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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지난 2008년, 현재까지 연구된 철저한 근거자료에 입각하여 정리한, 5.17 군사쿠데타 직후부터 19일 0시까지의 각종 근거기록에 의거한 각시분별 상황일지로서, 19일 0시부터 27일 최후항쟁까지의 자료 또한 충분히 보유하고 있으나, 시간관계상 아직 이와 같이 시분단위로 모두 정리하지는 못하여 미루어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어떻게 5.18이 시작되고 상황이 악화되어 가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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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전개과정을 정치적 배경을 배제하고, 발발 초기인 17일 심야부터 18일 자정까지의 모든 폭력발생 과정만을 시간적으로 배열해 봅니다.
80년 5월 17일
23시 전후.
서울에서 김대중, 예춘호, 문익환, 김동길, 고은, 이영희,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치열, 김진만, 오원철, 김종락, 장동운, 이세호 등 26명의 각계인사들을 급습하여 연행.
계엄군이 전북 14개 대학 및 전남 20개 대학에 은밀히 침투. 대학내 방송실을 무력 점거 후 작전개시.
"17일 밤 전남대 총학생회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11시경에 군부대 트럭이 교내로 들어왔다. 그들은 통신 점검차 들렀다고 하면서 횡설수설했다. 자정이 되자 공수들이 정문과 후문으로 계속 밀어닥쳤다. 총학생회 사무실에 있던 7명 중 3명은 무사히 빠져나가고, 권창수, 오진수, 나 외에 1명이 새벽 1시경 공대 5호관에서 붙잡혔다." (구술 : 이승룡,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이하 현사연이라 약칭) 조사)
"조선대 방송실에서 선후배들이 모여 철야 간담회를 하고 있는데, 31사단 소속 통신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학교 통신시설을 점검한다며 들어왔다. 형식적인 점검 후 그들이 나가자 나는 화장실에 갔다. 잠시 후 방송실에서 험한 욕설이 흘러나오고 무엇이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교내에 계엄군이 진입한 것이다. 그때가 밤 12시경이었다." (구술 : 진호림, 현사연 조사)
->계엄군의 폭력
23시 40분.
신군부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 발표.
24시 전후.
전북 금마에 주둔하던 7공수 중 일부대대가 전북대를 급습. 철야 중의 총여학생회장 문희선, 김성숙 등 35명의 학생들을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 후 체포.
35명 중 전북대 농학과 2학년 이세종 사망.(18일 새벽 1시경 시신 발견.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 당한 후 추락. 두개골 복합골절. 안면부, 흉부, 복부, 사지 등 타박상)
전북대 34명 및 원광대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23명의 학생들이 연행.
->계엄군의 폭력 및 살인
80년 5월 18일
00시 05분
7공수 33.35대대가 광주에 도착 각 대학 및 방송국 점령 작전개시.
군과 합동수사본부(안기부, 경찰, 보안대)는 새벽 5시경까지 학교와 예비검속 대상자의 가택 등을 수색.
01시.
(17일 23시~24시 사이 31사단 소속병들이 각 대학에 침투 방송실을 점거한 상태.)
7공수 33.35대대가 전남대를 급습. 철야 중의 학생들을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 후 체포.
->계엄군의 폭력.
02시.
7공수 33대대 전남대와 광주교대 점령 완료. 전남대 69명의 학생들을 운동장에 옷을 벗겨 꿇어 앉히고 곤봉과 군화발로 쿠타 후 연행.
7공수 35대대 조선대와 전남대 점령 완료. 조선대 43명의 학생들을 운동장에 옷을 벗겨 꿇어 앉히고 곤봉과 군화발로 쿠타 후 연행.
->계엄군의 폭력.
02시 26분.
7공수 33.35대대가 31사단 96연대에 배속.(31사단 전투상황보고서)
02시 29분.
7공수 33.35대대가 배속된 31사단 96연대가 호남신학대 / 서원보건전문대 / 동신전문대 / 대건신학대 / 서강전문대 / 성인경상전문대 / 기독간호전문대 / 송원전문대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점령. (31사 전상보)
96연대가 광주시내 전 방송국 KBS / MBC / CBS / VOC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점령. (31사 전상보)
->계엄군의 폭력.
03시 05분.
전남대 주변에 31사단 96연대 및 전투경찰 7백24병 투입 배치.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작전일지)
09시.
전남대학교 학생들 등교 시작.
일찍 등교한 학생 6명이 팬티만 입혀진채 무릎을 꿇고 있음.
학교에 들어가려던 교수 1명이 계엄군에 구타당함.
->계엄군의 폭력.
10시.
2백여명의 학생들이 모여있는 상태에서 교내 방송을 통해 '다리에 있는 학생에게 알린다. 즉시 귀가하라. 그렇지 않으면 강제 해산시킨다' 는 경고방송.
전남대생들이 분개하여 계엄군에게 돌을 던짐. 등교하는 학생들이 늘어남에 따라 처음 50여명에서 계속 늘어 5백여명으로 늘어난 상태로 시위가 20여분간 계속됨.
->학생들의 폭력.
10시 20분.
7공수 33대대 2개 중대 투입. (특전사 전투상황 보고서)
M-16 자동소총을 어깨에 비켜 멘 채, 곤봉과 군화발 등으로 진압개시. 학생들 흩어짐.
->계엄군의 폭력.
전남대에서 흩어졌던 학생들이 금남로를 향하며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의 구호. '흔들리지 않게' 등의 노래를 부르며 비폭력 가두행진시위 시작.
전남대생 2백여 명이 동대학 정문에서 계엄군과 투석전. 1백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도청 쪽으로 진출 중에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10시 30분.
7공수 33대대 2개 중대원 2명. 전남대 후문 버스승강장에서 버스에서 내리던 시민 장천수씨를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 후 연행.
"전남대 후문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 공수 2명이 내 양쪽 팔을 잡고 전남대 수위실로 끌고 갔다. 왜 나를 잡아가느냐는 물음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군화발로 차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팼다. 수위실에는 먼저 잡혀온 몇몇 사람이 포승줄에 묶인 채 꿇어앉아 있었다." (구술 : 장천수, 현사연 조사)
7공수 33대대 2개 중대원 중 2명. 전남대 후문에 정차한 버스에 난입. 승객 2~30명을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 후 연행.
"오전 10시경 10번 시내버스를 타고 갔다. 전남대 후문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한 명이 내리자 담벼락에 숨어 있던 공수가 달려와 버스를 세우더니 승객들에게 내리라고 했다. 아무도 내리지 않자 공수 2명이 승차하여 닥치는 대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20∼30명의 승객을 끌어내린 후 전남대 수위실 부근에 감금시켰다." (구술 : 범진염, 현사연 조사)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들에게 폭력.
10시 50분.
금남로 한일은행과 YMCA 양쪽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던 전투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자 학생들이 견디지 못하고 흩어짐.
11시.
계엄군 및 사복형사. 전경 등이 연합한 상태로, 전경의 최루탄 발사와 함께 계엄군의 곤봉과 군화발 등으로 눈에 보이는 학생.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하며 연행.
동구청 앞에서 30여명의 학생들이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시위. 위와 같은 방법으로 연행.
->계엄군이 학생 및 지나던 무고한 시민들에게까지 폭력.
11시 15분~25분.
학생 1백여 명이 충장파출소에 투석, 유리창이 파손됨. (시청 상황일지)
광남로 진출 2백여 명의 학생, 공원 쪽으로 가면서 충장로 파출소 유리창 7개 돌로 파괴.(계엄사 상황일지)
->학생들의 폭력.
11시 30분~12시 45분.
공원 쪽에서 몰려오는 6백여 명은 손에 돌을 들고 '전두환 물러가라','계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일은행 앞으로 진출. 가톨릭센터 앞에 3백50여 명의 학생 운집. (계엄사 상황일지)
가톨릭센터 앞의 6백여 명, 한일은행 앞 시위대와 합류, '비상계엄 해제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중, 경찰 최루탄 발사 해산시키며 주모자 체포중. (계엄사 상황일지)
금남로 충금동사무소 옆에서 학생 2백여 명이 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해산되었으며 5명 정도가 연행됨. (시청 상황일지)
학생회관 앞, 금남로에서 해산된 학생 중 3백여 명 재집결, 불로동 다리 방면으로 진행하면서 계엄해제 등의 구호를 외침. (전교사 작전일지)
한일은행 앞, 2백여 명 재집결 가톨릭센터 쪽으로 이동하며 시위. 경찰 최루탄 쏘며 주동자 검거(6명). (계엄사 상황일지)
7공수 33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가톨릭센터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령. (특전사 전투상보)
산수동 파출소 피습, 전남대생 20여 명 산수동 파출소에 투석, 유리창 20여 개 깨고 도주. (계엄사 상황일지)
->계엄군의 곤봉과 군화발 폭력과 학생들의 투석 폭력이 상호간에 난재.
13시~13시 10분.
7공수 35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도청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행. (특전사 전투상보)
수창초등학교(금남로 인근 유동)에 공수부대 차량 20여 대 집결.
"1시가 조금 넘어서 수창초등학교 앞에 당도하니 공수들이 5열 횡대로 차도를 막고 있었다. 그들은 총을 비스듬히 메고 곤봉을 총검술 자세로 받쳐든 채 지휘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한발 한발 움직이고 있었다. 20-30명의 학생들이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때였다. 지휘관의 긴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공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길가는 시민들을 붙잡아 무자비한 살상을 시작했다. 나는 데모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무원인 신분을 믿고 계속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들리는 요란한 군화발 소리에 놀라 돌아다보았다. 수십 명의 공수들이 나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나는 학생이 아니오, 나는 공무원이오' 하고 황급히 외쳤으나 그들은 곤봉을 내리치고 발길질을 해댔다. 나는 그들의 곤봉에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구술 : 김정섭, 현사연 조사)
2~30명의 학생들이 공수부대에 투석.
->학생들의 폭력.
공수부대의 곤봉과 군화발을 사용한 진압.
->계엄군이 학생뿐만 아니라 지나다니는 무고한 시민들에게까지 무차별한 폭력.
시간미상 : 이 와중에 금남로 제일극장 골목을 지나던 장애시민 김경철이 공수부대원에게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 당한 뒤 체포되어 트럭에 실리던 중 다시 전신을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당한 뒤 트럭에 실려감.->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진 뒤 19일 새벽 1시 숨을 거둠.
->계엄군의 살인.
13시 20분.
학생들이 학생회관 앞에서 경찰과 충돌, 페퍼포그차 1대를 불지름. (시청 상황일지)
"학생회관 정문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학생들이 전경들 주변으로 접근해서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졌다. 기습을 당한 전경들은 허겁지겁 도청 쪽으로 도망쳤다. 그들이 버리고 간 페퍼포그차, 몽둥이, 방패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기세등등해진 학생들이 페퍼포그차를 뒤집어놓고 기름통에 불을 붙여 차를 전소시켰다." (구술 : 이광호, 현사연 조사)
->학생들의 폭력.
14시 15분.
조흥은행 앞, 한일은행 쪽에서 해산되어 공원 쪽으로 이동중인 3백여 명을 추적 분산, 주동자 검거중(10명). (계엄사 상황일지)
또다시 도청 앞과 금남로 일대에서 1천5백여 명, 충장로 일대에서 1천6백여 명의 군중이 데모를 시작했다. 데모 군중들이 경찰관들을 향해 보도블록과 콜라, 사이다 병을 투척.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했으나 갈수록 과격해지는 데모대의 진압에는 실패. (말, 1988.5)
->상호간에 폭력이 난재.
15시.
시위군중 해산 및 337명 체포.
공중에서 헬기 3대 선회.
"처음에는 헬기가 단지 작전을 지휘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전경들과의 투석전이 계속되면서 시위대들의 숫자가 계속 불어나자 헬기가 직접 시위진압에 투입됐다. 헬기가 저공비행을 하면서 프로펠러의 바람을 이용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헬기가 다가오면 세찬 바람과 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어 골목으로 재빨리 피신했다가 재집결하여 투석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구술 : 임낙평, 현사연 조사)
이때 제35대대는 금남로 좌우측, 충장로 등을 차단, 군중을 해산시키고 데모 군중 2백73명을 체포, 연행. (말 1988.5)
15시 30분.
"관광호텔 안의 이발관에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 종업원들과 함께 나가봤다.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1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데모를 하다 공수들에게 밀려 도망가고 있었다. 뒤쫓아간 공수들이 30-40명의 시민, 학생을 동구청과 관광호텔 앞으로 붙잡아왔다. 공수들은 붙잡혀온 시민, 학생의 옷을 벗게 한 후 팬티만 입힌 채 구타와 기합을 주고 머리를 땅에 처박게 했다. 한국은행 부근에서 공수 2명이 여학생을 끌고 왔다.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공수들은 욕을 하며 더욱 거세게 발길질을 했다. 잠시 후 공수들이 다른 사람을 잡으러 간 사이 어떤 아저씨가 그곳에 잡혀있던 사람들을 모두 도망가게 했다. 30-40명의 시민,학생을 풀어준 사람은 도경 경비과장이라 했다. 그것을 보고 달려온 공수에 의해 그 아저씨는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터지고 동구청 뒷골목으로 끌려갔다." (구술 : 김후식, 현사연 조사)
->계엄군이 학생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까지 붙잡아 옷을 벗겨 팬티만 입힌 채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 및 기합을 줌.
->도경 경비과장이 3~40명의 학생과 시민들을 풀어주자, 계엄군이 도경 경비과장을 초죽음이 되도록 구타하여 동구청 뒷골목으로 끌고감.
15시 45분.
금남로에서 군인들에게 쫓긴 대학생들이 북동 쪽 민가에 잠입하자 군인들이 가정집을 수색하여 대학생으로 보이는 장발 청년과 여자를 마구 때리고 차고 대검으로 찌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한 후 차에 실어 연행해 감.(군인의 경상도 특유의 억양은 광주시민을 자극). (시청 상황일지)
->계엄군의 학생 및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폭력.
시간미상
<정호용 광주 와서 윤흥정 만나 광주 상황 점검하고 확고한 의지 보여야겠다며 돌아감.>
공수특전사령관(정호용 소장)은 광주일원의 사태가 격렬해져 심각하다는, 제7여단장 신우식 준장으로부터 현지보고를 듣고, 제3공수 특전여단(여단장 최세창 준장)에게 광주지역에 계엄군을 출동시킬지 모르는 형편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라는 지시를 하고 C-54 특별기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특전사령관 정호용 소장은 육사동기인 노태우 장군과 함께 각각 제7공수, 제9공수 특전여단의 창설여단장으로 2년 반 동안 재임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특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약 1년여 간 근무함. 정호용 사령관이 제7여단의 여단장으로 있을 때, 같은 육사동기인 전두환 장군은 최전방의 수도 방어부대인 제1사단의 사단장이었다.) 광주에 도착한 정호용 사령관은 제7여단장 신준장으로부터 지금까지의 광주 일원의 사태에 관한 보고를 받은 다음 곧장 육군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전교사) 윤흥정 장군과 부사령관 김기석 장군을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윤흥정 장군은 정호용 장군의 육사 선배로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사이) 윤흥정 장군이 정호용 장군에게, "이거 양상이 대단히 틀리게 돌아가는군." "중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계엄확대 조치에도 이렇게 소요가 계속된다면 가만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계엄군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초기에 군중들의 심리를 가라앉혀야 옳지 않겠읍니까?" 정호용 장군이 다시 진언, "그런데 광주시내의 기관장들이 대책을 협의하는데 그걸 보니까 이번 광주시민이나 학생들의 데모가 오히려 정당한 것인 양 분위기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호용 사령관은 광주 현지의 모든 상황을 점검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말, 1988.5)
<정호용, 전두환 등 군 수뇌에게 광주사태 보고하고 3공수 7공수 20사단 증파 결의>
서울 : 이때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정부장 서리 등 군수뇌부가 모여 광주사태에 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상황에 대한 자세한 브리핑을 하면서 제3공수여단과 제7공수여단을 동시에 증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두환 장군은, "20사단도 함께 진입시키는게 좋겠어. 계엄군이 집중적으로 나서면 그만큼 이쪽의 시위가 위력적일 테니까."
이때 제9사단장인 백운택 소장이 전두환 장군에게 '제가 광주에서 희생하겠다'고 자기도 보내줄 것을 진언했으나 보류됐음. (제11공수여단(여단장 최웅 준장)은 정호용 사령관의 특별명령으로 이미 광주에 진주해, 제11여단의 4개 대대가 2개 대대씩 나뉘어 각각 전남대, 조선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말, 1988.5)
15시 50분.
7공수 35대대 26/196, 충장로 출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오후 4시경 충장로 1가에 있는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공수 2명이 곤봉을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손에 초크가 묻지 않은 사람을 분류하여 곤봉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런 후 광주우체국 앞으로 끌고 갔다. 우체국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잡혀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잠시 후 공수들은 그들을 트럭에 싣고 갔다." (구술 : 조훈철, 현사연 조사)
->계엄군의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폭력.
충장로 입구, 전남대생 1백여 명 경찰과 투석전. 공원에서 분산된 6백여 명 도청 쪽으로 이동중 경찰 분쇄, 주모자 검거중. (계엄사 상황일지)
->계엄군과 학생 상호간에 폭력.
16시 20분.
3백여 명의 시위대 동명파출소 습격, 유리창 50여 장 파손, 시장관사 투석, 지산파출소 쪽으로 이동중(연행32명). (계엄사 상황일지)
->시위대의 폭력.
16시 25분.
수경사 계엄협의회의 결과보고. (계엄사 상황일지)
16시 30분.
금남로와 광남로 교차점인 중소기업은행 부근에서 공중전화 박스 등이 바리케이드로 이용됨.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기타를 갖고 가던 학생, 기타로 머리를 얻어맞음. 헬기 3대 공중에서 비행(대학생 집결지 파악하는 듯). (월간조선, 1985.7)
->계엄군의 폭력.
최대통령 특별성명 발표, '국가 보위 등을 위해 계엄확대 등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고. (조선일보, 5.20.)
33대대 작전종료(금남로 시위진압- 편집자주). 103명 체포, 31사 헌병대에 인계.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특전사 11여단 (여단장 준장 최웅) 여단본부 260명 광주로 이동. C-123 수송기 5대에 분승, K-16기지 출발. 도착과 동시에 2군 작전통제하에. (계엄사 상황 일지)
*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학생 50여 명이 데모를 하고 있었다. 공수들은 젊은 사람이면 무조건 잡아다 피투성이를 만든 후 중앙국민학교 돌담 밑에 꿇어앉혀 놓고 군화발로 짓이기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울컥 화가 치민 나는 죄가 있으면 법대로 처리하라고 항의했더니 곤봉으로 냅다 어깨를 후려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구술 : 이근재, 현사연 조사)
->계엄군의 폭력을 목격한 시민 이근재씨가 한마디 항의하자 계엄군이 폭력 행사.
16시 40분.
시위대 3백여 명 지산파출소에 투석, 기물파괴 및 방화. (전교사 작전일지)
->시위대의 폭력.
16시 48분.
전교사에 제11여단 선발대 도착(45/213). (말, 1988. 8)
16시 55분.
한국은행 앞, 학생 2백여 명 공수 1개 중대와 대치, 투석. (전교사 작전일지)
->학생들의 폭력.
17시.
경찰 20-30명이 시위대의 포로로 붙잡힘
"농장다리 쪽에서 경찰차를 포위한 시위대가 30여 명의 경찰을 인질로 삼았다. 우리는 경찰의 허리끈, 방석모, 곤봉 등을 빼앗은 후 그들을 앞세우고 장동 로터리로 갔다. 경찰 인질을 연행학생들과 바꾸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장동 로터리에 도착했을 때 공수들이 곳곳에 무리지어 있었다. 그들은 인질과 연행학생을 교환하자는 우리의 제의에는 대꾸도 않고 곤봉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다. 도망 치기에 급급했던 우리는 그때 경찰 인질을 놓치고 말았다." (구술 : 이광호, 현사 연 조사)
->학생들의 폭력.
트럭에 분승한 공수부대 MBC 앞으로 진출, 무차별 진압. 청년,학생 연행 (현사연 조사 종합)
상점, 다방, 이발관, 음식점 등을 뒤진 공수부대, 학생들을 연행.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계엄군의 무차별 폭력.
17시 05분.
1천여 명의 시위대, 노동청 앞에서 계엄군 및 경찰과 대치중.(계엄사 상황일지)
18시.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부근에 시민,학생 3백여 명이 운집, 공수부대와 충돌. 20-30분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공수부대가 산수동 방면으로 후퇴. 시위대가 계속 추격했으나 증강된 공수부대의 반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공포지대로 돌변. 밤새워 인근주택가를 뒤져 청년들 연행.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실천문학사. 이하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로 약칭)
"계림극장 앞을 지나다 보니 거리에 공수들이 쫙 깔려 있었다. 두려움을 느낀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쳤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저놈 잡아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처럼 달려든 공수들이 이렇다 할말 한마디 없이 곤봉으로 때리고 대검으로 4군데나 찔렀다." (구술 : 이장의, 현사연 조사) - 김태종, 전용호, 김선출 등 문화팀은 무등영아원(이현철의 거주지)으로 가서 유인물 제작에 들어감. 프린트되는 대로 들고 나와 양림동, 사동, 구동, 월산동, 방림동, 학동 일대에 배포함. (현사연 조사종합)
->계엄군의 곤봉 및 대검을 사용한 무차별 폭력.
19시.
한.미 연합군사령관, 18일 오후 7시 급거 귀임. 위컴사령관은 이날 오산 공군기지에 도착, 헬기편으로 유엔군 사령부로 돌아왔다. 주한유엔군 사령부는 위컴 사령관의 조기 귀임에 대해 '한국사태와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위컴 사령관은 최근 한반도 주변정세 및 한국내의 사태 등에 대해 워싱턴 당국과 협의하기 위해 귀국, 오는 27일에 귀임할 예정이었다. (조선일보, 5.20)
35대대 작전종료(충장로 일대 시위진압 - 편집자주). 173명 체포, 31사 헌병대에 인계.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20시 15분.
1백여 명의 학생들이 한일은행 뒤쪽에 모였으나 별다른 상황 없음. 일부 계엄군은 시민들이 시위학생을 감싸면 '너는 뭐냐?'고 구타. (월간조선, 1985. 7)
가톨릭센터 앞, 6백여 명의 시위대 계엄군과 대치, 총검 진압(주모자 61명 검거). (전교사 작전일지)
->계엄군의 곤봉 및 대검을 사용한 무차별 폭력.
20시 20분.
노동청 앞 등 전시가지 2천여 명 산발적 시위. (전교사 작전일지)
20시 30분.
계엄군은 여단 병력으로 증강. 광주시외 변두리와 대학가에 군인들 막사 쳐. 학교 정문에는 8명씩 무장하고 경계, 시가지 요소요소에 군인 배치. (월간조선,1985. 7)
20시 40분.
가톨릭센터 앞 대치중인 1백여 명의 시위대, 경찰 투입 해산. (계엄사 상황일지)
21시.
계엄공고 제4호로 통행금지 시간 연장 조치. 21:00 - 익일 04:00까지. (말, 1988. 8)
31사단 작전회의, 5.18 04:00부로 7공수 33대대는 31사단에, 35대대는 공수여단에 배속, 중요지점에 거점 병력 배치. (특전사전투상보, 시청 상황일지)
시민동향
- 5.17 이전의 학생 가두시위에는 시민들이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으나
- 5.18에는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때리고 짓밟고 찌르는 등의 잔인한 행동을 시민들이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 일부 시민들은 군인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경상도 사람들이 난동을 부린다고 격분하였고, 일부 부녀자는 '내 자식도 어디 가서 저렇게 맞고 다닐 것이다'하고 울면서 칼에 찔린 청년들을 노상에서 치료해 주려고 하였음(군인들이 방해).
- 특전대원들이 '전라도 새끼들 씨를 말려버려야한다''면서 청년들을 폭행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음.
(19일 오전 투입된 11공수대원 이경남 목사님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동료 대원이 이러한 발언을 하는 것을 목격함.)
- 거부장 옥상에서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투석하자 군인들이 거부장으로 들어와 3명을 연행한 사례로 보아 일부 시민들이 학생 편에 가담할 우려가 있음.
이상 (시청 상황일지)
->계엄군의 무차별한 폭력에 시민들이 극도로 동요.
23시.
군사령부가 제11여단 작전통제 지시. (말, 1988. 8)
23시 20분.
야간배치 완료. 경찰서 파출소 및 도로 교차지점 : 36개 지점. 계엄군 1개 지대(1/10)와 경찰 2개 분대(24명)로 합동배치(30명 규모) (말, 1988. 8)
23시 40분.
31사단 작전회의 재개최, 33대대 광주역 점령 임무부여. (특전사 전투상보)
시간미상
광주시내 전역과 직장예비군 무기 및 탄약 회수, 군부대에 보관 : 무기 4,717정, 탄약 115만 발.
분산 무기고 탄약, 군부대 및 경찰서에 보관 : 55만 발 - 무기고 접근자 발포 승인 건의. (31사 지시 80-1)
복무규율에 의거 지휘관 재량 실시토록 지시. (말 1988. 8)
모든 사건을 근거자료와 각 시간에 정확하게 대입하여 정리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19일부터 27일까지의 상황은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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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 후 반론하실 분은 반론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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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북 14개 대학 및 전남 20개 대학에 은밀히 침투> 전국 대학입니다. 이것은 문교부의 휴교령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문교부의 휴교령에 예외가 없었어요. 서울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오늘날과 같은 전경이 없었던 시대에는 군인이 문교부 휴교령 지원 업무를 수행했었습니다.
<17일 밤 전남대 총학생회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총학생회 사무실에 있던 7명 중 3명은 무사히 빠져나가고> 17일은 토요일 밤이고, 18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그 어느 학교에서도 방과 후의 학교 사무실은 학생이 지키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휴교령이 내렸는데 사무실을 지켰다구요?
"조선대 방송실에서 선후배들이 모여 철야 간담회를 하고 있는데" 철야 간담회를 하였습니까? 어떻게 토요일 밤부터 밤샘 작업을 하는 일이 조선대와 전남대에서 똑같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 밤샘 작업은 서울의 각 대학교에서도 똑같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평일에도 사무실로 사용되는 학교 건물은 야간에 학생들이 이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토요일 밤부터 운동권이 밤샘 작업을 하는 일이 전국 대학교 학생회 사무실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19일부터 시위 분위기를 더욱 띄워 20일에 전국적 민중봉기(김대중의 내란)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맞는가요?
<신군부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 발표.> 이것 보세요. 신군부라는 용어는 광주사태 이후 15년 지나 남한에 등장한 용어입니다. 어떻게 1980년 5월에 신군부라는 용어가 없었는데 신군부가 발표할 수 있으며, 신군부가 발표하였다는 보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방송국 점령 작전개시> 어떻게 하는 것이 방송국을 점령하는 것인가요?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전국의 모든 경계목표물을 계엄군이 경계합니다. 그런 비상계엄령법은 노무현 정권 때도 이명박 정권 때도 동일한 것이며, 어느나라에서나 공통적입니다. 그리고 주요 경계목표물 경계 업무는 점령이 아닙니다. 자, 5월 21일 진종채 2군 사령관이 초병복무규율을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요? 19일 기독교 방송국에서 (제가 북한군으로 추정하는) 폭도들에게 초병이 M-16을 탈취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두 명의 초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던 것은 점령이 아니었습니다.
31사단이란 광주향토사단을 일컫는 것임을 알지요? 광주에는 오로지 광주향토사단 병력만 동원되었습니다. 그것이 18일 상황이었습니다.
<7공수 33.35대대가 31사단 96연대에 배속.(31사단 전투상황보고서)>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7공수 33.35대대는 당시 31사단 사단장이었던 김대중의 인맥 정웅 소장의 명령 하에 있었습니다.
[7공수 33.35대대가 배속된 31사단 96연대가 호남신학대 / 서원보건전문대 / 동신전문대 / 대건신학대 / 서강전문대 / 성인경상전문대 / 기독간호전문대 / 송원전문대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점령. (31사 전상보)
96연대가 광주시내 전 방송국 KBS / MBC / CBS / VOC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점령. (31사 전상보)] 이것을 좀 정확히 이해합시다. 만약 엄청난 수의 공수부대원들이 동원되었다는 착각을 일으키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엄청난 거짓말이니까요. 공수부대가 점령한 것이 아닙니다. 광주향토사단의 96연대는 보병 부대였어요. 말이 연대이지 실제 병력 수는 적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실제 동원이 가능한 소대는
2개 소대밖에 없었습니다. 그 중 한 소대를 한동석 당시 소위가 인솔하며 광주시내 여러 방송국에 초병을 세웠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자세히 설명해야 하는 이유는 5월 21일의 집단발포설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5월 21일 도청을 경계하던 7공수에는 실탄이 없었습니다. 방송국 등을 경계하다가 시민군에게 밀려 5월 21일 오후 한 시 경 96연대 2개 소대가 핼기로 광주를 탈출하였을 때 사지에 남겨진 7공수 대대장이 실탄을 요청하였으며, 한동석 소위가 2개 소대가 보유하고 있던 경계근무용 실탄 200발을 건네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7공수가 96연대에 배속되어 있는 부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남대 주변에 31사단 96연대 및 전투경찰 7백24병 투입 배치.> 위에서 말한 대로 광주향토사단 96연대에는 그렇게 많은 병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전경이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전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riot police로서 전경을 이해하는데, 그런 의미에서의 전경은 1987년에 전두환 대통령이 창설하셨습니다. 88서울올림픽 때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면 외국인 보기에 좋지 않기에 그 문제점을 해결하시기 위해 riot police를 창설하셨으며, 지금 riot police는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습니다. 그런데 1980년의 전경은 주로 대공 업무의 전경을 말했습니다. 사실 광주사태 때
극소수의 전경이 동원되기는 했었으나, 그 외의 경찰은 나이 4, 50 대의 기동경찰이었습니다. 광주사태 첫 날에 수십 명의 경찰관이 시위대에 인질로 납치되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7공수가 동원되어야 했던 이유도 그들이 나이 많은 기동경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전남대 주변에 31사단 96연대 및 전투경찰 7백24병 투입 배치.>는 위의 일지 작성자가 짜집기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광주에 그렇게 많은 수의 전투경찰이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경찰병력 수가 많았다면 어떻게 광주사태가 일어난지 한시간 만에 광주 전 지역 파출서들이 파괴당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요?
위의 일지 순서대로 우선 5월 18일 오전 상황을 여기까지만 답변 드리고, 이데아님의 반박이나 답변이 있으면 제가 계속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저의 답변이 너무 길어져도 이데아님이 반박하시기 힘드실테니까요.
* 네 늦은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스티스님 방금 가보았습니다. 휼륭하게 그림 파일을 만들어 올리셨더군요. 시간이 무척 걸리셨겠습니다. 옮기시기 편하도록 앞으로는 댓글뿐 아니라 새글로도 제가 답변을 달아드려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