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에도 밀리는 꼴찌? ‘닥공야구’ 김경문호의 대반란 조회수 7,7092023. 9. 1. 13:02 수정
[이재국의 베팬알백] ⑯‘슈퍼문’ 김경문의 등장, 2004년 꼴찌후보에서 가을야구로 2004년 두산 제7대 감독으로 선임된 김경문 감독 ⓒ두산베어스
『올 시즌 두산의 1위 질주를 운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28일 현재 39승1무30패로 단독 선두. 시즌 전 전문가들이 주저없이 꼴찌로 찍었던 팀이 어떻게 이런 성적을 거둘 수 있을까. 그 중심엔 신임 김경문 감독이 있다.』 <동아일보 2004년 6월 28일자> 2003년까지 9년간 팀을 이끌던 김인식 감독이 물러나고 초보 사령탑 김경문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전년도 8개 구단 가운데 7위. 게다가 두산은 FA(프리에이전트) 정수근이 롯데로 이적하는 등 전력 누수가 많았다. 이런 점에서 2004년 개막에 앞서 전문가들과 팬들은 대부분 꼴찌 후보로 두산을 지목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꼴찌를 도맡았던 롯데보다 전력이 떨어진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닥공(닥치고 공격)’과 ‘허슬플레이’로 무장한 두산은 2004년 대반란을 일으킨다. 위의 기사처럼 시즌 도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1위로 올라서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고, 탈꼴찌를 넘어 가을야구에서도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베팬알백_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시즌2-두산 베어스 시대’ 16번째 주제는 김경문호를 맞이한 두산의 2004년 돌풍 이야기다. 두산 베어스 대표 응원 동호회인 '베사모' 회원들이 외야 관중석에서 열심히 응원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 3개 구단 사령탑 물갈이…40대 기수들의 ‘뉴웨이브’ 2004시즌을 앞두고 KBO리그는 많은 변화를 예고했다. 우선 사령탑 대거 교체로 새로운 물결(new wave)이 만들어졌다. 두산 김경문(당시 46세) 감독뿐만 아니라 롯데 자이언츠는 양상문(43), LG 트윈스는 이순철(43) 감독을 새로운 지휘자로 받아들였다. 3개 구단이 초보 감독. 그러면서 ‘40대 기수론’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40대 감독들의 유행과 열풍. 이들만이 아니었다. 기존 감독 중 SK 와이번스 조범현(44) 감독, KIA 타이거즈 김성한(46) 감독, 한화 이글스 유승안(48) 감독의 나이도 당시 40대였다. 그러니까 8개 구단 중 6개 구단 감독이 40대였다. 이들 위로 현대 유니콘스 김재박(50) 감독이 이제 막 50대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최고령인 삼성 라이온즈 김응용(63) 감독만 유일한 60대였다. KBO리그 사령탑 지형도는 전에 없이 젊어졌고, 2004시즌은 그만큼 예측불허였다. 두산 김경문 감독이 시무식에서 고사상에 술잔을 올리고 있다. ⓒ두산베어스 ◆ 마음을 움직인 김경문의 리더십
心相事成(심상사성). 2004년 개막을 앞두고 두산 베어스 라커룸에 이같은 사자성어가 걸렸다. 새 사령탑으로 부임한 김경문 감독이 서울서예가협회장에게 부탁해 써온 글귀였다.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일이 이루어진다’, ‘마음이 간절히 원하고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이었다. 라커룸에 안에 들어선 두산 선수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각자의 라커 앞에 엽서 한 장씩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성껏 쓴 손편지. 발신인은 다름 아닌 김경문 감독이었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 감독은 시즌에 앞서 선수 개개인에게 칭찬과 당부의 말을 직접 자필로 써서 엽서를 보냈던 것이었다. “솔직히 다들 놀랐어요. 감독님이 자필로 선수에게 편지를 쓴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선수들이 감동하더라고요.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느낌들을 받았나 봐요.” 2004년 두산 선수단의 손과 발 역할을 한 김정균 매니저(현 구장관리팀장)는 2004년 개막을 앞둔 당시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웃었다. 김 감독은 코치 시절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선수단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선수들이 무서워하는 코치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 카리스마 이면에 세심함과 자상함도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김 감독은 그 이후 NC 감독 시절까지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곤 했다. 앞에서 혼낸 뒤에도 개인적으로 따로 문자를 보내 오해가 없도록 선수의 마음을 풀어주곤 했다.) 김경문 감독은 그러면서 “마음이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선수와 코칭스태프뿐만 아니라 현장 직원과 프런트 직원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야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감독님은 늘 한결 같은 마음으로 선수단과 프런트 직원을 대했어요. 겉으로는 카리스마가 강해 보이지만 잔정이 많으신 분이셨죠. 보너스가 생기면 현장 프런트 직원들에게 주기적으로 금일봉을 줘서 '고생한다'며 식사를 하도록 했고요. 배팅볼 투수와 불펜 포수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발 등을 선물하면서 마음을 전했죠. 버스 기사나 그라운드 키퍼 아저씨 분들 보시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갖다드려라'면서 한 달에 한 번꼴로 선물을 하거나 식사값이라도 챙겨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선수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였던 거죠." 오랫동안 구단 프런트와 매니저로 김경문 감독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박보현 현 두산 베어스 2군 운영팀장 얘기다. 두산 김승호 운영팀장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새로 부임한 이승엽 감독님하고 김한수 수석코치가 두산만의 문화를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었어요. 마무리훈련과 스프링캠프를 할 때 프런트 직원들이 선수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모두 그라운드로 나가서 선수들과 함께 공을 줍는 장면을 보고는 '두산의 이런 면은 정말 놀랍다'고 하더라고요.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서로 돕는 이런 문화는 사실 김경문 감독님 시절부터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두산 김경문 감독과 김정균 당시 매니저(현 구장관리팀장). 매니저는 현장 선수단의 손과 발이 돼주는 존재다. ⓒ두산베어스 ◆ 초보 감독 신고식…‘시련’으로 시작한 감독 데뷔 무대 “두산은 약한 팀이 아니다. 반드시 4강에 가겠다.” 그러나 김경문 감독은 취임식 당시 당찬 출사표와 달리 막상 2004시즌이 개막되자마자 시련부터 경험했다. 4월 4일과 5일 잠실에서 열린 개막 2연전 상대는 KIA 타이거즈였다. 2연전 두산 선발투수는 마크 키퍼와 게리 레스. 공교롭게도 KIA에서 이적해온 외국인투수들이었다. 키퍼는 KIA 시절이던 2002년 19승으로 다승 공동 1위에 올랐다. 이후 성적 부진으로 2003년 7월 9일 최용호 맞트레이드 상대가 돼 두산으로 이적했다. 레스는 KIA에서 두산으로 이적한 뒤 2002년 16승8패, 평균자책점 3.87로 눈부신 피칭을 했다. 이러한 성적을 바탕으로 2003년 일본프로야구 최고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지만 성적 부진으로 1년 만에 두산으로 복귀했다. 개막전은 두산의 키퍼와 KIA의 다니엘 리오스(훗날 KIA 출신으로 두산 유니폼을 입는 외국인투수 목록에 추가된다)의 선발 맞대결. 키퍼가 4이닝 6실점 난조를 보이면서 초반에 대량실점을 하는 바람에 7-9로 패했다. 이어 5일 경기에서는 레스가 7이닝 1실점 역투를 펼친 덕분에 7-1로 승리하며 1승1패 균형을 맞췄다. KIA는 2004시즌에 앞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팀. 두산으로선 1승1패가 그리 나쁜 출발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롯데와 사직 3연전. [베팬알백] 15편에서 소개했듯이, 양상문 감독이 먼저 롯데 사령탑에 오른 뒤 당시 두산 김경문 코치에게 “수석코치로 와달라”고 부탁했던 인연까지 얽혀있던 팀이라 더욱 주목받았다. 여기서 두산은 롯데에 3연패를 당한다. 설상가상으로 첫 경기에서 박명환은 손가락 피부가 벗겨지는 부상으로 이탈한다. 롯데는 개막전 패배 후 4연승으로 단독 1위로 올라섰다. 롯데의 정규시즌 1위는 1990년 5월 23일 이후 약 14년 만이었다. 2023시즌 초반의 롯데 선두 도약처럼 난리가 났다. “롯데가 웬일이냐”, “올해는 뭔가 다르다”며 팬들은 물론 언론에서도 호들갑을 떨었다(롯데는 그해 결국 8위로 추락하면서 4년 연속 8-8-8-8 최하위가 된다). 반면 두산은 스윕패로 시즌 초반 단독 꼴찌(8위)로 주저앉았다. 개막 8연패로 시작한 2003년보다는 나아 보였지만, 별반 다를 게 없는 분위기였다. 이어진 문학 SK 3연전에서도 1승2패. 키퍼의 호투(7이닝 1실점) 속에 첫판을 잡고 연패에서 탈출했지만, 이후 2경기에서 선발투수 레스(0.2이닝 4실점)와 손혁(5.1이닝 5실점)이 무너졌다. “역시 두산은 꼴찌 후보”, “김경문 감독 야구도 별 볼 일 없다”는 푸념이 튀어나왔다. 김경문 감독과 손시헌이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다. 손시헌은 신고선수 신화를 쓰며 2004년 주전 유격수로 발돋움했다. ⓒ두산베어스 ◆ 허슬플레이로 무장한 꼴찌의 반란 김경문 감독은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꼴찌 후보라는 평가는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젊고, 힘 있고, 빠른 선수 위주로 팀을 재편해 나갔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선수는 2003년 신고선수(현 육성선수)로 입단한 손시헌이었다. 1993년부터 베어스 부동의 유격수로 활약한 김민호가 은퇴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자리. 시즌 초반엔 홍원기가 주전으로 나섰지만, 손시헌이 그 자리를 꿰찼다. 김 감독은 시즌 초반부터 허슬플레이를 하는 선수, 힘든 과정을 거쳤지만 절실하게 야구를 하는 선수에게는 반드시 기회를 줬다. 반대로 다이빙캐치, 슬라이딩을 해야 할 상황에서 몸을 날리지 않은 선수는 가차 없이 교체돼 덕아웃으로 들어오곤 했다. 선수단에 확실한 메시지를 줬다. 그리고는 “덕아웃에 있는 선수들도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와 하나가 돼야한다”며 독려했다. 경기가 시작되면 감독인 그 자신부터 덕아웃에서 소리를 질러가며 박수를 치며 응원했다. 경기에 나서지 않는 선수라도 1회 시작할 때부터 9회 끝날 때까지 목이 쉴 정도로 응원을 이어갔다. 心相事成(심상사성)의 실천이었다. 당시 매니저였던 김정균 팀장은 “2004년 우리 팀은 경기 시작하자마자 고교야구 선수들처럼 소리를 질렀다. 신생팀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면서 뭉치는 힘이 많이 생겼던 것 같다”고 그 시절을 돌아보며 웃었다. 강봉규 유재웅 이승준 등 신예들이 저마다의 잠재력과 장점을 가지고 라인업에 들어가는 일이 잦았다. 팀이 점차 정비됐다. 전통의 뚝심에 허슬플레이를 입힌 두산 야구는 4월 11승1무12패, 5월 12승13패를 기록하며 5할 승률 가까이로 맞춰나갔다. 6월 시작과 함께 두산의 대반격이 시작됐다. 1~3일 LG와 잠실 3연에서 시즌 첫 스윕승에 성공했다. 특히 2일 경기에서 외야수 윤재국의 부상이 선수단을 하나로 묶는 도화선이 됐다. 윤재국이 런다운에 걸린 사이 LG 투수 서승화가 발로 걸어 넘어뜨리면서 오른쪽 무릎 후방 십자인대가 파열된 것. 당시 양 팀 선수들 모두 몰려나와 충돌 직전까지 가는 험악한 상황이 연출됐다. 여기에 김경문 감독은 6월 6일 좌완 불펜요원 차명주를 한화에 내주고 외야수 임재철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로 선수단에 자극을 줬다. 두산 선수들은 신선한 생선처럼 모두가 그라운드에서 파다파닥 뛰어다녔다. 5월에 7위에서 4위까지 도약한 두산은 6월 시작하자마자 3위로, 2위로 치고 올라갔다. 이어 6월 12일 광주 KIA전부터 27일 잠실 한화전까지 11경기에서 10승1패(6연승 후 1패, 다시 4연승)의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6월 26일 잠실 한화전에서 김동주의 만루홈런 등으로 14-8 대승을 거두면서 전날까지 1위였던 현대를 밀어내고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 2001년 5월 17일 잠실 LG전 이후 3년 1개월 9일 만에 페넌트레이스 단독 1위. 그리고는 8월 초반까지 현대와 1~2위 싸움을 이어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꼴찌 후보의 반란이었다. 2004년 꼴찌 후보의 돌풍을 일으킨 두산 선수들이 승리 후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 프로야구에 무슨 번트? 닥치고 공격! “번트 야구는 팬들의 야구보는 재미를 반감시킨다.” 순위도 순위지만, 김경문 감독의 야구 색깔도 화제가 됐다. 가장 큰 특징은 ‘번트 야구’의 배격.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철저히 번트를 대지 않는 야구였다. 스몰볼이 유행하던 그 시절, 기존의 통념과 상식을 허물고 독자노선을 걷는 ‘김경문 야구’는 한편으론 신선하게 다가왔고, 한편으론 무모하게 비쳐졌다. 전임 김인식 감독도 ‘믿음의 야구’와 ‘선 굵은 야구’를 추구했지만, 김경문 감독은 한술 더 떠 ‘번트 야구’와는 철저히 담을 쌓는 ‘닥공 야구’를 밀고 나갔다. 2004년 두산의 정규시즌 희생번트는 총 55개. 당시 ‘번트 야구’의 대명사 김재박 감독이 이끈 현대(111개)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였다. 희생번트를 대야 할 타이밍에도 고집스럽게 강공으로 밀어붙였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일례로 2004년 6월 24일 문학 SK전. 1-2로 뒤진 9회초 무사 1·2루 찬스. 타석엔 홍성흔이 들어섰다. 누가 봐도 희생번트 상황. 그러나 김 감독은 ‘닥치고 강공’ 작전을 택했다. 이때 홍성흔이 삼진으로 물러나자 “왜 번트를 안 대냐?”, “멋으로 야구하냐?” 등등 이런저런 얘기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결국 후속 타자들의 연이은 안타로 9회초에만 4점을 쓸어담아 5-2로 역전승했다.
“우리 팀에서 타점이 가장 많은 선수가 홍성흔이다. 그런 선수를 놔두고 누굴 믿겠는가.” 당시 경기 후 김경문 감독이 한 말이다. 두산의 '닥공 야구'의 중심축이 된 홍성흔과 김동주. ⓒ두산베어스 물론 결과가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그해 포스트시즌까지 번트 야구를 멀리하는 자신의 기조와 철학을 포기하지 않았다. 굳이 작전을 낸다면 번트 대신 히트앤드런이었다. 이 같은 그의 야구 철학이 만들어진 건 은퇴 후 1992년부터 2년간 미국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을 때였다. “그때 인상 깊게 봤던 게 야구를 정말 공격적으로 하더라고요. 야구에서 번트가 필요할 때도 있는데 미국야구는 희생번트나 짜내기(스퀴즈번트)를 좀처럼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도 언젠가는 감독이 되면 번트를 대지 않는 야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끝내기 상황이 오더라도 스퀴즈번트보다는 쳐서 끝내는 게 응원하는 팬들에게 더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야구라고 생각했죠.” 김경문 전 감독은 당시 9회 1점차 승부에서도 희생번트를 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도 다음과 설명했다. “선발이 길게 던질 수 있고, 불펜이 강하면 1점을 가지고 이길 수 있죠. 하지만 2004년 우리 팀 마운드는 그렇지 못했어요. 9회에 동점 만드는 야구를 좋아하지 않았고요. 연장전 가서 불펜을 소모하다 보면 나중에 데미지가 오거든요. 1패를 하더라도 가급적 9회에서 승부를 내서 불펜 투수를 아끼는 게 낫다고 봤죠. 9회에 역전을 해서 이기면 좋고, 지면 지는 거고….” 외국인투수 게레 레스는 2004년 16승을 올리며 에이스로 귀환했다. ⓒ두산베어스 ◆ 정규시즌 3위…3년 만에 가을야구로 시즌을 치르면서 예상하지 못한 전력 변화도 많이 생겼다. 선발 요원 손혁이 시즌 개막 후 2경기에 2패, 평균자책점 10.13으로 부진한 성적을 남긴 뒤 어깨 부상 여파로 4월 21일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가뜩이나 얇은 투수층. 그러나 이가 없으면 잇몸이었다. 시즌 초반 위태롭던 구자운(4승9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4.17)이 마무리투수로 안정감을 찾고, 중간계투들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 특히 2002년에 1차지명한 우완 정통파 투수 이재영(60경기 9승7패 3세이브 14홀드, 평균자책점 2.59), 삼성에서 방출돼 2003년 두산 유니폼을 입은 사이드암 정성훈(79경기 3승3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3.12)이 불펜의 핵으로 자리 잡았다. 정재훈도 43경기에 나서 3승1패, 3홀드, 평균자책점 3.14를 기록하면서 이듬해 마무리투수로 가는 길을 닦았다. 6월말부터 4연패에 빠진 키퍼는 2군행 지시에 불만을 품고 태업을 하다 7월 25일 퇴출이 결정됐다. 대신 1년 전 LG에서 뛰었던 외국인타자 이지 알칸트라를 영입해 공격력 강화를 꾀했다. 키퍼-레스-박명환으로 구성된 선발 축은 이경필, 노경은, 전병두 등이 들어와 메웠다. 두산은 8월 6일까지 1위를 지키다 7일 2위, 8일 3일로 떨어진 뒤 시즌 마지막 날까지 3위를 유지했다. 후반기는 롤러코스터였다. 7월 중순 7연패를 당한 뒤 곧바로 5승1패로 회복했고, 8월 6일부터 17일까지 1승8패로 부진에 빠졌지만 8월 21일부터 9월 1일까지 다시 8승1패를 거두는 회복탄력성을 보였다. 그야말로 팬들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만큼 재미있는 시즌이었다. 게리 레스(17승8패, 평균자책점 2.60)는 KIA 다니엘 리오스, 삼성 배영수와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외국인선수 다승왕에 오른 것은 2002년 키퍼가 KIA 시절 19승으로 최초 역사를 쓴 뒤 2년 만이자 역대 두 번째였다. 12승3패를 올린 박명환은 평균자책점(2.50)과 탈삼진(162) 부문 2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시즌 개막에 앞서 가장 걱정했던 마운드는 팀 평균자책점 3.88로 삼성(3.76)에 이어 2위일 정도로 안정화됐다. 타선에서는 김동주가 타율 0.286에 19홈런 76타점의 성적으로 타격왕에 올랐던 1년 전(타율 0.342, 23홈런, 89타점)보다 떨어졌지만, 홍성흔이 KBO 역사상 포수 출신 최초 최다안타왕((165개)에 오르며 분전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70승1무62패. 3위를 차지하면서 준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냈다. 3년 만의 가을잔치.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올라 우승까지 도달했던 2001년(65승5무63패)보다 성적이 좋았기에 ‘미러클 두산’ 신화를 기억하는 팬들의 기대감은 고조됐다. 홍성흔이 2004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이 열린 광주구장에서 연장 12회초에 결승 만루홈런을 친 뒤 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 가을야구에서도 ‘닥공’…절반의 성공과 아쉬움 두산 베어스와 KIA 타이거즈. 역대 최초 우승팀(1982년 OB 베어스)과 역대 두 번째 우승팀(1983년 해태 타이거즈)의 맞대결. 최다 우승 1~2위(타이거즈 9회, 베어스 3회)의 격돌. 가을야구에서 두 팀이 만난 것은 1987년 플레이오프(해태 3승2패) 이후 17년 만이었다. 충성 팬들을 많이 보유한 팀들답게 준플레이오프부터 관심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산은 김경문 감독이 첫 가을야구 지휘봉을 잡았다. KIA는 시즌 도중 김성한 감독이 하차하면서 유남호 감독대행 체제로 포스트시즌을 치르는 상황이었다. 잠실구장에서 열린 1차전 선발투수는 두산 개리 레스와 KIA 다니엘 리오스. 둘 다 대량실점을 하면서 승부는 미궁 속으로 흘러갔다. 이 난타전 속에 가장 빛난 선수는 두산의 알칸트라와 안경현이었다. 시즌 도중 영입된 알칸트라는 2회 중월 2점홈런, 3회 우중월 3점홈런 등으로 6-0으로 달아났다. KIA가 6-3까지 따라오자 이번에는 안경현이 나섰다. 5회 좌월 2점홈런, 7회 좌월 3점홈런. 둘은 4홈런 10타점을 합작하면서 KIA의 후반 추격을 뿌리치고 11-8 승리를 이끄는 데 앞장섰다. 특히 안경현은 4타수 4안타에 11루타로 포스트시즌 한 경기 최다루타 신기록을 작성했다. 2차전은 2004년 김경문 야구의 백미. 선발투수 박명환(7이닝 2실점)과 김진우(7.2이닝 1실점) 호투 속에 팽팽한 투수전으로 전개됐다. KIA는 4회말 손지환의 2점홈런, 두산은 5회초 알칸트라의 솔로홈런을 터뜨린 게 득점의 전부였다. 두산이 1-2로 뒤진 9회초, 마운드에는 KIA 전천후 투수 신용운. 선두타자 최경환이 2루수 쪽 내야안타로 출루했다. 타석에는 4번타자 김동주. 상황이 상황인지라 희생번트도 예상됐다. 그러나 김경문 감독은 페넌트레이스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닥공’이었다. 여기서 김동주가 5구째에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했다. 무사 1·2루. 타석에는 5번타자 홍성흔.
"여기서는 희생번트가 나오겠지."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깼다. 홍성흔은 초구부터 방망이를 돌렸다. 파울. 2구째도 강하게 휘둘렀다. 유격수 직선타. 정규시즌도 아닌 단기전이었다. 게다가 9회초 1점을 뒤진 상황. 1사 2·3루를 만들어 놓고 최소한 동점을 노리는 방향으로 가야 할 찬스에서 타자만을 믿고 강공을 선택한 김경문 감독의 선택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내젓고 혀를 찼다. 김경문 감독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밀어붙였다. 여기서 알칸트라가 볼넷을 골라 1사 만루. 이어 안경현의 몸에 맞는 공으로 밀어내기 동점이 만들어졌다. 행운이 따라왔다. 승부는 연장 12회초에 갈라졌다. 1사 만루에서 구원등판한 백전노장 이강철을 상대로 홍성흔의 만루홈런과 안경현의 2점홈런이 연달아 터졌다. 두산은 거침없는 ‘닥공’으로 KIA를 연파하고 다음 스테이지로 올랐다. 두산 홍원기가 2004년 플레이오프 3차전 3회말 전상렬의 2루타 때 홈을 파고들었지만 삼성 포수 진갑용에게 태그아웃됐다. ⓒ두산베어스 플레이오프 상대는 삼성 라이온즈. 김응용 감독의 사령탑으로서 마지막 시즌이었다. 두산 감독 협상까지 갔다가 무산된 선동열이 수석코치로 부임해 배영수, 권오준, 권혁 등 젊은 투수들을 키워 내면서 ‘지키는 야구’를 만들어갔다. 두산은 준플레이오프 2연승의 기세를 타고 대구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1차전마저 4-3으로 잡는 파란을 일으켰다. 3-0으로 앞선 6회말 1사 만루에서 맏형 안경현이 3루수 앞 땅볼을 친 뒤 1루에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며 병살타를 막았다. 그러면서 1점을 추가했다. 2004년 두산의 허슬플레이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 삼성이 8회말 김한수의 3점홈런으로 추격해 왔지만, 안경현의 필사적인 질주로 얻어낸 1점 덕에 두산은 4-3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삼성은 이승엽(일본 지바롯데)과 마해영(KIA)이 FA로 빠져 나갔지만 전력의 두께가 남다른 팀이었다. 특히 마운드의 두께와 강도는 리그 최강이었다. 두산은 2차전에서 1-3, 장소를 잠실로 옮긴 3차전에서도 0-2로 패했다. 이어진 4차전. 1회초 시작하자마자 레스가 4점을 헌납했다. 벼랑 끝에 몰린 두산은 1회말 1점, 4회말 1점, 5회말 2점을 뽑으며 4-4 동점을 만드는 뚝심을 발휘했다. 그러나 다시 6회초 3실점. 6회말 1점을 따라붙었지만 더 이상 힘을 내지 못했다. 9회초 추가 1실점하면서 두산은 4차전을 5-8로 패하고 말았다. 1승3패로 한국시리즈행도 좌절됐다. 마지막 4차전에서도 김경문 감독의 ‘닥공 야구’는 계속됐다. 5-7로 뒤진 7회초 무사 1·2루와 8회초 무사 1루에서 강공으로 맞섰지만 연속 병살타가 나오면서 막판 뒤집기가 무산됐다. ㄷ산 김경문 감독 ⓒ두산베어스 ◆ 업그레이드 김경문 야구, 2005년 한국시리즈로 향하여 시즌 개막에 앞서 꼴찌 후보로 평가받던 두산의 반란은 플레이오프에서 진압됐지만, 분명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김경문 야구는 성패를 떠나 KBO리그에 새로운 재미와 화두를 던져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동안 각 구단의 야구 맛은 대체적으로 거기서 거기였다. 천편일률적인 메뉴에서 김경문의 색다른 ‘닥공야구’ 메뉴가 추가됨으로써 리그는 한층 더 다채로워졌다. 2000년대 후반 8개 구단 감독들이 각기 다른 스타일과 색깔로 개성 시대를 여는 새로운 출발점이 됐다. “감독 첫해에 포스트시즌까지 가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는 했지만 플레이오프 패배로 끝나니까 아쉬움이 많이 남았어요. 스포츠는 질 때 배우는 게 더 많다고 하잖아요. 번트를 안 대는 게 능사는 아니다는 것도 느꼈고요. 2005년에는 무조건 두산 팬들을 한국시리즈까지 모시고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김경문 감독은 2005년 업그레이드된 ‘닥공 야구’로 이듬해 마음 속에 품었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다. 두산 베어스는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한다. 두산 김경문 감독이 2004년 플레이오프에서 패한 뒤 팬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김 감독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2005년 팀을 한국시리즈 무대로 이끈다. ⓒ두산베어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OBS라디오 프로야구 해설위원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