15)
민족의 고유명절인 '추석'입니다. 이번 추석은 코로나와 함께하는 추석이다 보니 예전과 같은 만남을 할 수는 없지만, 추석의 정신만큼은 더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추수의 계절이고, 일 년 중 먹을 것이 가장 풍성한 때이고, 그리운 가족과 이웃을 만나 사랑과 정을 나눌 수 있는 가장 행복하고 기쁜 때가 바로 추석이고, 이것이 추석의 정신이라는 의미의 속담입니다.
'늘 오늘만 같아라!'
우리 모두가 함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영과 육이 그렇게 풍성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탐욕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자신 만을 위한 탐욕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일깨워 주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12,20)
나와 우리만이 아닌, 주변에서 영적으로 육적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도 함께 넉넉한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탐욕을 조금만 내려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적으로 어머니가 없는 첫 추석명절이라 마음은 좀 그렇지만, 분명 함께 드리는 미사와 기도 안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믿고, 주변에 계신 또 다른 어머님들을 잘 챙기겠습니다.
우리에게 풍성함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부모님과 조상님들을 기억하면서 그 큰 사랑에 깊이 감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처럼,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살아계실 때 한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더 전화 드리면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자녀들이 됩시다!
마음이 넉넉한 추석!
마음이 기쁘고 행복한 추석!
마음이 건강한 추석명절 보내세요♡
=====================
[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VXFQZjHz-s&feature=youtu.be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하느님 안에
생명이 있고
한가위가 있다.
빠르게 지나가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우리들 삶을
바라본다.
생명을
돌보아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한가위 날이다.
감사와
사랑 사이에
우리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을
함께 기뻐하고
기도하는 날이다.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는
마음의 날이다.
마음은 하느님을
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이란 욕심을
통과하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좋은 것을
빼앗고 죽이는
우리들 아픈
욕심이다.
그리하여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느님
사랑임을 깨닫고
그 사랑을
잊지 않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깊고
깊은 의미를
다시 묻게 되는
시간이다.
생명의 질서는
서로를 위하는
사랑의 질서이다.
사랑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하느님의 간곡한
뜻이다.
사람의 생명은
신비롭게도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 더욱
충만할 수 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닌 하느님께
머물러야 아름다운
사랑과 존중이 된다.
한가위 마음에서
생명의 길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도한다.
생명의 마음
감사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한가위의 미사이다.
무너진 감사를
다시 일으키는
뜻 깊은 올해의
한가위 날이다.
주님, 한가위를 통해
찬미 받으소서.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