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새 외 1편
정 겸
햇볕 따뜻한 오후, 날개 접은 새 한 마리
은행나무 가로수에 앉아
지나가는 행인 물끄러미 바라본다
쏟아지는 붉은 햇살에 기억은 녹아내리고
푸른 날개의 새는 어느새 붉은 새가 되었다
파란 하늘에는 철새가 무리지어 날아가고
가로수 아래로 어린 아이가 지나간다
소녀가 지나가고 청년이 지나간다
중년의 아저씨가 이어폰을 끼고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
반백의 노신사가 낡은 가방을 들고
바쁜 걸음으로 걷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허리 굽은 할머니가
뒷짐을 지고 느린 걸음으로 걸어간다
할머니 머리 위로 황금빛 은행잎이
하늘거리며 떨어져 앉았다
사람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블랙홀 같은 시간 속으로 빠져들고
시간은 또 다른 시간에 밀려
지구를 빠져나와 우주로 향하고 있다
언뜻 눈에 들어온
행복백화점 벽시계는 오후 5시
햇살 조금 남아 있다
아직도 댄싱퀸을 기다리는 저 남자.
환승역에서 서성거리다
가로수 잎사귀마다 노을이 맺혔다
가을은 서둘러 앞 산허리를 감싸 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내 몸에서는
계절을 잃어버린 푸른 가시가 돋아났다
시간은 가속도가 붙어 빠르게 증발되고
바이칼 호수에서 날아온 도요새는
서둘러야 저 산을 넘을 수 있다고 재촉한다
철인삼종경기 선수처럼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이제 육부능선 겨우 넘었다
문득 서쪽 하늘 바라보니 하얀 초승달 아래로
가창오리 떼 횡대를 지어 날아가고 있다
초록빛 추억이 그리워지는 저녁
고향으로 가는 환승역이 희미하게 보인다
냉기가 느껴지는 플랫폼에 서서
허공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쉴 즈음
열차 사정상 무정차 통과한다는 안내방송
내 생애를 지탱해 주던 또 한 번의 기회가 사라졌다
다음 열차를 탈 수 있을까
불ㆍ안ㆍ하ㆍ다.
정 겸
경기 화성 출생, 본명 정승렬. 경희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전공.
2003년 《시사사》 등단.
시집 푸른 경전. 공무원, 궁평항 등. 경기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