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분들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하나의 "가정"이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렇지만,
이것만 되면, 이것만 성공하면, 이것만 이루어지면 행복해질 거야.
행복할 수 있을 거야.
행복에 조건을 달고,
그 조건이 충족되어야지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행복 가정법.
과연 그럴까요?
지금 당장 행복한 사람
심리학에서는 그간 행복 가정에 대한 수많은 연구들이 있어 왔고,
거의 모든 결과들이 다음과 같이 일관적으로 도출되는 편입니다.
조건이 충족되도, 그 행복은 최장 1년을 넘기지 않고 사그러든다.
즉, 평생 행복권을 보장하는 성취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인간에게는 쾌락 적응(Hedonic Treadmill)이라는 기제가 있어서,
아무리 커다란 성취를 이뤘다한들, 머잖아 그 쾌감에 반드시 면역됩니다.
10억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막상 10억을 벌게 되면,
한동안은 성취감에 젖어 뿌듯하게 지낼 수 있겠지만,
그 성취감이라는 쾌락에 적응된 후에는 자신의 현재 상황에 만족 못하고 더 큰 야심을 지니게 돼요.
50억만 있다면.. 50억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해질 텐데..
이러한 행복 가정법의 특징은,
가정이 충족되지 않는 현재 상태에선 좀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나부터가 이미 행복에 대한 경계 조건을 걸어놨기 때문에,
그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지금의 나는 당연히 행복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거죠.
행복 가정법이 지니는 가장 큰 폐해는
성취감이라는 가장 거대한 감정만이 진정한 행복이라 받들어 모시면서,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사소하고 확실한 행복감들은 좀처럼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가령,
서울대만 가면 행복해질 거야라고 강하게 믿고 있는 학생이 있다면,
고등학교 시절 동안 과연 얼마만큼 본인의 삶을 행복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학생은 아직 행복 가정법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본인을 행복하다고 평가하지 않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봤을 땐 얼마든지 행복해 보이는 인생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공부도 잘하고, 화목한 가정에다, 교우 관계도 원만해.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쟤는 참 행복하겠다 싶어도, 막상 자기 자신은 행복할 수 없는 겁니다.
본인부터가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왜? 나는 아직 행복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니까.
이처럼 행복 가정법으로 점철된 인생에선 행복의 가치 체계 자체가 변하게 돼요.
자잘하고 소박한 행복감들은 일시적 쾌락, 가치없는 쾌감으로 격하되고,
거대하고 임팩트 있는 한 방의 행복감만이 진정한 행복으로 격상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 한 방의 행복감마저 쾌락 적응 기제에 따라 곧 사라지고 마니,
행복 가정법에 매몰된 사람들은 정작 일생에서 행복감은 얼마 느껴 보지도 못한 채
스펙만 주구장창 챙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여도,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더라도,
뭐뭐하면 행복해질 거야란 행복 가정법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며,
쾌락 적응 기제로 인해 인간의 욕심은 끝도 없이 늘어나기 때문이죠.
죽어라 노력해서 목표를 달성했다 해도, 그로 인한 행복감은 몇 달에 걸쳐 사라지고,
나는 결국 또 다른 행복 가정법으로 갈아탄 채, 평생을 성취와 스펙 향상에만 몰두하며 살아가게 돼요.
비유하자면,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기 위해,
오로지 훈련에만 매진하는 삶을 평생토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금메달을 여러개 따면 결국 위너가 되는 것 아닌가요?
위너가 되는 것과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위너가 되면 일시적으로 행복해질 순 있어요.
하지만, 그 성취감에도 얼마 안 가 면역이 된다는 것이고,
오히려, 이겨야지만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 됐다면,
승부가 없는 인생의 길고 긴 시간들 동안엔 무료하거나 무감정한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겠죠.
왜? 행복 가정법을 충족시키는 것만이 그에게 허용된 행복이니까.
인생에서 목표를 달성하는 몇몇 순간들 이외엔,
좀처럼 행복하다는 감정을 인지할 수 없는 무채색의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결국 그도 행복의 본질이란,
일상에서 만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감(소확행)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만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 무라카미 하루키 <랑겔한스섬의 오후>
이처럼,
하루에도 몇번씩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느낌을 행복이라 인정할 수 있게 되면,
이와 같이 "행복 현실법"에 익숙한 사람들의 삶은 행복 가정법에 익숙한 사람들의 무채색 인생보다
훨씬 더 다채롭게 반짝반짝 빛날 수 있게 돼요.
그렇다고, 행복 현실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현실에만 안주한 채 자기계발 노력을 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목표는 있습니다.
단지 다른 건,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며 그렇게 모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목표 추구 활동을 하느냐?
아니면,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가며 그렇게 모은 필사적인 에너지로 목표 추구 활동을 하느냐?
의 차이일 뿐.
어떤 에너지가 더 강력할까? 글쎄요.
하지만, 어느 쪽의 인생이 더 살만하고 흥미로울 지는 예상이 되시겠죠?
잊을만 하면 느껴지는 소소하고 자잘한 행복감들에 둘러쌓여 사는 삶
VS
영원한 안식을 꿈꾸며 거대한 한 방을 노렸지만 얼마 안 가 그 강렬한 행복감조차 무뎌지는 삶
뭐뭐하면 행복해질 거야라는 생각은 내가 자격을 갖춰야만 행복을 선사하지만,
지금 당장 행복한 사람들은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행복의 시점을 굳이 미래로 밀어내려 하지 마세요.
행복은 가정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현실 속에 존재하니까요.
※ 무명자 블로그 : https://blog.naver.com/ahsune
첫댓글 엄청 엄청 공감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쾌락적응이라고 부르는건가요^^ 경제용어에도 한계효용의 법칙?이 있듯이 쾌락이고 행복이고 지속되지 않는 법이죠. 이 단순한걸 못 깨닫는 사람이 많은 한국이라는 슬픈현실 입니다!! ㅠㅜ
행복가정법... 전 큰 목표는 아니지만 종종 사용하는데(주로 취미관련 쇼핑?) 진짜 금방 무뎌지더라구요ㅠ 행복현실법, 소확행에 대해 많이 들어봤지만 막상 일상에서 나에게 적용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ㅠ 하지만 오늘 무명자님 글 읽으니 다시금 되새기게 되네요! 행복해지도록 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