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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 2007/10/28
말씀의 초대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의 빈곤층을 대변한다. 실제로 그들은 어디에서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 하느님만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분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를 변호하는 이도 없었다. 죽음을 내다본 바오로 사도이지만 섭섭해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그의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평온하게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제2독서).
세리의 기도는 불쌍히 여겨 달라는 한마디였다. 사실 주님 앞에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는가? 반면 바리사이는 자신의 일상을 늘어놓고 있다. 세리와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애쓰고 있다. 부질없는 짓이다(복음).
제1독서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35,15ㄴ-17.20-22ㄴ 15 주님께서는 심판자이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 16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17 그분께서는 고아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과부가 쏟아 놓는 하소연을 들어 주신다. 20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는 받아들여지고, 그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 21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살펴 주실 때까지 그만두지 않으니, 22 그분께서 의로운 자들의 송사를 듣고 판결해 주신다. 주님께서는 머뭇거리지 않으신다. 제2독서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4,6-8.16-18 사랑하는 그대여, 6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7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16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이 불리하게 셈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17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18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의 묵상
성모님을 통한 놀라운 만남
프랑스 루르드 성모성지에서의 일입니다.
나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재면서 기준 미달인 사람들을 판단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수녀원이란 곳은 철저한 규율 아래 침묵과 절제와 희생과 기도의 삶으로 영위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 기준에 맞춰야 했고, 나아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성당에 앉아 있음으로써 하느님께 특별한 존재가 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참된 인간이 되기 전에 참된 수도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는 모든 율법 조건을 완벽하게 채우고 덤으로 더 지키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부족한 한 가지가 공든 탑을 무너뜨립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태어난 소중한 존재이므로 그 어떤 잣대로도 다른 사람을 업신여길 권리가 없습니다. 이를 아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어 창피를 주거나 돌에 맞아 죽도록 할 마음이 없어서 남몰래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도 의로운 사람입니다. 형들의 시기로 상인에게 팔리고, 이국땅에서 하인으로 살다가 억울하게 감옥살이까지 하며 아까운 젊은 날을 허비(?)했지만, 재상이 되고 형들을 재회했을 때 그 모든 일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용서하는 사랑을 보입니다. 진정 의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사실 그의 자세는 하느님 앞에 선 사람의 자세가 아니었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스스로 도취된 상태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 없이 자신이 하느님처럼 판단하고 결정해 버립니다. 참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기도라면 자신의 양심을 살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루카 15,29)라고 한 큰아들의 목소리를 반향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는 정말 종처럼 충실한 자입니다. 덤으로 주 2회나 단식하며 십일조도 꼭꼭 바치는 완벽주의자요 모범생입니다. 그는 찬양과 감사의 구조를 갖춘 기도를 구사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구색 맞추는 장식에 지나지 않고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자, 하느님! 제가 이 정도 하였으니 당신도 이에 준하여 제게 갚아주셔야지요?’가 아닐까요? 좋은 말을 구사한다고 해서 좋은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2-3)라고 했지요.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는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라고 한 작은아들의 목소리와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라고 한 소경의 절박한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참조) 그래서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집회 35,21)고 하지요. 바리사이는 자신의 공로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그 공로에 대한 보상이 구원이라고 계산하며 사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다.” 이제 예수께서 이런 판단을 내리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세리는 자신이 의롭게 된 줄도 모르지만,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한 바리사이를 예수님은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은 위선자들`….”(마태 23,1-36 참조) 오늘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시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복음서는 말합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너희는 기도할 때 다른 민족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6-7 참조) 베네딕토 성인은 규칙서에서 “많은 말로써가 아니라 순결함과 통회의 눈물로써 우리 간청이 허락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부산] 루가 18, 9-14.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의 예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예화의 바리사이는 실제로도 윤리적으로 훌륭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유다교인으로서 지킬 것 다 지키고 바칠 것도 다 바쳤습니다. 유다교가 요구하는 단식은 일주일에 한 번인데 이 사람은 두 번이나 단식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다교가 요구하는 십일조는 주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인데 이 바리사이는 자기의 부수입까지 포함한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지키고 바치는 일에 있어서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감동하실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 시대 공인된 죄인으로 모든 이의 지탄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말씀을 열심히 신앙생활하고도 겸손 하라는 교훈으로 축소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예화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열린 하느님의 지평에 우리를 인도합니다. 인류역사 안에 신(神)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신이 준 계명을 잘 지키고 제물을 바쳐서 신으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해서 소원성취 하라고 권합니다. ‘태초에 두려움이 있었고 이 두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을 생각하게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에게 무엇을 바쳐서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어떤 혜택을 받아 내겠다는 민속 종교들의 발생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정화수를 떠놓고 빌던 그 마음의 연장이고, 공양미 삼백 석을 바쳐 아버지가 눈을 뜨는 혜택을 받게 한 심청이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초월적 힘을 빌려 소원성취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이 소원성취 하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앙은 내가 잘 지키고 잘 바쳐서 하느님을 감동시켜 그분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아내어 나 한 사람 잘 되고 잘 사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소원성취는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비는’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우리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불쌍히 여기심이 흘러넘치게 하는 데에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베풀어진 것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려 합니다. 잘 지키고 잘 바쳐서 소원성취 하겠다는 것은 독재자 밑에 사는 기쁨조가 바라는 일입니다. 혹은 조폭조직의 두목 밑에 사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의 혜택을 받겠다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그런 독재자도 아니고 조폭의 두목과 같은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을 배경으로 자기 한 사람 강자가 되어 잘 살아보겠다는 호칭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생명을 배워서 살겠다는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그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신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말할 때는 어머니와 대립된 아버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자녀를 낳아 기르고 그 자녀가 사람노릇 하도록 가르치는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옛날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자녀들과 관련지어 아버지를 말할 때는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역할도 당연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주신 분, 아버지의 배려로 생명이 성장할 수 있고, 자녀가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하여 산다고 말할 때, 아버지라는 호칭 안에는 어머니도 항상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때,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같은 역할을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버리지 않고 용서하며 돌보듯이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 부모가 우리를 불쌍히 여겼듯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 부모에게서 세상에 사는 법을 배웠듯이 우리가 배워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하느님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아버지라는 하느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가 잘 한 일에 만족하고 하느님께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도취되어 자만자족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우리들이 흔히 하는 자만자족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열(優劣)을 논하라고 주어진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우리의 경쟁자가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웃이며 하느님이 주신 형제자매들입니다. 사심 없이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은 모두 불쌍합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우월감도 열등감도 현실을 바로보지 못한 잠시의 착각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리는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실 것을 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세리 두 사람 중에 의롭게 되어 돌아간 사람은 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올바른 자세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사는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안에 가득할 것을 빕니다. 그리고 그 자비를 스스로 실천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죄인이라고 유다교가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하느님이 용서하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당신 주변에 넘쳐흐르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외면하고 나 한 사람 잘 되겠다는 사람이 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를 외면하는 유다교 지도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소신껏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 [서울] 내 기도의 크기는 몇 평이나 되는가 정원순 신부
오늘 복음(루카 18,9-14)에서는 두 사람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사이는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세리와도 같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영적인 교만함이 배어 나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자기중심적이고 우월적이며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게 자기자랑을 하는 기도로 보입니다. 자신의 기도 생활에 대하여 우쭐하여 하느님에게서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어 보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세리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고 그것을 진실하고 겸손하게 반성하며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보았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제대로 그리고 진지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사는 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말은 기도하는 것과 사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내 삶에 반영이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기도와 삶이 일치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땀이 나고 몹시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세리는 솔직하게 하느님께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의 생활을 뒤돌아보면 자신의 잘못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솔직함과 인간다움이 묻어 나는 기도입니다. 이에 비하여 바리사이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데는 민감하면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살펴보고 알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죄라는 결과로 선을 그은 것입니다. 그래서 경직된 기도를 할 수밖에 없나 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기도한다고 했지만 자신과 너무 가까이 있었기에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 처지, 아픔을 느끼고 헤아리기보다 자신이라는 벽에 부딪쳐 다른 사람들의 죄만 본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데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기도하시면서 우리도 당신을 따라 기도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요한 14,13) 기도하고 구하며 간청하라”(마태 7,7)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기도는 겸손된 것이어야 하며(루카 18,9-14), 깨어 있는 마음(마르 13,33),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신뢰하는 마음(루카 11,5-13)과 순수한 지향으로 하느님께 합당한 기도를(마태 6,5-8) 바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자세로 기도를 할 때 내 기도의 크기는 수백만 평이 되어 다른 사람의 흠이나 잘못도 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형제자매가 나를 헐뜯고, 뒤에서 비난해도 내 기도의 크기가 한두 평이 아니고 수백만 평이 되기에 그 사람에게 웃음을 보일 수 있습니다.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통, 곤란, 번민, 아픔, 괴로움 따위에도 주저앉거나 실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도 나의 기도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군종] 주님을 위한 마음의 공간 최정훈 신부
[수원] 겸손한 자의 기도 조욱현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 기도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오늘은 특히 겸손한자, 가난한 자의 기도에 특별한 강조를 두고 있다.
제1독서: 집회 35,12-13.16-18: 겸손한 사람의 기도 제1독서에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큰 희생제물을 즐겨 받으시는 듯이 하는 전례태도에 말려들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자, 과부, 억압받는 자들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 그들의 기도는 진실하고 소박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뇌물에 매수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 기도의 힘은 ‘구름’까지도 뚫으며, 그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하느님께 대해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이러한 내용은 오늘의 복음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도 가난한 자 세리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만, 자기의 공로와 선행을 내세우는 자 바리사이의 기도는 거절하신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기도에 있어서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비유의 전체적 의미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취하는 ‘자만심’과 ‘자기 합리화’의 태도를 고발하는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9절) 말씀하셨다고 루가는 밝히고 있다. 자기네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명백하게 언급되어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인 것은 확실하다. 비유의 내용이 ‘올바름’의 형태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우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자만심을 비난하고 계시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14절).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기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청해야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다만 자신이 행한 많은 선행을 자랑할 것 밖에 없다. 그는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율법 이상의 것을 행하고 있다. 즉 율법은 1년에 단 한번 속죄의 날(레위 16,29)에 단식을 하도록 하고 있는데 일주일에 두 번이나(월. 목) 단식을 한다든가, 생산자에게만 의무가 부과되는 밀, 술, 기름을 구입하면서도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든가 하는 것이다(12절). 이것뿐이 아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자신만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의 보증을 받을 수 있는 ‘올바른’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11절). 모든 내용이 그 자신만을 들어 높이기 위한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그 자신의 자기만족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요소가 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죄스런 상태에 있더라도 그들을 위한 도움과 자선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의’(義)를 돋보이게 하려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는데 더 신경을 쓴다. 그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다른 형제들을 내리 깎기 위한 하나의 구실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다”(13절). 자기 잘못에 대한 세리의 겸손하고도 순박한 고백은 그가 대죄인 이라기보다는 그가 하느님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 앞에 내세울만한 것이 없기에 오직 하느님의 자비만을 기다리고 있다. 만일 그가 무엇을 얻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잘못을 용서해주시고 그를 새롭게 해주는 사랑일 것이다. 즉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은총’이요 ‘선물’이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14절). 세리의 태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최고의 사랑과 용서의 모습을 되찾으신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올바름’이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분만이 자신을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란 세리의 기도처럼 항상 겸손한 기도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 바로 그러한 기도를 통해서 당신의 은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현대인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기도를 하더라도 바리사이처럼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한다. 복음의 바리사이파 삶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하느님 앞에 증오심으로 가득 차있는’ ‘거짓’과 ‘위선’으로 싸여있는 인간의 상징이며, 하느님 앞에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의’만으로 족하다는 자만심으로 차있는 사람들의 상징이다. 이러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퍼져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자기 형제들과 교회의 바리사이즘을 맹렬히 비난하면서도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과 복음은 어느 누구의 자기 찬양을 위한 도구가 될 수는 없다. 제2독서: 2디모 4,6-8.16-18: 정의의 월계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았음을 알고, 동시에 그 구원에 협력해야할 의무를 깨닫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7-8절). 하느님 앞에 겸손된 기도를 바치면서 바로 주님께서 나 자신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닫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하느님 앞에 언제나 올바른 사람으로 서있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안동]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조인래 신부
우리는 살면서 ‘어느 누구보다 더 아름답고,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살고, 어느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더 아름답고 더 잘 살고 더 행복하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항상 내 주위에 비교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 대상과 비교하여 내가 우위에 있을 때 마치 성공을 한 것처럼, 행복한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비교해서 행복해지려는 맘이 우리들의 맘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말들도 다 비교에서 나오는 말들일 것입니다. 어떤 대상을 나란히 옆에 놓고 우리는 ‘많다 적다’ ‘크다 작다’ 그리고 ‘많이 가졌다 적게 가졌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두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한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온 모범적인 종교인인 바리사이이고, 또 다른 사람은 직업상 죄인으로 취급을 받아온 세리였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 중에서 하느님께 의인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하느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는 말씀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리사이는 죄를 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모든 규정을 지키며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단식을 자주 하였으며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너무나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기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도 경건한 종교인으로 인정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반대로 세리는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에 상납을 하였고, 또 중간에서 부당이익을 챙겼던 사람들이었기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을 세리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바리사이는 자신이 살아온 모습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내 세웠습니다. ‘오, 하느님! 저는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이웃’ 옆에 두고 비교하였기에 기도는 자신을 자랑하는 내용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마저도 자신의 모범적인 삶을 드러내는 하나의 도구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 반면 세리는 잘못한 부분이 너무나 많기에 자신을 내세울 수 없었던 것이기에 당연히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세리가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저는 ‘세리보다 바리사이가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바리사이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였지만, 나름대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어진 여건 속에서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들. 그러나 바리사이와 같은 잘못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이웃 옆에 놓고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옆에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주] 소박한 그러나 절실한 기도 장상호 신부
페루에서 사목을 할 때다. 주일날 성당 마당에서 신자들이 미사에 오는 것을 반기는데 저 멀리 본당에서 가까운 공소에 사시는 로사리아 할머니(101세)가 무거운 몸을 자식(80세)에게 의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오신다. 공소에서 본당으로 올 때는 거의가 내리막 산길이라 보통사람의 걸음으로 약 40분 정도 걸린다. 그러나 되돌아가는 길은 거의가 오르막길이라 1시간이 넘게 걸린다.
너무 안타까워서 할머니 귀에 대고서 큰 소리로 외쳤다. “로사리아 할머니, 너무 힘드시니까 성당에 오시지 말고 그냥 공소에서 기도 열심히 하세요. 그래도 천당에 가니까요!” 그러자 할머니가 펄쩍 뛰신다. “성체 안모시면 예수님 뵐 면목이 없어” 그리고 자식 할아버지도 한마디 거든다. “힘들어도 지금 이대로의 마음과 행동이 천당에 있습니다” 두 노인네들의 얼굴에서 멋진 미소를 본다. 되돌아가시는 길에 비가 오지 않아야 할 텐데…. 사람들 마음 하나하나가 소박하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생활도 소박하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도 요란하지도, 거창하지도 않고 소박하다. 그저 산비탈에 심어진 감자, 옥수수가 무럭무럭 잘 크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 소박한 기도의 내면에 그들 삶의 진실함이 스며들어 있다. 이 소박한 기도가 그들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들과 함께 할 때 소박하고 절실한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 13). 허나 지금의 생활은 이런 마음이 없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안일하다. 모든 것이 내게서 나오는 것처럼 산다.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 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집회 35, 21)는 말씀을 되새기며 소박하지만 절실함이 스며든 삶을 다짐해 본다. 겸손한 기도만이 주님께 이릅니다
프랑스의 매화마을이라는 명상센터를 운영하시는 베트남 승려 틱 낫 한 스님은 기도에 대하여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기도는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도는 우주가 인간에게 선사하는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선물이다. 행복은 이미 궁극의 차원에 존재하고 있으며, 기도는 궁극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기도하길 바란다. 그래서 당신 자신이 우주 안의 모든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험하길 바란다.”
가끔 교우분들과의 면담 중에 자주 상담 받게 되는 것이 기도 중에 분심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집중이 안 되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저 자신은 속으로 “저도 안 되요”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누릅니다. 불교 격언에 “찰라의 순간에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면 부처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찰라’란 ‘눈 깜짝할 사이’라는 뜻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도 정신이 한 곳으로 집중이 안 돼 많은 스님들이 평생을 깊은 산중에서 수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같이 세속에서 온갖 일상의 번잡함 속에서 온전히 한 정신으로 기도에 전념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집중된 기도를 포기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분심과 잡념이 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더욱 그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에 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을 겸손되이 낮추며 기도할 때 분심 잡념의 기도를 뛰어 넘어 주님께서 다 들어 주신다는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때문에 오늘 집회서의 저자는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집회 35, 21).
기도의 분심 여부를 떠나 진정 내 자신의 기도는 가난한 이의 기도, 낮추는 이의 기도였는지를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실망감에 포기하지 않는 끈기의 항구한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성인들도 기도의 완성과 끝이 없었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어 항구히 주님께 매달린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런 뒤에 오늘 바오로 사도와 같은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티모 4, 7~8).
타는 떨기나무에서 광야의 타는 떨기나무 아래에서 모세는 존엄하신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으로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신을 벗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신고 있는 세속의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시련과 고통을, 자갈과 가시, 오염된 물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 주었던 신을 벗는 것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 대신 온전히 주님께 의탁할 때, 그분께서 신이 되어 주시고 지켜 주실 것입니다.
세속과 천상의 것에 양다리를 걸치고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가장 작은 자세로, 주님께서 당신의 것으로 신겨 주시고 입혀 주신다는 사실에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임해야 합니다.
자기가 이제껏 아무리 훌륭한 신앙의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감추고 겸손히 서야 합니다. 열심히 쌓아올린 세상의 공로들이 때로는 진실한 기도에 다가갈 수 없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겸손을 가로막는 교만과 우월의식의 유혹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는 자신이 훌륭히 지켜온 종교적 선행과 율법이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장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신고 있던 세속의 신을 벗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이었던 세리는 자신의 허물로 인한 잘못으로 세속 교만의 신을 벗고 겸손히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뉘우칩니다. 이때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 14).
결국 기도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주님 앞에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죄의 인정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입니다. 그리고 세속의 것을 버리고 주님께 온전히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입니다. - 배광하 신부
저는 운동경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중계를 하는 운동경기는 거의 빠짐없이 보는 편이지요. 특히 요즘에는 프로야구의 막바지라서 야구에 흠뻑 빠져 있답니다. 그런데 야구를 보면서 의외의 경우가 자주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분명히 점수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한 점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또 반대로 점수를 도저히 낼 수 없는 상황인데 오히려 대량 점수를 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의외성 때문에 야구가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의외성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반응입니다.
도저히 득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편이 점수를 내거나, 상대편의 아주 좋은 기회를 잘 막아내면 너무나도 신나고 재미있는 상황이 됩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좋은 기회에서도 점수를 하나도 내지 못하거나, 상대편의 공격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상황인데도 점수를 주게 될 때에는 ‘어쩌면 그럴 수가 있냐?’고 말하면서 이 의외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자신에게 좋은 의외성은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나쁜 의외성은 그럴 수 없다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들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말처럼, 우리들은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나요? 사실 그러한 판단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항상 올바른 판단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새벽, 잠을 자고 있는데 글쎄 모기한테 물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기가 어찌나 재빠른지 도저히 잡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또 한 두 마리도 아닌 것 같습니다. 불만 껐다하면 윙윙대는 소리는 잠을 도저히 잘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화가 나요. ‘이 놈의 모기 때문에 내가 잠을 못 잔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지 모릅니다. 이 모기의 크기가 얼마나 될까요? 저만한가요? 아니지요. 저보다도 훨씬 작지요. 제 손톱보다도 작은 모기 때문에 그렇게 부정적인 마음으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잘났다’고 교만해져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점을 말씀하세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중에서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더욱 더 기쁘게 받아들인다고 하지요. 이는 비록 겉으로는 옳게 산다고 하더라도 하느님보다도 위에 올라서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기도는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가슴을 치며 바치는 겸손된 기도는 그 사람이 지금은 외적으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일지라도 받아주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한없이 부족하면서도 겸손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반성하여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떳떳하다고 착각하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한 세리의 모습을 갖추겠다는 결심을 감히 해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바리사이의 기도를 바치고 싶을 때가 종종 우리들에게 유혹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하지만 그 때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기도보다는 세리의 기도를 더 좋아하십니다.
잠깐이라도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세요.
지금 그 자리에 행복이 있습니다(‘좋은생각’ 중에서)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고마움을 잃고 난 후에 그 소중함을 깨닫지만 눈 들어 세상을 보면 우리가 불행을 헤아리는 데만 눈을 들어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러는 사이 당신은 지상에서 가장
[광주]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한분도 신부
먼곳을 가깝고 빠르게 갈수 있는 자동차와 시간과 장소에 상관하지 않고 통화할 수 있는 핸드폰으로 인해 업무 처리는 예전보다 빨라졌고, 더욱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해결해야 할 일들도 많아졌지만, 그렇게 세상은 더욱 발전되어 갑니다.
[대구] 행위냐 존재냐 이상영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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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랑을 늘어 놓으면서 작은 선행이라도 하면 요란스럽게 떠듭니다. 그리고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증상은 가상의 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결백하고 열심하다고 뽐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경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기도하시면서 우리도 당신을 따라 기도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요한 14,13) 기도하고 구하며 간청하라”(마태 7,7)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기도는 겸손된 것이어야 하며(루카 18,9-14), 깨어 있는 마음(마르 13,33),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신뢰하는 마음(루카 11,5-13)과 순수한 지향으로 하느님께 합당한 기도를(마태 6,5-8) 바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자세로 기도를 할 때 내 기도의 크기는 수백만 평이 되어 다른 사람의 흠이나 잘못도 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형제자매가 나를 헐뜯고, 뒤에서 비난해도 내 기도의 크기가 한두 평이 아니고 수백만 평이 되기에 그 사람에게 웃음을 보일 수 있습니다.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통, 곤란, 번민, 아픔, 괴로움 따위에도 주저앉거나 실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도 나의 기도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다른 것들로 가득 차 하느님이 머무실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 자기의 구원을 위해 눈에 보이는 것, 느낄 수 있는 것을 추구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 보다 눈에 보이는 우상이 그러했고, 우리의 마음을 끄는 돈이나 명예가 바로 그런 것이고, 바리사이파의 율법에 대한 집착, 친구나 동료들보다 나 자신을 좋게 평가하려는 욕심 등이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 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베풀어진 것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려 합니다
아무리 세리가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저는 ‘세리보다 바리사이가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바리사이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였지만, 나름대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어진 여건 속에서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들. 그러나 바리사이와 같은 잘못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이웃 옆에 놓고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옆에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