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사전에 더 이상 장애는 없다.'
스포츠는 각본없이 펼쳐지는 '한 편의 드라마'다. 이를 부인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는 많다. 숨막히는 벼랑끝 대결, 이긴 자와 진 자의 희비교차, 그리고 기대치 못했던 화려한 스타 탄생…. 하지만 만일 이 모든 것에 감동이란 코드가 빠진다면 스포츠가 한 편의 멋진 드라마라는 공식이 성립되기는 힘들다.
전세계 스포츠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심어주는 이들은 누구일까? 불굴의 투지로 진정한 인간승리를 온몸으로 실천해온 장애인 선수들이 그들이다.
16일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제84회 전국체육대회 최우수선수(MVP)는 해머던지기 종목에서 한국신기록을 세운 이윤철도, 체전 11연속 3관왕에 오른 한국역도 간판 김태현도, '부부 2관왕'이라는 이색 기록에 빛나는 육상의 김남진-이윤경 부부도 아니었다. 이번 체전의 MVP는 한 손이 없는 신체적인 결함을 딛고 은메달을 목에 건 창던지기 선수 허희선(22·경성대)의 몫으로 돌아갔다. 장애인 선수가 MVP를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예상밖의 메달, 그래서 더 값지다
허희선은 체전 개막 전부터 관심의 대상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허 선수는 성적표에만 관심이 쏠린 각 시·도의 과열경쟁으로 얼룩진 체전에 한가닥 희망을 안겨줄 수 있는 그런 '뉴스메이커'였기 때문이다. 매스컴은 허 선수가 한국의 창던지기 1인자인 국가대표 박재명의 기록(76m27)에 70㎝가 모자란 75m57로 은메달을 획득했다는 소식을 일제히 보도하며 '희망의 창'을 던진 사나이라는 수식어를 앞다퉈 붙이며 박수를 보냈다.
전문가들조차도 그가 메달을 획득하리라는 예상을 전혀 하질 못했다. 다른 종목도 마찬가지지만 창던지기는 양팔을 온건히 지닌 선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국체육과학연구원의 문영진 박사는 "창던지기는 근력과 팔의 회전력을 잘 이용해야 하는 종목"이라며 "허 선수는 다소 왜소한 체격에 한쪽 팔이 없는 핸디캡을 지녔다. 그런데 이를 극복하고 이번 체전에서 은메달을 땄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고 말했다.
● '진정한 인간 승리의 표본.'
올해는 유난히 허 선수처럼 인간승리의 표본을 보여준 스포츠인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선수 전원이 청각장애아로 구성된 충주성심학교 야구부가 지난 8월 제33회 봉황대기 야구대회에 처음 문을 두드렸다. 비록 맞상대인 성남서고에게 10-1로 7회 콜드게임패를 당했지만 그들의 아름다운 도전은 잔잔한 감동을 안겨줬다. 그즈음 가까운 이웃 일본에서도 의족선수인 소가 겐타(18·이마바리서고)가 고시엔 대회에 정식으로 출전해 화제가 됐다.
시각장애인 육상선수 말라 러니언(34·미국)은 4월에 열린 보스턴마라톤에서 2시간30분28초의 기록으로 5위에 올라 전세계 장애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최근에도 한쪽 다리가 없는 장애인 수영선수가 아프리카대륙의 스포츠축제인 아프리카게임에서 금메달을 안았다. 주인공은 2년 전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잃은 나탈리 두 토이트(19·남아프리카공화국). 그는 "내 다리는 남은 여생에서 극복해야 할 대상"라는 말을 남겨 스포츠의 진정한 참뜻을 세계인의 가슴에 아로새겼다.
이들 외에도 1988년 서울올림픽에 미국 야구대표팀 일원으로 참가해 금메달을 일궜으며 93년에는 뉴욕 양키스 선발투수로 클리블랜드전에 등판해 노히트 노런까지 달성한 '조막손 투수' 짐 애보트, 고환암을 이겨내고 2003년 투르 드 프랑스(프랑스 일주 도로사이클대회)에서 5년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운 랜스 암스트롱(32·미국) 등도 온갖 장애를 넘어선 '감동 스토리'의 주인공들이다.
●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어서다
세계적인 장애인 스포츠인들의 면면을 보면 '온몸이 멀쩡한' 선수들에 견줘 결코 기량이 뒤지지 않은 경우가 적지않다. 결국은 인간 한계라는 벽이 반드시 장애와 비장애라는 경계선과 일맥 상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앞서 열거한 러니언, 암스트롱와 같은 대선수들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특히 러니언은 "보이고 안보이는 문제가 안된다. 난 더욱 좋은 기록을 위해 앞으로 계속 달리겠다"며 장애가 더이상 걸림돌이 아님을 강조하고 나선지 오래다.
한편 허 선수의 MVP 수상을 계기로 이제부터라도 장애인 선수들이 제도권 대회 종목에 참가할 수 있는 길을 보다 넓게 터줘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서울장애인복지관의 한 관계자는 "현재 우나나라 장애인은 전체 인구의 3%를 넘는다. 하지만 장애인 체육에 대한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지원은 겨우 0.3%에 불과하다"며 "장애인 스포츠의 투자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제2, 제3의 허희선 선수가 탄생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스포츠서울닷컴ㅣ손현석기자 ssonton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