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 은 경북 영주에 있습니다.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
300~500년의 세월을 견뎌낸
소나무들로 이뤄져 있는데,
지역 선비들이
나무를 꾸준히 심은 인공림이다.
[2022년 8월 26일(음:7월 29일. 일출 5시 56분.일몰19시 12분]
서해상에 위치한
고기압의 가장자리에 든 영향으로.
전국이 흐리다가
오전 한때 구름이 많겠고.
낮 기온이 대부분 20도대 에 머물면서
선선한 날씨를 보이겠으며.
일부지역은 오전에 10도대까지 내려가면서
초가을 날씨가 나타나겠습니다.
아침 최저기온은 영상 17도 ~ 22도,
낮 최고기온은 영상 26도~ 30도 로
어제와 비슷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인
영주 소수서원(사적 제55호)이
세계유산으로 인정 받으면서
글로벌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59호 숙수사지 당간지주.
서원이 세워지기 이전
사찰이 있었다는 증거다.
안향은 숙수사에서 과거 공부를 했다.
최근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한국이 신청한 영주 소수서원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소수서원 입구.
입구 남서에 제단이 하나 보이는데,
제사에 쓸 제물의
흠집을 검사하는 성생단이다.
영주시는 지난해
부석사에 이어 두 번째
세계유산을 보유하는 도시가 됐다.
성생단 맞은편에 있는 경렴정.
경렴정 뒤로는 죽계천이 바로
옆에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영주 소수서원은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安珦) 선생을 배향하고
선비들을 강학하기 위해
설립해 1550년 명종 친필인
소수서원이라는
현판과 서적을 하사받았고
문성공묘. 다른 서원과 달리
강학 공간의 서편에 위치해 있다.
문성공 안향을 기리는 제향은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에 치른다.
문성공묘(보물 제1402호),
강학당(보물 제1403호)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한
영주 최대 서원이자
영남학파의 뿌리며
동국도학의
발상지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보물 제1403호 소수서원의 강학당.
다른 서원과 달리
정사각형에 가까운 구조다.
강학당에서 길러낸
원생은 무려 4000여 명이나 된다
소수서원은
세계유산 등재기준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
(OUV ; Outstanding Universal Value),
진정성, 완전성, 보호 및 관리체계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강학당 내부.
소수서원 현판은 명종의 친필이다.
그 아래는 문성공 향사를 주관하는
삼헌관과 집사 직책이다.
직책 아래에 담당자
이름을 표시한 분정기를 붙인다.
소수서원에는 문성공묘와
강학당 등의 건물이 있다.
특히 중국식인 전학 후
묘로 배치한 대부분의 서원과 달리
우리나라 전통방식인
동학 서묘로 배치됐다.
강학당 뒤에 있는 일신재와 직방재.
다른 서원과 달리 한 건물로 붙어 있다.
문성공묘는 문성공
회헌 안향을 비롯한 안축, 안보,
주세붕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른 것은 이례적이다.
국보 제111호 안향의 초상(복제품).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는
고려시대 초상화
양식을 알 수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강학당은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퇴계 이황 선생의 많은 제자들이
이곳에서 배움을 닦았다.
장대석의 기단 위에 초석을 놓았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배흘림기둥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우금촌 두암고택의 사랑채 모형
소수서원 터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숙수사란 절이 있었으나
세조 3년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폐부될 때
인근의 승림사와 함께 소실되고.
우금촌 두암고택의 안채 모형
유일하게 지금 서원 경내에는
보물 제59호인
당간지주 1기만 남아 있다.
소수서원이란 이름이
사액 되기 전에는 풍기 군수로 부임한.
소수서원 앞을 흐르는 죽계천.
왼편에는 "경(敬)"자 바위,
오른편에 있는 정자는 취한루다.
"敬"은 유교의 근본사상인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릿글자인데,
주세붕이 서원을 세우면서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희생된
원혼들을 위해 붉은색으로 새겼다.
유일하게 지금 서원 경내에는
보물 제59호인
당간지주 1기만 남아 있다.
소수서원이란 이름이
사액 되기 전에는 풍기 군수로 부임한.
경북 영주시 소수서원
숙수사지터를
서원의 터로 잡은 것은
안향선생이 어린시절
수학을 했던 장소였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매표소로 가는길, 주변엔 식당들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한 인물은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 선생으로 당시.
소수서원 입구
신분제도가 엄격한 사회에서
신분과 계급을 떠나
무쇠장이 배순을 제자로 삼아
평민 교육을 실천한 사례가
현재까지 귀감이 되고 있다....빵긋
멋진 소나무가 많은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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