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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명목으로 남편이 있는 여자와 강제로 혼인 하려다 붙잡혀 감옥에 간 이력이 있다. 게다가 1955년에는 여성 신도들과의 부적절한 성관계, 즉 '혼음(混淫)' 혐의로 서울지검에 구속된다. 통일교의 교리 중에 타락한 혈통을 정결케 하기 위해 문선명이 신도 여성과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 통일교 내부 문서나 공식 교리서에서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지만, 내부 관행 혹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성적으로 왜곡되었다는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런 비상식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한 점은, 초창기 통일교에 가담한 인물을 살펴보면, 지식인층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장 반대할 것 같은 집단이 오히려 강하게 동조한 셈이다. 특히 1955년, 연세대, 이화여대 교수들이 통일교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면직되고 10여 명의 학생들이 퇴학을 당한 사건은,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통일교회에 가담했었는지 보여준다. 유수 대학의 학생들과 거기에 더해 대학교수까지 연계되어 있었다. 중학교 이상 교육을 받는 비율이 30%도 채 되지 못했고 대학 진학률은 4% 미만이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통일교가 지식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무리가 없다.
물론, 특수한 상황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가치의 공백과 종말론적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윤리적, 신앙적 질문이 있던 시기였다. 게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위계적 구조, 교권 중심주의, 교파 간 분열 등으로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권위를 상실해 갔다. 특히 신사 참배 문제로 기독교가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이, 전통적 기독교에 대한 무너진 신뢰는 신흥 종교에 대한 개방을 가능하게 했다. 통일교는 이 시점에 구원과 종말, 역사관을 새롭게 해석하며 대안을 제시했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 역사의 섭리, 민족의 사명 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일종의 청년 선지자 운동으로 비쳤다.
박정희와 문선명 상생법
1954년 5월 1일, 통일교는 서울 무학동 391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설하며 시작되었다. 1950년대 중반, 문선명의 성범죄 연루로 논란이 있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되면서 기사회생한다. 사회적 비판과 각종 언론 보도로 통일교는 사이비 종교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고, 한국 기독교 단체 및 각 교단은 통일교를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했다. 신뢰를 상실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외부적 요소는 통일교를 내부 결속이 강한 조직으로 재편하도록 했다.
유대인들로부터 갖은 모함과 고난을 겪은 예수처럼, 문선명은 거짓 고난을 견딘 참된 메시아라는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1960년대, ‘대학생 원리연구회’를 조직해 연세대와 고려대 등 서울의 주요 대학에서 활발한 전도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과 연관 있다. 당시 지식인으로 불렸던 대학생을 통한 ‘지성적 전도’ 전략은 사회 엘리트층을 확보하고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박정희 정권에서 통일교는 반공사상/민족주의 담론과 결을 같이 하며 반공 청년운동을 실시한다.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아 세를 늘리는 데 성공한다. 통일교는 역사를 선과 악의 투쟁으로 해석한다. 통일교 원리 강론에는 악을 타락한 인간사와 사탄의 영향력이고 공산주의가 악의 결정체로 묘사된다. 통일교에서 공산주의는 단순한 정치 이념이 아니다. 사탄이 인류를 파멸시키기 위해 내놓은 체제다. 통일교에서 반공사상은 신앙적 실천이며 구원의 과정이다.
한국전쟁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는 국가정체성의 핵심이었다. 박정희 정권(1961~1979)은 반공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했고, 반공주의 운동을 장려하는 단체에 특혜를 제공했다. 박정희 정권 아래, 통일교는 ‘국제기독청년학생연합(IYSC)’, ‘세계반공연맹(WACL)’, ‘세계자유청년연맹(WFYC)’ 등을 조직한다. 통일교의 이념을 따르는 조직적 위성 체계였다. 정부의 암묵적 후원을 받아 청년과 학생들에게 반공 이념을 주입하는 활동을 펼쳤다. 정치적 기반을 굳건히 하기 위해 반공사상을 이용했던 정부와 이를 빌미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통일교의 이념이 맞아떨어져 둘은 공생 관계가 되었다.
통일교는 정권의 이념 노선(반공/국가주의)을 적극 지지하고, 청년 운동과 종교 활동을 통해 정권 안정에 기여한다. 정부는 대가로 통일교가 사이비 종교단체임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심지어 해외 활동, 언론사 설립, 기업 진출 등 우회적으로 지원한다. 1960년대부터 통일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중심에는 반공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통일교 세계관의 힘
통일교는 냉전 시대, 반공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국을 넘어 미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미국의 정보기관이나 극우 반공 진영과 연계된 인물들과 협력하며 미국 내에서 정치적 지지를 확보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2년, 문선명이 미국에서 창간한 일간지, 워싱턴 타임즈 (The Washington Times)다. 공식적인 연결고리는 없다고 하지만, 당시 통일교는 미국의 레이건 접루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이러한 정치적 기반으로 미국 내 우파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의 사이비 종교단체 교주가 어떻게 미국 내 언론사를 창간할 수 있을까?
과거 레이건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인 리차드 앨런(Richard V. Allen)이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직접적으로 통일교에 대해 언급했다는 내용이 밝혀지면서, 미국 내에서 통일교는 단순한 종교 집단을 넘어 국제관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관계자로 인식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실제로, 당시 통일교의 핵심 간부로 알려진 박보희가 미국 내 정치 로비를 주도했고, 미 정보기관과의 접촉을 시도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특히 문선명의 주도로 조직된 '미주사회 통일협회 연합(CAUSA)'은 미국과 남미를 중심으로 반공 이념을 설파하는 단체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외에도 통일교 산하 단체 인사들이 참여하여 재정적 후원을 한 것으로 알려진CNP(Council for National Policy)과 CARP(Collegiate Association for the Research of Principles), 세계반공연맹(WACL, World Anti-Communist League) 등을 바탕으로 미국과 중남미 일대에 반공 메시지를 전하며 단순한 종교적 선교 차원을 넘어, 통일교가 국제정치 네트워크의 핵심적인 위치로서 자리 잡을 수 있게 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중심에는 자본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통일교는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을 만들고, 정당한 포교 활동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언론사를 창간한다. 과거 통일교가 사이비 종교라는 인식을 심은 결정적 계기가 언론 보도였던 만큼, 언론을 장악해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해 보겠다는 계획이었다. 1970년 이후 통일교는 종교단체로서의 단계를 넘어 실질적인 기업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통일교는 수많은 단체, 기업, 학교 등을 직접 또는 우회 소유하고 있다.
한때 맥콜로 유명했던, 활력비타를 생산하는 일화(주)가 한국 내 대표적인 통일교 기업이다. 청와대 리모델링 사업에 참여했던, 건축자재 회사인 일신석재, 지금은 비활성화 상태인 통일 중공업, 2020년 매각된 용평리조트도 한 때 통일교의 자산이었다. 이미 언급했던 통일교 최대 언론 자산인 워싱턴 타임즈와 우리나라의 세계일보 역시 통일교다. 이 외에도 선문대학교, 청심 국제 중/고등학교, 리틀엔젤스(선화예술 중/고교) 예술학교 등 기업과 언론을 넘어 교육사업에까지 진출한 대한민국 전천후 기업/재단/종교단체로 성장했다.
21세기 통일교는 단순 종교 조직이 아닌, 막대한 자본력을 가진, 종교와 이념-기업 복합체(religio-political conglomerate)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제와 언론, 교육에 이르기까지 복합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였고, 현재도 다수의 기관과 자산을 유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이비 종교 혹은 이단이라는 프레임으로는 더 이상 이미지를 추락시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옮김)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