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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의 시사토론 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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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토론 ●자유게시판 5.18의 증거기록과 증언에 근거한 시간별 전개과정(이데아의 글)
저스티스 추천 0 조회 272 10.01.09 22:04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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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1.10 02:46

    첫댓글 <전북 14개 대학 및 전남 20개 대학에 은밀히 침투> 전국 대학입니다. 이것은 문교부의 휴교령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문교부의 휴교령에 예외가 없었어요. 서울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오늘날과 같은 전경이 없었던 시대에는 군인이 문교부 휴교령 지원 업무를 수행했었습니다.

  • 10.01.10 02:52

    <17일 밤 전남대 총학생회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총학생회 사무실에 있던 7명 중 3명은 무사히 빠져나가고> 17일은 토요일 밤이고, 18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그 어느 학교에서도 방과 후의 학교 사무실은 학생이 지키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휴교령이 내렸는데 사무실을 지켰다구요?

  • 10.01.10 02:59

    "조선대 방송실에서 선후배들이 모여 철야 간담회를 하고 있는데" 철야 간담회를 하였습니까? 어떻게 토요일 밤부터 밤샘 작업을 하는 일이 조선대와 전남대에서 똑같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 밤샘 작업은 서울의 각 대학교에서도 똑같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평일에도 사무실로 사용되는 학교 건물은 야간에 학생들이 이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토요일 밤부터 운동권이 밤샘 작업을 하는 일이 전국 대학교 학생회 사무실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19일부터 시위 분위기를 더욱 띄워 20일에 전국적 민중봉기(김대중의 내란)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맞는가요?

  • 10.01.10 03:03

    <신군부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 발표.> 이것 보세요. 신군부라는 용어는 광주사태 이후 15년 지나 남한에 등장한 용어입니다. 어떻게 1980년 5월에 신군부라는 용어가 없었는데 신군부가 발표할 수 있으며, 신군부가 발표하였다는 보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 10.01.10 03:11

    <방송국 점령 작전개시> 어떻게 하는 것이 방송국을 점령하는 것인가요?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전국의 모든 경계목표물을 계엄군이 경계합니다. 그런 비상계엄령법은 노무현 정권 때도 이명박 정권 때도 동일한 것이며, 어느나라에서나 공통적입니다. 그리고 주요 경계목표물 경계 업무는 점령이 아닙니다. 자, 5월 21일 진종채 2군 사령관이 초병복무규율을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요? 19일 기독교 방송국에서 (제가 북한군으로 추정하는) 폭도들에게 초병이 M-16을 탈취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두 명의 초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던 것은 점령이 아니었습니다.

  • 10.01.10 03:14

    31사단이란 광주향토사단을 일컫는 것임을 알지요? 광주에는 오로지 광주향토사단 병력만 동원되었습니다. 그것이 18일 상황이었습니다.

  • 10.01.10 03:16

    <7공수 33.35대대가 31사단 96연대에 배속.(31사단 전투상황보고서)>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7공수 33.35대대는 당시 31사단 사단장이었던 김대중의 인맥 정웅 소장의 명령 하에 있었습니다.

  • 10.01.10 03:24

    [7공수 33.35대대가 배속된 31사단 96연대가 호남신학대 / 서원보건전문대 / 동신전문대 / 대건신학대 / 서강전문대 / 성인경상전문대 / 기독간호전문대 / 송원전문대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점령. (31사 전상보)

    96연대가 광주시내 전 방송국 KBS / MBC / CBS / VOC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점령. (31사 전상보)] 이것을 좀 정확히 이해합시다. 만약 엄청난 수의 공수부대원들이 동원되었다는 착각을 일으키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엄청난 거짓말이니까요. 공수부대가 점령한 것이 아닙니다. 광주향토사단의 96연대는 보병 부대였어요. 말이 연대이지 실제 병력 수는 적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실제 동원이 가능한 소대는

  • 10.01.10 03:34

    2개 소대밖에 없었습니다. 그 중 한 소대를 한동석 당시 소위가 인솔하며 광주시내 여러 방송국에 초병을 세웠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자세히 설명해야 하는 이유는 5월 21일의 집단발포설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5월 21일 도청을 경계하던 7공수에는 실탄이 없었습니다. 방송국 등을 경계하다가 시민군에게 밀려 5월 21일 오후 한 시 경 96연대 2개 소대가 핼기로 광주를 탈출하였을 때 사지에 남겨진 7공수 대대장이 실탄을 요청하였으며, 한동석 소위가 2개 소대가 보유하고 있던 경계근무용 실탄 200발을 건네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7공수가 96연대에 배속되어 있는 부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10.01.10 03:41

    <전남대 주변에 31사단 96연대 및 전투경찰 7백24병 투입 배치.> 위에서 말한 대로 광주향토사단 96연대에는 그렇게 많은 병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전경이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전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riot police로서 전경을 이해하는데, 그런 의미에서의 전경은 1987년에 전두환 대통령이 창설하셨습니다. 88서울올림픽 때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면 외국인 보기에 좋지 않기에 그 문제점을 해결하시기 위해 riot police를 창설하셨으며, 지금 riot police는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습니다. 그런데 1980년의 전경은 주로 대공 업무의 전경을 말했습니다. 사실 광주사태 때

  • 10.01.10 03:49

    극소수의 전경이 동원되기는 했었으나, 그 외의 경찰은 나이 4, 50 대의 기동경찰이었습니다. 광주사태 첫 날에 수십 명의 경찰관이 시위대에 인질로 납치되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7공수가 동원되어야 했던 이유도 그들이 나이 많은 기동경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전남대 주변에 31사단 96연대 및 전투경찰 7백24병 투입 배치.>는 위의 일지 작성자가 짜집기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광주에 그렇게 많은 수의 전투경찰이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경찰병력 수가 많았다면 어떻게 광주사태가 일어난지 한시간 만에 광주 전 지역 파출서들이 파괴당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요?

  • 10.01.10 03:51

    위의 일지 순서대로 우선 5월 18일 오전 상황을 여기까지만 답변 드리고, 이데아님의 반박이나 답변이 있으면 제가 계속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저의 답변이 너무 길어져도 이데아님이 반박하시기 힘드실테니까요.

  • 작성자 10.01.10 03:59

    * 네 늦은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 10.01.10 17:42

    저스티스님 방금 가보았습니다. 휼륭하게 그림 파일을 만들어 올리셨더군요. 시간이 무척 걸리셨겠습니다. 옮기시기 편하도록 앞으로는 댓글뿐 아니라 새글로도 제가 답변을 달아드려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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