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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맛어때
 
 
 
카페 게시글
오늘♬ ⚊ 차맛어때 스크랩 동다송 14
眞 旭 추천 0 조회 79 14.07.10 10: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후기의 고승이며 다도(茶道)의 명인인 초의(草依 : 1786~1865, 본명 張意恂)가 시로써 다도를 설명한 글.
1책. 필사본. 7언시로 총 31송이며 송마다 주를 붙여 본문을 보충했다. 내용은 차의 역사, 차나무의 품종, 차 만드는 법, 차를 끓이고 마시는 법, 차의 생산지와 품질 등을 노래한 것이다. 우리나라 토산차에 관한 것은 6송이 있다. 토산차가 중국 것에 못지 않음을 찬양하고, 토산차를 따는 시기도 중국과 달라 중국책인 〈다경 茶經〉에서 말한 곡우(穀雨) 뒤가 아닌 입하(立夏) 다음이 적당하다고 했다. 이외에 차의 수확과 다도에 관한 저술인 〈다신전 茶神傳〉(8장, 필사본)이 있는데, 내용은 중국의 〈만보전서 萬寶全書〉에서 뽑아 엮은 것이다. 우리나라 차의 역사와 전통다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75년 최범술(崔凡述)이 보련각(寶蓮閣)에서 간행한 〈한국의 다도〉에 두 책의 원문과 번역문이 수록되어 있다

 


第十四頌(原文)

綵莊龍鳳轉巧麗 費盡萬①金成百餠.

[大小龍鳳團 始於丁謂 成於蔡君謨 以香藥合而成餠 餠上飾以龍鳳紋供御者 以金莊成. 東坡詩 紫金百餠費萬②錢]


원문교정(原文校訂)

① 만금(萬金):만냥의 금을 말하는데 다예관본에는 만(萬)으로 되어 있고 석오본에는 만(万)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두 글자는 서로 통하는 자요, 약자이다.

② 만전(萬錢):만냥의 돈을 말하는데 다예관본과 석오본에는 만(萬)자가 각기 다르게 쓰여져 있다. 만(萬)자가 정자이다.


第十四頌(校訂文)

綵莊龍鳳轉巧麗 費盡萬金成百餠.

채장용봉전교려 비진만금성백병.

[大小龍鳳團 始於丁謂 成於蔡君謨 以香藥合而成餠 餠上飾以龍鳳紋供御者 以金莊成. 東坡詩 紫金百

[대소용봉단 시어정위 성어채군모 이향약합이성병 병상식이용봉문공어자 이금장성. 동파시 자금백

餠費萬錢]

병비만전]

 

제14송

오색 비단으로 싼 용봉단다(龍鳳團茶)①는 용봉의 무늬를 아름답게장식했고, 만금(萬金)을 들여서 겨우 백 개의 떡차를 만들었네. [크고 작은 용봉단다는 처음으로 정위(丁謂)②가 만들기 시작하여 채군모(蔡君謨)③가 완성했는데, 향약(香藥)을 넣어 떡차를 만들고, 그 위에는 용과 봉의 문양을 장식하였다. 임금에게 진상하는 차는 금(金)으로 장식하여 만들었다. 소동파(蘇東坡)④의 시(詩)에 「자금색(紫金色) 떡차 백 개에 일만전을 들여서 만드네」라고 하였다]



주(註)

① 용봉단다(龍鳳團茶):용단(龍團) 봉단(鳳團)을 말하는데 크고 작은 대소(大小) 용봉단이 있다. 대관다론(大觀茶論:徽宗)에는 용단(龍團), 봉병(鳳炳)으로 되어 있고, 고려도경(高麗圖經:徐兢)에는 용봉단(龍鳳團)으로, 고려사에는 용봉다(龍鳳茶)로 기록되어 있다. 이 용단 봉병 차는 송나라 때 건안(建安:복건성 건구현)지방의 어용 다원인 북원(北苑)에서 만들어 궁중에 진상하던 덩어리 차로, 표면에 용이나 봉의 문양을 새겨서 금으로 장식하였다. 용단은 용의 무늬를 새긴 차를 말하고, 봉단 또는 봉병이라고 하는 차는 봉의 무늬를 새긴 차를 말한다. 차는 똑같은데 무늬가 다를 뿐이다. 용과 봉의 문양은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일반 서민은 쓸 수가 없다. 용봉차가 만들어진 유래는「선화북원공다록」에 이렇게 나와 있다.「성조(聖朝:宋) 개보(開寶:태조연호:968~975년) 말년에 남당(南唐)을 항복시켜서, 태평흥국(太平興國:태종연호:976~983년) 초년에 용과 봉황의 문양틀을 특별히 비치하고, 사신을 북원에 보내어 단다(團茶)를 만들게 해서 서민이 마시는 것과 다르게 하였다. 용봉차는 대개 이로 부터 시작되었다.」


② 정위(丁謂):송나라 때 사람(962~1033년)으로 장주(長洲:강소성 오현)에서 났다. 자는 위지(謂之) 또는 공언(公言)으로 시 짓기(作詩)를 기뻐하고, 그림 그리기, 음악 등 박학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다. 순화(淳化) 3년에 진사가 되었고 진종 때 구준(寇準)이 재상이 되었을 때 정사에 참여하였다. 진종 때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옥청소응궁(玉淸昭應宮)을 세웠다. 후에 진공(晉公)에 봉해졌다. 그래서 정진공(丁晉公)이라고 부른다. 일찌기 건안다록(建安茶錄) 3권을 저술했다. 복건(福建)의 전운사(轉運使)로 있을 때 건안(建安)의 공다소(貢茶所)의 차밭과 차공장, 기구, 차따기와 제다법 등을 기록한 책이다.


③ 채군모(蔡君謨):북송(1012~1067년)때 서예가(書藝家)로서, 자는 군모(君謨)요, 이름은 양(襄)이다. 복건성 선유(仙遊) 사람으로 시문(詩文)에 밝고 사학(史學)에 정통하며 서법(書法)에 능하였다. 19세에 진사가 되고 인종 때 장주판관(?州判官) 서경유수(西京留守) 복건로전운사(福建路轉運使)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고, 영종 때에는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와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인종의 하문을 받고 다록(茶錄)을 지어서 바쳤고 인종으로부터 군모(君謨)라는 자를 하사받기도 했으며 그가 죽자 신종은 충혜(忠惠)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고 묘비명은 구양수(歐陽脩)가 썼다.


④ 소동파(蘇東坡):북송 때 (1036~1101년) 문학가, 서화가이다.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 이름은 식(軾)이다. 미산(사천성) 사람으로 22세에 진사가 되고 신종 때 밀주(密州) 서주(徐州) 호주(湖州) 등 주지부(州知府)를 지냈고.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다가 황주(黃州)로 유배를 갔다. 철종 때 다시 복직이 되어 한림학사와 예부상서를 역임했다. 당송 8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그가 죽자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했다.



해설(解說)

제14송

제1구:금으로 장식하고 비단으로 싼 용단 봉병의 귀한 차는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 없구나.

제2구:만금을 들여서 만들어도 겨우 백여 개의 덩어리 차 뿐이니 귀하고 값지기 이를데 없네.

원문주:크고 작은 용봉단다가 있는데 이는 정위가 처음 만들기 시작해서 채군모가 완성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었다. 웅번의 북원공다록에는 「대개 용봉차 등은 모두 태종때 만들어진 것으로 함평(咸平) 초에 정진공이 처음으로 다록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많이들 말하기를 용봉단다는 정진공으로부터 비롯 되었다고 한다. 장순민(張舜民)의 화만록(畵漫錄)에도 전운사인 진공이 처음으로 용봉단다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지만 이 말은 전해 들은 것이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채군모가 용단 봉단을 더욱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처음에 용단 봉단을 만들 때는 용뇌(龍腦)의 향료를 섞어서 만들어 진상하였지만, 차에 천성의 향기가 있어 이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쓰지 않게 되었다. 떡차 표면에는 용과 봉의 무늬를 새기고 금(金)으로 장식하였으며 비단으로 쌌다. 진귀한 떡차 한 근에 금이 두 냥이 되는데, 일만 전을 들여서 자금색 떡차 백여 개를 만든다고 하였다. 이 떡차를 만드는 방법은 북원별록(北苑別錄 : 趙汝礪)에 상세히 나와 있다.


제14송의 전체적인 뜻은 송나라 때 북원이라는 어용다원에서 전운사로 있던 정위가 처음 용봉단다를 만들기 시작해서 채군모가 소용봉단다를 만들어 정교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게 하였는데, 이 차를 만드는 비용 만 전을 들여도 겨우 떡차 백여 개에 그치니 실로 진귀하기 비길 데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만든 떡차는 한 근(28 덩어리)에 금2냥이나 되는 비싼 차였다.


인용문헌(引用文獻)

용봉단다에 대한 문헌은 여러 곳에 실려 있는데, 초의선사는 웅번의「선화북원공다록」을 많이 활용하였으며,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내용을 요약해서 골자만 뽑아 썼다. 그리고 소동파의 싯구는「장기(蔣?)가 보내준 차에 화합하여(和蔣?寄茶)」라는 칠언고시(七言古詩)에서 한 구절을 뽑아 쓴 것이다. 그 앞뒤는 다음과 같다. 「청시양폭기천리(淸詩兩幅寄千里) 자금백병비만전(紫金百餠費萬錢) 음아팽초양기절(吟?烹?兩奇絶) 지공투걸번봉전(只恐偸乞煩封纏) 노처치자부지애(老妻稚子不知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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