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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개중절(發皆中節)
발현됨이 모두 치우치지 않게 조절하라
發 : 필 발(癶/7)
皆 : 다 개(白/4)
中 : 가운데 중(丨/3)
節 : 마디 절(竹/9)
현대는 과학이 발달한 시대이다 보니 인체뿐 아니라 우리 인식에 관한 연구도 과학에 기초해서 진행되는데 대표적인 분야가 뇌를 다루는 학문이다.
극단적으로 보는 입장은 마음이란 것이 신체를 떠나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뇌의 반응과 저장과 전달로 본다. 일체의 우리 인식현상을 뇌의 작용으로 보기도 한다.
마음에 관한 논의는 전통적으로 철학과 종교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에서 기존의 논의를 흡수 통합하여 재구성하고자 하는 논의도 있다.
마음을 단순히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다루는 것도 체감하기에 공허하고 형이하학적 차원에 가두어놓는 것도 협소하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과학적 실험과 논의는 고전을 재해석하는데 유의미하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중용'이 그동안 마음에 관한 논의를 전개해온 고전이다.
첫머리에 마음이 지닌 두 가지 영역을 이야기한다. 두 가지 영역이긴 하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소재는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다. 이 감정에 대해 너무 깊숙한 영역은 미발현의 영역으로, 너무 일상적인 영역은 발현된 영역으로 구분하여 우리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요즈음 많이 이야기되는 인지부조화든 인지편향이든 모두 '중용'의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철학이 과학적으로 응용된 것들이다.
이들과 연관해볼 때 '중용'의 요구는 너무 일상적으로 쉽게 체감하는 마음의 영역에 대해 점검하고 반성하여 조절하는 장치를 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이 되는 것은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깊은 마음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마음의 작용이 중용적으로 조절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 중용(中庸) 제1장(第一章)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하늘이 명(命)하신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性)을 따름을 도(道)라 이르고, 도(道)를 품절(品節)해 놓음을 교(敎)라 이른다.
命, 猶令也; 性, 卽理也.
명(命)은 영(令)과 같으며, 성(性)은 바로 이(理)이다.
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而理亦賦焉, 猶命令也.
하늘이 음양(陰陽)․오행(五行)으로 만물(萬物)을 화생(化生)함에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理) 또한 부여(賦與)하니 명령(命令)함과 같다.
於是, 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이에 사람과 물건이 태어남에 각기 부여 받은 바의 이(理)를 얻음으로 인하여 건순(健順)․오상(五常)의 덕(德)을 삼으니, 이른바 성(性)이라는 것이다.
率, 循也; 道, 猶路也.
솔(率)은 따름이요, 도(道)는 노(路)와 같다.
人物, 各循其性之自然, 則其日用事物之間, 莫不各有當行之路, 是則所謂道也.
사람과 물건이 각기 그 성(性)의 자연(自然)을 따르면 일상생활(日常生活)하는 사이에 각기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곧 이른바 도(道)라는 것이다.
修, 品節之也.
수(修)는 품절(品節)함이다.
性道雖同, 而氣稟或異, 故, 不能無過不及之差.
성(性)과 도(道)가 비록 같으나 기품(氣稟)이 혹 다르기 때문에 과(過)하고 불급(不及)한 차이가 없지 못하다.
聖人, 因人物之所當行者而品節之, 以爲法於天下, 則謂之敎, 若禮樂刑政之屬, 是也.
이러므로 성인(聖人)이 사람과 물건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인하여 품절(品節)[등급과 제한]하여 천하(天下)에 법(法)이 되게 하시니, 이것을 일러 교(敎)라 하니 예악(禮樂)․형정(刑政)과 같은 등속이 이것이다.
蓋人, 知己之有性而不知其出於天, 知事之有道而不知其由於性, 知聖人之有敎而不知其因吾之所固有者裁之也.
사람들이 자기 몸에 성(性)이 있음을 알되 하늘에서 나온 것은 알지 못하고, 일에 도(道)가 있음은 알되 성(性)에서 말미암음은 알지 못하고, 성인(聖人)의 가르침이 있음은 알되 나의 고유(固有)한 것을 인하여 만들었음은 알지 못한다.
故, 子思於此, 首發明之, 而董子所謂道之大原出於天, 亦此意也.
그러므로 자사(子思)께서 여기에 첫 번째로 이것을 발명(發明)하셨으니, 동자(董子)[동중서(董仲舒)]의 이른바 '도(道)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다.'는 것도 또한 이러한 뜻이다.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도(道)란 것은 수유(須臾)[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
是故, 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이러므로 군자(君子)는 그 보지 않는 바에도 계신(戒愼)하며 그 듣지 않는 바에도 공구(恐懼)하는 것이다.
道者, 日用事物當行之理, 皆性之德而具於心, 無物不有, 無時不然, 所以不可須臾離也.
도(道)는 일용사물(日用事物)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이(理)이니, 모두 성(性)의 덕(德)으로서 마음에 갖추어져 있어서 사물마다 있지 않음이 없고, 때마다 그러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때문에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若其可離, 則豈率性之謂哉.
만일 그 떠날 수 있다면 어찌 솔성(率性)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是以, 君子之心, 常存敬畏, 雖不見聞, 亦不敢忽, 所以存天理之本然, 而不使離於須臾之頃也.
이러므로 군자(君子)의 마음은 항상 공경함과 두려워함을 두어, 비록 보고 듣지 않을 때라도 또한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천리(天理)의 본연(本然)함을 보존하여 잠시의 시간이라도 도(道)를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 君子, 愼其獨也.
은(隱)보다 드러남이 없으며 미(微)보다 나타남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그 홀로를 삼가는 것이다.
隱, 暗處也; 微, 細事也.
은(隱)은 어두운 곳이요, 미(微)는 작은 일이다.
獨者,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
독(獨)은 다른 사람들은 미쳐 알지 못하고 자기만이 홀로 아는 곳이다.
言, 幽暗之中, 細微之事, 跡雖未形, 而幾則已動, 人雖不知, 而己獨知之, 則是天下之事, 無有著見明顯而過於此者.
유암(幽暗)의 가운데와 세미(細微)한 일은 자취가 비록 나타나지 않았으나 기미(幾微)가 이미 동(動)하였고, 남이 비록 알지 못하나 자기가 홀로 알고 있으니, 이는 천하(天下)의 일이 드러나 보이고 밝게 나타남이 이보다 더함이 없는 것이다.
是以, 君子旣常戒懼, 而於此, 尤加謹焉, 所以遏人欲於將萌, 而不使其潛滋暗長於隱微之中, 以至離道之遠也.
이러므로 군자(君子)가 이미 항상 계구(戒懼)하고, 이에 더욱 삼감을 가하는 것이니, 인욕(人慾)을 장차 싹틀 때에 막아서 은미(隱微)한 가운데에 속으로 불어나고 자라서 도(道)를 떠남이 멂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發)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니, 중(中)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란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道)이다.
喜怒哀樂, 情也; 其未發, 則性也; 無所偏倚故, 謂之中; 發皆中節, 情之正也; 無所乖戾故, 謂之和.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정(情)이요 이것이 발(發)하지 않은 것은 바로 성(性)이니, 편벽되고 치우친 바가 없으므로 중(中)이라 이르며, 발(發)함에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은 정(情)의 올바름이니, 어그러지는 바가 없으므로 화(和)라고 이른다.
大本者, 天命之性, 天下之理, 皆由此出, 道之體也, 達道者, 循性之謂, 天下古今之所共由, 道之用也.
대본(大本)은 하늘이 명하신 성(性)이니, 천하의 이치가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오니, 도(道)의 체(體)요, 달도(達道)는 성(性)을 따름을 이르니, 천하(天下)와 고금(古今)에 함께 행하는 것이니, 도(道)의 용(用)이다.
此, 言性情之德, 以明道不可離之意.
이는 성정(性情)의 덕(德)을 말씀하여 도(道)를 떠날 수 없는 뜻을 밝힌 것이다.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萬物)이 잘 생육(生育)될 것이다.
致, 推而極之也.
치(致)는 미루어 지극히 함이다.
位者, 安其所也; 育者, 遂其生也.
위(位)는 그 자리를 편안히 함이요, 육(育)은 그 삶을 이루는 것이다.
自戒懼而約之, 以至於至靜之中無所偏倚而其守不失, 則極其中而天地位矣, 自謹獨而精之, 以至於應物之處無少差謬而無適不然, 則極其和而萬物育矣.
계구(戒懼)로부터 요약히 하여 지극히 정(靜)한 가운데에 편벽되고 치우친 바가 없어 그 지킴이 잃지 않는 데 이르면, 그 중(中)을 지극히 하여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편안히 할 것이요, 근독(謹獨)으로부터 정(精)히 하여 사물(事物)을 응(應)하는 곳에 조금도 잘못됨이 없어 가는 곳마다 그렇지 않음이 없는 데 이르면, 그 화(和)를 지극히 하여 만물(萬物)이 생육(生育)될 것이다.
蓋天地萬物, 本吾一體.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이 본래 나와 일체(一體)이다.
吾之心正, 則天地之心亦正矣, 吾之氣順, 則天地之氣亦順矣.
그리하여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天地)의 마음이 또한 바르고,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天地)의 기운이 또한 순하다.
故, 其效驗, 至於如此, 此, 學問之極功, 聖人之能事, 初非有待於外, 而修道之敎, 亦在其中矣.
그러므로 그 효험(效驗)이 이와 같음에 이르는 것이니, 이는 학문(學問)의 지극한 공효(功效)요, 성인(聖人)의 능사(能事)인데, 애당초 밖에 기다림이 있지 않고, 수도(修道)의 가르침도 또한 이 안에 들어 있다.
是其一體一用, 雖有動靜之殊, 然, 必其體立而後用有以行, 則其實, 亦非有兩事也.
이는 한 체(體)와 한 용(用)이 비록 동(動)․정(靜)의 다름이 있으나 반드시 그 체(體)가 선 뒤에 용(用)이 행해질 수 있으니, 그렇다면 그 실제는 또한 두 일이 있는 것이 아니다.
故 於此, 合而言之, 以結上文之意.
그러므로 여기에서 합하여 말씀하여 위 글의 뜻을 맺은 것이다.
右, 第一章.
우(右)는 제1장(第一章)이다.
子思述所傳之意以立言, 首明道之本原出於天而不可易, 其實體備於己而不可離, 次言存養省察之要, 終言聖神功化之極, 蓋欲學者於此, 反求諸身而自得之, 以去夫外誘之私而充其本然之善, 楊氏所謂一篇之體要是也.
자사(子思)가 전수(傳授)한 바의 뜻을 기술(記述)하여 글을 지어, 맨 먼저 도(道)의 본원(本原)이 하늘에서 나와 바뀔 수 없음과 그 실체(實體)가 자기 몸에 갖추어져 떠날 수 없음을 밝혔고, 다음에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의 요점을 말하였고, 맨 끝에 성신(聖神)의 공화(功化)의 지극함을 말하였으니, 배우는 자들이 이에 대하여 자기 몸에 돌이켜 찾아서 스스로 터득하여 외유(外誘)[외물의 유혹]의 사사로움을 버리고 본연(本然)의 선(善)을 충만하게 하고자 한 것이니, 양씨(楊氏)[양시(楊時)]가 이른바 '한 편의 체요(體要)'라는 것이 이것이다.
其下十章, 蓋子思引夫子之言, 以終此章之義.
이 아래 열 장(章)은 자사(子思)가 부자(夫子)의 말씀을 인용(引用)하여 이 장(章)의 뜻을 맺으신 것이다.
◼ 중용(中庸)과 중도(中道)
중용(中庸)은 유교적 개념이고, 중도(中道)는 불교적 개념이다. 그런데 이 둘을 혼돈해 혹은 같은 것이라 하고, 혹은 다른 것이라 말하는데 이 둘은 전혀 다른 사상이다.
○ 중용(中庸)이란
중용(中庸)이란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책 이름이기도 한데, 그 책 속에서 "희(喜), 로(怒), 애(哀), 락(樂)이 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희로애락이 발해 절도에 맞는 것(적당하게 사용되는 것)을 화(和)라고 말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고 했다.
이에 대해, 주자(朱子)는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중(中)이라는 것은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이고, 용(庸)이란 평상(平常)의 뜻이다( 中者 不偏不倚無過不及之名 庸 平常也)"고 했다.
또한 주자는 용(庸)을 떳떳함이라 했으며, 주자의 스승 격인 정자(程子)는 "용이라는 것은 천하의 일정한 이치(庸者 天下之定理)"라고 했다.
그리고 주자는 "희노애락은 정(情)이다. 미발(발하지 않은)한 것은 성(性)이다. 치우치는 바가 없는 까닭에 이를 중이라 한다. 발해져서 모든 것이 절도에 맞음은 정의 바름이다. 어그러지는 바가 없는 까닭에 이를 화(和)라 한다(喜怒哀樂 情也 其未發 則性也 無所偏倚 故謂之中 發皆中節 情之正也 無所乖戾 故謂之和)"고 했다.
그리고 중용에 대해서는 "중을 천하의 대본이라 하고, 화를 천하의 달도(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요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라 했다.
이렇듯 중국에서 말하는 중용(中庸)이라는 것은 유유자적하고, 희로애락이 치우침이나 과부족(過不足)이 없이 알맞은 상태인 정도에 대한 표현으로, 편벽되지 않는 마음가짐(不偏不倚無過不及之謂中)이다.
따라서 때와 장소에 맞게 말하고, 처신(和)하는 것을 평상의 생활로 꾸준히 떳떳하게 항상 지속(庸)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을 실천하면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며, 치국(治國)할 수 있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중용(中庸)이란, 있다는 생각도 떠나고, 없다는 생각도 떠나고(離有邊 離無邊),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평상심으로 정도(正道)를 지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중용의 도(道)에는 절대 선(善)이나 절대 악(惡)이 있을 수 없으며, 때와 장소에 따라 어느 누구에게나 알맞은 타당한 것이 중용의 길이다. 중용은 어쩌면 마음의 균형(均衡)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결국 중용이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아주 적절한 상태 또는 그 수준을 택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 선택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하는데 있어서 과(過)하지도 않고 불급(不及)하지도 않는 아주 적절한 정도를 선택하는 일을 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중용이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 하며,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중용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도덕적 미덕에 대해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극단과 극단 사이의 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뿐이라'고 하면서, 만용과 비겁의 중간인 용기, 교만과 비굴의 중간인 긍지, 낭비와 인색의 중간인 검소를 말했다.
그는 또한 주어진 상황에서 중용을 식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동기를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는 중국의 중용사상에서 바로 '화(和)'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렇게 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미덕인지 아닌지를 그때그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실천적 지혜(實踐的智慧)'라 했다.
그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을 다루는 과학지식과 달리, 이 실천적 지혜는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다루기 때문에 이것을 특정상황을 인식해서 선(善)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의 이성적이고 진실한 상태라고 정의했다.
○ 불교의 중도(中道)란?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에 나타나는 '중(中)'은 '가운데'라는 뜻이 아니고, '정확하다, 올바르다'는 뜻으로 바를 정(正)자와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불교의 중도(中道)는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도리를 말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양극단의 중간이 아니고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을 말한다.
중도사상은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나 실천면에 있어서나 모순 상극된 상대적인 차별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이 융합된 절대 원융자재(圓融自在)한 대원리이다. 이 사바세계의 현실은 모순 상극이어서 곳곳에 언제나 싸움이 그칠 사이 없다.
그래서 중도에 있어서는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 번뇌에 의해서 부지 중 어떤 것에 집착하려고 하는 그 어떠한 치우침도 모두 버려야 할 것이 강조된다.
범부중생은 나와 너, 유와 무, 이것과 저것, 양과 음, 강과 약, 흑과 백 등 일체의 사물을 2분법적 차별상으로 분별한다. 이런 2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혀, 좋고 나쁨, 내편 네편, 승 패와 같이 좌우를 구별하는 데에서 갈등과 투쟁이 생긴다.
따라서 세상만사의 이치를 상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데서 추함이란 관념이 나오고, 선(善)을 좋다고 생각하는 데서 악(惡)의 관념이 생긴다.
이와 같이 천편일률적으로 양쪽을 극단적으로 분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깨끗하다 더럽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와 같은 흑백논리처럼 양 극단에 치우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쉬운 예로 부부관계를 생각해보자, 남편과 아내라는 남여를 초월한 자리에 서게 되면 남자는 남자대로의 특성을 인정하고, 여자는 여자로서의 특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의 똥고집도 인정하게 되고, 여자들의 시기질투도 이해가 된다.
어느 정도의 단계에 올라서 버리면 거기가 바로 중도의 자리이다. 초월의 자리, 궁극의 자리에 서고 보면 다 이해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남남끼리 만나 일심동체 부부관계가 바로 중도의 자리이다.
약점 없는 완벽한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서로가 극진히 사랑한다면 그런 약점을 다 덮어버리고 부부가 사랑으로 용서하고 융합하게 된다. 그래서 아무 갈등 없이 아늑한 보금자리를 꾸며 오손 도손 자식 낳고 잘 산다면, 그것이 바로 이상적인 중도(中道)인 것이다.
중도란 ‘양변의 극단을 여윈’ 그런 말이다. 세상의 모든 시끄러움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불협화음에서 생긴다. 하모니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처럼, 서로 상대를 이해하고 남의 주장을 존중해 상생이 이루어지면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그러므로 지극한 중도는 지혜와 자비로 귀결된다. 무조건 하나로 통일하려는 발상은 또 다른 획일주의이며, 제2, 제3의 갈등을 낳는 뿌리가 된다.
사물을 좌와 우, 흑과 백, 많고 적음 등으로 양극화 2분화해서 그 중 하나로 모든 것을 통일시키려는 독선주의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양변을 아울러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지혜, 그리하여 초월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경지, 그것이 중도(中道)이다.
이러한 중도란 팔정도(八正道)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지탱되는 준엄한 도(道)이며, 아무런 걸림 없이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고, 올바르게 관찰하는 거기에 깨달음이 있다고 했다.
즉, 어리석은 중생의 생각으로 구성한 양극단의 상대적인 개념을 모두 근거 없음을 밝혀내서 부정하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수행을 높이 쌓아 번뇌와 무명(無明)을 탁 깨뜨려 버리면 허공처럼 청정하고 확 트인 참마음 자리가 열린다. 여기에는 한 점의 속박도 치우침도 없다. 이것을 ‘중도의 경지’라고 한다.
즉, 중도란 양변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므로 중용과는 다르다. 쌍차쌍조(雙遮雙照)를 내용으로 하는 중도를 바로 알게 되면, 동서양의 종교나 철학이 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금강경'에 "일체 만법이 모두 불법이다(一切法皆是佛法)"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중도란 일체만법, 일체 모든 진리를 융합한 우주의 근본원리임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중도사상을 알고 보면 일체만법이 불교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중도사상을 모를 때는 불교는 불교, 유교는 유교, 무슨 철학은 무슨 철학, 유신론이든지 유물론이든지 각각 다 다르지만 중도사상을 바로 알게 되면, 이 모두가 불교에 통합된다.
따라서 중도(中道) 앞에서는 우매한 중생들이 무명에 끄달려서 나다 너다, 옳다 그르다, 높다 낮다, 많다 적다고 하는 등의 온갖 분별이 봄 눈 녹듯 없어진다. 이와 같이 중도는 바르게 깨친 법의 안목으로서 치우침이 없는 부처의 경지를 뜻하며, 중도의 완성은 불교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 결론
인류역사에 있어서 기원전 500년은 참으로 의미 깊은 시기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욱한 원시세계에서 비로소 인류문명에 세련된 지성(知性)이라는 고도의 정신문화가 성립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문명, 인도에서는 불교, 중국에서는 유교가 성립됐다. 이 같은 시기에 중용 혹은 중도를 취한 공자(孔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유사한 특징을 지녔었다는 것은 더욱 신기하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공자의 중(中, 희로애락의 미발상태)의 개념보다는 화(和)의 개념에 가깝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인간의 기질적 특징이 작용할 때 과다하거나 부족하지 않는 상태, 예컨대 만용을 부리거나 비겁하지 않는 상태의 것을 용기라고 하듯이 실천적 행위로서의 덕성(virtue)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유가의 중용은 인성론적, 행위론적 수준만의 개념이 아니라 우주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중용에서는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에 따름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 했다.
또 "성(誠)은 하늘의 도리이고, 성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라고 한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라고 해서, 우주와 사람의 본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와같이 중용(中庸)은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중간쯤이란 개념이다.
이에 비해 불교의 중도(中道)는 유무(有無), 진속(眞俗), 염정(染淨), 생사(生死) 등 양변의 분별을 여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중간도 아니다. 양변이 원융무애(圓融無碍)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양변이 합쳐 하나가 된 것도 아니다. 이것을 융이불일(融二不一)이라 한다. 원융무애란 서로 모순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떠나서 양변이 거리낌 없이 통해버리는 것을 말한다. 일체가 거리낌 없이 원만하게 껴안아 받아들이는 경지이다.
산골 오두막에 단 둘이 사는 노부부가 서로 아픈 곳을 보살펴주고 감싸주며 정답게 사는 모습, 마치 이쪽 개울물과 저쪽 개울물이 합쳐져서 한 물이 되듯, 그리하여 잔잔한 물처럼 사는 그 게 바로 중도의 참모습이다.
이상에서 논한 것들을 정리해보면, 불교에서 중도는 일체 만법이 모두 불법이다(一切法皆是佛法)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일체 모든 진리를 융합한 우주의 근본원리임을 인식해서 이것을 신앙생활에 실천하는 것이고,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윤리 도덕적인 측면, 사회 처세적인 측면에서의 중용을 중심으로 다룬다.
그래서 개인이나 사회 모두가 정신적 완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전제를 두고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하면, 현실적인 세계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정신적인 세계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붓다의 중도에 귀속될 것이다.
이에 따라 붓다의 중도가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보다 더 높은 궁극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몸뚱이의 가치를 줄이고 정신적 가치를 늘리면서 심신을 끊임없이 고도의 정신세계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정이 그러함을 인정한다면 중용은 최종적으로 붓다의 중도 개념으로 통합될 것이고 ,인류는 보다 높은 진리를 추구하면서 무한의 정신세계로 고양돼 갈 것이다.
▶️ 發(필 발)은 ❶형성문자로 発(발)의 본자(本字), 发(발)은 간자(簡字), 彂(발)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필발머리(癶; 걷다, 가다)部와 부수(部首)를 제외한 글자 殳(몽둥이 수)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필발머리(癶)部는 발을 좌우(左右)로 벌리다에서 벌리는 일, 弓(궁)과 부수(部首)를 제외한 글자 殳(수)는 치는 일, 음(音)을 나타내는 癹(짓밟을 발)은 나중에 풀을 밟아 죽이는 것이라고 일컬어지지만, 본디는 물건을 치거나 튀기거나 하는 일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發자는 '피다'나 '쏘다', '드러나다', '밝히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發자는 癶(등질 발)자와 弓(활 궁)자, 殳(창 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發자의 갑골문을 보면 癶자와 又(또 우)자, 矢(화살 시)자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도망가는 사람을 향해 화살을 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發자의 본래 의미는 '쏘다'나 '발사하다'였다. 그러나 금문에서부터는 矢자가 弓자로 바뀌었고, 소전에서는 又자가 몽둥이를 들고 있는 모습의 殳자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의 發자는 활과 몽둥이를 들고 누군가를 뒤쫓아 가는 모습이 되었다. 發자는 본래 화살을 쏜다는 뜻이었지만 누군가를 추격하기 위해 발자국을 따라가는 모습에서 '나타나다', '들추다', '밝히다'라는 뜻이 파생되었다. 그래서 發(발)은 (1)차, 배, 비행기 따위의 출발을 나타내는 접미어 (2)지명(地名)이나 날짜를 나타내는 명사(名詞) 다음에 쓰이어 전신(電信), 전화(電話) 등의 발신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피다 ②쏘다 ③일어나다 ④떠나다 ⑤나타나다 ⑥드러내다 ⑦밝히다 ⑧들추다 ⑨계발하다 ⑩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⑪빠른 발 모양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쏠 사(射), 펼 전(展), 세울 건(建), 창성할 창(昌), 우거질 번(蕃), 성할 성(盛), 설 립(立), 세울 수(竪), 일어날 기(起), 일 흥(興),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붙을 착(着)이다. 용례로는 법령을 공포하거나 명령을 내림을 발령(發令), 증서나 영장 따위를 발행하는 것을 발부(發付), 소식이나 우편이나 전신 등을 보내는 것을 발신(發信), 채권이나 승차권 따위를 발행함을 발권(發券), 움직이기 시작함을 발동(發動), 마음과 힘을 떨쳐 일으킴을 발분(發奮), 총포나 활 따위를 쏨을 발사(發射), 한 상태로부터 더 잘 되고 좋아지는 상태로 일이 옮아가는 과정을 발전(發展), 어떤 일을 생각해 내는 것 또는 그 생각을 발상(發想), 무슨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냄을 발심(發心), 의견을 내놓음이나 무엇을 생각해 냄을 발의(發意), 땅 속에 묻힌 물건을 파냄을 발굴(發掘), 미개지를 개척하여 발전시킴을 개발(開發), 숨겨진 물건을 들추어 냄을 적발(摘發), 길을 떠남 또는 일을 시작하여 나감을 출발(出發), 일이 자주 일어남을 빈발(頻發), 불이 일어나며 갑작스럽게 터짐을 폭발(爆發), 범죄 사실을 신고하여 처벌을 요구하는 행위를 고발(告發), 액체나 고체가 그 표면에서 기화함을 증발(蒸發), 정당하지 못한 일이나 숨기고 있는 일을 들추어 냄을 일컫는 말을 발간적복(發奸摘伏), 죄나 잘못 따위가 없음을 말하여 밝힐 길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발명무로(發明無路), 장차 운이 트일 땅이라는 뜻으로 좋은 묏자리를 일컫는 말을 발복지지(發福之地), 강성해지기 위하여 분발하다는 뜻으로 개인이나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분발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발분도강(發憤圖强), 일을 이루려고 끼니조차 잊고 분발 노력함을 일컫는 말을 발분망식(發憤忘食), 사냥개를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가리켜 잡게 한다는 뜻으로 시문 따위의 빼어나고 웅대함을 평하는 말을 발종지시(發踪指示) 등에 쓰인다.
▶️ 皆(다 개)는 ❶회의문자로 사람이 줄을 짓는다는 뜻의 比(비)와 말함을 뜻하는 白(백)으로 이루어졌다. 모두 같이 말하다의 뜻이 전(轉)하여 죄다 또는 함께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皆자는 '다'나 '모두', '함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皆자는 白(흰 백)자와 比(견줄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皆자의 금문을 보면 白자가 아닌 曰(말씀 왈)자가 쓰여 있었다. 比자가 서로 나란히 서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고 曰자가 ‘말’을 뜻하니 皆자는 여러 사람이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皆자는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목소리를 낸다는 의미에서 '모두'나 '다 함께'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皆자는 단독으로 쓰이기보다는 다른 글자와 결합해 '모두'라는 뜻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皆(개)는 ①다(=總), 모두 ②함께, 다 같이 ③두루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④견주다(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기 위하여 서로 대어 보다), 비교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 실(悉)이다. 용례로는 일정한 기간 동안에 휴일 외에는 하루도 빠짐 없이 출석 또는 출근함을 개근(皆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일함을 개로(皆勞), 일정한 부분의 산림을 일시에 모두 베어 냄을 개벌(皆伐), 다 또는 모두를 개시(皆是), 모든 사람이 말하되 라는 개왈(皆曰), 남에게 빌었던 것을 남김 없이 다 갚음을 개제(皆濟), 조세 따위를 남김없이 다 바침을 개납(皆納), 전혀 없음을 개무(皆無), 거의 모두나 대부분을 거개(擧皆), 거의 다를 기개(幾皆), 모두나 다를 실개(悉皆), 지구와 태양과의 사이에 달이 들어가서 태양의 전부 또는 일부가 달에 의하여 가려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을 개기일식(皆旣日蝕), 누구든지 삼생을 통하여 불도를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개성불도(皆成佛道), 온 산의 풀과 나무까지도 모두 적병으로 보인다는 뜻으로 적의 힘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찮은 것에도 겁냄을 이르는 말을 초목개병(草木皆兵), 사람은 있는 곳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니 그 환경을 서로 바꾸면 누구나 다 똑같아 진다는 말을 역지개연(易地皆然),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나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세상일은 무엇이나 내 몸가짐에 대한 깨우침이 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 이미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다른 나머지도 다 이와 같음을 일컫는 말을 여개방차(餘皆倣此), 온 세상이 다 흐리다는 뜻으로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바르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거세개탁(擧世皆濁) 등에 쓰인다.
▶️ 中(가운데 중)은 ❶지사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물의 한가운데를 상하로 통하는 세로 금으로 중심, 중앙을 뜻함과 형제를 위로부터 차례로 伯(백), 仲(중), 叔(숙), 季(계)라고 일컬을 때의 仲(중)으로서 쓰인 것이다. 또는 깃대의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❷상형문자로 中자는 '가운데'나 '속', '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전에는 中자가 무언가를 꿰뚫는 모습을 그렸던 것으로 해석했었다. 그러나 갑골문이 발견된 이후에는 이것이 군 진영에 깃발을 꽂아놓은 모습을 그려졌던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中자는 진지 중앙에 펄럭이는 깃발을 그린 것으로 '가운데'나 '중앙'을 뜻하고 있다. 中자가 '중앙'이라는 뜻으로 쓰이다 보니 때로는 '속'이나 '안', '마음'과 같은 사물의 중심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中(중)은 (1)일부 한자로 된 명사(名詞) 다음에 붙이어 그 명사의 뜻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과정임을 나타냄 (2)등급 같은 것을 上中下(大中小)로 구분할 경우 그 가운데 등급 중등(中等) (3)중국 (4)장기판에서 끝으로부터 둘째의 가로줄을 이르는 말 (5)마음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가운데 ②안, 속 ③사이 ④진행(進行) ⑤마음, 심중(心中) ⑥몸, 신체(身體) ⑦내장(內臟) ⑧중도(中途) ⑨절반(折半) ⑩장정(壯丁) ⑪관아의 장부, 안건(案件) ⑫가운데 등급 ⑬중매(仲媒), 중개(仲介) ⑭중국(中國) ⑮버금(으뜸의 바로 아래), 둘째, 다음 ⑯가운데에 있다 ⑰부합하다, 일치하다 ⑱맞다, 맞히다, 적중시키다 ⑲급제하다, 합격하다 ⑳해당하다, 응하다 ㉑뚫다 ㉒바르다, 곧다 ㉓가득 차다 ㉔이루다, 이루어지다 ㉕고르다, 고르게 하다 ㉖간격을 두다 ㉗해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바깥 외(外)이다. 용례로는 중도에서 끊어짐을 중단(中斷), 한가운데를 중심(中心), 사방의 중심이 되는 곳을 중앙(中央), 사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나 자리 중추(中樞), 일이 되어 가는 동안 중도(中途), 치우침이나 과부족이 없이 떳떳하며 알맞은 상태나 정도를 중용(中庸), 사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나 자리를 중추(中樞), 두 사물의 사이를 중간(中間), 일을 중도에서 그만 둠을 중지(中止), 중간에서 이어줌을 중계(中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함을 중립(中立), 길을 가고 있는 동안 도중(途中), 하늘이나 하늘 가운데를 공중(空中), 마음 속을 심중(心中), 도시의 안을 시중(市中), 정신을 집중시킴을 열중(熱中), 눈의 안이나 마음속을 안중(眼中), 코의 밑과 윗입술 사이의 우묵한 곳을 인중(人中), 돌에 박힌 화살촉」이라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하면 때로는 믿을 수 없을 만한 큰 힘이 나올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중석몰촉(中石沒鏃), 쏜 화살이 돌에 박힌다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하면 때로는 믿을 수 없을 만한 큰 힘이 나올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중석몰시(中石沒矢), 터무니없는 말로 헐뜯거나 남을 해치려고 속임수를 써서 일을 꾸밈을 일컫는 말을 중상모략(中傷謀略), 일을 하다가 끝을 맺지 않고 중간에서 그만 둠을 일컫는 말을 중도이폐(中途而廢), 마음속의 욕망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외부의 사악을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함을 이르는 말을 중경외폐(中扃外閉), 중원의 사슴이라는 뜻으로 천자의 자리 또는 천자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중원지록(中原之鹿), 중립을 취하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중립불의(中立不倚), 보통 사람은 감당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중인불승(中人弗勝), 마음속에 일정한 줏대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중무소주(中無所主), 덕성이 발라서 과불급이 없는 화평한 기상을 일컫는 말을 중화지기(中和之氣), 시작한 일을 완전히 끝내지 아니하고 중간에 흐지부지함을 일컫는 말을 중도반단(中途半斷) 등에 쓰인다.
▶️ 節(마디 절)은 ❶형성문자로 莭(절)의 본자(本字), 节(절)은 간자(簡字), 㔾(절)은 고자(古字)이다. 음(音)을 나타내는 卽(즉; 먹을 것을 많이 담은 그릇 앞에 사람이 무릎 꿇고 있음, 절)과 대나무(竹)의 마디를 나타내는 글자를 합(合)하여 마디를 뜻한다. 병부절(卩=㔾; 무릎마디, 무릎을 꿇은 모양)部는 사람이 무릎꿇고 있는 모양으로, 나중에 대나무 패를 둘로 나누어 약속의 증거로 한 것을 절(卩=㔾; 무릎마디, 무릎을 꿇은 모양)이라 하여, 竹(죽)과 병부절(卩=㔾)部를 합(合)한 자형(字形)은 약속에 쓰는 대나무 패를 뜻하는 셈이지만, 자형(字形)을 갖추기 위하여 병부절(卩=㔾)部에서 나중에 생긴 글자인 卽(즉)을 빌어 節(절)이라 쓴다. 대나무 패는 대나무의 한 마디를 잘라 만들므로 대나무의 마디도 節(절)이라 하고 나중에 마디나 물건의 매듭에도 썼다. ❷상형문자로 節자는 '마디'나 '관절', '예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節자는 竹(대나무 죽)자와 卽(곧 즉)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卽자는 식기를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으로 '곧'이나 '즉시'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節자를 보면 단순히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㔾(병부 절)자이다. 㔾자는 금문에서부터 竹(대나무 죽)자와 卽(곧 즉)자가 결합한 형태가 되어 대나무의 마디를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節(절)은 (1)일부 명사(名詞) 뒤에 붙어 명절(名節)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절기(節氣)를 나타내는 명사 뒤에 붙어 절기의 뜻을 뚜렷이 하여 주는 말 (3)여러 단락(段落)이 모여 하나의 문장(文章), 시가(詩歌), 음곡을 서술(敍述)한 경우에, 그 단락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식물의 마디 ②동물의 관절(關節) ③예절(禮節) ④절개(節槪), 절조(節操: 절개와 지조를 아울러 이르는 말) ⑤철, 절기(節氣) ⑥기념일(記念日), 축제일(祝祭日), 명절(名節) ⑦항목(項目), 사항(事項), 조항 ⑧단락(段落) ⑨박자(拍子) ⑩풍류(風流) 가락 ⑪절도(節度), 알맞은 정도 ⑫절약(節約)하다 ⑬절제(節制)하다 ⑭높고 험하다 ⑮우뚝하다 ⑯요약하다 ⑰초록(抄錄)하다(뽑아서 적다) ⑱제한(制限)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마디 촌(寸)이다. 용례로는 절약하고 검소하게 함을 절검(節儉), 알맞게 조절함을 절제(節制), 절의와 신념 등을 지키어 굽히지 않는 충실한 태도를 절개(節槪), 일의 순서나 방법을 절차(節次), 한 해 동안을 24로 가른 철을 절기(節氣), 아끼어 씀을 절약(節約), 물을 절약함을 절수(節水), 전기를 아끼어 씀을 절전(節電), 일이나 행동 등을 똑똑 끊어 맺는 마디를 절도(節度), 굳은 마음과 변하지 않는 절개를 정절(貞節), 꼭 알맞은 시절을 당절(當節), 사물을 정도에 맞추어서 잘 고르게 함을 조절(調節), 절개를 지킴을 수절(守節), 절개를 지키지 아니함을 실절(失節), 좋은 명절이나 좋은 철을 가절(佳節), 뼈와 뼈를 결합하는 부분을 관절(關節), 부족하거나 잘못된 점을 흠절(欠節), 절개나 지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바꿈을 변절(變節), 절약하고 검소하는 마음을 절검지심(節儉之心), 가지 마디에 또 가지가 돋는다는 절상생지(節上生枝), 나라의 재물을 아껴 쓰는 것이 곧 백성을 사랑함을 이르는 말을 절용애인(節用愛人), 가지 마디에 또 가지가 돋는다는 뜻으로 일이 복잡해 그 귀결을 알기 어려움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절상생지(節上生枝), 절약하고 검소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을 절검지심(節儉之心), 청렴과 절개와 의리와 사양함과 물러감은 늘 지켜야 한다는 말을 절의염퇴(節義廉退), 서릿발이 심한 추위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홀로 꼿꼿하다는 뜻으로 충신 또는 국화를 일컫는 말을 오상고절(傲霜孤節), 아담한 풍치나 높은 절개라는 뜻으로 매화를 이르는 말을 아치고절(雅致高節), 어떠한 난관이나 어려움에 처해도 결코 굽히지 않는 높은 절개를 일컫는 말을 상풍고절(霜風高節), 부절을 맞추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꼭 들어맞아 조금도 틀리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약합부절(若合符節), 재원을 늘리고 지출을 줄인다는 뜻으로 부를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비유한 말을 개원절류(開源節流), 오행의 목기가 성하는 때로 곧 봄철을 달리 이르는 말을 목왕지절(木旺之節), 오행에서 화기가 왕성한 절기라는 뜻으로 여름을 이르는 말을 화왕지절(火旺之節), 복사꽃이 아름답게 피는 때라는 뜻으로 처녀가 시집 가기에 좋은 꽃다운 시절을 이르는 말을 도요시절(桃夭時節)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