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 1 / 오철수 (시인)
가.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란? 나에게 있었던 일이란 말 그대로 내가 겪은 일(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진탕 먹고 정신을 잃었던 경험이나, 차를 타고 졸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 갔다거나, 지하철에 중요한 물건을 두고 내려서 그것을 찾으러 종점까지 갔다거나, 별 이유 없이 두통이 하도 심해 병원에 갔던 일과 같이 시간적으로 펼쳐졌던 일이나 사건입니다.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그런 일이나 사건이 뭔가 의미 있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다가올 때 그런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시 쓰기입니다. 다음 예문을 보겠습니다.
집이 가까워 오면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깨어 보면 늘 종점이었다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 속을 내딛듯 골목으로 사라져 가고 한 정거장을 되짚어 돌아오던 밤길, 거기 내 어리석은 발길은 뿌리를 내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늘 막다른 어둠에 이르러서야 했던, 그제서야 터벅터벅 되돌아오던, 그 길의 보도블록들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그래서 길은 기우뚱거렸다 잘못 길들여진 말처럼 집을 향한 우회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희미한 종점 다방의 불빛과 셔트를 내린 세탁소, 쌀집, 기름집의 작은 간판들의 바람에 흔들렸다 그 낮은 지붕들을 지나 마지막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지붕들 사이로 숨은 나의 집이 보였다 집은 종점보다는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 나희덕 「종점 하나 전」 전문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늘 타는 버스인데도 묘하게 집에 가까이 올수록 졸음이 쏟아져 깜박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내리지 못하고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렸던, 그래서 한 정거장을 되짚어 왔던 경험. 그래서 사실 쉽게 흘려버릴 수도 있는 그런 경험인데, 시인은 그 일로부터 뭔가 의미심장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예 타자마자 잠이 들어 종점까지 왔다면 피곤해서 그러겠거니 하고 말 텐데, 꼭 집에 가까이 올수록 졸음이 쏟아지고 내려야 할 곳에서 깜박 졸다가 한 정거장 더 간 종점에서 깨인다는 것이, 또 그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이 묘하지 않습니까? 뭔가 내 마음을 짜릿짜릿하게 합니다. 특히 막차를 탔을 경우에는 다시 나가는 버스도 없고 해서 길을 되짚어 걸어올 때! 그 되짚어 오는 밤길의 면면이 생의 조건에 대한 어떤 암시처럼 느껴지며 서정의 파고를 불러일으킵니다.
그 체험을 나눠 보면 (1) 습관처럼 집을 지나치는 졸음 (가) 이상하게도 (나) 늘 (다) 어리석은 발길 (2) 되짚어 오는 밤길의 면면 (라) 보도블럭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기우뚱거렸다 (마) 우회 (바)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3) 우리의 생의 조건이 마치 그처럼 ‘이상하게도’. ‘어리석게’, ‘기우뚱거리는’, ‘우회’를 조건으로 하는 길 같아만 보인다는 사상 감정 (사) “집은 종점보다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그래서 있었던 일 시로 쓰기는 (1) 있었던 일 (2) 있었던 일이 왠지 찌릿찌릿한 느낌을 주다가 (3) 생의 한 국면에 해당하는 의미 감정을 불러일으켜 (4) 의미가 드러나게, 의미를 중심으로, 있었던 일(사건)이라는 객관적 자료를 활용하여 사상 감정을 표현하기입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위 시를 봐도, 있었던 일이 생의 한 국면에 대한 이해를 촉발시키지 못했다면 이와 같은 시가 쓰여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리고 있었던 일의 면면에 근거하지 않고는 그런 생각을 표현할 길도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처럼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란 있었던 일이 불러일으킨 사상 감정을 있었던 일에 근거하여 표현하는 쓰기입니다.
나. 시 쓰기의 재료 나에게 있었던 일을 대상으로 하는 시 쓰기입니다. 있었던 일이 나에게 어떤 생각과 느낌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그런 생각과 느낌을 있었던 일에 근거하여 표현하는 시 쓰기입니다.
그래서 시 쓰기의 재료는, ▽ 있었던 일의 어떤 면 - 경과 과정의 어떤 면들(이야기) ▽ 있었던 일들을 불러일으킨 생각과 느낌이 됩니다. 실제로 나희덕의 「종점 하나 전」도 있었던 일의 면면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생각과 느낌을 더해 나가는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만약 있었던 일의 면면이 생에 대한 이해를 환기하는 바가 부족했다면 이와 같은 시 쓰기는 불가능합니다. - ‘시 창작 강의 노트, 나를 바꾸는 시 쓰기(유종화, 새로운눈, 201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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