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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니코로드리겠음
킬링필드(វាលពិឃាត, The Killing Fields)
1975년에서 1979년 사이, 캄보디아의 민주 캄푸치아 시기에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가 자국민 수백만명에게 자행한 학살 사건.
흔히 '킬링필드'라 함은 위와 같이 캄보디아 공산주의 무장 단체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 '폴 포트'가 자국민 수백만명을 학살한 사건으로 포털에 설명 되어 있고, 또 그리 알려 져 왔습니다.
특히 이 비참한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데에는 1980 년대 미국에서 제작한 '킬링필드'란 영화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뉴욕타임즈 기자 '스드니 샌버그' 의 친구이자 조력자인 캄보디아인 '디트 프란' 이 크메르 루즈 정권하의 죽음의 땅을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킬링필드'는 아카데미 3개 부분을 수상했고, 우리나라에도 80 년대 군부정권하에 공산주의의 폐해와 잔인성을 학생들에게 고취시키기 위해 학교 차원에서 중고생 단체관람을 시켰었지요. "이런 탓에 40대 중에는 본 사람이 굉장히 많음"
당시 학생들이 극장에서 비명을 지르거나 밤잠을 설쳤을 정도로 시체와 해골로 뒤덮힌 캄보디아의 참상은 받아드리기 힘든 공포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엔딩 장면에서 처량히 울려퍼지던 존 레넌의 'imagine' 이 굉장히 인상 깊었던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 킬링필드의 실존인물인 샌더슨과 프란 (좌), 영화내에 시체와 해골로 뒤덥힌 캄보디아 국토>
하지만 이 지옥의 아비규환을 단지 '폴 포트' 한 명이 일으킨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이 과연 정확한 역사의 되짚음 일까?
20세기 냉정시대때 지나친 반공주의로 인해 이 문제에 대한 왜곡 된 시선이 있지 않을까?
정치적 성향과 시대상에 따라 여러 해석이 나오지만, 당시 일어났던 사건들을 나열하여 수백만명이 죄없이 죽여야 했던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먼저 사회과부도를 보겠습니다요."
캄보디아의 지정학적으로는 왼쪽으로는 태국, 오른쪽은 베트남, 윗쪽은 라오스에 사이에 끼여있습니다.
간단하게 캄보디아의 역사를 보자면 캄보디아는 유구한 역사 동안 주위 세 나라에게 수시로 두들겨 맞고 살면서 간신히 버텨 온 나라입니다.
19세기 서구열강들의 식민지화 마수가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뻗혀 올때, 다른나라들은 외세에 저항했지만 캄보디아는 오히려 먼저 나서서 프랑스에게 자신을 식민지화 하여 보호 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주위 세 나라로부터 수시로 공격 받고 영토도 뺏기고 하다 보니 아예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게 나라 형태라도 유지하는거라 생각했을 정도였지요.
2차 대전 이후 캄보디아는 프랑스 연합 내에서 독립을 선언하여(1947 년), '캄보디아 왕국'으로 국명 정하고, 초대왕으로 '시아누크'가 등극합니다.
캄보디아 초대 국왕으로 오른 '시아누크'는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여러나라와 두루 친하게 지내며 비동맹, 중립 노선을 펼칩니다.
<캄보디아 초대 국왕 '시아누크'>
"어느 나라와도 적을 지지도 않고, 동맹도 하지 않는 비동맹, 중립 노선을 펼칩니다. "
1964 년.
캄보디아의 이웃나라 베트남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 이 일어납니다.
'베트남 전쟁'은 공산주의의 북베트남(베트콩)과 자본주의의 남베트남과의 내전에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이 남베트남을 도우면서 본격적인 북베트남과 미국의 양상을 띄게 됩니다.
물자에서 압도적이었던 미국은 당초 예상과 달리 정글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지만, 그 중 대표적인것이 북베트남이 북에서 남으로 정글 사이에 은폐 된 길을만들어 놓고, 이를 통해 군수물자와 병력을 신속히 이동시켰던 운송로가 있었던 것이 미국에는 큰 장애 요인이었습니다.
이 정글 운송로가 바로 '호치민 루트' 였지요.
호치민 루트는 정글로 덮혀 있어 항공정찰이 쉽지 않았으며, 설사 경로를 발견하고 폭격 해도 북베트남군은 근처 땅굴에 숨어 있다가 폭격이 끝나면 땅굴에서 나와 제빨리 보수해버리는 바람에 루트를 끊어내기란 여간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이 '호치민 루트' 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을 교묘히 타고 있었고, 인근에 땅꿀마저 즐비했던 탓에 갑자기 튀어나와 공격을 퍼붓고 땅꿀로 사라지는 북베트남의 게릴라전에 미국은 어지간히 고전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호치민 루트'를 끊기 위해 전쟁과 상관없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본토를 공격하는 것은 국제법상 여러가지 문제의 소지가 있어 이마저도 쉽게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호치민 루트와 땅굴 모식도>
그리하여 미국은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에게 이부분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이웃나라 전쟁의 화마에 휩쓸리기 싫었던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는 애초 하던대로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중립' 외교를 꿋꿋이 고수 하였습니다.
1968년. 참다 못한 미국 국방부는 닉슨 대통령에게 캄보디아 폭격 승인을 요청합니다.
처음에는 닉슨 대통령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반대 하였으나, 생각보다 전쟁이 장기화 됨에 따라 자국내에 반전 운동 등 여론이 좋지 않았고, 캄보디아 국경을 넘나들며 공격하는 북베트남(베트콩)군 때문에 전쟁이 난황을 겪자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하는 마음에 결국에는 승인하게 됩니다.
<캄보디아 공습에 대해 브리핑을 하는 닉슨 미국 대통령>
"에...우리는 캄보디아 여기여기를 졸라 때릴 거임 .."
헌데 이 폭격은 단순 국경 차단 폭격 수준을 훨씬 넘어 선, 무려 14 개월동안 64 만톤의 폭탄이 투여 된, 그야말로 캄보디아 전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국가 초토화 공격이었습니다.
<캄보디아에 폭탄을 퍼붓는 미 폭격기>
<미국에 폭격 받은 캄보디아 땅>
"달의 크리에이터 아님"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 밀도를 보여주는 지도>
"이 정도면 국가 하나를 리셋한 수준 ㅎㄷㄷ"
미국의 폭격으로 인해 10 - 15 만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사망하게 되었고, 300만의 이재민이 발생하였으며, 대부분의 농경지는 파괴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미국이 주요 식수원인 메콩강을 비롯 여러 강들을 고엽제로 오염시켜 버렸고, 농경지가 파괴 된 탓에 2차적으로 대기근 현상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여파로 국민 대다수가 종사했던 농경지는 붕괴되고, 농민들이 수도 프놈펜으로 무작정 몰려 들면서, 프놈펜의 인구는 폭격전 60만명 정도에서 300 만명까지 불어나며, 도시 전체가 빈민굴이 되어 버립니다.
<프놈펜에 몰려 든 난민들>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
캄보디아인들에게는 죽음의 땅 즉 '킬링필드'의 서막을 연 사건으로 이를 1차 킬링 필드라 불러 마땅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닉슨이 국제법을 어기고 캄보디아인을 학살하였다하여 전범으로 기소해야 한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폭격 이후 미국은 캄보디아에 그들에게 우호적인 정권을 세우기 위해 군부 '론놀' 장군을 지원하여 앞장 세웁니다.
미국을 등에 업은 '론놀' 은 쿠테타를 일으켜 국왕 '시아누크'를 쫓아내고 마침내 친미 군부 정권을 수립하게 됩니다.
< 론 놀>
"나 '론놀'임 . 근데 한국의 누구랑 등장 씬이 닮지 않았음??"
하지만 '론놀'은 무능하고 잔인했습니다.
미국이 꽤나 큰 금액의 구호 물자와 자금을 지원하였으나, 군부들은 자기들의 배를 부풀리기 바빴고, 배고픔에 허덕이며 시위하는 국민에게 총포를 쏘며 진압하였습니다.
게다가 공산주의자들을 몰아 낸다는 명분하에 무리한 색출과 사살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캄보디아 내에는 실제 공산주의자들도 있었지만, 앞 선 미국의 일방적 폭격과 '론놀'의 폭정으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는 자연스레 반미 감정이 팽배 해 있었습니다.
이런 국민들마저 '론놀'에게는 공산세력으로 간주되어 학살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속출했으며, 무분별한 공산주의자 색출 작업으로 인해 캄보다아는 다시 한 번 들판에 시체더미가 쌓이게 되었습니다.
실제 1980 년대 이후 학살을 저지르고 숨어 있다 붙잡혀 국제재판에 선 크메르 루즈의 간부급 전범들은 '평생 농사만 짓고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 형제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론놀의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이에 대한 복수심으로 크메르 루즈가 되었다.'라고 증언하기도 했었습니다.
<2000년 대 이후 양민학살로 인한 전범으로 국제재판대에 오른 '크메르루즈' 핵심 인물들.
누온 체아, 이엥 사리, 키우 삼판, 이엥 티리트>
이 시기에 사망한 캄보디아인 숫자는 정확히 집계 되지 못했지만, 수만명에 이르는 꽤많은 숫자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놀'의 양민학살, 이 역시 '킬링필드' 사건 속에서 책임을 물어야하며, 이것을 2차 킬링필드 사건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론놀'의 횡포가 심해 질수록 , 이에 반감을 품은 국민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의도와는 반대로 오히려 반미 감정과 공산주의가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 합니다.
이런 상황이 이후 등장 할 학살자 '폴 포트' 의 '크메르 루즈'가 급격히 성장하는데에 자양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 유학을 다녀왔으며, 한때 교사이기도 했던 '폴 포트'는 '반미' '공산주의' '시아누크 국왕의 복권' 을 내세우며, 캄포디아 외곽에서 미국의 폭격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소수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지지를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브리튼스 갓 탈렌트에서 우승한 가수 폴 포츠 고 "
"이 놈이 미친 살인마 폴 포트 이다."
그리고 이런 '폴 포트'에게 중국과 북베트남(베트콩)이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면서, 공산 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즈'를 창단하게 됩니다.
'크메르 루즈' 창단 이후 '폴 포트'는 포섭 활동 위주에서 본격적인 전투 항쟁을 시작 하였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세를 불려 갑니다.
1975 년 '폴 포트'의 '크메르 루즈'는 마침내 수도 프놈펜에 진격하게 되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버티던 '론놀'은 더이상 버티기 어렵자 미국 하와이로 망명해 도망쳐 버립니다.
<크메르 루즈 군인들>
<프놈펜에 입성 한 크메르 루즈군들>
<'론놀' 의 정권을 붕괴시킨 후 기뻐하는 크메르 루즈 군인과 시민들 >
<프놈펜 왕궁에 입성 한 폴 포트와 크메르 루즈 간부들>
<캄보디아에 남아 있던 미국인과 친미세력을 피신시키던 미국 헬기.론놀도 피신하여 하와이로 망명한다>
"어찌 등장과 퇴장이 우리나라 누구하고 참 비슷한데.. "
정권을 쟁취한 '폴 포트'는 '민주 캄푸치아' 라는 나라를 세우고, 미쳐 도망가지 못한 '론놀'의 수하와 가족들, 공무원, 군부들에 대한 대대적으로 숙청, 학살을 자행합니다. 이 숫자도 엄청났지만 이것은 앞으로 시작 될 학살에 있어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폴 포트'는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캄보디아를 소련이나 중국과는 다른 여지껏 경험하지 못한 새롭고 완벽한 그리고 독자적인 형태의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국민들에게 포부를 밝혔습니다.
근현대사에서 국가의 이념과 정책에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것이 없으며, 그것은 항상 성공과 실패를 겪고, 수정과 보완을 통해 끊임 없이 다듬어가야 하는 영원한 숙제와 같은 것임을 대부분의 나라들이 경험을 통해 통감하여왔습니다.
이런 부분을 무시한 채 헛 된 망상을 가지고 출범한 '폴 포트'의 국가론은 당연히 시작부터 제동이 걸리게 됩니다.
여러 정책들이 현실과 동떨어져 사사건건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쳤으며, 여기저기서 불만이 속출하였습니다.
이런 문제에 당면한 폴 포트는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기 보단, 살육과 공포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국가를 가로 막는자는 모두 죽여야 한다!!'
위의 문구를 기치로 내건 '크메르 루즈' 군부는 국가 정책에 따르지 않는 국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폭압과 공포로 자신들의 노선을 실천 해 나갑니다.
<주민들을 억압하는 크메르 루즈 군인들>
그리고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 반발 하는 것은 '생각'하고 ''사고' 를 하는 행위에서 나온다 하여, '생각' 과 '사고' 할 기회조차 주지않는 방법을 고안하고 실천합니다.
그 급부로 먼저 지식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사, 약사, 교사, 교수, 전문직, 중산층이 주요 학살의 대상이 되었으며, 종국에는 영어를 할수 있다는 이유, 안경을 썼다는 이유, 손바닥에 굳은 살이 없다는 이유,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이유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게다가 자본주의적인 내용의 책이나 기사를 쓴 사람도 모두 학살했으며, 외국에 나간 경험이 있는 자 역시 죽임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국제경기에 참가 한 적이 있는 스포츠 선수들까지 모두 죽여버리는 미친짓을 벌입니다.
'아무 생각을 하지마라. 묻는말에는 1초만에 답해라.'
생각 자체를 못하게 하기 위해, 질문에 즉각 답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반동분자로 몰려 고문과 학살을 가했습니다.
그렇게 국민들을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꼭두각시로 만들어 자신들 의 허황 된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광기로 인해 불과 3년 반 사이에 100 만명이 넘게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캄보디아 인구를 볼 때 7명 당 1명 꼴로 사망 한 수치입니다.
그야말로 캄보디아 전역은 시체로 널리게 되었습니다.
<지식인 수용소, 자세히 보면 손발이 모두 철사로 묶여져 있다>
<캄보디아 전역에 널려진 시체와 해골더미>
근데 이 기간에 참 미묘한 조력 관계가 형성 됩니다.
앞 서 서술한 바처럼 '폴 포트'는 같은 공산주의 노선인 중국과 북베트남(베트콩)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특히 북베트남(베트콩)은 무기와 자국 군대까지 파견하여 '크메르 루즈'를 창단하는데에 적극 지원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탈환 한 직후 '폴 포트'는 북베트남과 손절하며, 이후' 폴 포트'의 새로운 조력자로 놀랍게도 미국이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역사적 반목'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흔히 우리가 알다시피 중국과 베트남은 사이가 안좋습니다.
역사적으로 서로 뺏고, 뺏기고를 반복하여 양국민 사이에는 응어리 같은게 남아 있지요. 마치 우리와 일본처럼요.
게다가 캄보디아 역시 역사적으로 베트남으로부터 침공을 많이 당했었습니다.
그래서 캄보디아와 베트남 사이에도 이런 역사적 반목이 잔존 해 있었습니다.
'내 적의 적은 동지 !!??'
먼저 '북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 때에 처음에는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나, 미국 철수 즈음에는 중국과 멀리하고, 소련의 스탈린과 동맹을 맺습니다. 중국 입장에선 아주 괘씸한 일이었지요.
한편 1973년.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완전히 철수 하게 됩니다. 전쟁이 길어지자 자국의 여론 악화와 장기적 물적, 인적 소모로 더이상 전쟁을 끌수 없었던 탓이죠. 그리 철수하면서 아쉽고, 분했던 탓이었는지, 캄보디아와 베트남 사이의 역사적 반목을 잘 알고, '폴 포트' 에게 베트남을 견제, 공격 할 것을 부추기며 무기를 지원해 줍니다. "뒷끝 쩔~~"
그리하여 그 급부로 미국과 중국은 수교를 맺고 손을 잡습니다.
"잠만 .. 너네는 얼마전까지 한국에서 피터지게 싸우지 않았나?"
중국은 자기들에게 등을 돌린 베트남이 미국을 쫓아 낸 후 라오스나 캄보디아로 세력 확장을 할까 싶어 경계하였고,
미국은 자신들은 비록 철수 하지만, '폴 포트'를 이용 해 베트남을 견제, 공격하게 하려던게 목적이었습니다.
고로 위의 '폴 포트'의 학살 사건 때도 '크메르 루즈' 군은 명백히 중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학살을 지시한 건 아니지만, '크메르 루즈'를 지원하고 있었다는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국제학자 '그레고리 일리치'는 그의 컬럼의 통해 폴 포트가 한참 자국민을 학살 할때도 미국이 크메르 루즈의 후견인이었다고 미국의 위선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여러 매체와 언론에 미국의 크메르 루즈 지원은 기정 사실화 되어 있습니다.>
"미국애들은 뭐 잘했다고 자기들 얘기는 쏙 뺀 영화만들고 아카데미 3관왕 시켜주고.."
자국민 학살에 열을 올리고 있던 '폴 포트'는 어느 정도 입지를 굳힌 후 중국과 미국의 바람대로 베트남에게 고개를 돌립니다. 먼저 '폴 포트'는 '크메르 루즈' 창단때 북베트남이 파견 해 도움을 주었던 북베트남 동지들을 무참히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캄보디아 자국내에 있던 베트남인 집성촌 마을들을 비롯 모든 베트남인들을 찾아내어 모두 죽여버립니다.
이 소식은 전쟁을 막 끝내고 숨고르기를 하고 있던 베트남 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자면, 베트남은 프랑스와 독립전쟁, 내전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으로 약 25 년간 전쟁에 시달려 온 탓에 국토는 아직 재건도 못한 쑥대밭이었고, 전쟁의 피로도도 상당 했었습니다. 이런 베트남과 미국,중국을 등에 업은 '폴 포트' 가 붙는다면, '폴 포트' 입장에선 꽤 해 볼 만한 게임이었습니다.
1975년 '폴 포트' 는 드디어 베트남 국경을 넘어 베트남 내 푸꾸욱 섬을 공격합니다.
처음에는 국지전의 양상을 띄어 전쟁 후 국가 재건에 여력이 없던 베트남은 캄보디아와 외교적으로 해결 하려 노력했습니다. 어느 정도 협상이 진행되나 싶었는데, 그럼에도 약속을 어기고 캄보디아는 또다시 국경부근의 베트남 마을들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학살 합니다.
이쯤되면 베트남 입장에서도 더 이상 외교적 카드는 무용지물이란걸 깨달을 때도 되어버렸을 겁니다.
1978년 12월 25일 결국 참다 못 한 베트남은 15만 정예병을 소집 출동시켜, 본격적으로 캄보디아에 총공세로 나섭니다.
<무장한 크메르 루즈 군인들>
<반격에 나선 베트남 군인들>
두 나라의 전쟁은 당초 예상과 달리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죽음과 공포의 '크메르 루즈' 군은 그 동안 힘없는 양민들만 학살 할 줄 알았지 실전 경험이 부족하였으며, 반면 베트남군은 오랜 전쟁으로 실전경험이 풍부하여 베트남군 앞에 크메르 루즈군은 오합지졸일 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베트남 군은 여러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크메르 루주' 군을 섬멸 해 나갑니다.
<베트남 군에 포로로 붙잡 힌 크메르 루즈 군인들>
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15일.
결국 '폴 포트'는 수도 프놈펜까지 베트남군에 내어주게 되고, 남은 '크메르 루즈' 잔당과 함께 북부 밀림지역으로 뿔뿔히 흩어져 도망치게 됩니다.
<캄보디아 북부지역 밀림에 숨어 살고 있는 크메르 루즈 잔당들>
일단 여기서 '킬링필드' 학살의 역사는 끝이 나게 됩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본인들이 '킬링필드'를 종식 시켰다고 국제 사회에 선언하였지만, 당시 냉전시대 하의 서방세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베트남이 세력 확장 야욕으로 캄보디아를 점령하였다고 치부해 버리지요..
이 말도 백프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캄보디아인들의 입장에서 볼 땐 그 지긋하고 지옥같던 학살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베트남은 크메르 루즈를 쫓아내고 친베 정권을 세웠는데, 그 동안 얼마나 폴 포트의 크메르 루즈가 막장이었으면, 역사적 반목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 국민들은 친베 정권에 열광하게 됩니다.
<본국으로 철수하는 베트남군에 환호하는 캄보디아 국민들>
학살에 관한 얘기는 여기서 끝이지만, 뒤로 진행되는 얘기도 흥미롭습니다.
앞서 베트남은 주력 부대를 대거 이끌고 캄보디아 본토로 공격을 간 탓에 베트남내에는 남아 있는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중국이 빈집털이를 들어 오게 됩니다.
이것이 '중월전쟁' 입니다. (1979년)
중국의 명분은 현재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있는 베트남군의 철수와 캄보디아의 독립이었습니다.
<베트남으로 진격하는 중공군>
중국은 탱크와 중화기를 앞세워 빠르게 남하 하였으며, 베트남은 북부지방이 더더욱 병력 공백이 심해 대부분의 거점 도시가 개전 초반에 중국 수중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중국은 당장에 수도 하노이를 점령 할 기세로 거세게 남하합니다.
한편 베트남은 주력부대가 캄보디아 프놈펜에 있었던 탓에, 중국에 비해 한참 모자라는 병력과 이를 메우기 위해 여자, 노인, 청소년이 민병대에 뛰어 들어 방어에 나섭니다.
헌데 이 저항이 생각보다 거세어 중국은 초반엔 빠른 속도로 남하 하였으나 점점 진격이 더디게 되었으며, 심지어 역공을 당해 뒤로 무르고 밀고를 반복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에는 베트남과 캄보디아전 때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군인과 민병대는 오랜 전쟁으로 실전에 꽤 능숙했던 탓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게다가 밀림전투에 있어 능숙도의 차이도 컸습니다. 또한 미국 철수 때 미국으로부터 노획 된 무기가 효과를 톡톡히 발휘 한 탓도 있습니다. "실제 미국 헬기와 수송기가 날라다니고 장갑차가 왔다 갔다하니 중국은 이 뭥미!!?? 했다는.."
중국은 시간이 점점 지체되자 초조함을 느꼈고, 캄보디아에 나간 주력부대 일부의 복귀가 이루어질 시점즈음인, 개전 3주만에 중국은 공격을 멈추고 철수 해 버립니다.
이후 두 나라는 서로 자신이 이겼다고 자화자찬합니다.
<전투에 참여 한 베트남의 여성들>
"베트남 내에 남아있는 정규군이 부족하여 부녀자와 청소년, 노인들까지 중국군 방어에 나섰다. "
<중공군에 생포 된 베트남 포로들>
"실제 중국은 전투에서 포로를 잡고 보니, 대부분 이런 소녀들이었다고.. "
<베트남군에 생포 된 중국 포로들>
"위와 반대로 베트남에 포로로 붙잡힌 중공군인데, 감시하는 베트남 여성군인이 인상적이다."
<전쟁의 승리에 기뻐하는 중공군들>
"근데 이건 아무리봐도 베트남의 승리 아니냐? 정신승리도 승리의 일종인가?"
'중월전쟁'의 여파로는 중국은 아무튼 당초 목적인 캄보디아에서 베트남 군을 완전 철수 시키는데에는 실패했습니다.
또한 중국은 이 '중월전쟁'을 기점으로 기존 전술의 한계를 느끼고(인해전술), 국방산업 현대화, 첨단화에 열을 올리게 됩니다. "긍까 누가봐도 너네가 발린거임.."
미국이 베트남전 영화를 많이 제작하며 자위(?) 했듯이, 중국도 이 '중월전쟁'의 소재로 영화를 꽤 만들었습니다.
소련이 뒤에서 베트남을 밀어주었던 탓에 중국과 소련은 사이가 소원 해 집니다.
한편 베트남 내에서는 안그래도 안좋았던 중국인에 대한 감정이 극에 달해 , 베트남 내에서 살고 있던 중국인들을 모두 쫓아내게 됩니다.
이로 인해 쫓겨 난 베트남내의 중국인들은 보트를 타고 탈출하게 되는데, 망망대해를 떠돌며 무작정 상선들을 보면 구호를 요청했는데, 이것이 '보트피플'의 시초가 됩니다.
<80년 대에 국제적으로 문제시 되었던 '보트피플' >
'국민학교 시절 공산당이 집권하면 국민들 보트피플 된다고 배웠은데, 스토리는 사뭇 다름 '
마지막으로 '폴 포트'는 크메르 루즈 잔당과 함께 캄보디아 밀림을 도망다니며 살다.
1998년 밀림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 밀림 움막에서 사망한 폴 포트>
작성자 : 이종격투기 카페
니코로드리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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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니코로드리겠음
첫댓글 잘 읽었다...미국은 저래놓고 저 영화를 만들어서 아카데미 상도 주고 개뻔뻔하네
개쓰레기 같은 미국.. 미국 뿐만 아니라 동남아는 유럽 식민지로도 고통 받았고.. 참 아픔이 많은 땅이다 ㅜㅜ
미국 개쓰레기
와 .. 진짜 술술 잘읽었어 보트피플이 여기서 나온거였구나! 미국은 진짜 양아치네;;
와...베트남 진짜 대단한 국가다 스스로 자부심 느낄만 하겠어 미국이랑 중국은 이 뭔...!!
7명당 1명사망? ㅁㅊ
미국이 뿌린 씨...
나는 매일 천국의 조각을 줍는다
이 책 배경이 저때더라고 읽어볼만함
오 잘읽었엉!! 세계사로 잠깐 지나간기억나는데 이런 역사가잇엇구나
나어릴때 저기 갔엇는데 정말 유골이 쌓여있고.... 그땐 어려서 무섭거나 하진 않았어..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