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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사학회 학술대회 발표문 집입니다. 왼쪽위는 KDI연구원 김두얼씨 명함인데, 어쩌다보니 인사도 나누고 명함도 받게됬네요.
※. 글이 좀 횡설수설합니다. 제대로 정리가 안되었는데, 양해바랍니다.
혜화역에 있는 방송통신대 본교 역사관 2층에서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혹시나 저희 학교 장시원 교수님이 계실까 싶어 가서 찾아뵙지만 보이지 않으시더군요. 저번 중앙대학원 강의실이 상당히 비좁았던 것에 비교해볼때 방통대 역사관 2층 세미나실은 꽤 넓고 좋았습니다. 오후 2시에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시간내에 참석인원이 다 오질않아서 조금 늦게시작했습니다. 2시 10분? 좀 넘어서요. 학회장인 허수열 교수님도 계시고, 김낙년 교수님도 계시고.. 저번 학술대회때도 말솜씨가 유창했던 편인 고선씨도 눈에 보였습니다.
저번 학술대회는 늦게 가다가 선재원 교수님과 이런저런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누고, 이영훈 교수님과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럭저럭 붙임성있게 끼어들었는데, 이번 학술대회때는 그런 인연까지는 없고, 또 제가 아는 것도 없다보니 대화 커뮤니티에 끼질 못하겠더군요. 혼자 뻘줌하게 왼쪽 앞 좌석에 앉아서 학술대회를 경청했습니다. 오늘 발표회는 2시~5시까지 총 3시간식, 한 발표당 1시간씩 잡혀있어서 시간적 여유가 지난번에 비해서 대단히 많았습니다. 발표 외 토론과 질문의 시간이 많다보니 그럭저럭 대화가 잘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뭐 개인적인 느낌은 이정도로 말하고 학술대회내용소개를 해야겠군요.
1. The Migration Patterns of US Female Teachers, 1860-1880
발표(손기태) : 이 발표는 남북전쟁 전후의 시기에 여성교사들의 이주유형을 수량적으로 파악하여 교육정책의 변화나 이주현황에 대한 것을 파악하게끔 한 연구성과입니다. 발표자는 계량적으로 파악해본 결과 교사들 중에 여성들이 많았고 그중에서 백인 특히 20~30대 젊은 여성계층이 많았다는 것에 착안하여 20~30대 백인 여성교사들을 표본대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기존에 교사에 대한 연구는 교사들의 개개인의 사생활에 초점을 맞춘 것이 대부분이고 이들의 이주를 특별히 부각시킨 연구는 없었습니다. 주로 일기나 학교기록, 회고록등에 입각하여 개개인의 삶을 조명한 연구들이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발표자는 대표성있는 샌서스 자료를 통해 이주유형을 파악했다고 합니다. 뭐, 사용하고 있는 자료가 여러가지 한계가 있다는 점을 설명했는데, 제가 전문용어를 몰라서 이해를 잘 못했습니다. 크로색션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쨌던..
다음으로 참고할 수 있는 자료의 성격 그리고 그외 변수보정등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일단 샌서스조사자료가 가지는 문제점은 매번 다른사람의 직업을 새로이 조사하기 떄문에 변수가 많다는 것이고, 당시에는 교사를 1, 2차직업으로 삼고 부업이나 본업이 따로있는 경우가 있는데 발표자는 1차직업이 교사인 집단에 한정하여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샌서스 자료외에 학교자료를 참고할 수 있는데, 샌서스자료의 경우 매년마다 조사를 해서 오차범위가 학교자료보다 적기 때문에 샌서스자료에 많이 의존을 했다고 하더군요.
교사의 결혼여부도 문제가 되었는데, 보통 통상적으로 결혼을 하면 가족이주나 여러 변수가 생기는데, 이것도 일단은 결혼을 한 여성은 별도의 직업을 가지기 어렵다는 이유로 일단 배제했다고 한 것 같네요.(제가 발표내용을 잘 못들어서 기억이 좀 가물가물합니다.)
이주형태는 (1)주, (2)지역, (3)국가 등으로 세분화했다고 하고, 이 표본조사에서 반론의 여지는 이주를 여러번에 걸쳐서 하느냐 아니면 한번에 걸쳐서 하느냐의 여부 그외 직업하고 상관없는 이주도 표본대상에 끼게되어 원인확정이 어렵다는 등의 문제가 있다고 하더군요.
서론이 길었는데, 어쨌던 수량데이터로 파악한 이주유형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로 20~30대 백인여성교사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주거리가 멀 수록 그런 경향이 짙었고, 그 원인은 도시의 임금이 더 높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주를 제일 많이하는 지역은 미국 북동부였고, 대부분이 미국중서부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북동부 외에도 해외에서 이주를 해오는 교사들도 중서부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구요. 통상적으로 전해지는 문헌에는 남부로 이주가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는데, 이것은 문화적 이질성에 대한 충격으로 회고하는 자료가 많이 나온 것이지, 특별히 이주수가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더군요.(오히려 남부로 이주가는 경우는 극소수라고..) 그리고 중서부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경우는 매우 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중서부로 이주해오는 이유는 그지방에서 설립되는 학교가 많아짐에 따라 교사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동부에서도 메사츄세츠의 이주자가 많았는데, 학교졸업자가 많아서 교사가 된 사람들이 많아 공급초과가 벌어짐에 따라 그 지역에서 많은 이주가 있었다고 '추론'을 할 수 있는데 아직 증거는 없다더군요. 어찌됐던 교사들이 이주함에 따라 북동부의 발달된 교육제도가 중서부에도 정착하게 됨에 따라 중서부교육의 질이 향상됩니다.
토론(고선) : 이분은 저번 학술대회때도 마찬가지지만, 미국 계량경제사에 식견이 참 뛰어난 것 같습니다. 데이터의 성격이나 문제점을 참 잘 파악하더군요. 일단, 손기태 박사의 연구가 전역의 교사이동현황을 파악하고, 잘 사용되지 않았던 자료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학문적으로 공헌을 했다며 장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참고한 자료가 마이크로 필름형태로 보관된 샘플자료였는데, 샘플안에 모든 대표성있는 대상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료상의 현황이 대표성이 있는지는 불확실하다며 그 한계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교사수급시장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샌서스 필름보다는 원사료를 연구하는게 좀더 좋을 것 같다는 평을 했습니다. 게다가 샌서스 자료자체가 조사를 해서 기입을 하는 식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 조사대상자가 스스로 기입하는 방식에 의존했기 때문에, 교사가 어떤 유형의 교사인지 파악하기가 힘드므로 좀더 파악을 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손기태씨는 Card & Krueger(1992)의 연구성과를 참고했는데, 이 연구는 주마다 교육여건의 편차가 심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모두 다 더한 다음 나눠서 평균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교사의 지역별 현황을 파악하는데는 좋지 않고, 이것 보다는 19c영국측 자료를 참고하는게 더 나았을 것이라고 평가하시더군요. 지역 및 학교별 교사의 유형과 현황을 파악하는데에 그리고 수량적 접근외에 이주자들의 역할에 대해서 좀더 심층적으로 연구를 하면 좀더 발전적인 연구가 될 것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2. Were Baby Girls More Likely to be Killed For Birth Control in Pre-Modern Asia?: Evidence from Colial Korea
발표(김두얼, 박희진) : 제가 명함받았던 그분이네요. 개인적인 이야기는 이즈음 하고.. 이 연구는 동아시아 전근대에 있어서 여아살해를 통한 인구조절 메커니즘이 실존하였는가를 검증하는 것입니다. 인구경제학의 시초인 맬서스는 영아살해(Infanticide)란 부모들이 생계의 위기에 쳐했을때 취하는 마지막 카드로써 어쩔 수 없는 인구조절 메커니즘 즉, Postive Check(적극적 억제?)라고 했습니다. 근대적 인구조절 메커니즘으로서는 Preventive Check(예방적 억제)가 있는데 이 유형은 T.wrigley가 검토했을때는 영국에서 발견되었고(1984), David Weir를 통해서 혁명이전 프랑스사회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非유럽지역 그중 중국사연구를 통해 동아시아에서는 인구압을 낮추기 위해 Preventive Chek(예방적 억제)로써 영아살해가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는 주장(James Lee)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발표는 그 주장의 실증적 타당성 여부를 따지고 있습니다.-
서유럽과 달리 피임기술이 부재하였던 동아시아(중국)에서는 영아살해를 통해 인구를 조절했다는 것이죠. 일본에서는 이것이 Mabiki라는 여아살해중심의 관행으로 표면화 되구요. 효율성을 위해 여아살해를 할 경우, 여아살해가 조직적으로 벌어지면 자연성비인 105(남):100(녀)보다 성비불균형이 높아지게됩니다. lee는 조사를 통해 120~130:100정도의 극악한 성비불균형을 확인하는 것을 증거로 여아사망이 발견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원인으로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다는 점을 제시하면서요.
그런데 이 이론은 여러모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첫째로 남아선호사상과 여아살해의 영향성이 왜 동아시아에서만 부각되냐는 것입니다. 여자의 결혼지참금 등을 고려해볼때 여아가 남아보다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이었던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인데, 왜 이런 현상이 유독 동아시아에서만 발견되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이 안나오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성비불균형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아가 높으면 여아의 희소성이 높아지고, 남아의 공급이 과잉됨에 따라 남아의 수요도 줄어들게 되는데, 이 수요/공급이 균형을 갖추려고 산아형태도 변화하면서 장기적으로는 다시 성비가 역전 혹은 회복된다는 것이죠. 실증적으로는 첫째로 lee가 표본으로 삼은 대상은 중국 한 지방의 수천명도 안되는 팔기군 마을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표본대상도 작을 뿐더러, 5세미만의 영아가 기록된 수는 그중에서 50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팔기군 마을이었기 때문에 군역대상자외 기록은 대단히 소략하다는 문제점이 있다는 겁니다. 두번째로 lee등은 청황실의 족보자료를 표본으로 삼았는데, 족보의 특징상 여성은 기록에서 누락되기 때문에 족보상의 성비불균형은 실제보다 과다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적, 실증적 문제점을 들어 일단 중국사례를 통해 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여아살해현상이 나타났는지를 반증하고자 식민지기 영아사망율 계량을 통해 검증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살해비율은 행려사망자(길에서 죽은 사람) 자료를 참고하고, 영아 성비의 조사는 샌서스자료를 참고했다고 하는군요.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상 등록인구의 수치를 보면, 식민지기 전반에 걸쳐 남녀 성비는 112:100의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105:100이라는 자연성비보다는 좀 높은 편인데, 여아의 등록이 부진했다거나, 기록이 누락된다는 이유로 성비불균형이 과다한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생존영아의 성비와 마찬가지로 사망성비중에서 남아의 비중도 높기 때문에 샌서스상의 남녀성비불균형은 어느정도 이런 요인들을 고려하고 봐야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표자들은 『국세조사』상의 샌서스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여기서 나온 성비균형상태는 영아의 경우 자연성비균형상태인 105:100보다 작음을 확인했습니다. lee의 연구와 달리 여기서는 확인이 안되는 샘이죠. 이에 더해 죽은자의 이름 이나 인적사항 나이등을 약간 기록하고 있는 행려사망자 기록까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식민지기 행려사망자 자료중 700명이 영아 사망자인데, 통계적으로 확인해볼 때 영아 혹은 여아살해가 있었으나 비율로 따지면 그 수가 매우 극소수이고, 1980년대 초음파 성별감식법 이후 성비불균형 현상과 비교해볼 때 식민지기 여아살해 혹은 영아살해는 성비불균형을 초래할만큼 대단히 광범위한 현상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중국 한 마을을 기점으로 여아살해가 광범위하게 일어나 인구조절을 초래했다는 lee등의 연구는 적어도 식민지기에서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토론(차명수) : 실제로 뵌적은 없는데, 꽤 스타일리쉬한 중년남성이더군요. 외모에 대한 묘사는 이쯤하고.. 차명수씨는 사망자가 어떠한 원인으로 죽었는지에 대한 기준이 명확치 않고, 여아살해 유형의 통계가 대단히 적다고 하지만 이것에 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같은데 안이뤄졌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동아시아라는 맥락에서 이 일제시대에 대한 연구는 피임기술의 부재에 따른 전근대 영아살해 인구조절매커니즘을 다루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인구조절메커니즘 까지 설명할 수 있는 논리인데, 식민지기에 이것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꼭 조선시대에 까지 그렇지 않다고 적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췄습니다. 즉, 농업에서의 노동력 제공 그리고 식민지기에 따른 성불평등 해소 등의 요인들을 고려할때 전근대사회인 조선사회가 일제시대때에 비해서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으므로 식민지기 살해현황상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서 전근대 조선 및 동아시아의 남아선호에 따른 여아살해현상 발생여부에 대한 포괄적인 부정 및 반박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민지기 연구를 통해 청나라시대 인구경제사 연구를 반박하는 것은 참 이상한 논증이라고 혹평하시더군요. 그 밖에 유아살해를 산아제한과 똑같은 유형으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입장도 피력하셨습니다.
답변(김두얼) : 종래연구가 일반화의 오류를 펼치고 있으므로 반증사례를 제시했을 뿐이라고 일단 밝혔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중국사례를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례를 가지고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 현상임을 주장하는 그 포괄적인 주장에 대한 반증으로써 여아살해현상의 부재를 증명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조선후기-식민지기 간 성별불평등이 해소된다고 반드시 성비불균형이 해소되느냐는 차명수씨의 지적에 대해서, 1980년대 남아선호현상으로 인한 남녀성비불균형의 사례가 있으므로 반드시 근대화로 인한 성불평등해소가 성비불균형을 완전히 개선시킨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답변(박희진) : 공동연구자이신 박희진씨입니다. (꽤 중후하실 줄 알았는데 상당히 젊으시더군요) 차명수씨가 식민지기-조선시기간 성별불평등 및 성비불균형에 대해서 차이가 있는 시기로 파악하고 있는데, 실제 조선시대와 식민지기간에는 생활풍습이 계승되는 측면도 있고, 되려 식민통치기간 일본문화유입으로 인해 남아선호현상이 강화되는 측면이 있으므로 반드시 식민지기에 남아선호현상 약화 및 성불평등이 약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뭐, 일단 식민지기 연구로 중국연구를 반증하려는 것에는 논란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밖에 연구보완점으로는 청나라 표본자료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왕실족보에 대한 분석도 해보고 또 지속적으로 연구누락분을 채워나갈 것을 기대한다는 군요.
질문(고선) : 고선씨는 행려사망자의 사망자원인에 대해서 의문을 표했습니다. 즉 영아사망자라고 해도 영아만 죽은 것이 아니라 가족과 같이 죽으려 했던 경우도 있고, 살해가 아니라 키우려다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죽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변수들은 어떻게 통제를 했느냐는 것이죠. 그리고 행려사망자중 영아사망자가 영아살해와 연관성이 있는지, 그것을 분별할만한 자료가 좀 드물지 않느냐는 점에서 자료상의 제약이 있지 않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질문(이헌창) : 제 뒤에 계신 낯읽은 학자분이 누군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이헌창씨더군요. 일단 동아시아에서 영아살해가 보편적이었냐 아니냐도 논의로 제기되었기 때문에, 그 차원에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유교사상에서 아이를 죽이는 것이 쉬웠냐는 것이 그 의문입니다. 군포부담은 과중한데 애를 못죽여서 자신의 성기를 자른 설화가 다산 정약용선생의 이야기를 통해 나타나는것으로 미루어볼때 자신의 생존 및 생계를 위해 영아를 살해하는 현상을 사회적으로 용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피력할 수 있냐고 보았습니다. 그밖에 행려사망자라면 버려진 아이 및 미아등이 죽는 것도 포함할탠데, 영아유기등을 살해와 동일하게 보기는 어렵다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질문(이름이 무엇인지..) : 이 사례가 반증으로서는 적절하지만, 영아살해와 여아살해 자체가 없었다는 증거물로서는 뭔가 부족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답변(김두얼) : 여러 질문으로 지적되듯 자료의 성격이나 문제점 및 보완점에 대해서는 좀더 많이 생각해보고 고민해보고 있다고 합니다. 일단 고선씨가 지적했던 가족과 같이 죽는 경우는 연구를 통해 파악은 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아서 그리 중요치 않다고 보이고, 그밖에 여아살해 혹은 영아살해로 볼 수 있는 80개의 경우 이것은 좀더 엄밀하게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3.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의 중소상공업정책
이게.. 글쎄요. 개인적으로 영아살해나 미국수량경제사는 몰라서 이 발표를 꽤 기대했는데, 생각했던 것과 달리 꽤 횡설수설하고 해괴하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정안기 선생이 김인호씨와 허수열씨의 식민지기 공업화에 대한 한계점에 대한 지적을 반박하고자 쓴 발표문인데, 김인호씨가 쓴 주장을 정안기씨가 수탈론으로 파악하고 오독하는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학술대회에서 가장 답변 vs 질문 & 토론이 논쟁양상으로 짙게 벌어진 것 같습니다. 위 다른 발표처럼 일일히 답변, 발표내용을 정리하자니 워낙 빨리 토론이 진행되서 구분해서 설명하기가 힘들 것 같군요. 정안기 박사는 식민지기 조선인 중소공업에 대한 조직적 탄압과 배제를 통해 식민정책의 안정화를 꽤했다는 김인호씨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자 그당시 중소상공업 정책에서 폐점에 대한 간섭여부는 되려 일본본토에 비해 식민지는 대단히 너그러운 편이었고, 김인호씨가 인식하는 것과 달리 식민지기 공업화 정책은 광공업위주가 아니라 광공업 + 조선내 경공업 육성정책으로 나아갔음을 지적했습니다. 제도적인 중소기업 육성책고 보호정책의 예를 들어 그것을 보완설명합니다.
그런데 토론자인 배석만씨가 지적하듯 김인호씨 논문이나 책에서는 그렇게 무리하게 수탈적 공업화론을 펼친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반론을 맞은 김인호씨가 직접 참여해서 스스로 1942년까지 일제의 총독부정책은 중소상공업 육성정책이었음을 자기도 인식하고 있고, 또 정안기씨가 지적하듯 식민지공업화에 적극적으로 조선인 사업과를 배척하려들었다고 주장한 바도 없다고 해명하였습니다. 어쩌다 보니 식민지기 공업화의 한계를 지적하는 허수열씨도 이 반론의 대상에 포함되는 형세라 허수열씨도 똑같은 답변을 하게되더군요. 즉 식민지기 공업화 정책에서 민족별 한계나 조선인 중소공업의 배제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창출하고자 한 현상이 아니라 전쟁이 가속화됨에 따라 선별적으로 산업을 육성지원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속에서 자본력이나 기술 그리고 경영규모가 영세한 조선인기업은 자연스레 배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밖에 제도적인 요인에 대한 설명, 실효성에 대한 논란, 세부산업의 지원 여부(정어리업등)에 대한 의견이 오고갔습니다만, 일단 핵심적인 내용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어쩌다보니 오해가 생겨서 해프닝이 발생했는데, 이거 뭐 크게 자세히 설명해봐야 별로 좋을 것 같지도 않고 ㅡㅡ..;; 일단 해프닝이라고만 적어두겠습니다.
- 소감
저번 학술대회는 발표시간이 짧아서인지 전문용어 사용도 적고 되도록이면 요점을 짧게 설명해서 저같이 전문지식이 얕은 학부생은 참 알아듣기가 편했습니다. 그런데 이발표문은 상세하게 발표하는 것은 좋은데 세부적인 논리를 잘 모르는 저로써는 다 이해하기가 좀 버겁더군요. 뭐 핵심논의는 대강 알아듣기는 했습니다만, 역시나 세부적인 지식이 딸리는 지라 마지막 발표,토론은 참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특히나 정안기 박사님이 워낙 말이 빠르셔서 필기하기도 참 어려웠습니다.(아참.. 저번에 J&P회사경영의 실적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던 분이 정안기 박사님이더군요.) 학술대회에 참여한 학부생은 저 혼자였던 것 같습니다. 학부생이 참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는지 참여하신 분들이 제가 누군지 여쭤보더군요. 학술대회 열리는 역사관 학교 학생이라고 하니까 참 많이 반기더군요. 어쨌던.. 학술대회 끝나고 저녁식사도 있고 했는데.. 뭐 제가 아는게 없다보니까 대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듣는 입장이고 딱히 듣는것 외에 말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저번처럼 선재원 교수나, 이영훈 교수와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끼는 분위기가 없어서.. 끝나고 인사도 없이 빠져나왔습니다.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하는데 끼질 못하니까 참 뻘쭘하고 어색하더군요..;; 게다가 나이대가 다들 40~60되시는데 저혼자 20대인지라.. 뭐 이런저런 이유로 하다보니 그냥 나왔습니다. 나오는 길에 김두얼씨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학술대회에서 처음보는 참여자라고 꽤 반기더군요. 어쩌다 보니 명함도 받게되었습니다. 나름 유익한 시간이었는데, 어째 학자분들 커뮤니티에 끼지 못한게 내심 많이 후회가 되네요.
첫댓글 요즘 경제학에 관심이 많으신것 같내요 ㅎㅎ
근데 학부생이 본인밖에 없을 정도로 위엄찬 분위긴가 보군요ㅋ대단하세요!
원래 저런 곳에 가는 학부생이 별로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