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들녘에서
일월 중순 셋째 화요일이다. 아침 최저 기온이 빙점 근처로 내려가긴 해도 그다지 추운 줄 모르고 겨울이 한복판을 지난다. 소한을 따뜻하게 넘겨 며칠 뒤 다가올 대한을 앞두었다. 앞으로 봄이 오기까지 영하권으로 내려갈 날이 몇 차례 더 있을 테지만 겨울은 절정을 지나 하강하고 있다. 옐리뇨 영향인지 올겨울 잦은 비로 강수량은 예년보다 많고 비교적 따뜻하게 보내는 편이다.
이번 주 후반 목요일과 금요일에 기압골 통과가 예상되어 또 한 차례 비가 올 듯하다. 가끔 들리는 도서관은 비 오는 날 가기로 아껴두고 화요일 아침나절 산책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빈 배낭에는 혹시 냉이를 만나면 캐 올까 싶어 우리 집에서 유일한 농기구인 호미를 챙겼다. 현관을 나서 외동반림로를 따라 걸어 원이대로로 나가 동전에서 백월산 밑으로 가는 14번 버스를 탔다.
버스는 충혼탑과 홈플러스를 둘러 명곡교차로에서 소답동을 거쳐 굴현고개를 넘어갔다. 감계 신도시는 들리지 않고 화천리에서 동전 산업단지에서 교차로를 지난 월촌에서 월백에 닿았을 때 내렸다. 백월산 아래 ‘월’자 돌림으로 월촌과 월백과 남백이 나란히 있는데 월촌은 공장이 들어섰고 월백과 남백은 자연마을 원형질이 남은 구역이다. 백월산 바위 봉우리는 쳐다만 보고 지났다.
예전에는 백월산 등정을 어렵지 않게 했으나 근래는 머뭇거려진다. 아마 앞으로 백월산을 오르려는 마음은 아예 거두어야 하지 싶다. 연전까지 겨울 새벽에 마금산 온천수 몸을 담근 뒤 해가 솟을 무렵 마산리에서 북사면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올라 월백마을 억불사로 내려섰다. 화양고개에서 주남저수지가 바라보인 동남쪽 산등선을 따라 정상으로 올라 마산리로 내려가기도 했다.
월백마을 앞 구부정한 농로를 따라 걸었다. 빈 논바닥은 휴경지로 늦은 봄에 물을 가두어 다시 벼농사를 준비할 테다. 농로와 인접한 텃밭은 마늘이나 양파를 심어 가꾸고 시금치를 비롯한 월동 채소들도 보였다. 무를 뽑은 자리로 가봤더니 냉이가 자랐을 법했는데 선행 주자가 먼저 캐 간 흔적만 남고 보이질 않았다. 내년에 싹이 틀 씨앗이 될 몇 포기는 남겨야 하는데 아쉬웠다.
산모롱이를 돌아가니 양봉단지를 지키는 검둥이는 짖지 않고 꼬리를 흔들며 과객을 반겼다. 길 아래 언덕에 복숭아 과수원은 전정을 깔끔하게 해두고 두엄까지 내어 봄 농사가 시작되었다. 감나무 둥치에 묶인 흰둥이는 아까 양봉원 검둥이와 달라 사납게 짖어대 목줄이 풀릴까 봐 걱정했다. 갈전마을이 보이는 야트막한 고갯마루 산불감시원은 유튜브를 시청하면서 무료함을 달랬다.
한우와 젖소 축산 농가 많은 갈전마을을 지난 승산 들녘으로 나가니 벼를 거둔 빈 논바닥은 큰기러기들이 먹이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주남저수지 인근에는 환경단체에서 양곡 포대 벼를 흩어준다만 승산 들녘으로 날아온 큰기러기들은 콤바인이 굴러가며 남겨진 벼 낱알을 먹이로 삼았다. 북녘에서 날아온 같은 철새라도 뿌려준 먹이를 먹는 녀석과 자연산을 먹는 녀석으로 나뉘었다.
승마를 즐기는 이들의 말을 키우는 체험장을 지난 길섶에 냉이가 보여 배낭의 호미를 꺼내 몇 줌 캐 봤다. 가까이 소똥과 같은 말똥이 보였지만 사료가 볏짚이나 건초 검불을 먹여선지 냄새는 나질 않았다. 인적 없는 들녘에서 평화로이 먹이활동 하던 큰기러기 한 무리가 나를 보더니 푸드덕 날아올랐다. 들녘에서 신천을 건너 화천리 밀밭 식당을 찾아 냄비우동으로 점심을 때웠다.
감계천을 따라 걸어 천변에서 유난히 꽃이 일찍 피던 매실나무를 찾아가 봤다. 개울 건너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북풍을 막아줘 다른 곳보다 개화가 빠른 편인데 아직 봉오리만 봉긋해져 있었다. 지난 세밑에 봉림동 분재원에서 봐둔 운룡매보다는 개화가 늦을 듯했다. 새터로 건너가 달천정 구천의 매화를 살폈더니 거기는 아직 봉오리도 부풀지 않았지만 수액은 펌프질하지 싶다. 24.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