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생이다
人間隨病生必業(인간수병생필업)-인생에 병이 따름은 출생의 업보이니
死煩除盡苦痛完(사번제진고통완)-죽어야 번뇌가 사라지고 고통도 끝나리.
有爲無爲皆無益(유위무위개무익)-갖인것도 부족한 것도 모두 다 부질없는 것
同病路程此人生(동병노정차인생)-병과 같이 가는 길 이것이 인생이다 !
농월(弄月)
성모병원 20층, 한강위로 겨울비가 내린다.
멀리 삼각산 만경대(萬景臺)
가까이로 남산 전망대(展望臺)
서쪽으로 건장한 다리 근육을 뽐내듯 6.3빌딩이 차가운 겨울비의 우모세우(牛毛細雨)속에 희미하게 보인다.
병실 휴게실 TV에 개그콘서트가 왁자지껄하고, 유재석이 익살을 떨어도
웃음을 잃고 수심에 그늘진 환자 보호자들
시선이 고정되지 않은 초점 잃은 눈동자로
보는지 마는지 병원 창문에 부딪치는 빗방울을 통해 관악산으로
머~ㅇ 한 눈길을 주고 있는 모습들
A4 용지 열장에 빽빽이 써도 남을 만큼 헤아릴 수 없는 병명(病名)으로 1320개 병실과 치료실에 평균 5500여명의 환자가 병마(病魔)와 생(生)과 사(死)의
치열한 각투(角鬪) 현장이다.
Code red, Code red !
귀에 익은 긴급을 알리는 확성기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아, 또 한사람의 귀한 생명이 꺼져가는 구나 !
병원에서 평균 매일 같이 “code blue나 code red”의 긴급 확성기 소리를 듣는데
이것은 환자의 절박함을 알리는 다급한 호출이다.
이 소리를 들으면서 급히 뛰어가는 의사 간호사들을 보면 형용할 수 없는
허탈과 전율(戰慄)의 감정을 느낀다.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은 1980년 강남성모병원으로 개원하였다.
그때는 작은 병원건물 2동 뿐이었다.
1990년 필자의 가족이 중병(重病)으로 이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치료를 받기 시작하였다.
하루 이틀 1년 2년, 완치의 바램 속에 24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서울성모병원”의 발전 역사를 환자의 병력과 함께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아왔다.
환자의 병세는 여전히 계속되고---
단출하던 병원 건물 2동은 1조원이라는 천문학적 시설로 지상 22층, 지하 6층
의료진 3000명이 넘는 세계적인 병원으로 성장(成長)하였다.
성모병원의 성장과 함께 내 얼굴에도 연륜의 마크인 주름살이 늘어났다.
어디 서울성모병원만 이렇게 증설 된 것이 아니다.
서울에 있는 소위 빅5 병원들은 전부 서울성모병원과 같은 수준으로 증설되고 발전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세계 속의 의료경쟁(醫療競爭)에 뒤지지 않고
글로벌 의료 시스템(global medical system)을 갖추기 위해
국제의료평가위원회인증인 JCI (Joint Commission International)를 획득하기 위해서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고 의사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원격진료와 영리병원”도 업그레이드되는 글로벌 의료 시스템의 일환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한민국 의학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처럼 의학이 발달하고 의료시설이 확장되는 것은 병이 많이 생겨 환자가 증가한다는 증거다.
수요(需要)가 있는 곳에 공급(供給)이 따른다는 간단한 시장논리다.
왜 사람은 병이 드는가?
말도 안 되고 어리석고 유치한 질문을 하여 본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물어 보는 화두(話頭)다.
인간이 처음 탄생될 때에 왜 “병 없이 살다가 죽는다”는 스팩으로 설계 되지 않았을까
태어남(生)과 죽음(死) 사이에 왜 병(病)이 끼워져 있을까.
생물학적(生物學的) 병리학적(病理學的)으로 “생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바이러스가 존재한다”는 식의 생성과정상 합리 불합리를 따져 물어 보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창조론(創造論)이나
인간은 음양오행(陰陽五行)에 의하여 형성되었다는 동양철학의 음양관(陰陽觀)도 아니다.
물론 진화론(進化論)에 의한 유전자를 따지는 것도 아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도
도연명(陶淵明)의 도원경(桃源境)을 염두에 둔 생각도 아니다.
바람과 물에게도 병(病)이 있을까?
바람처럼 불다가 멈추고, 물처럼 흐르고 고였다가 말라져서 생사(生死)를 규정하는 것처럼 사람도 왜 그렇게 디자인되지 못했을까
이것을 물어 보는 것이다.
나의 이 질문에는 니힐리즘(nihilism)을 분명히 경계(警戒)함을 밝혀둔다
나의 의미 없고 공상(空想)의 생사관(生死觀) 질문은 여기까지다.
이유는 인간의 병으로 인한 고통을 그나마 의학(醫學)외는
그 어떠한 종교나 철학으로도 근원적인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
불교는 “무소유의 해탈로 열반에 들어라”
하면서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같이 말하지만 엄밀히 생각하면
죽으면 해결된다는 말이 고작일 뿐이다.
부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대속으로 병으로 부터 해방이 된다면 성모병원 같은
매머드 병원이 필요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사문유관(四門遊觀)이 동기가 된 출가(出家) 결심도 병을 해결하지 못했다.
대장엄론경에
-건강이 가장 큰 이익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건강을 위해서는 부란약(腐爛藥오줌)을 마시라-
화엄경에서도
-보살이 발심(發心)하고 보리(菩提)를 배우려면, 병이 가장 큰 장애가 되는 줄 알아야 한다-
증일아함경
-비록 몸에는 병이 있더라도 마음에는 병이 없게 하라-
등으로 육신(肉身)의 병(病)을 염려하는 말들뿐이지 궁극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병을 해결하는 아무런 방편은 없다.
구약성경 창세기 1장 26절에
천지(天地)를 창조(創造)하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는 다 기록 할 수 없지만
신약성경
누가복음 5장 30절∼32절
마가복음 2장 16절∼17절
마태복음 10장 8절
마태복음 14장 13절~14절
누가복음 8장 42절~48절
요한복음 5장 1절~14절
등등----
구약성경 신약성경 여러 곳에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이 병을 치료 한다는
말은 많이 있지만 병(病)을 근본적으로 해결한다는 방안은 없다.
기독교에서 주장하기로는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님이 마지막
-다 이루었다-
고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마가복음 15장 33~34절에
-제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예수의 죽음으로 “인간의 모든 죄와 불행을 대속(代贖)”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죄 사함을 받았다는 그리스도인들도 가장 큰 불행인 육신(肉身)의 병은 병원에서 의사에게 의존하고 고통 받다가 죽어가고 있다.
김일성 주치의로 있다가 탈북한 김소연 박사에 의하면
진시왕의 무병장수를 갈망하던 김일성도 김정일도 병으로 죽었다.
인간의 태생적 불행인
병(病) !
병실의 겨울밤
이방 저 방에서 환자들의 여러 형태의 신음소리에 적막(寂寞)의 공간에 균열(龜裂)이 간다.
출구를 찾지 못하는 병고(病苦)의 심연(深淵)은 더욱 깊어지고
병실의 겨울밤은 깊어간다.
사랑도 명예도 재물도 병앞에는 무기력하다
그냥 적게 아프다가 “꼴까닥” 죽을 수는 없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적어 본 것이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