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연금공약 후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진 영 장관>
"원숭이가 어떻게 사람이 돼?"
예전에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한 친구가 내게 던졌던 질문이다. 놀랍게도 그 친구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걸 진화론이라고 알고 있었다. 우리는 진화론-창조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고, 나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왜 현생인류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꽤나 똑똑했던 그친구가 말도 안되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해치는 진화론에 대해 완전히 귀를 닫았기 때문일 거다. 어떤 주장에 찬성-반대하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창조론자에게 진화론을 설득하려면 창조론을 이해해야 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반론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의 찬성이나 반대는 온전한 입장이라 볼 수 없다.
2년전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복지논란에 불을 지폈을 때 찬성론자들은 '우리 아이들 밥'이란 말을 반복적으로 강조했고, 반대론자들은 ‘이건희 손자에게도 공짜밥을?’이라는 질문으로 맞섰다. '아이들 밥'과 '공짜밥' 둘 다 이성적인 설득이라기보다는 유권자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수사에 가까웠다. 당시 선거에서는 찬성론자들이 승리했지만, 이걸 보편적 복지에 대한 합의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이 기초연금 공약에 대해 말을 바꾸자 어떤 사람들은 다시 보편적 복지의 당위에 대해 의문을 품기 옮겨 시작했다. 2년전 '이건희 손자'를 언급했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이건희 씨를 직접 거론한다.
"이건희에게도 똑같이 20만원을 줘야 하나?"
보편적 복지에 대한 반박이라는 점에서 2년의 질문과 다르지 않다.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꿔 쓸 수 있다.
‘왜 국가가 부자를 도와야 하는가?’
시장주의-작은정부론을 옹호하는 저 질문이 아이러니하게도 반재벌정서라는 한국의 특수한 환경과 만나자 위력이 배가된다. 안그래도 미운털이 박힌 재벌에게 세금을 투입해 돕겠다고 하니 국민들이 이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리 없다. 그런데, 보편적 복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저 질문은 그 자체로 난센스다. 보편적 복지의 핵심은 말 그대로 보편성, 즉 '누구나'라는 것에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복지란 국가의 의무이자 시민의 권리이다. 국가는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든, 적게 벌는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같은 수준의 복지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건희에게도 기초연금을 줘야하나? 물론이다.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며 한국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노인이 혜택을 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 질문이 잘못됐다. 물론 이 원칙이 모든 사회복지정책에 통용 될 수는 없으며, 보편적 복지론자들 역시 모든 복지서비스를 균등하게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복지주의자들은 적어도 교육, 보육, 의료, 노후보장 같은 분야에서 만큼은 이 원칙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이번에 논란이 된 기초연금과 무상보육, 중증 진료비 지원 등 박근혜 정부가 약속했던 복지공약의 대부분도 이런 시각이 녹아있는 정책들이다.
20만원 받으실래요?
역설적인 질문
이건희 씨는 기초연금 20만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단언하건데 그는 분명 기초연금을 지급받길 원치 않을 것이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만약 이건희 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대로 매월 20만원을 받게 된다면 대한민국 모든 노인들이 기초연금을 받는다는 뜻이다. 즉 막대한 복지재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며, 이는 곧 재벌감세 정책의 철회를 강제한다. 전임 정권이 만들어 놓은 재벌감세 정책으로 가장 큰 수혜를 누리고 있는 이건희 씨가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복지정책 도입에 찬성할 리 만무하다. 반대로 '이건희에게 20만원을 주지 말자'는 주장이 힘을 얻을 경우 보편적 복지는 동력을 잃게 되고 부자감세 철회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건희 씨와 재벌에 대한 반감을 담고 있는 주장이 오히려 그들의 경제적 특권을 유지지키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의 전제조건은 부자들의 높은 조세부담이다. 박근혜 정부는 세수부족의 원인을 불경기와 일시적인 세계경제 환경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부자감세를 철회하지 않고 약속했던 복지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복지공약은 재벌감세 정책에 예속돼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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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복지론자들의 관심은 '왜 부자에게 혜택을 주는가'가 아닌, 그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고 있는가'에 있다. 이건희에게 매달 20만원을 주더라도, 이건희 손자에게 공짜밥을 먹이더라도 나라의 복지재정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부자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건희 씨가 경영권을 쥐고 있는 삼성전자의 2010년 법인세 결정세액 추정액은 3조6371억원이었는다. 그런데 이 회사는 각종 감면 혜택으로 이 중 50.7%를 감면받아 1조7929억원만 납부, 실효세율은 11.9%에 불과했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제조업의 실효세율(17.5%)과 중소기업 평균(22%)보다도 크게 낮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최고 부자가 우리나라에서 최고 많은 세금감면혜택(연 1조원 이상)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건희 씨가 복지혜택을 '얼마나 받나'보다는, 세금을 '얼마를 내나'에 관심을 갖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 이건희라는 이름을 가지고 논쟁해야 할 주제가 있다면 '기초연금'이 아닌 '재벌감세'여야 옳다.
'무상복지'라는 괴상한 표현
'무상복지'라고?
'무상복지'라는 표현은 여러모로 문제가 있다. 첫째, 대부분의 국민들이 세금을 낸다. 둘째, 복지는 국가의 의무이자 시민의 권리다. 셋째, 가치중립적이지 못하다. 개인이 마땅히 제공받아야 할 복지권에 대해 유상-무상을 논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마치 복지가 돈을 주고 사는 재화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다. '공짜밥'이라는 저급한 표현도 이런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복지란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상품이 아닌, 국가가 마땅히 제공해야 할 공공재다. 복지가 '사고 파는 것'이 아닌 이상 '유상', '무상', '공짜' 같은 수식어들은 모두 어색해진다.
지난주 정부는 기초연금 공약의 후퇴-수정을 사과하면서도 그것의 불가피함을 호소했을 뿐 65세이상 모두에게 2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던 원안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제 정치권에서는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하는 논란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지난 대선에서 보편적 복지의 확대를 주장하던 세력이 집권했고, 그것을 더 강하게 주장하는 야당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분간 정치권에서는 보편적 복지라는 기조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대한민국 국민 다수가 여전히 보편적 복지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지난주 JTBC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기초연금을 차등 지급하는 정부안에 대해 찬성한다는 의견이 54.2%, 반대한다는 의견이 35.9%로 나타났다. 많은 국민들이 여전히 복지를 시혜-자선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부가 어떤 정책을 채택했다하더라도 국민들이 이를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보편적 복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거부감이 여전히 '이건희에게도 복지를?' 따위의 감정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으며, 이러한 정서(몰이해)가 복지국가로 도약하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는 데 있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던 유시민 씨는 저서 '국가는 무엇인가'에서 <보편적 복지 VS 선별적 복지>논쟁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현실에서는 두 가지 원칙이 공존할 수밖에 없으며 상호보완적으로 작동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인 환경이라면 저 주장이 옳다. 그러나 다수 국민이 보편적 복지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이라면 저 논쟁은 유효하다. 선별적 복지만으로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기초연금 공약 파기는 본격적인 복지논쟁을 불러왔다. 충분히 토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적인 토론은 상대의 주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상급식 논란에 온나라가 들썩였던 것이 2년전 일이지만 어떤 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상대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귀를 막은 채 고장난 확성기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들과 정상적인 토론은 불가능하다. 반론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의,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찬성이나 반대는 온전한 주장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이건희를 돕는가?'
이제 저런 것은 주장이 아닌 '공해'다.
출처 : 정치블로그 ☞ <다람쥐주인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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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건희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 당연히 받아야 지요.
다만 가진게 많으니 세금을 더 많이 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