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桓檀古記 -36 (유라시아 대제국을 세운 몽골족)
『단군세기』4세 烏斯丘 檀君 條에는 단군이 아우 烏斯達을 蒙古里汗에 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BC2137년의 일이다.
그런데 사마천의『史記』를 보면 東胡라는 部族이 나온다.
동호는 만리장성 너머 몽골과 만주 일대에 거쳐 살던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부른 명칭으로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데,
이 동호에 몽골족도 포함되었을 것.
東胡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
燕나라 장수 진개의 東胡 공격을 기록한『史記』,『염철론』,『삼국지』등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동호는 고조선
전체 또는 그 일부를 가리킨다.
중국 사서들이 조선이라는 정식 국호를 은폐하기 위해 쓴 별칭 중의 하나가 바로 東胡이다.
※염철론鹽鐵論. 중국 전한(前漢)의 선제(宣帝) 때에 환관(桓寬)이 편찬한 책.
무제(武帝)가 제정하여 시행한 소금과 철의 전매, 균수(均輸), 평준(平準) 등의 재정 정책의 존폐에 대하여 선제
때에 여러 식자(識者)가 논의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전한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학예 따위에 관한 좋은 자료이다. 12권.
전국시대에 東胡가 주로 교류한 나라가 燕이었다.
BC300년경 東胡는 연의 장수 秦開를 인질로 잡을 만큼 强大하였다.
동호 역시 흉노처럼 야금술, 궁술, 기마 전투술이 탁월했다.
동호는 漢代에 이르러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패한 뒤 (BC209) 세력이 급격히 弱化되었다.
이 후 동호라는 이름은 사서에서 사라지고 鮮卑, 烏桓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당시 독립된 부족으로서의 세력을 갖추지 못했던 몽골족은 선비족에 포함되어 그 명맥을 잇게 되었다.
선비족은 영웅 檀石槐 사후 拓跋(탁발), 慕容, 柔然, 契丹(거란), 室韋 등의 부족으로 분리되었다.
室韋族에서 징기스칸(1162-1227)이 이끄는 몽골족이 출현했다.
고조선(동호)⟶ 흉노에게 패망⟶ 선비. 오환⟶ 선비족<탁발부족, 모용부족, 유연부족, 거란부족, 실위부족-
징키스칸(몽골족)>
거란(키타이)의 영웅 耶律阿保機(야율아보기)는 10세기 초에 遼(요)나라 건국. 907년에 天祭를 거행하고, 텡그리
카간이라 함. 카간은 천제 대행자인 天子를 가리키는 말.
야울아보기는 몽골 고원을 장악하고 大震(발해)을 멸망시킴.
현재의 北京과 大同(山西省) 일대에 이르는 北中國을 장악하고 宋나라와 대치하였다.
거란은 유목지와 도시복합체라는 독특한 성격을 띠어 예전의 유목국가보다 한 단계 발전된 국가체제를 수립하였다.
거란帝國은 12세기 초에 이르러 女眞族의 金나라에 의해 멸망.
(정확한 표현은 金나라로 승계되었다고 봐야. 金=여진족+거란족 연합 정권)
※秦始皇은 漢族이 아니라 女眞族이었다. 秦부락의 언어는 비교적 강렬한 몽골어적 특징을 보였으며, 진시황은
긴 얼굴의 여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朱學元,『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P.165).
징기스칸(1162-1227, 65세) = 室韋族
징기스칸 등장 전까지는 몽골 초원은 돌궐계, 몽골계, 퉁구스계 등 다양한 집단의 相爭地였다.
징기스칸은 19세에 몽골계 中 몽골 Ulus(국가 또는 백성의 뜻)족 칸으로 선출된 뒤 모든 몽골 부족을 통합하고
1206년에 몽골 집단 전체의 카간(天子)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곧이어 눈을 초원 밖으로 돌려 중앙아시아 일대 정복했다. 그의 子는 1222-1223년에 아조프海 연안에서
러시아 군대와 싸워 이기고 1223년에는 키예프 공국을 공격.
징기스칸이 죽자(1227) 그 후계자들은 정복 범위를 더욱 확장했다.
왕성한 정복사업 결과, 몽골제국은 징기스칸 자손들이 통치하는 여러 개의 分封王國을 거느리게 되었다.
징기스칸 아들들의 나라
①오고타이 汗國 = 天山北路 북쪽 땅으로 셋째 아들 오고타이에게 나누어 줌.
②차가타이 汗國 = 2남 차가타이에게 사마르칸트 일대 땅 분봉.
③킵착 汗國 = 장남 주치에게 이르티시江 서쪽 영지를 분봉했는데 유럽 원정 이후 남러시아 땅을 추가,
킵착 한국이 됨.
④일 汗國 = 칭기스칸 손자 훌라구가 1258년에 바그다드의 칼리프 제국(Abbas왕조)을 멸망시킨 후 이란과
이락 일대에 세운 나라.
5대 카간 쿠빌라이(재위1260-1294) 때 정복사업 절정.
쿠빌라이는 카간이 되기 전에 이미 티벳, 베트남까지 공격.
1259년에 兄 몽케 카간이 병사하자 막내아우와 겨룬 끝에 도읍을 燕京(현北京)으로 옮기고 1271년에 元나라
개국. 1279년 元은 南宋을 멸하고 중국 땅 전체 다스리는 大統一帝國을 형성하였다.
※인도의 티무르帝國(1370-1507)과 무굴帝國 (1526-1875)은 몽골帝國의 후예.
티무르제국 창시자는 몽골의 차가타이 汗國(한국) 宰相이었던 하라사르노안(合刺沙兒諾顔)의 5代 손. 하라사르
노안은 차가타이한국, 일한국을 정복하고 티무르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티무르 왕조가 끝난 후 이슬람 제국인 무굴왕조를 세운 무굴족 지도자 Babur(1482-1530)는 티무르의 5대손
으로 징기스칸의 후손이다.
무굴이란 아랍어로 몽골을 뜻한다.
17세기 중반 샤 자한 황제(바부르 4대손)가 왕비를 기리기 위해 세운 타지마할은 무굴건축의 백미다.
몽골제국은 구성원이 매우 이질적이고 다양하다.
驛站制(역참제)를 효율적으로 시행. 몽골 역참제는 帝國 전역을 연결하는 광대한 교통네트워크.
東으로는 고려와 만주, 西로는 중앙아시아에 거쳐 이란과 러시아, 南으로는 安南(베트남), Burma에 이르는 교통
로 상에 역참을 두었다.
역참에는 운송수단인 말, 수레, 배가 있었고 숙박시설도 갖추었다.
牌符라는 증명서만 있으면 이용 가능. 문서, 서신, 관원과 公的물자 신속이동 가능. 역참제를 기반으로 元은 상업
진흥책 구사. 漢族 왕조인 宋과 달리 상인 우대하고 국제무역 적극지원. 오르톡(상인조합)에 행정 포함시키고
다양한 국가사업 맡김. 통행세 폐지하고 통상로를 안전하게 하는데 신경을 썼기에 동서 간 교류가 활발했다.
몽골족은 타종교에 관용적. 그들은 唯一神인 天神을 숭배. 天神을 텡그리(Tengri)라 했는데, 흉노나 투르크인이
부르는 Tengri와 같은 존재였다.
唯一神을 믿었다고 해서 다른 下位의 神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몽골인은 이러한 신들과 접해서 그 뜻을 알아낼 수 있는 shaman(샤먼 :무당)을 두었다.
대샤먼은 천상에 가까운 者라는 뜻으로 텝텡그리라 불렸다. 샤먼은 북을 치고 주문을 외면서 接神을 하였다.
그러나 몽골족은 샤먼을 무조건 神聖視하지는 않았다.
징기스칸의 경우 대샤먼이 권력을 이용, 자신의 형제들을 이간시키려 한다는 죄로 처형을 시키기도 하였다.
몽골인은 산을 신성시하여 산에 祭를 올렸다. 몽골인은 또 술을 마시기 전에 손가락으로 술을 3번 튕기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고조선의 고수레와 같았다.
돌탑 주위를 3번 돌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믿음도 있었는데, 이 또한 우리의 3수 신앙과 비슷했다.
몽골인은 편협한 신앙을 배척하고 모든 종교를 공평하게 대우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도 존중.
단 어떤 종교를 택하더라도 광신으로 흐르는 것은 철저히 경계. 몽골제국은 각 종교의 지도자에게 면세혜택.
몽골제국의 개방적인 동서교류 정책은 인류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활발한 인적 왕래, 종교 전파,
상품의 확산을 가져다주었다. 이로써 Pax Mongolica가 성립되었다.
1-2세기 지중해 일대 평화........... 로마에 의한 평화..... Pax Romana
13-14세기 유라시아 일대 평화.....몽골에 의한 평화..... Pax Mongilica
이태리 상인 Marco Polo는 몽골제국에 가서 쿠빌라이 칸의 신하로 살다가 귀국, 견문록 남김.
반대로 長春眞人 丘處機(1148-1127)는 山東人으로 징기스칸의 부름을 받고 몽골군 원정 종군...... 西로 갔다.
알타이山 ⟶ 天山 北路 ⟶ 사마르칸트. 南으로는 힌두쿠시 山脈을 넘었다.
장춘진인의 기행문『長春眞人西遊錄』은 13세기 元나라의 동서 교통에 대한 귀중 자료.
몽골이 주도했던 13-14세기의 동서 간 활발한 교류는 인류의 근대를 열어가는 데 크게 기여.
북방민족들(흉노, 선비, 돌궐, 거란, 몽골 등)은 韓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민족 원류의 하나는 알타이, 天山, 몽골 고원을 무대로 역사를 펼친 北方系 민족이었다.
※몽골의 정식 명칭은 몽골국(Монгол Улс, 몽골 울스)이다.
"몽골 울스"에서 "몽골"(Монгол)은 민족 이름을 뜻하고 "울스"(Улс)는 몽골어로 "나라" 또는 "국가"를 뜻한다.
이를 한국어로 직역하면 "몽골 민족의 나라(국가)"라는 뜻이 된다.
몽골은 ‘용감한’이라는 뜻을 가진 부족 이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자 표기로는 몽고(蒙古)라고 표기하는데
'아둔하고 뒤떨어진 사람들'이란 뜻으로 중국 한족이 몽골족을 멸시하기 위하여 만든 이름이다.
한민족의 원류가 북방계 민족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증거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天孫民族의식, 天神
즉 天神上帝를 숭배하는 종교문화, 卵生설화, 가야 유물에서 나타나는 銅鍑(구리솥) 및 馬甲같은 북방 유목민
유물, 고구려 벽화에서 나타나는 기마전사로서의 성격, 그리고 殉葬制와 兄死取嫂制 같은 것이 있다.
桓檀古記 -37
7) 찬란한 청동기 문명을 꽃피운 고조선
강단 史學界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가 (기껏해야) BC1,3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최근 연구결과는 그보다는 1,000년 이상 앞선다.
BC2,500년경에 이미 청동기를 사용한 유적을 발견하였다(遼西 지역 夏家店 下層 文化).
이 문화는 황하 유역의 BC2200년경, 시베리아 지역의 BC1,700년경보다 이른 시기에 시작된 청동기 문화이다.
내몽골 적봉시를 중심으로 발해만 일대, 요녕성의 의무려山 일대까지 뻗어있던 하가점 하층 문화는 山城의 존재
와 출토 유물 등으로 볼 때 황하 유역의 중국 문화와 성격이 다른 별개의 문화였다.
이 지역은 고조선 강역으로 하가점 하층 문화로서 고조선 문명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 유적의 발견은 청동기 문명을 고대 국가의 출현 조건으로 보는 한국의 主流 史學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에서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BC1,300년 이후로 설정하고 BC1,300년이 지나서야 한민족의
고대국가가 탄생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를 근거로 BC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환단고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청동기가 고대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중남미의 경우, 청동기가 없이 석기만으로도 고대국가가 건설되었으며, 고대 이집트 왕조도 청동기 문명에 기초
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다.
후기 Veda시대(BC1,000-BC600)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도의 통일국가도 청동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나타
나고 있다.
청동기문명이 있어야만 국가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강단 사학자들의 주장은 近代實證史學의 일방적 논리이다.
하가점 지역을 포함한 요서, 요동, 만주 및 중국의 하북성, 산동성 일대에서 발견된 고조선의 청동기 중 가장 유명
한 것이 비파형 銅劍(중국에서는 曲刀短劍)이다.
비파형 동검 = 청동+아연의 합금(재질 단단, 강)
※청동과 아연은 비등점이 서로 달라서 두 금속의 합금 제조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중국은 主로 납으로 검을
만들었기 때문에 무디어지기 쉬웠다.
그런데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북부뿐만이 아니라, 충남부여, 전남여천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한반도 전역이 내몽골, 요서, 만주 일대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했고, 고조선의 영역이 요서에서 한반도까지
걸쳐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조선의 수준 높은 청동제련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多鈕細紋鏡(여러 꼭지 잔줄 무늬 거울)이다.
※강단 학자들은 비파형 동검, 다뉴세문경, 고인돌 등을 보고도 고조선을 기술한『환단고기』를 부정하고 있다.
8) 古朝鮮의 巨石 고인돌
고인돌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나타난 돌무덤 형식의 하나.
동북아시아와 서유럽 일대에 많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고조선 영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에 많이 남아 있다.
한반도 경우, 약 40,000기로 추정. 고창(전북)과 같이 100여개 이상 밀집지도 있다.
고인돌 무게는 10톤-300톤. (따라서 이동 등을 생각하면 상당히 조직화된 사회였음을 추정 가능).
고인돌 모양은 음양을 상징. 뚜껑은 양으로 하늘(父) 상징, 1개(天一)이고, 받침돌은 음으로 땅(母) 상징,
2개(地二)로 이루어져 있다.
뚜껑, 받침돌, 피장자(被葬者)는 天,地,人을 상징하여 三才사상을 나타낸다.
고인돌에도 신교의 천지음양과 三神사상이 녹아 있다. 고인돌은 무덤으로 시작되었지만, 제단이나 마을의 상징물
이기도 했다.
제단 고인돌은 주로 독립적으로 나타나는데, 시신을 묻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덤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런 경우
는 상징물이었을 것이다.
고인돌의 출토 범위와 건축 추정시기 또한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환단고기』가 전한 고조선의 실존을 증명
한다. 하지만 국내 강단 사학자들은 한반도 고인돌의 방사능 탄소 연대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보는 그들로서는 고고학적 증거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인돌에서 보듯이, 고조선은 중국과는 뚜렷이 다른 독자적인 喪禮文化를 갖고 있었다.
고조선의 상례문화가 中國보다 더 발달한 것은 공자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공자는 “少連과 大連이라는 상례를 잘 치렀다. 사흘 동안 게으르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으며, 1년 동안
슬퍼하고, 3년 동안 근심하였으니 東夷의 자손이다.”고 했다.
(孔子日... 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懈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禮記』「雜記 下」.
『小學』에도 같은 기록 전함)
(巨石文化의 상징 고조선의 고인돌)
우리나라에는 40,000개 정도의 고인돌이 있다. 전남북지방에 22,000-25,000基가 있다.
고창 운곡리 고인돌 경우, 덮개돌 무게가 297톤, 높이가 4m로 세계에서 가장 크다.
한국엔 고인돌 ....... 독립적인 돌무덤 형태. 탁자식(북방식)
유럽엔 선돌............ 집합적 돌무덤 형태. 탁자식(북방식)
유럽에도 60,000基정도 있다. 선돌이 주를 이룬다. 마치 탁자를 터널처럼 길게 연결시켜 놓은 형태이다.
(돌무덤 성). 그러나 우리나라 고인돌은 독립적인 무덤 형태.
9) 고조선의 경제생활
2세 扶婁단군 때부터 井田制라는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시행하였다. 흔히 중국의 周나라 때 처음 실시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고조선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나중에 중국으로 전파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白圭라는 사람이 “나는 20분의1 세금을 받고자 하는데 어떻겠습니까?”라고 묻자 孟子는
“그대의 방법은 貊의 방법이오”라고 대답했다.
(이때의 맥은 조선을 지칭. 白圭曰: “吾欲二十而取一, 何如.” 孟子曰: “子之道貊道也”.『孟子』「告子下」)
고조선시대엔 벼농사뿐 아니라 밭농사도 지었다. 2012년 6월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사적 제426호)에서 고랑과
두둑이 일정치 않은 초기 농경방식을 띠는 밭이 나왔다.(문화재청 국립문화재 연구소 발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5,000년 전 것으로 추정.
이때는 고조선 전기, 이곳은 馬韓영토. 밭 유적과 함께 BC3,600-BC3,000년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짧은 빗금
무늬 토기의 土器片, 돌화살촉 등도 출토되었음.
이 발굴로 미루어 볼 때 BC3,000년경 한반도에서는 원시적 농경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농사를 짓는 본격적 영농
이 行해지고 있었고 다양한 농작물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000년 전이라면 고조선 이전인 배달시대가 된다.
고조선은 화폐도 주조했다. 4세 烏斯丘단군 때인 BC2,133년에 貝錢이라고 하는 가운데 둥근 구멍이 뚫린 돈을
주조하였다.
이 패전은 후대에 엽전의 기원이 되었다. 고조선은 일찍이 청동기 문명을 열었기에 화폐 주조도 가능했지만 고조
선의 실존을 부정하는 학계에서는 한국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금속화폐를 BC6세기경의 중국 燕나라 화폐인
明刀錢으로 본다.
※文明 = 고대에 대체로 ‘文彩가 있어서 환하다‘(文彩光明)거나 ‘文德으로 다스리다’(文治敎化) 등을 의미.
고대 중국어의 문화와 의미 유사. civilization은 19세기 일본서 번역한 말.
明刀錢의 명칭은 앞면에 있는 銘文의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중국 학계는 상형문자에 나타나는 日과 月의 조합문자로 인식, 明으로 해석한 明刀錢, 燕나라 옛 명칭을 匽(언)
으로 해석한 匽刀錢, 易자로 본 易刀錢 등 다양한 견해를 제기한 바 있다.
최근에는 앞면의 銘文과 이것이 유통된 북방 유목지역의 태양숭배 사상을 결부시켜 明刀라고 불러야 한다는
견해가 새롭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明刀錢은 燕나라 화폐라기보다는 고조선의 화폐로 보아야 마땅하다.
명도전 출토지역이 고조선의 疆土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고대화폐 연구가인 박선미의 ‘명도전 출토 지역 분포도’, 러시아 학자 부찐의 ‘고조선 영역지도’를 비교해 보면,
두 영역이 거의 일치한다.(성삼제,『고조선 사라진 역사』, pp.150-151.)
桓檀古記 -38
10) 고조선의 문화와 풍습
(고조선의 文字)
고대문명 조건 중 하나는 문자 사용이다. 고조선 이전 배달국 때부터 문자 생활을 했다.
『太白逸史』「소도경전본훈」에 “桓雄天皇께서 神誌赫德에게 命하여 鹿圖의 글로써 天符經을 기록하게 하였다.”
라고 한 것을 보면 배달시대에 鹿圖라는 문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는 3세 嘉勒단군이 새 글자를 만들기 전에 眞書라는 상형문자가 있었다.
眞書는 사용하기 불편한 鹿書를 대폭 개량한 것으로 단군왕검 때 새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녹도문자(사슴발자국 모양)로 天符經을 기록(환웅천황이 神誌赫德에게 命) ⟶ 단군왕검 때 眞書(상형문자? 鹿書를
개량한 것?) ⟶ 3세 嘉勒단군 正音 38자(加臨土 탄생)
BC2,181년에 3세 가륵단군은 眞書가 ‘해독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으므로(字難相解) 三郞 乙普勒(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었다.(『단군세기』,『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
이로써 고조선의 새로운 문자 가림토가 탄생.
加臨土 또는 加臨多라 불리는 글자의 모습은 조선 세종 때 만든 訓民正音과 형태가 같거나 흡사하다.
특히 母音 11자는 똑같다. 세종실록 26년 조에 의하면, 세종 때 최만리의 上疎文에도 “글자의 모습은 옛 篆文
(전문)을 모방했지만, 음을 쓰는 것과 글자를 合하는 것은 다 옛것과 반대이다
(字雖形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라 하여 훈민정음이 예전의 전서를 모방했음을 밝혔다.
최근 중국 곳곳에서 尙(殷)나라 甲骨文 이전의 文字로 추정되는 上古金文이 발견되고 있다.
상고금문을 연구한 중국학자 駱賓基(뤄빈지)는 자신의 저서『金文新攷』에서 “上古金文은 한민족의 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문자”라고 밝히고, 그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주체를 동방 조선족이라 단언하였다.”
(김대성,『금문의 비밀』)
동이족이 창안한 상고금문이 은나라의 甲骨文, 周나라의 大篆, 秦나라의 小篆을 거쳐 지금의 漢字로 완성된 것
이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문자가 바로 중국 문자의 원형임을 알 수 있다.
甲骨文字의 원형은 동이족 문자. 甲骨文字는 발해 연안의 동이족 文化圈에서 처음 발생⟶ 서남으로 내려가
商나라 도읍지인 殷墟지역서 전성기 맞음.
(고조선의 禮樂)
祭政일치의 고조선 제사의례에서 사용한 전통악기인 BC2,000년경의 石磬(석경)과 편종이 고조선 강역이었던
요령성 건평현 이도만자 남산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더 오래된 인근 하가점 하층 문화에서도 석경 출토.
한반도 두만강 유역에서 BC2,000년 경 제작된 또 다른 악기 뼈피리 발견.
漢族의 二頭里 문화에서 발굴된 중국의 석경은 BC1,900-BC1,600년 것으로 고조선 강역에서 출토된 것보다
한참 뒤 것.
그런데 고조선의 예악은 배달로부터 전수된 것. BC3,000년경 배달시대의 유적인 홍산(紅山)문화에서 고조선 것
보다 더 오래된 석경이 출토된 사실이 이를 입증.
홍산문화의 祭壇유적에서는 특히 타악기가 주로 나왔다. 五孔琴이라는 玉으로 만든 악기도 발견.
현대인이 流行歌를 즐겨 부르듯이 고조선인은 祭天歌를 즐겨 불렀다. 天祭...(봄엔 大迎節. 음력3월 16일에 강화
도 마리산 참성단에서, 가을 천제는 10월 白頭山에서 삼신상제님께 於阿歌라는 제천가를 불렀다.
어아가는 감탄사 於阿로 시작. 2세 扶婁단군이 지음. 어아가는 삼신과 인류의 조상이신 천상의 大祖神(삼신상제님)
을 맞이하는 노래.
어아가는 고구려시대의 參佺戒經 속에 수렴되었다.
참전계경은 고구려 9세 故國川열제 때 재상 乙巴素가 하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의 인성교육 위해 지은 경전으로
神敎文化의 三大經典(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중 하나.
고조선 시대엔 일반 백성도 악기를 즐겨 다루었다. 箜篌(서양의 하프 비슷 현악기)를 연주하며 부른 公無渡河歌가
널리 퍼졌다. 공후는 BC106년경 중국 漢나라에 전해졌다. 고조선은 한마디로 동방 예악문화의 고향.
(고조선의 服飾文化)
고조선 영역이었던 요령성에서 靑銅器문화가 시작된 때는 BC2,500년경. 중국 황하유역 청동기 문화는 BC2,200
년 경. 청동기 문화는 농기구, 祭器, 武器 등의 제작기술 수준을 높였지만, 직물생산도구의 발전도 초래.
고조선의 양잠기술은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고조선의 강역이었던 평양에서 출토된 BC3,000년경
의 질그릇에서 확인된다.
이 질그릇의 밑바닥에 뽕잎 무늬가 새겨져 있다.
(고조선엔 중국과 다른 토종 누에 품종이 있었다. 야생 메누에를 순화시킨 것.)
고조선의 실크 생산은 고구려로 계승. 비단(錦)은 고구려를 상징. 대중화되었음.
그러나 중국서는 특수 신분만 허용. 西漢 경우, 경제 어려워 비단옷 못 입게 금지령 내릴 정도.
※중국 장사市 湖南省박물관에는 馬王堆漢墓에서 나온 비단그림(帛畵)과 素紗草衣(매미날개옷)가 있다.
紅山文化 유물에 玉簪(옥잠)이 나오는데, 한국의 직조기술이 중국보다 앞섰음을 보여준다.
매미날개처럼 아주 얇은 실크를 중국보다 앞서 생산했고, 실크 종류도 고조선이 더 많았다.
실크로드는해 동방⟶ 서방으로 간 대표적 상품이 중국 비단인데서 생긴 말.
그러나 홍산문화 유물, 고조선 유물,『환단고기』등을 근거로 한다면 실크 로드 역사는 다시 써야 한다.
면직물 생산도 중국보다 앞선다.
우리는 고조선 때부터 棉이 있었지만, (고조선 때 이미 품질이 우수한 백첩포를 생산했다) 중국은 元나라 때부터
있었다. ※고려시대 文益漸이 元에서 몰래 목화씨를 붓 뚜껑에 넣어 가져왔다는 것은 각색된 얘기에 불과.
고조선 사람들은 삼베와 모직도 생산하였다.
함남 북청 토성리 고조선 유적에서 삼베 조각 출토. 길림성 星星哨(초) 유적에서 양털실과 개털실을 섞어서 짠
모직물 출토. 고조선 후기 유적인 吉林省 猴石山(후석산) 유적에서는 방직기로 짠 마포가 출토되었다.
또 “부여인들은 흰색 옷을 숭상, 흰 베로 만든 큰 소매가 달린 도포와 바지, 가죽신 신었다.”(在國衣裳白布大袂
(소매 몌), 袍(솜옷 포), 蔥(겉옷), 履革鞜(가죽신 탑).『삼국지』「위서동이전」)
복식문화에서도 白色의 天地光明 사상을 중시한 한민족의 도가적 神敎文化를 느낄 수가 있다.
※전 세계에서 출토된 금관은 10여 점인데, 그중 8점이 한국에서 출토되었다. 중국에서는 遼(거란)이전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이 문제 하나만 갖고도 동북공정의 허구성을 입증할 수 있다.
고대 한민족은 머리를 틀어 올렸다. 머리카락을 상투처럼 올리고 비녀 꽂아 고정시키는 물건을 玉箍(옥고)라
했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옥고가 발굴되었다.
이 옥고⟶ 한국의 금관으로 (옥고 = 한국 금관의 기본 양식, 출발점) 한국에서 금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때. 한국은 금관의 宗主國(죽은 시체를 금으로 덮고 머리엔 금관)
홍산문화에서의 玉문화는 고조선으로 이어졌다.
※내 몽골(용감하다는 뜻. 그러나 중국은 아둔하다는 뜻의 蒙古라고 표기...왜곡) 홍산을 포함, 만주 한반도가
같은 문화권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수천 년, 수만 년 후 한 유물을 놓고 사람들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편다.
여기저기서 같은 흔적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한 지역에서만 나타난 (아니 다른 데를 찾지 못해서 일수도 있는데)
흔적일 수도 있는데 그것들(유적) 에 대한 해석이 역사적 정의가 된다.
때로는 의도적이거나 객관을 빙자한 주관인데도 객관적 사실로 정립된다. 따라서 학자, 연구자는 늘 객관성,
윤리성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고조선의 음식과 주거문화)
평양시 남경 유적에서 5,000년경의 炭化米가 한 구덩이 안에서 大量 발견되었다.
이 벼는 현재 우리가 먹는 쌀과 같은 短粒種이고 야생벼가 아니라 재배종.
이는 고조선 이전부터 한반도에 벼농사가 정착되었다는 의미. 온돌(한민족 고유의 난방시설)도 고조선 후기 유적
에서 발견된다. (함북 웅기. 평북 강계, 자성, 영변들의 유적지에서 구들 형태 확인.)
11) 고조선의 종말 三韓管境制의 와해.
22세 색불루단군은 제2고조선 왕조였다. 정권을 탈취한 색불루는 송화강 아사달(하얼빈. 소밀랑)에서 白岳山
아사달(吉林省 長春)로 천도, 고조선의 제2왕조 시대 열고 국정쇄신 위해 삼한(辰韓, 番韓, 馬韓)을 삼조선(眞조선,
番조선, 莫조선)으로 바꾸었다.
삼조선 체제에서도 삼한체제와 마찬가지로 眞조선이 병권을 가졌지만 이미 예전의 三韓管境制가 아니었다.
索弗婁단군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八條禁法을 시행. 8조금법은 三聖祖시대(환국, 배달국, 고조선) 최초의 成文法.
당시 고조선은 神敎文化의 聖所인 소도(蘇塗)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약해지고 빈부격차와 계급 分化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43세 勿理단군 때에 이르러 삼한관경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냥꾼 于和沖(우화충)의 역모 때문. 우화충이 무력을 이끌고 도성 공격. 단군은 피난길에 붕어.
이때 반란군 평정위해 백민성(白民城) 욕살(褥薩.지방장관) 丘勿(구물)이 장당경(요령성 개원)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 평정. 44세 단군으로 즉위. 고조선의 제3왕조시대 열게 됨.
桓檀古記 -39 (부여 뜻)
구물단군은 국력회복을 위해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었다.
우리말에서 부여는 ‘아침에 어둠이 걷히면서 먼동이 뿌옇게 밝아오는 것’을 뜻한다.
『揆園史話』(조선 숙종 원년 1675년 北崖子가 씀)「檀君紀」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넷째 아들 부여를 서쪽 땅에
봉해 그곳을 부여라고 불렀던 사실이 있다.
제3왕조를 연 구물단군이 초대 단군시절의 부여를 생각, 국호를 정한 것은 고조선 초기의 국력을 다시 회복하겠
다는 중흥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44세 구물단군은 九誓之盟(9가지 맹세)을 정해 백성의 화합과 교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대부여는 예전의 辰韓 또는 眞조선과 같은 막강한 통치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副檀君이 다스리는 番조선과 莫조선도 병권을 가지게 되어 중앙의 쇠약해진 진조선과 대등한 관계가 되었기 때문
이다. 이로써 약 2,000년 동안 고조선을 지탱하던 삼한관경제는 와해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45세 余婁(여루)단군 이후 고조선과 국경을 접한 燕나라의 침입이 잦고, 46세 普乙(보을)단군 때에는 번조선 67
세王 解仁이 燕나라 자객에 의해 시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보을단군 보위찬탈 내란까지 발생.
장군 高列加가 내란을 진압하고 단군에 취임. 그는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이 되었으나 입산수도 신선이 되었으므로
고조선은 2,096년 만에 마감을 한 셈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멸망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 歷史 2,096년은 고조선의 中心 세력인 만주에 있던 辰韓(眞조선)의 歷史라는 것이다.
고열가단군은 퇴위했지만, 고조선 전체가 문을 닫은 것은 아니다.
서쪽의 番조선은 그 후 40여 년(BC238-BC194) 존속하다가 위만(衛滿. 番조선으로 망명)에게 찬탈 당했다.
三神文化에 바탕을 둔 고조선의 국가 경영체제를 모르면 고조선 망국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고조선의 亡國과정)
고조선은 神敎의 三神사상(天地人)에 바탕을 둔 三韓管境制였으나 삼한관경제가 해체되면서 망국의 길을 걸었다.
국력약화 ⟶ 三神신앙 쇠퇴⟶ 지배층 분열(내부) ⟶ 외침(燕나라 잦은 침입) ⟶ 연속 흉년
제1왕조 ⟶ 제2왕조
21세 소태(蘇台)단군 말엽에 殷나라 정벌에 공을 세운 개사원 욕살 고등과 해성 욕살 서우여 사이에 권력투쟁
발생. 고등의 손자 색불루가 군대를 거느리고 백악산 아사달(길림성 장춘)에서 스스로 보위에 오름.
소태는 색불루에게 옥쇄를 넘겨주었다. 22세 색불루단군.
제2왕조 ⟶ 제3왕조
43세 勿理단군 때 사냥꾼 우화충 역모. 피난 가던 물리단군 붕어. 백민성 욕살이 반란군 토벌, 44세 단군으로 즉위.
朝鮮⟶ 大夫餘⟶ 北夫餘
44세 구물단군은 국정쇄신 위해 국호를 조선⟶ 大夫餘로. 장당경 아사달(현 요령성 개원)로 천도.
삼조선 체제 유지했으나 병권이 세 조선에 주어짐.
삼한관경제 붕괴. 眞조선은 大檀君 명맥만 유지. 45세 余婁단군 이래 燕나라의 침략이 끊이지 않음.
46세 普乙단군 때 番조선 王 解仁이 燕나라 자객에 시해 당하자 재위 탐하는 내란 발생.
내란 진압한 高列加 장군이 47세 단군에 즉위. 고열가 단군 말엽에 정국 혼란.
국가 경영철학인 삼한관경제 무너지고 장수들 용호상박.
고열가, 단군직 버리고 산속으로. 오가(五加.五部族)가 6년 동안 共和政(과도기) ⟶ 해모수(解慕漱)가 군사 일으
키고 北夫餘라 하고 고조선을 계승(BC232) ⟶ 진조선은 亡했으나 이후 번조선은 40여년을 더 유지하다가 위만
에게 찬탈 당함(BC 194).
황해도 구월산엔 동방 한민족의 國祖이신 桓因, 桓雄, 檀君王儉 三聖祖를 모신 三聖祠가 있다.
三聖殿 내부엔 환인, 환웅, 왕검이 모셔져 있다.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엔 舊(구)단군릉이 있었는데『숙종실록』,『영조실록』,『정조실록』, 허목의 『東事』,
유형원의『輿誌地』등에 기록이 있다.『단군세기』에 따르면, 이 陵(舊陵)은 5세 丘乙단군 능으로 추정됨.
구 단군 능은 1936년 강동 유지들에 의해 보수된 능.
1993년 발굴, 1994년 改建하여 거창한 북한 단군 능이 되었다.
4. 韓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北夫餘
1)북부여의 건국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副檀君과 지방 軍將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엽에 解慕漱(고조선 제후국인
藁離國 출신)가 北夫餘 건국(BC239, 桓紀6959년, 神市개천 3,659년).
(북부여라는 이름)
고조선 제3왕조 시대인 대부여의 강역 중 북녘 땅(만주)을 중심으로 나라를 열었기에 大자를 北자로 바꾸어 북부
여라 했다. 이는 亡해 가던 대부여(고조선)의 정통을 계승, 한민족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해모수 단군의 의지를
반영한 것.
고조선 개국 이래로 서방 진출의 교두보이자 외부침략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던 藩(또는 番)조선 땅은 이 무렵
戰國시대의 혼란을 피해 越境하던 漢족 난민들로 넘쳤다.
그 난민 中에 衛滿이 있었다. 그는 부하 1,000명과 함께 藩조선 準王에게 투항(BC195년).
준왕은 그를 서쪽 변방인 上下雲障 수비 장수로 임명. 상하운장은 지금 난하 서쪽의 국경 요새.
난하는 만리장성 동쪽 끝인 山海關 근처를 흐르는 강. 이곳에 한족이 많이 살았다. 그 수장으로 위만을 임명한 것.
그런데 위만은 그곳(상하운장)에서 세력을 키워 이듬해 王儉城(지금의 하북성 창려현 지역) 공격, 한순간에 준왕
을 내쫓고 스스로 王이 됨(BC194)....... 衛滿조선(위만정권 BC194-BC86, 108년 간)
『三國遺事』와 현 사학계에서는 위만이 藩조선을 탈취하여 세운 정권을 위만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또 다른 조선이라는 뜻.
하지만 위만 조선은 고조선의 서쪽 영토인 藩조선을 강탈, 지배한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안정복,『順菴集』「東史問答」
번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은 나라를 위만에게 빼앗기고 황해를 건너 지금 금강 하구 지역으로 피신.
群山 또는 益山 설이 있다. 금강 河口에 있는 御來山이라는 이름은 준왕의 渡來사건에서 유래.
전북익산의 미륵산에는 준왕(기준)이 쌓은 성이라 불리는 箕準城의 성벽 흔적이 있다.
한편 遼西 지역에 살던 대부호 최승이 백성과 함께 진귀한 보물을 싣고 발해를 건너 莫조선으로 넘어와 왕검성
(지금의 평양)지역에 낙랑국을 세웠다.(BC155)
북부여가 세워진 후 만주의 眞조선은 북부여에 흡수되고, 한반도 莫조선에는 낙랑군이 들어섰으며 요서와
藩조선은 망명객 위만이 차지하였다. 이로써 고조선의 三朝鮮 시대는 완전히 門을 닫게 되었다.
2) 북쪽엔 북부여, 남쪽엔 南三韓
번조선 땅이 위만에게 강탈당하자 상장군 卓이 조선백성을 이끌고 한강 이남으로 이주, 馬韓을 세웠다.(BC194).
상장군 탁은 북삼한 시대 莫조선의 월지국 출신이다.
번조선에서 벼슬하다가 번조선이 위만에게 침탈당하자 유민들과 함께 고향 월지국(지금의 익산)으로 돌아가
소규모의 馬韓을 세운 것. 이 馬韓과 辰韓, 弁韓을 南三韓 또는 中三韓이라고 부른다.
옛 眞조선과 莫조선의 백성 일부도 한강 아래로 남하, 진한과 변한을 세웠다.
馬韓은 전북 益山을
辰韓은 경북 慶州를
변한은 경남 金海를 中心으로 형성되었다.
중국에서 眞韓이 교체되고 요서지역에 衛滿정권이 수립되자 옛 三韓백성이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三韓을 이룸으로써 南三韓시대를 연 것.
丹齋 申采浩는 이 사태를 두고 前後 三韓說을 주장, 한반도의 삼한을 後三韓(南三韓)이라 부르면서, 고조선 시대의
前三韓(北三韓)과 구별했다. 이 南三韓이 강단 사학계가 (우리 상고사를 거론할 때) 주장하는 三韓이다.
고조선의 文化와 역사를 읽는 핵심 code인 三韓管境制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두 三韓을 구별할 수 있겠
는가? 만주대륙의 북삼한은 부정되고, 한반도의 남삼한만 거론함으로써, 우리 역사는 小韓史觀에 갇혀버렸다.
작은 三韓의 시야로 역사를 보는 것이 小韓史觀이다.
그러나 韓民族史는 대륙을 누비던 큰 三韓의 관점, 즉 大韓史觀으로 봐야 한민족사 본연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北삼한 시절엔 眞韓이 삼한의 中心國이었고
南삼한 시절엔 馬韓이 삼한의 中心國이었다.
(馬韓의 卓 임금이 辰王 노릇을 했다. 辰王이란 辰韓의 왕 또는 辰國의 왕을 의미한다. 결국 辰王이란 大檀君 또는
檀君天皇의 다른 말.)
3) 북부여의 구국 영웅 高豆莫汗
북부여는 4세 단군(高于婁)에 이르러 역사적인 큰 전환점을 맞는다.
BC109년 흉노의 무릎을 꿇린 漢武帝는 水陸 兩軍을 동원, 右渠(우거. 위만의 손자)가 다스리던 藩조선을 침공
했다. 그러나 패배. 한나라 군대는 그 후 잇단 공격을 했지만 번조선의 굳센 수비에 좌절.
그러나 오랜 전쟁에 지친 번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생겼고, 漢의 이간책으로 藩조선 尼谿相(니계상) 參(삼)이
우거를 살해하였다.
漢나라는 우여곡절 끝에 王儉城을 함락시켰지만(BC108), 결코 한나라가 승리한 싸움은 아니었다.
전쟁 후 논공행상에서 좌장군 순체(順彘)는 棄屍刑(사람 많은 곳에서 목 베고 시신을 길거리에 버리는 刑)을,
누선장군(樓船將軍)은 형을 면하고 평민으로 살았다.
漢이 사실상 패한 전쟁이라 해서 전쟁 참여 장군들 모두 포상 대신에 처벌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漢무제는 右渠王을 죽여 위만정권을 무너뜨린데 一助한 고조선의 신하들을 山東지역의 제후로 봉하고
우대하였다.
이때 니계상 삼은 홰청(澅淸)지역의 제후로, 고조선의 재상 韓陰은 추서(萩서)의 제후로, 장군 王唊(왕겹)은 平州
의 제후로, 죽은 우거의 子 長降은 幾(기) 지역 제후로, 最(고조선의 재상 路人의 아들)는 죽은 父를 대신, 溫陽의
제후로 봉해졌다. (『史記』「조선열전」)
한나라 장수는 모두 처벌을 받았는데, 적국 고조선의 신하들은 모두 제후가 되었다는 것은 漢나라가 패했다는
것이 分明하다.
한나라의 패전은 漢무제가 고조선을 평정하고 四郡을 설치했다는 『史記』「조선열전」의 기록이 결코 진실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다.
전쟁에 패한 漢나라가 어떻게 번조선, 즉 고조선의 요동과 요서 땅을 지배할 수 있었으며, 그곳에 식민지를 설치
할 수 있었겠는가.
실속 없는 전쟁이지만 위만정권을 무너뜨린 漢무제는 내친 김에 (BC108년에)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
북부여의 4세 高于婁 단군은 심성이 나약,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했다.
이를 지켜보던 高豆莫汗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漢을 물리쳤다.
이때 卒本(졸본)에서 나라를 열어(BC 108) 卒本夫餘라 하고 스스로 東明王이 되었다.
高豆莫汗은 고조선 47세 高列加 단군의 직계 후손. 東明王의 칭호는 동방의 광명(明)을 부활시킨다는 의미.
졸본부여를 東明夫餘라고도 함.
※북부여 歷史의 전모를 모르는 현 역사학계는 고구려의 시조 高朱蒙을 東明王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다.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가 자칫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한민족 상고시대 최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東明王은
구국 영웅으로 추앙을 받아 북부여의 5세 고두막 단군으로 즉위했다(BC96).
東明王 고두막과 관련된 내용은 한민족사의 國統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핵심인데도 지금의 (국사)교과서에서
는 이 내용이 잘못되어 있다.
동명왕 고두막한은 우리 上古史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人物이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고려 때 范樟이 저술한
『北夫餘記』를 제외한 다른 歷史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北夫餘記』의 고두막 단군 조에는 高豆莫의 다른 이름을 豆莫婁라 했다.
6세기 중반 北魏 역사서인『魏書』에 두막루 國을 '옛날의 북부여‘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두막루國의
국명을 고두막의 다른 이름인 두막루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豆莫婁國 在勿吉國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夫餘也.『魏書』「列傳」제88 두막루傳)
고두막 단군의 등장으로 전기 북부여 시대가 끝나고 새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북부여는 고두막 단군의 아들 6세
高無胥 단군에 이르러 182년간의 짧은 역사를 끝내고 高句麗로 계승된다.
그리고 이 고두막 단군 때 北夫餘에서 東夫餘가 갈라져 나왔다. 이것이 동부여의 탄생과정이다.
(『三國史記』,『三國遺事』에도 동부여의 이런 건국과정이 소개되어 있지만『북부여기』와 달리 高豆莫汗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동부여는 고두막한에게 권력을 빼앗긴 解夫婁(고우루단군의 아우)가 차릉 지역에 세운 부여국이다.
고우루가 죽자 동생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고두막에게 쫓기어 迦葉原(가섭원)에 나라를 열었다.
해부루는 제후로 강등되어 국상 阿蘭弗(아란불)의 주청으로 가섭원(지금의 흑룡강성 통하현)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
그래서 東夫餘를 迦葉原夫餘라고도 한다.
동부여는 2세 金蛙(금와)를 거쳐 3세 帶素王 때 고구려 大武神王(고구려 3대왕)에 의해 멸망하여 갈사부여(曷思
夫餘)와 연나부부여(椽那部夫餘. 西夫餘)로 나뉘었다.
갈사부여는 帶素王 아우가 曷思水(지금의 두만강 유역)에 세운 夫餘. 연나부부여는 帶素王의 從弟가 연나부(지금
의 요령성 개원)에 세운 부여로 모국인 동부여의 서쪽에 있었다 해서 西夫餘라고도 한다.
북부여가 고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 맥을 바로 잡는 핵심요체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강단 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의 각본대로 위만정권을 고조선의 계승자로 앉혔을 뿐만 아니라
(BC194) 위만정권이 漢나라에게 망한(BC108) 후 고조선이 있던 그 자리(한반도 북부)에 漢나라가 4개의 郡(漢四
郡)을 설치하였다고 가르친다.
고조선을 승계한 북부여는 온 데 간 데 없고, 中國의 식민지인 衛滿朝鮮과 漢四郡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강단 사학자들은 또 中國史書와『三國史記』,『三國遺事』를 근거로 북부여 시조 解慕漱를 고구려 시조인
高朱蒙의 아버지로 단정했다.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고 하여 해모수와 주몽을 거의 동시대 인물로 만들
었다. 실은 해모수의 4세 손인데도 혈통까지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180여년에 걸친 북부여 6대 단군의 歷史는 완전히 증발해버렸다.
그렇다면 왜 북부여사가 이렇게 난도질을 당했을까?
그것은『史記』를 쓸 때 漢무제가 東明王 高豆莫汗에게 대패한 치욕을 숨기고자 의도적으로 北夫餘史를 누락
시킨데 따른 것이다.
그 후 중국의 대부분 사서에서 북부여 역사가 사라졌다.
그리고 고려, 조선의 사대주의 사가들이 이를 그대로 모방하였고, 일제 식민사학자와 국내 주류 강단사학자들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했다.
고조선의 건국 사실만 있고 실제의 역사 과정이 전혀 없듯이, 북부여도 解慕漱의 건국 사건만 기록되고 구체적인
역사내용이 없다. 이는 歷史 抹殺과 관련된 것이다.
4) 서방으로 진출한 부여족
주류 강단 사학계에서는 부여 역사를 외면하지만 丹齋 申采浩가 韓國民族을 夫餘族이라 부를 정도로 부여사는
한민족사의 골간을 이룬다.
愼鏞廈(신용하)는 부여가 최소한 BC5세기부터 AD5세기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만주일대에 존재하였고 4세기
전반까지 동북아의 최선진국이었다고 말한다.
5세기는『환단고기』가 전하는, 북부여에서 분파된 마지막 부여인 연나부부여(椽那部夫餘. 西夫餘)가 멸망한
때와 일치.
신용하에 따르면, 4세기 말경 부여족의 일파가 中央 Asia의 카스피에海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casus)
지방으로 이주했고, 그 후 5세기-7세기 초까지 돈江 유역과 北캅카스 지방으로 이주했다.
서양사에서 7세기부터 Bulghar 족의 역사가 나오는데, 이 불가族이 곧 부여족이다.
불가란 부여(불)의 加(족속. 식구)라는 뜻이다.
635년 불가족은 족장 Kubrat 지도력 아래 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
하지만 몇 년 후 Kubrat가 사망하고(642년) 그의 다섯 아들은 극렬한 권력싸움으로 불가리아를 해체시켰다.
그 중 세 아들이 이끈 불가족은 결국 주변 민족에게 복속하고, 둘째와 셋째 아들은 독립국가를 세웠다.
둘째 아들 Kotrag이 세운 나라 고추불가(Kotchou-Bulghar)는 14세기까지 번성했는데, 현재는 타타르 自治
공화국(1920년에 Soviet연방의 자치공화국이 됨)으로 존재.
타타르인의 언어구조는 한국어와 同一하고 생김새도 東洋人과 같다.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오늘날의 발칸반도로 南下했다.
당시 Byzantine제국의 로마군 장교 기록에 의하면, 불가족은 로마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向해 조상신
단군(Tangun)에게 (桓=하늘의 광명, 檀= 땅의 광명, 韓=인간의 광명)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을 행했다.
이 불가족은 로마군을 물리치고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을 건국했으며, 불가족은 귀족계층이 되어 Boyar
(보야. 부여와 유사발음으로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 불렀고, 슬라브족(Slav)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황제 Krum에 이르러 주변의 로마군을 대부분 추방하고, 수도를 옮겨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Sophia)라고 불리
었다. 황제는 소비의 山에 올라 단군에게 제사를 올리고, 그 山 이름을 Balkan으로 定했다.
신용하는 발칸山을 밝안산, 밝산, 白山 등 우리말 地名과 同一한 것으로 보며, 한민족은 고대로부터 백산(밝은 산)
에 올라 제천의식을 행하였다고 말한다.
지금도 Krum황제의 제천유적이 일부 남아 있다는 이 발칸산에서 발칸반도라는 名이 유래.
Krum 황제 변사(814)후, 불가리아는 국력 쇠퇴. 12세기에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을 세웠지만 그 지배층
은 제1제국 때와 달리 소수 불가족과 다수의 Slav족 간의 혼혈로 얼굴 모습이 Slav족의 생김새를 많이 닮게 됨.
하지만 발칸산, 발칸반도, 소비 등의 地名 속에 부여의 자취가 남아있고, 불가리아 말의 文法구조와 풍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에서도 한민족의 체취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또 불가리아 사람은 서양에서 유일하게 갓난아이의 엉덩이에 斑點(몽고반점)이 있다.
불가리아인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라는 신용하교수의 주장처럼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은 바로 부여족
임을 알 수 있다.
5) 日本에 진출한 부여족
부여족은 일본열도에도 진출했다. 그래서 초기 일본 왕실은 부여계에서 나왔다.
일찍이 기다 사다기찌(喜田貞吉.1871-1939, 78세)는 일본 왕실의 조상이 부여, 백제계라고 밝힌 바 있다.
1921년에 기다 사다기찌는 “부여는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4세기에 日本列島로
건너와 나라를 세웠다. 적어도 한국의 三國과 일본의 건국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고문헌을 연구, 유물, 언어, 신화, 풍습 등 多方面에서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가 매우 비슷하다고 주장.
기다 사다기찌는 日本의 騎馬民族說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다.
기다 사다기찌의 주장은 일제 강점기 日鮮同祖論의 이론적 근거가 된 바 있다.
그는 일본의 남조선 경영설을 뒷받침하고 일제의 조선 강점을 합리화했던 것이다.
이 같은 기마민족설을 최종적으로 완성한 사람은 동경대학교수를 역임했던 에가미나미오(江上波夫(1906-2002)
이다. 그는 東北 부여계의 기마민족이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열도로 들어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야마또
(大和) 지방에 야마또 조정을 세웠다는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을 주장했다.
그것은 대륙의 기마민족이 일본을 정복했다는 ‘기마민족 일본정복론’인 셈이다.
에가미는 일본민족의 형성과 일본국가의 성립을 구별하고 있다.
민족형성은 야요이(彌生)시대의 농경민족으로 소급하지만, 통일국가인 야마토(大和)조정은 4세기-5세기에 松花江
유역의 평원에 있던 부여계 기마민족이 韓반도의 남부를 거쳐 일본열도에 와서 세운 王朝라는 것.
기마민족 중 남하한 一部가 고구려와 백제를 세웠고, 일부는 가야를 지배한 후 4세기 초에 對馬⟶ 壹岐(잇끼)섬을
경유, 九州 북부를 정복하여 倭韓連合 王國을 형성했다는 것.
더욱이 그 세력은 5세기 초 무렵에 畿內의 大阪(오오사까)평야에 진출, 거대고분을 조성하고 야마토 조정을 세웠
다는 것.
한반도에서 건너간 부여, 백제, 가야인들이 일본 고대국가를 건설했다는 설은 이제 일본학계의 정설이 되고 있다.
부여인 풍속(『삼국지』「魏書 東夷傳」)
음력 12월(殷正月)에 迎鼓라는 천제를 지낼 때 온 국민이 매일 모여 술 마시고 춤을 추었다. 흰색 옷 숭상, 가죽 옷
즐겨 입고, 외국 갈 때는 비단에 수놓은 옷, 가죽 신, 금은 장식 모자를 착용했으며 형벌이 엄격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日本은 부여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건너 간 한민족이 세운 나라이다.
6) 夫餘史를 찾는 날이 곧 역사 광복의 날
『後漢書』,『三國志』등 中國 歷史書에 나오는 부여사는 모두 西부여 역사이다. 서부여는 북부여(4세 단군
烏斯丘 이후)에서 갈려나간 東부여가 망한 후 요서에 자리한 亡命 夫餘이다. 西부여사는 부여의 끝자락 역사이다.
주류 강단 사학계 책에서는 서부여를 부여 모습의 전부로 그리고 있다.
우리의 고유 史書를 불신하고 부여에 대한 단편적이고 왜곡된 정보를 담고 있는 中國史書를 신뢰한 결과이다.
이로 말미암아 부여사의 원형이 파괴되고, 나아가 9,000년 한국사의 허리가 잘려 국통 맥이 단절되고 말았다.
桓檀古記 -40
5.列國시대 이후 대한민국 수립까지
1)북부여 계승한 고구려
북부여는 고조선을 계승했으나 고조선의 전 영역을 흡수하지는 못했다.
列國分裂(여러 나라가 갈갈이 찢기는 것)시대가 되었다. 북부여→동부여→서부여→낙랑국→南삼한→옥저→동예
등 여러 나라로 나뉘었다. 南三韓은 78개의 小國家가 연합, 연맹체로 발전했다.
辰韓에는 12개, 馬韓에는 54개, 弁韓에는 12개 소국이 있었다. 단군12세 阿漢단군 條에 보이는 西沃沮(서옥저)를
비롯, 고조선에는 4옥저가 있었다.
북부여의 國統은 高朱蒙이 세운 고구려로 계승되었다. 夫餘語로 朱蒙이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주몽은 북부여 시조 解慕漱(해모수)의 4세손으로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의 손자인 불리지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구려의 등장은 북부여 이래 列國시대의 혼란상을 극복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고구려 3세 大武神 열제는 東夫餘 3세왕 帶素를 물리쳐서(AD22) 동부여를 고구려에 귀속시키고, 이어서 崔崇이
세웠던 낙랑국을 병합했다(AD37).
대무신 열제의 아들 호동왕자가 낙랑국의 공주로 하여금 自鳴鼓를 찢어 버리게 한 사랑얘기도 이때 일어난 것이다.
동부여 대소의 아우와 그 流民이 세운 曷思부여(21-68), 대소의 從弟가 세운 椽那部夫餘(西부여)도 결국 고구려
에 항복하거나 편입되었다.
우리가 배운 고구려 역사(BC37-AD668)는 700년이 좀 넘는다.
그런데 中國史書『新唐書』를 보면 “고구려는 900년을 넘지 못하고 80먹은 장수에게 망한다.”고 하였다는 기록
이 나온다. 唐에 유학한 崔致遠도 ‘900년 설’에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해서 고구려 歷年이 900년이 될까?
‘고주몽이 해모수를 태조로 하여 제사를 모셨다’는『三聖記』上의 기록에 그 결정적인 해답이 있다.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때(BC239)로부터 환산하면 고구려는 900년이 좀 넘는다.
고구려는 북부여의 연장선상에 있는 나라로, 북부여를 원고구려라 할 수 있다.
고구려가 亡하고 大仲象이 세운 大震도 처음에는 국호를 後高句麗라 했다.
원고구려-고구려-후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는 우리의 국통 맥을 잇는 결정적 요소 중 하나이다.
한반도 북쪽에서 위와 같은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南三韓에 형성되었던 소국가 연맹체는 백제, 신라, 가야로
계승되었다.
高朱蒙과 소서노((召西奴. 기원전 66년-기원전 6년)는 비류를 시조로 하는 백제 건국 설화에서 나오는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이자 고구려 동명성왕 추모왕의 두 번째 부인.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이라는 설과 졸본부여 사람인 연타발의 딸이라는 설, 비류국 왕인 송양의 딸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비류국 왕 송양의 딸은 추모왕의 아들인 유리왕의 부인이 되었으므로 소서노는
송양의 딸이 아니다.)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 중 溫祚가 馬韓 땅에 백제를 세우고 (BC18) 馬韓의 小國家를 모두
통합하였다.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서 난 두 아들 비류와 온조)
溫祚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지금의 난하(고대의 요수. 갈석산을 끼고 돌며 고조선과 漢의 국경선) 부근인 패대
지역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馬韓으로 와 한강유역의 백리 땅을 할애 받아 백제를 건국하였다.
백가의 무리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한반도로 왔기에 백제라 했다.
辰韓은 신라로 발전. 高豆莫汗의 딸이 낳은 박혁거세가 진한 땅에 斯盧國을 세워 점차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한
결과였다.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의 후손이 일군 역사다.
2)고구려를 이은 大震(渤海) - 대진 건국
백제는 신라에 병합(660년)되었고 고구려는 羅唐연합군에게 망한(668) 뒤 遺將 大仲象과 그의 아들 大祚榮이
세운 大震(渤海)으로 이어졌다.
고구려가 망할 때 대중상이 동쪽으로 東牟山에 이르러 城을 쌓고 새 나라를 열어 ‘고구려를 회복하여 부흥한다’는
뜻에서 나라를 後高句麗라 했다. 대중상이 죽고 난 뒤 그의 아들 대조영이 唐軍을 격파하고 6,000리 강역을 개척,
고구려의 옛 땅을 상당히 회복하고 국호를 大震으로 다시 선포하였다.
震은 東方을 뜻하는 것으로, 大震은 동방광명의 큰 나라, 또는 위대한 동방의 나라를 의미했다.
한국 사람의 입에 익숙한 渤海라는 국호는 唐나라가 붙인 이름이다.
大震의 對唐抗爭에 시달리던 唐나라는 8세기 초에 大震을 반란의 무리가 아니라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하지만 대조영이 선포한 국호 대진을 쓰지 않고 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발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713년 唐나라가 대조영을 左驍衛大將軍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에 책봉한 것이 그
시초이다. 마치 唐이 한민족의 宗主國인냥 대진의 황제를 발해란 지역의 제후로 봉한 것이다.
이처럼 唐은 대조영을 발해의 제후로 격하시키고 그 나라를 발해라 불렀던 것이다.
光明의 나라를 뜻하는 大震이란 이름을 회피하고, 이렇게 人口膾炙(회자)의 바다인 발해를 국호로 부르는 것은
中國의 전통적인 惡習이다. 고조선도 조선이 아니라 肅愼(숙신), 濊貊(예맥), 山戎(산융) 등으로 폄하하여 불렀다.
3세 무황제(대무예) 때에는 개마, 구다, 흑수 등 여러 나라가 신하라 칭하고 조공을 바쳤다.
1세는 대중상-辰國烈皇帝, 2세는 대조영 聖武高皇帝라는 연호를 썼다.
대장군 장문휴를 파견, 산동성에 있던 등주와 내주를 공격, 점령을 하자 唐과 그 동맹국 新羅가 침략했다.
그러나 대진은 그 침략을 물리치고 海東盛國이라 불릴 정도로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이때 唐, 신라, 바다 건너 倭까지 대진에 사신 보내 조공을 바쳤다.
대진은 결코 唐나라의 예속 지방정권이 아니었다. 한민족의 국통을 계승하고 天子國의 위상을 떨친 당당한 독립국
이었다. 11세 선황제 때는 세력이 절정에 달해, 南으로는 신라와 접한 경기도 일대까지,
北으로는 大興安嶺산맥과 흑룡강까지, 西로는 요하, 東으로는 연해주 일대까지 차지하여 그 크기가 9,000리에
이르렀다.
대진은 강역을 다스리기 위해 5개의 수도(5京)와 60州, 1郡, 38縣현을 설치하였다.
(『태백일사』「대진국본기」) 5京制는 神敎의 三神五帝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大震의 멸망)
발해인들은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예(後裔)라고 생각했다. 대진 무황제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대진을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부여 전통을 계승한 나라”(『속일본기』)라고 했다.
일본인도 발해에 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곳에 “발해는 옛 고구려국”이라고 기록했다.
후대의 기록서도 日人들은 한민족의 국통이 高句麗⟶大震(渤海)⟶高麗로 이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대진은 또 황제국이었다. 그런데 동북아 강대국 대진의 멸망은 하나의 역사적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나 표면적으로는 거란족의 공격으로 망한 것이 분명하다.
기록에 의하면, 거란은 926년 대진을 공격, 거의 싸우지도 않고 이겼다고 한다. “거란 태조가 그 갈린 마음을
틈타 움직이니 싸우지 않고 이겼다.”(『遼史』「耶律羽之傳」)는 기록으로 보아 거란은 아마도 대진의 내부
분란을 이용, 침략에 성공한 것 같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자연재해 (백두산 폭발)였다.
일부 학자들은 약 1,000년 전 대진의 수도 上京龍泉府(홑한성)에서 멀지 않은 백두산에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
났음을 밝혀냈다. (국가적 재난으로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태에서 거란족이 침입, 국가가 통째로 무너진 것.)
거란족은 鮮卑族의 한 갈래로 北魏시대부터 거란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 일정한 정착지 없이 유목, 수렵
생활, 고구려, 돌궐 같은 주변 강대국 지배받음.
그러다가 10세기 초 唐이 혼란에 빠지고 돌궐도 쇠약해지자 거란부족들은 영웅 耶律阿保機 밑에서 강렬한 국가
로 통합(907년)했다.
아보기는 부족장들을 모두 처단하고 자신을 황제라 선포한 뒤 먼저 먼 곳에 있는 돌궐, 吐渾(토혼), 堂項 등을
쳐서 배후를 안전하게 한 다음 대진을 공격했다. 大震 멸망으로 한민족의 5,000년 대륙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
었다.
3) 고려의 칭제 건원과 그 이후
후신라(통일신라)와 대진이 공유한 남북시대를 계승한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라는 의식이 확고했고 대진과 마찬
가지로 皇帝國을 지향했다. 이런 지향(志向)은 정치체제에서도 먼저 드러났다.
高麗의 정치는 3省(中書省, 文下省, 上書省)과 6부(吏戶禮兵刑工)체제였다. 유교 명분론에 의하면,
省이나 部는 제후국에서 사용할 수 없고 天子國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다.
세계제국을 건설한 元나라의 정치적 간섭이 시작되면서 황제국 고려는 제후국으로 전락했고, 국왕에 대한 칭호
는 황제에서 王으로 격하되었다. 그 첫째 왕인 忠烈王은 元나라 쿠빌라이 황제 딸인 齊國大長公主룰 왕비로
맞았다. 이후로 高麗는 줄곧 元나라 鮒馬國(부마국. 사위의 나라)이 되었다.
元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 말기를 끝내고, 새롭게 열린 조선왕조는 철저한 사대주의에 빠져 고려 때보다
더욱 심각한 中國의 속국이 되었다.
조선말 고종황제가 稱帝建元을 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주 독립국임을 선언하였으나 이미 국운이 쇠하여
日帝 35년 식민통치를 당했다.
고조선시대 史官 發理가 지은『神誌秘詞』에 따르면, 한민족 국통 맥의 역사는 9번을 바뀌어 32개가 된다고 했다.
그의 예언처럼 실제로 우리나라는 桓國→倍達→고조선→북부여(列國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4국 시대)
→대진, 신라(남북국시대) →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9번의 開國과정이 바로 통북아 역사의 주역이자 인류의
시원문화 종족인 한민족의 國統 맥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국인의 9,000년 역사였다. 이제부터서는 9,000년 역사를 이끌어 온 정신문화이자 사상적인 지주인
神敎에 알아본다.
日帝 강점 이후 이 땅의 上古史는 완전히 말살되어 한국인의 역사의식은 식민국의 노예사관의 틀 속에 갇히게
되었다.
燕나라 衛滿→ 子 → 손자 右渠
위만은 옛 秦나라의 빈 땅인 上下鄣(장)에 거처하면서 차츰 진번과 조선과 만이(蠻夷) 및 燕나라와 齊나라의
亡命者들을 예속시켜 부렸으며, 王이 되어 王險城에 도읍하였다. (『史記』「조선열전」)
※太史公이 말하였다. “右渠는 城의 견고함만 믿다가 나라를 잃었고, 涉河(중국사신)는 공로를 속이는 바람에
전쟁을 일으키는 발단을 만들었다.
樓船장군 楊僕(양복. 水軍장수)은 도량이 좁아서 어려움을 만나 죄를 얻었으며, 番禺(지금 廣東)에서 기회를 잃은
것을 후회하다가 오히려 반역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荀彘(순체. 돼지체. 육군 左장군)는 공로를 다투다가 公孫遂(공손수. 濟南太守)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양복과 순체 兩軍은 모두 치욕을 당했고, 장수들 중 누구도 제후로 봉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