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드에 긴팔을 입고 마실을 나갔어요. 처서까지만 해도 요지부동 30도를 유지하던 온도가 백로 지나자마자 25도로 떨어졌어요. 이럴 때 보면 나도 영락 없는 옛날 사람이지요? 아싸, 추석까지 지금의 컨디션으로 가즈아! 1991년도에 10.000달러이던 GDP가 2004년 3만 달러, 그리고 드디어 꿈의 4만 달러가 2026년에 달성될 것이라는 보도를 접하고 있습니다. 제발. 김승원(59세)과 용혜인(37세)을 내각에 기용시키려는 정부 여당의 모습이 애처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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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친구! 사람이 그렇게도 없나! " 연합사 부사령관을 한 양반(강신철, 육사 46기)의 아들(30세)이 7억짜리 상가를 어떻게 샀을까요? 정말 이모/이모부 찬스가 맞다면 반칙입니다. 딱지 값만 7억이니 프리미엄은 상상 그 이상일 것입니다. 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조국에는 단 1명의 성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또 확인했고, 개인적으로 흑수저 안규백이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숍도 인사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양 이틀 1명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데 뾰쪽한 대책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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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선 년 내 숍을 하나 더 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 같습니다. 가족에게 기대지 않는 자립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자립은 타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삶을 뜻하는가? "한국은 이제 가족이 서로를 구원하거나 부양하는 시대가 완벽하게 끝났다(이호선)" 동의합니다. '부모의 희생'과 '자식의 효도'라는 사회적 계약이 파기되었으니 속히 보상심리의 꿈에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자식(며느리)은 나(아들)의 종속물이 아닙니다. 정서적 탯줄을 끊고 각자도생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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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무엇보다 '신체 자립성'을 사수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에 기대어 서운함과 분노를 쌓아가는 수동적인 삶을 끝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건강과 일상을 통제하는 강인한 홀로서기가 나의 품격이 되게 하시라! 홀로 있어도 충만한 일상 루틴을 만들라! 에예공! 아비는 이제 자식에게 노후의 보상을 청구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고 사랑까지 독립시키겠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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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을 돌보고, 내 일상을 꾸리고, 내 삶의 책임을 가능한 한 스스로 감당하되, 서로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거리에서 사랑하고 싶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고 부모 역시 자식의 짐으로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립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더 자유로운 관계를 시작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결국 품격 있는 '홀로서기'란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있을 때도 무너지지 않고, 함께 있을 때도 상대를 붙잡아두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2.
후드에 긴팔을 입고 마실을 나갈 수 있게 된 아침은 계절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처서까지 버티던 더위가 백로를 지나며 누그러지니 절기가 참 신통하게 느껴집니다. “추석까지 지금의 컨디션으로 가즈아!”라는 외침에는 계절의 변화만큼이나 회복된 몸을 오래 지키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국민소득이 높아진다는 소식은 반갑지만, 국가의 숫자가 곧바로 개인의 삶의 질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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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4만 달러라는 목표와 오늘 숍에서 한 명으로 영업해야 하는 현실 사이에는 간극이 있습니다. 국가가 부유해지는 것과 한 사람이 안정적으로 일하고 늙어갈 수 있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동일한 문제는 아닙니다. 정치권의 인사 문제를 바라보며 “사람이 그렇게도 없나”라고 탄식하는 마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마음에 드느냐를 넘어, 어떤 기준으로 공직자를 검증하고 권한을 맡길 것인가입니다. 개인의 도덕성뿐 아니라 제도의 투명성과 책임성이 함께 작동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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숍의 인사 문제 역시 결국 사람을 믿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에게 모든 운영이 의존하지 않도록 구조를 만드는 문제일 것입니다. “부모의 희생과 자식의 효도라는 사회적 계약이 파기되었다”는 말에는 오래된 가족 질서에 대한 피로가 담겨 있습니다. 부모가 희생했으니 자식은 갚아야 하고, 자식은 부모의 기대를 충족해야 한다는 관계는 사랑을 채무로 바꾸기 쉽습니다. 자녀를 독립된 인격이 아니라 자신의 노후를 보장할 자산처럼 여기는 순간, 사랑은 권리 주장으로 변하고 서운함은 분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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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헤겔의 인정투쟁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진정한 인정은 상대를 나의 소유물로 만들 때 성립하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자유로운 존재로 상대를 인정할 때 비로소 상호 인정이 가능해집니다. 자식이 부모의 종속물이 아니라는 선언은 부모와 자식 모두를 자유롭게 합니다. 부모는 보상을 기다리는 채권자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자식은 평생 갚아야 할 빚을 진 채무자의 자리에서 벗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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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과 관련하여 가족에게 모든 부양을 떠넘기는 사회가 문제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결론이 정답은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타인의 돌봄과 사회적 제도에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완전한 자립은 불가능하며, 자립이란 의존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의존의 방식을 성숙하게 재구성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철학자 에바 키테이의 돌봄 윤리가 강조하듯, 인간의 취약성과 의존은 예외적인 실패가 아니라 삶의 기본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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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신체자립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을 잃는 순간 인간의 품격까지 잃는 것은 아닙니다. 아프거나 늙어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존엄합니다. 자립의 가치는 도움을 받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범위에서 자기 삶의 결정권을 유지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강요가 아닌 상호 존중 위에 세우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홀로 있어도 충만한 일상 루틴을 만드는 것은 훌륭한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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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운동하고, 공부하고, 식사를 챙기고, 숍을 운영하며 자기 하루의 리듬을 만드는 일은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실천입니다. 다만 루틴이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기 위한 방어벽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일수록 누군가와 함께할 때 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상대에게 나의 결핍을 메워달라고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주야! 아비는 이제 자식에게 노후의 보상을 청구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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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사랑까지 독립시키겠다는 뜻은 아니다. 내 몸을 돌보고, 내 일상을 꾸리고, 내 삶의 책임을 가능한 한 스스로 감당하되, 서로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거리에서 사랑하고 싶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고 부모 역시 자식의 짐으로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결국 품격 있는 홀로서기란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는 강철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있을 때도 무너지지 않고, 함께 있을 때도 상대를 붙잡아두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립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더 자유로운 관계를 시작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2026.9.10.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