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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다해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자신을 믿지 않는 만큼 표징과 이적을 얻을 수 있다>
복음: 요한 4,43-54
오늘날 이 시대에도 다음과 같이 말하며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혹시 신이 내게 기적이나 이적을 보여 준다면 그때는 믿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런 이들은 표징이 없어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으려 해서 못 믿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아주 작은 표징에도 큰 믿음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본의 영적 멘토 스즈키 히데코 수녀님이 들려주는 생생한 증언입니다.
“2004년 말, 나는 수마트라 지진으로 쓰나미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태국을 방문했습니다. 쓰나미의 엄청난 공포를 겪으면서도 목숨을 건진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나,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힘이 되어 준 것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젊은 일본인 여성이 대답했습니다.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다고 느낀 순간, 매일 아침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나한테는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다’라는 확신이 저를 구해 주었어요.’
프랑스 여성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커다란 파도의 무서운 기운을 등 뒤로 느끼면서 산으로 도망치고 있을 때, 나는 날마다 성당에서 바쳐지는 기도의 힘을 느꼈습니다. 그 기도가 내 등을 밀어 줘서 밀어닥치는 파도보다 빨리 도망칠 수 있었어요.’
이 사람들의 체험을 들으면서,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도가 언제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닿아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재 참조: ‘행복을 발견하는 시간’, 스즈키 히데코; 참조 ‘2015 사순묵상 - 이루신 일 놀랍네’, 미래사목 연구소)
어떤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그저 미미하게나마 느껴지는 기도의 힘을 믿으며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큰 표징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믿지 않겠다고 이미 정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내린 결정을 지나치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됩니다.
사실 지옥에 간다면 그것은 본인이 원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신이 지옥에 갈 것을 믿습니다. 어떤 표징도 그들의 결심을 꺾을 수 없습니다.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에 맞는 삶을 삽니다. 돈을 좋아하고 사람을 미워하고 육체의 쾌락에 빠집니다. 말로는 지옥에 가고 싶지 않다고는 하지만 이미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다는 온갖 핑계를 댑니다.
그 중에서 자신에게는 주님께서 어떠한 표징도 내려주시지 않는다는 핑계가 제일 큽니다. 이는 마치 자해하는 사람이 자신들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미리 결정해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해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자해를 합니다. 그리고 그 아픔 속에서 자신의 믿음이 옳았다는 평화를 얻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예언을 해 놓고 그것에 맞추어 살며 자신의 예언이 맞았다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나무라십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속으로 이미 그 표징을 믿지 않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중에 표징만 주어지면 생각을 바꾸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왕실 관리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들의 치유를 청하는 그에게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표징과 이적이면 믿을 수도 있다.”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왕실관리는 어느 정도 표징만 주어지면 믿으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표징을 받은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엔 진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진리이시고 그분을 증언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십니다. 나에게 옳은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참 진리를 거부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표징도 거부합니다. 자기가 내린 예언이 틀리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맡겨야합니다.
우리가 표징을 청하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나쁜 것은 자신이 내린 결정을 바꾸려하지 않으면서도 표징이나 해보라는 식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표징과 이적을 청할 때, 우선 자신의 믿음을 언제든 바꾸려는 유연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아브라함의 며느리를 찾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낙타에게 물을 주는 사람이면 주님께서 점지해주신 며느릿감이라 여기겠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여인이 나타나자 의심 없이 그 여인임을 믿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전쟁에 나가는 것이 맞는지 양털로 하느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으시고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질것이 뻔하였지만 그래도 목숨을 걸고 적들에게 뛰어들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표징을 보면 내 삶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마음’으로 청해야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표징과 이적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열매가 맺는 나무에 거름을 주십니다.(전삼용신부)
이제 곧 꽃피는 봄이 올 것입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처럼 봄은 오지만 아직 봄을 맞이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면 봄은 왔지만 그 봄의 따사로움을 느끼기 어려울 것입니다. 몸이 아프면 계절은 봄이 왔어도 몸은 아직도 추운 겨울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자연에도 봄이 오듯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도 봄이 오면 좋겠습니다.
‘불후의 명곡, 복면가왕’이라는 음악프로가 있습니다. 프로의 특징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기존 가수의 노래를 새롭게 편곡하거나 해석해서 들려주는 것입니다. 발라드의 노래가 탱고라는 옷으로 갈아입기도 합니다. 조용히 끝나던 노래가 열정적인 외침으로 마무리되기도 합니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담벼락에 그림 하나가 더해지면서 아름다운 담으로 변신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곡의 작품성과 완성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역사가 되었고, 신앙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자신들의 삶으로 재해석하였고, 편곡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재해석된 예수님의 삶은 오늘 나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르꼬, 루까, 마태오 복음 사가는 자신들이 체험한 예수님의 삶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되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가 되셨고, 표징을 보여주시는 새로운 권위가 되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셨고,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포하였습니다. 암부로시오, 아우구스티노, 안셀모, 토마스아퀴나스, 칼라너, 한스큉과 같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신학과 철학의 옷을 입혀드렸습니다. 베네딕토, 프란치스코, 대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과 같은 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영성의 옷을 입혀드렸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도시의 성당에 팔이 부서진 예수님상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기도하던 군인이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나는 이제 팔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나의 팔이 되어주십시오.” 군인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팔, 예수님의 발,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묵상하였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명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왕실 관리가 한 일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 청을 드린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왕실 관리의 병든 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군가가 나의 빈자리를 채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내가 누군가에 무엇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어 주셨습니다.(조재형신부)
2019년 04월 01일 월요일
[자]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입당송
시편 31(30),7-8 참조
저는 오로지 주님만 믿나이다. 가련한 저를 굽어보시니, 당신 자애로 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본기도
하느님,
거룩한 성사로 세상을 새롭게 하시니
현세의 교회를 도우시어 영원한 나라로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리니,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카나에서 왕실 관리가 카파르나움에 있는 앓아누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자 고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5,17-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18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19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20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21 그들은 집을 지어 그 안에서 살고 포도밭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0(29),2와 4.5-6.11-12ㄱ과 13ㄴ(◎ 2ㄱㄴ 참조)
◎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 주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당신은 저를 구하시어, 원수들이 저를 보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주님, 당신이 제 목숨 저승에서 건지시고,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나이다. ◎
○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이니, 울음으로 한밤을 지새워도,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리라. ◎
○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니, 주 하느님, 영원히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
복음 환호송
아모 5,14 참조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43-5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43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44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45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46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47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48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49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51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52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53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5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정성을 다하여 바치는 이 제사의 은혜로
저희가 현세의 옛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워지고
천상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에제 36,27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리니, 너희는 나의 규정을 따르고 나의 법규를 어김없이 지켜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찬의 신비로 저희 삶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주님,
이 백성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육신의 쾌락에 빠지지 않고
영신의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사순 제4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성경의 독서들은 파스카 축제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사순 시기에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향합니다. 사순 시기는 우울한 시기가 아닙니다. 그분을 믿고 우리가 세례 때에 결정한 마음을 새롭게 하며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 죽음에게 거둔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가 됩니다. 이 주제는 사순 시기가 끝날 때까지 점차 강조될 것입니다.
유배 후에 살았던 예언자인 제3이사야가 제1독서에서 들려주는 것처럼, 새로운 세상의 이른 아침, 부활의 서광 속에 하느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기쁨으로 채워 주실 때 예루살렘에서 우는 소리는 사라질 것입니다. 질병과 죽음을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 그분 안에서 예언자의 예언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요한 복음에서 뽑은 오늘 복음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카파르나움에 있는 한 왕실 관리가 죽게 된 아들을 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왕실 관리의 믿음 어린 간청은 갈릴래아 카나에서 베푸신 예수님의 능력을 통하여 거리가 먼 곳에서도 치유의 기적을 끌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생명으로 드러내십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어쩌면 공관 복음 전통(마태 8,5 이하와 루카 7,1 이하)이 전하는,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치유하신 이야기에 대한 요한의 해석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요한은 카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의 첫 표징에 이은 “두 번째 표징”이라 강조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