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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하신 하나님
삼하 12:24-31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26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27 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28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29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
30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31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삼하 12:24-31 / [다시 낳은 아들 솔로몬] 다윗이 자기의 아내 밧세바를 찾아가 잠자리를 같이하고 지나간 슬픔을 위로해 주었다. 밧세바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다윗은 새 아이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도 이 아이를 사랑해 주셨다. 25) 여호와께서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 사실을 알려 주셨다. 나단은 다윗을 찾아가 여호와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그 아이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지어 불렀다.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아이' 라는 뜻이다. 26) [암몬 족속의 수도 랍바의 함락] 요압 장군은 암몬 족속의 수도 랍바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성의 앞부분을 점령하였다. 27) 이때에 요압이 다윗에게 몇 사람을 전령으로 보내어 이렇게 보고하였다. `제가 마침내 랍바성을 기습 공격하여 상수도와 연결된 시냇가의 도시 구역을 점령하였습니다. 28) 이제는 임금님께서 직접 남아 있는 이스라엘의 군대를 거느리고 오셔서 이 성의 중심부를 점령하십시오. 이 성을 정복하는 일은 제게 허락된 권한이 아니니 임금님께서 직접 점령하시기 바랍니다.' 29) 다윗은 이스라엘에 남은 장정들을 모두 불러모은 후에 랍바로 가서 그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30) 다윗은 암몬 족속의 신 밀곰의 머리에서 금면류관을 벗겨다가 머리에 썼는데 그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었고, 그 면류관의 중앙에는 값비싼 보석도 하나 박혀있었다. 그 밖에도 다윗은 그 성에서 많은 물건을 약탈하였다. 31) 또한 그는 그 성의 주민을 포로로 끌어다가 예루살렘 건설에 투입하였다. 그들은 톱으로 돌을 자르거나 정으로 돌을 깨고 다듬으며,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고, 가마에서 벽돌을 굽고, 도끼로 통나무를 다듬는 등의 일을 하였다. 다윗은 암몬 족속의 다른 성읍과 그곳의 주민들에게도 랍바성에서와 똑같이 처리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를 모두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은 다윗과 밧세바의 둘째 아들 솔로몬을 지극히 사랑해 주십니다.
솔로몬의 출생(24-25) 밧세바를 우리아가 아닌 다윗의 아내로 정당한 부부로 지칭합니다. 첫째 아이는 죽었지만, 다윗 그리고 밧세바는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는데, 솔로몬의 출생은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을 받습니다. 솔로몬의 출생이 간단히 언급되는데,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했던 선지자가 이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합니다(25). 우리아의 아내가 이제는 다윗의 아내 밧세바로,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다윗의 모든 아들들 보다 더 사랑을 받아 왕위 계승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기억하십니다. 그는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들 솔로몬을 사랑하셔서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부르셨는데, 그 뜻은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입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사랑의 선물입니다.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죄의 제거가 아니라 성품과 생활의 변화를 목적으로 합니다.
다윗이 랍바를 쳐서 점령하다(26-31) 암몬과의 적대관계는 다윗의 사절들에 대한 암몬의 모욕으로 시작하여, 다윗이 암몬 사람을 상대로 치르던 전쟁은 이제 끝났습니다. 요압은 성읍의 아랫부분을 점령한 다음에 방어 시설물로 둘러싼 성읍 윗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성읍은 다윗에게 넘겨졌으며, 다윗이 자기가 승리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물들의 성읍은 물 길가에 있는 성읍 아래 부분을 가리키는데, 이 물길은 급수하는 데도 중요했습니다. 왕성은 왕궁이 있는 성읍 윗부분에 더 잘 어울리는데, 그곳을 다윗이 점령 했습니다(26).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에서 다윗은 암몬의 우상 말감의 면류관에 박혔던 보석을 자기의 머리 장식으로 사용했습니다. 다윗이 우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 우상 면류관에 박혔던 보석을 자기의 머리 장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만이 참 하나님이신 줄 믿고 소위 신이라고 하는 다른 신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암몬 사람들은 끌려가서 수치를 당했는데, 노동자로 수 십 년 동안 암몬이 독립할 수 없도록 자신들의 성읍들을 파괴하는데 동원 되었습니다.
적 용 :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는 사실로 반복하여 짓는 죄가 있지 않는가를 점검해 보세요.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歲寒圖)를 보면 공자의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歲寒然後 (세한연후) 知松柏之後彫也 (지송백지후조야)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라야 충신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나단의 책망을 듣는 것은 힘든 일이었겠지만, 이로 인해 회개하여 돌아올 수 있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바르게 신앙 생활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조언을 마음을 열고 들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호크마 주석
성 경: [삼하12:24]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솔로몬의 출생]
그 처 밧세바 - 본서 기자는 이제 밧세바(Bath-sheba)를 더 이상 '우리아의 처'(15절; 11:26)라 하지 아니하고 '다윗의 처'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이제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다윗의 처로 인정하셨음과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嫡子)라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위로하고 - 이 말은 단순히 정신적인 차원의 위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위로의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즉, 다윗 왕은 아이를 잃고 허탈감에 빠져 있는 그의 처 밧세바에게 새로운 아이를 낳아 주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그녀를 위로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이어지는 '동침하였더니'란 말과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Hertzberg, Caspari).
솔로몬이라 하니라 - 여기서 '솔로몬'(*, 쉘로모)은 '평강의 사람'이란 뜻이다. 다윗이 그의 이름을 솔로몬(Solomon)이라고 지은 동기에 대하여, 혹자는 이제 이 아이의 시대에는 다윗 자신의 시대에 있었던 것과 같은 피흘리는 처절한 전쟁(8, 10장)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주장한다(Lange,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이라고 하는 아이가 자신의 범죄에 대한 다윗의 진실한 회개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 가정에 사랑의 표시로 주신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다윗이 그의 새 아이를 솔로몬이라고 이름한 것은 솔로몬의 출생이 하나님과 그 가정 사이에 '화목'관계가 회복된 사건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임이 분명하다(Keil).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이 아이의 이름을 재차 지어주신 것(25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그런데 이같은 솔로몬은 실상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넷째 아들이다(5:14; 대상 3:5).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이 앞서 죽은 아이(18절)의 바로 다음에 태어난 것처럼 기술된 까닭은 아마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25절). (2) 장차 다윗의 왕위를 이을 계승자로서 솔로몬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왕상 1장). 한편, 본장에서 솔로몬의 출생 기사는 랍바 성 함락 사건(26-31절)보다 앞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솔로몬의 출생 사건이 랍바 성의 함락 사건 이후에 있었을 것으로 확실히 사려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군의 랍바 성에 대한 포위 공격(包圍攻擊)은 밧세바가 죽은 아이(18절)을 잉태하였을 때(11:5) 이미 진행되고 있었으며(11:1, 14-25) 솔로몬의 출생은 그로부터 약 2년 후의 일이기 때문이다(Keil, Lange, Clericus, Thenius). 따라서 우리는 본 기록 역시 연대별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기 위해 주제별로(topically)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5:11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2:25]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솔로몬의 출생]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 여기서 '보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솰라'(*)는 '어떤 특수한 임무를 맡기어 보낸다'는 의미를 가진다(민 13:16, 27; 14:36; 16:28, 29; 렘 19:14; 25:17; 시 105:26, 28; 사 55:11; 61:1). 따라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내방(來訪)한 것은 다윗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알리기 위한 직무 수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Keil).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 여기서 '여디디야'(*)란 이름은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란 뜻이다. 이 이름은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의 '다윗'(*)과 내용상 같은 점을 시사해 주기에 충분하다. (1) 하나님께서 회개한 다윗을 전보다 더욱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솔로몬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이다(Keil, The Interpreter's Bible). (2) 다윗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5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총을 베푸사 그의 아들 중에 하나를 후계자로 선택하여 다윗 왕조가 영구히 계속되도록 하셨다는 사실이다(7:14-16). 즉, '여디디야'(Jedidiah)라고 하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다윗의 후계자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Pulpit Commentary, Payne). 아무튼 이와 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셨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7:4-16).
성 경: [삼하12:26]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랍바 성 정복]
요압이... 왕성 랍바를 쳐서 취하게 되매 - 랍바 성 함락 사건이 솔로몬의 출생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임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이다. 24절 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왕성'(the royal city)은 랍바 성을 이루고 있던 두 성중 하나의 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성은 카알(Keil)의 주장처럼 27절의 '물들의 성'(the city of water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 둘은 랍바 내의 각기 다른 두 성이다(Lange). 11:1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2:27]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랍바 성 정복]
물들의 성 - 이는 왕성(王城)과 더불어 랍바 성을 이루고 있던 또 하나의 성이다. 즉 이는 얍복 강에서 흘러 들어온 물을 가두어 두었던 랍바의 수원지(水源池)를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성이었다. 11:1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2:28]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랍바 성 정복]
이제 왕은... 취하소서 - 랍바 성의 두 성 중 하나인 왕성(王城)을 탈취한 요압(26절)이 나머지 하나인 '물들의 성'을 탈취하기 전에(27절) 예루살렘에 있던 다윗 왕을 모셔오는 장면이다(Lange). 그런데 이처럼 요압이 직접 랍바성을 완전히 함락시키지 않고 다윗을 초치(招致), 그로 하여금 랍바 성을 정복케 한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음과 같이 견해를 달리한다. (1) 이러한 일은 그 당시 원정군(遠征軍)에게 흔히 있었던 일로서 이 일의 동기를 특별히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견해이다(The Interpreter's Bible). (2) 암몬족의 재산을 사적으로 노략하지 않고 당시의 국제적 계약(契約)에 따라 합법적으로 인수하기 위해서라는 견해이다(Hertzberg). (3) 그러나 이상의 제 견해는 본장의 전체 문맥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요압의 처신은 다분히 개인적인 소신이나 야망에서 나온 행위로 보아야 한다(Lange). 즉, 요압은 자기의 주인인 다윗 왕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에서 그렇게 했거나 아니면 군대 장관이라는 자신의 현 위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다윗왕에게 아부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서에서 자주 보여지는 다윗왕에 대한 요압의 맹목적인 헌신과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이중적인 성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1:17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2:29]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랍바 성 정복]
다윗이... 랍바로 가서 - 당시 다윗이 거처하던 예루살렘(11:1)에서 암몬의 수도 랍바(Rabbah)까지는 약 70km 정도의 거리이다. 따라서 요압의 전갈을 받은 다윗(27, 28절)은 그다지 많은 시간을 소요(所要)하지 않고서도 랍바에 당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11:1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2:30]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랍바 성 정복]
그 왕의 머리에서 - 여기서 '그 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캄'(*)은 문법적으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즉 이는 암몬족의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Keil), 또한 암몬 사람들의 우상인 '말감'(밀곰)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Lange, Wevers, Wellhausen,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삿 2:11-23 강해, '고대 근동의 신들' 참조.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첫번째 해석을 취할 경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난점에 봉착하게 된다. (1) '그 왕'에서 '그'를 암몬 사람들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로 보려면 그 앞절에 암몬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나와야 하는데 없다는 점이다(Wellhausen). (2) 또한 본절에 나오는 '보석 있는 면류관'의 무게가 금 한 달란트에 달하는데 이는 사람이 오래 쓰고 앉아 있을 수없는 무게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의 '그 왕'이란 당시 암몬인들이 자신들의 왕과 같은 존재로 섬기던 신(神)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금 한 달란트라 - 여기서 달란트(Talent)는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이 무게를 측정하던 도량형으로 1달란트는 34. 27kg에 해당된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34kg이나 나가는 면류관은 다윗이 머리에 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암몬족의 면류관에서 보석만을 빼어 자신의 면류관에 부착한 후 이를 머리에 썼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행위는 헛된 우상을 섬긴 암몬 사람들의 실패와 다윗 왕이 이제 암몬의 정복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행위였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삼하12:31]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랍바 성 정복]
톱질과 써레질... 하게 하니라 - 본절은 학자들간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왜냐하면 원문상 본절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1) 다윗이 암몬인들에게 톱질이나 써레질 등과 같은 고역(苦役)을 시켰다는 해석이다(Hertzberg, Wycliffe). (2) 다윗이 톱이나 써레 등과 같은 도구로써 암몬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해석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이 중 어느 해석이 보다 타당한지는 섣불리 판단키 어렵다. 그러나 과거 암몬인들이 다윗의 신복에게 크나큰 수치를 안겨 주었던 점(10:4, 5)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은 다윗이 어떤 식으로든 암몬인들에게도 잔인하게 복수한 것을 가리키는 구절임이 분명하다.
< 설 교 >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삼하 12:24-25 / 이동휘목사
이는 곧 다윗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윗은 모든 상황이 자신의 계획대로 종료되었다고 안심하고 있었겠지만, 그의 악행에 대한 심판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밧세바가 낳은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심으로부터 시작하여, 후에 아들 압살롬의 반역 사건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죄악을 감추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소위대로 보응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다윗이 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목숨만은 건졌지만, 악행에 대한 보응을 받게 되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아의 죽음의 비밀은 오직 다윗과 요압만이 알고 있었고 모든 사람이 알지 못함으로 영영히 묻힐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악행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악행을 두고 거의 1년 동안 침묵하시고 문책하지 않으셨습니다. 밧세바가 출산할 동안 침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만 아는 죄를 범했을지라도 전혀 반응이 없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까지 속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욥은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욥 13:9)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숨은 죄를 찾아 감찰하시게 되면 하나님을 속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침내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셨을 때는 이미 아이가 태어났을 때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동안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하루하루가 좌불안석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이 탄로난 것은 아닌가 하고 불안해 하며 하루가 천년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한 때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고백 받도록 나단 선지자를 보내었습니다. 죄의 얽매임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주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다윗의 죄악을 지적하자 지체없이 그 자리에 엎드려 통회하게 됩니다. 이러한 다윗의 통회 자복하는 모습이 시편 51편입니다.
(시51:1-19)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긴 동안 다윗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러한 고통을 다 아시고, 적절할 때 그렇게 나단 선지자들 보내셨습니다. 가장 아플 때 수술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죄를 지적해 주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적 의사인 것을 믿으시고, 그럴 때 거부하지 말고 수술을 받으시면 평생 건강한 영적생활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나단 선지자는 주저함 없이 다윗의 죄악을 지적했습니다. 다윗은 지체없이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 며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 고백을 듣고 그 자리에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삼하12:13) 죄악을 회개한 다윗을 용서하셔서 죽음에 이르지는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말미암아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원수에게 비방할 거리를 제공하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삼하12:13-14) (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다윗의 회개를 들으시고 그 죄악을 용서하셔서 다윗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그 죄악에 대한 징계로 간음으로 출산한 아이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간음과 살인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혹 하나님께서 죄를 회개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징계나 형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는 말씀에, 크게 당혹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믿음이 실족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지식과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히브리서 12:5-8을 보겠습니다.
(히12:5-8)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것은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고, 하나님께서 채찍으로 때리시는 것은 그가 사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 자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와 채찍을 받을 때 그 징계와 채찍을 경히 여기기 말며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그 죄에 대한 징계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삼하12:10-11)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다윗이 충신의 우리아의 가정을 권력의 칼로 파괴하였기 때문에, 공의의 하나님께서도 칼이 다윗의 집을 영영히 떠나지 않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다윗의 집에 재난을 일으키시고 다윗의 처들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백주에 그와 동침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하나님의 응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겠습니까? 그같은 하나님의 선포는 징계라기보다는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구절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성경 전체가 주는 일관성 있는 메시지의 큰 틀을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일종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스러움을 보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징계는 일차적으로 치료하고 고치는 약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징계를 통해 그의 인격과 잘못된 삶의 태도를 고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그냥 ‘용서한다’는 말 한 마디로 싸구려 용서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벌하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신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먼저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게 하심으로써 영적으로 죽음을 경험하게 하셨고, 후에는 육신의 죽음으로 그 결과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임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시고 그 벌을 다 주고 나서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차원을 오해하거나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해 주셨다면 모든 영적, 육체적 죄의 결과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지 않는가?’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가르침은 죄 용서가 죄의 결과들로부터의 구원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는 분명히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인정했을 때, 그리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자복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구한대로, 구원의 즐거움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죽지 않은 것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입니다. 왜냐하면 다윗 자신이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미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감당해야 할 죄의 결과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죄의 결과라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한 값, 형벌과는 다릅니다. 그 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 용서와 더불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죄의 결과는 형벌은 아니지만, 죄의 결과로서 우리가 죄에 대한 징계를 짊어짐으로써 우리로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하는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인생을 사는 동안에 이루어가는 성결은 결코 영광 그 자체는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하늘의 소망도 여전히 영생 자체와는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용서받았지만, 죄로 말미암아 짊어져야 하는 땀 흘리는 삶은 감당해야 했습니다. 은혜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분하기 싫어하는 부분입니다. 은혜는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다 면제해준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은 그런 은혜는 결코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누구인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성도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성도가 어떻게 거룩해지는지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성도는 성공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성도의 거룩한 삶을 원하십니다. 다윗은 더 이상 이런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식으로 살아갈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범죄의 결과로서 가장 합당한 것을 징계로 주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바라고 은혜를 사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더욱 더 성결한 인격과 삶으로 성숙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 중 혹 징계를 받을지라도 그 징계를 경히 여기거나, 그 징계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더욱 더 성결한 인격과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사는 하나님의 친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 대한 징계로 밧세바와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를 데려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생명을 데려가시겠다고 하시겠습니까?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셨습니다.
(삼하12:14) (14)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다윗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아이를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 사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 그들의 나라가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성전은 무너져 훼파되고 백성들은 다 제국의 여러 곳으로 사로잡혀갔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뭐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이런 방식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자기 백성을 심판하여 망하게 하심으로써 공의의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움직이지 못하는 목석우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범죄하는 자기 백성을 때리시고 고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열심으로 다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반드시 이루고야 마십니다. 본문도 바로 똑 같은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밧세바의 사이에 죄로 말미암아 태어난 아들을 치심으로써, 당신께서는 죄를 다루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윗 자신과 그의 주변에 그리고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 회개하기만 하면 되니까’ 라고 겁 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배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나, 우리로 죄에 머물러 살지 않도록, 죄의 결과와 관련한 징계로 우리를 다루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범죄하지 마십시오. 죄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그 결과를 남기는 법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세상 사람들의 목전에서 무시를 당하도록 허용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항상 범사에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지 않도록 거룩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합한 자로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윗 같은 사람이 범죄했습니다. 그것도 추악하고 더러운 성격의 죄였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척하고 살지라도 누구나 다 이렇게 넘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은 이로 말미암아 조금도 손상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죄로 다루심으로써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를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의 죽음이었습니다. 불륜의 아이가 죽은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이런 하나님,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심으로써 당신의 자녀로 손색없게 길러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품을 생각할 때, 징계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됩니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데려가시겠다는 말씀이 떨어지자 엎드렸습니다. 그는 금식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밤새도록 간절히 아이를 살려주시기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7일 만에 아이를 데려가셨습니다. 아이가 죽자 신하들은 그 소식을 금식하며 기도하는 다윗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에도 힘들어했는데, 죽었다는 것을 알면 왕이 견딜 수 없어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곁의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아이가 죽은 것을 눈치를 챈 다윗은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뜻밖에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베풀게 하는 것입니다. 신하들에게 이 모습은 의아하게 비춰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혹시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아이를 살려주실까 하여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아이를 데려가셨으니 이제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 놀라운 대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대목에서 넘어지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다윗은 아이를 살려주시기를 원해서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램과 달리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때 어떻게 하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기도하는대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 때가 종종, 아니 많이 있습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달랐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때가 중요합니다. 이때 다윗이 보여준 행동은 ‘주의 뜻은 선하십니다. 주께서 하신 일은 옳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범죄했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비록 내 뜻과 달라도, 비록 나를 아프게 해도, 비록 마음이 상하는 것이더라도 선하시고 옳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도 다윗과 같은 수준의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앙의 자리로 성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심을 믿고 혹 징계를 받을지라도 감사와 은혜로 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징계를 은혜로 여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을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삼하12:24-25)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하나님께서는 밧세바를 통하여 한 아이를 주셨는데, 그가 솔로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그에게 ‘여디디야(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이름까지 주셨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전의 그 아이를 안 데려가시면 되지, 왜 데려가시고 나서 새 아이를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통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징계는 비록 당시에는 아프고 힘들지라도 그 징계를 잘 받으면 ‘징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래의 은혜를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는 징계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모든 징계는 자녀들이 징계를 잘 받을 때, 피하지 않을 때, 반드시 장래의 은혜를 낳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께서 베푸실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잘 알았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선포했습니다.
(시30:4-5) (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백의 의미를 이제는 아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이 고백을 하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 깊은 의미의 고백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어떤 자리에 처해 있든지 우리로 이런 고백을 가지고 선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달게 받은 다윗에게 아들을 주시며, 그 이름을 ‘평강’이라는 뜻을 지닌 ‘솔로몬’,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뜻을 지닌 ‘여디디야’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이러한 것은 다윗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된 상태를 의미하며, 크게는 지금까지 피 흘리는 전쟁 시대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평화의 시대가 임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솔로몬이 잉태되었을 뿐 아니라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뜻으로 ‘여디디야’라는 지으신 것은,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사생자를 죽이심으로 다윗을 징계하시기도 하시지만, 솔로몬, 여디디야를 주심으로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사 징계도 하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용서를 보여주십니다.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보여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지은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실지라도, 그 징계를 달게 받을 때 용서와 더불어 더욱 큰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를 회개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솔로몬을 주시고 그 이름을 ‘여디디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말세에는 세계 인구의 1/3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을 보면서도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계9:18-21) (18)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19)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그만큼 사람들이 강퍅하여 엄청난 재앙으로 세상 사람 1/3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생활로, 다윗처럼 ‘여디디야’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위로의 하나님
김의식목사 / 삼하 12:24-25
오늘 본문은 위로가 필요한 밧세바, 다윗, 솔로몬에게 나단 선지자 즉 “주는 자”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나단을 보내면서 시작됩니다. 그러면 위로가 필요한 밧세바, 다윗, 솔로몬을 어떻게 위로하셨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가 필요한 우리에게도 어떤 위로의 음성을 주시는지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평화를 주십니다. (24절)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
다윗이 철저하게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 누구보다도 큰 상심이 된 밧세바를 위로하며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면서 두 번째 아들을 얻게 되고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처럼 '솔로몬'은 '평화 평강의 사람'이란 뜻으로 다윗은 자신에게 주신 아들을 통해 자신의 삶에 평화가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오늘 등장하는 다윗, 밧세바, 나단, 솔로몬 중 누가 가장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겠습니까? 밧세바가 아니겠습니까? 밧세바를 생각해보면 인정받고 충성된 남편이 전쟁터에 있는 동안 왕의 권력 앞에 자신은 비참하게 무너지고 남편은 전쟁터에서 죽고 자신은 다윗왕의 아이를 임신하고 누군가에게 짓밟힌 이 여인에게 어떤 걸로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임신한 아이는 태어나서 7일 만에 죽고 맙니다. 어쩌면 그 아이가 죽은 것이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수치와 아픔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밧세바에게 다시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아들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힘과 권력에 철저하게 무너진 한 여인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솔로몬을 주셨습니다. 도저히 원망과 부끄러움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여인에게 태의 문을 여서서 위로하십니다. 그 여인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이렇게 어리석고 연약하고 교만해서 죄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변함없는 사랑이며 그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그래서 시편2편 7절에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는 다윗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무너진 밧세바를 위해서 위로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여전히 너는 내 딸이다” 여전히 이 단어가 참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그로 인해 허물과 죄를 짓는 우리를 향한 마음은 바로 위로의 음성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변함없이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밧세바처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짓밟힌 상처난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받아 주십니다. 아버지 앞으로 나오면 광야에도 메마른 땅에도 꽃이 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짓밟힌 인생이라도 원망과 불평과 저주의 삶이 아니라 평화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27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밧세바는 어쩌면 가장 비참한 여인이 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밧세바를 위로하셔서 그 마음에 평화를 주셨습니다. 다윗의 보호아래 살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밧세바가 고통과 슬픔 가운데 있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다윗을 철저하게 회개시키시고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위로하시면서 솔로몬을 주심으로 평화를 얻게 하셨습니다. 평안을 주셨습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를 바라보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의 도우심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주시는 평안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2. 회복시키십니다. (25상)
“선지자 나단을 보내” 하나님은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을 보내십니다. 이미 1절에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려고 우리야를 죽이기 위해서 요압에게 비밀 문서를 보내고 적군의 손에 비참하게 죽게 한 사실을 아시고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선지자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분명 쓴 소리를 하거나 불편한 소리를 하는 존재입니다. 별로 달갑지 않는 존재입니다. 아마도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은폐하고 거의 완전한 범죄를 하고 나중에 조용히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하였을 것인데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찾아옵니다.
생각해보면 선지자 나단을 보내신 것은 다윗을 책망하시기 위해서이기 이전에 그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깨어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시는 데는 특별한 은혜를 주시기 위함인데 그것이 바로 회개를 통한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셨는데 바로 회복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회복인 줄 믿습니다. 철저한 회개를 통한 회복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다윗을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무너지고 후회와 어둠의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나단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시편 51편 3절,5절, 10-12절에 보면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의 철저한 회개의 제목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시지 않는 것입니다. 밀어내지 마시고 쫓아내지 마시고 성령을 거두지 마시라고 울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회복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로인 회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복음 14장 16-18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버려두지 않고 떠나지도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등지고 멀어지게 하는 사탄의 계략에 무너지지 않도록 우리 곁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셔서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특별히 우리 주위에 영적인 사람들이 보내셔서 우리를 깨우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 아멘으로 화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자신은 깨어 회개하고 회복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종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우리 곁에 보내신 주의 종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주의 종들을 통해 주시는 말씀에 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나단을 보내신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욕심으로 철저히 무너진 다윗도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다윗이 철저하게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나단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편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신실한 영적인 사람들을 붙여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의 종들을 우리 곁에 두셨습니다. 주의 종들이 평신도들보다 탁월해서가 아니라 주의 종들에게 주신 사명 때문입니다. 상처받고 힘든 영혼들을 위로하라고 주의 종들을 세우셔서 우리의 곁에 두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을 존중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여러 방편 중에서 다윗에게 솔로몬에게 나단을 붙여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담임목사님을 세우시고 부족하지만 저희 목회자들을 여러분들에게 붙여주신 줄 믿고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잘 섬기시기 바랍니다. 이런 섬김을 하나님은 분명히 기억하시며우리에게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3. 치유하십니다. (25하)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나단을 솔로몬에게 보내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디디야'란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란 뜻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도 밧세바에게도 중요했지만 솔로몬에게도 참으로 중요한 사람이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을 “여디아야” 라고 부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솔로몬이라고 부르는데 나단 선지자만 솔로몬을 여디디야 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언젠가 솔로몬에게 닥칠 인생의 방황을 아시고 미리 솔로몬에게 여디디야라고 계속해서 불러줍니다. 너는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란다 솔로몬을 만난 때마다 다윗 왕을 뵈러 갈때마다 꼭 솔로몬을 만나서 “여디디야” 이렇게 불러줍니다. 그리고 언제가 시간이 흘러 왕이 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비록 다윗 왕이 늙었지만 목숨을 걸고 솔로몬의 왕권을 지켜줍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언어생활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축복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상처에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표현하여 더 큰 사랑으로 품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서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 주위의 이들에게 그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당신은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참 따뜻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안에 사랑의 언어생명을 살리는 생명언어로 가득하게 되는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고집과 욕심과 모질 것들을 다 녹일 수 있는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의 심령이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로마서 5:5-6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사랑으로 가득해져야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해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서다윗을 지켜내고 솔로몬을 지켜낸 것입니다. 단호할 때는 단호하고 부드러워야 할 때는 한 없이 부드러웠습니다. 죄로 인해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있고 소통이 되지 않은 다윗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책망을 했습니다. 또한 반대로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짐으로 쓰러질 수 밖에 없는 솔로몬에게는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단다” 그렇게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24, 29절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우리 안에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방법 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의 입으로 누군가를 축복하고 긍휼의 마음으로 이해해주고 배려해주고 사랑의 언어로 격려하고 위로해 주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요? 우리가 사랑을 받지 못해서 사랑할 수 없을까요? 부모로부터 사랑과 칭찬과 격려를 받고 자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3:34-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1서 4:19절 말씀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미 이렇게 먼저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를 축복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품고 덮고 서로를 축복해야 합니다. 서로를 사랑하며 축복함으로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셔서 축복의 언어로 솔로몬을 치유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참된 위로자는 우리 주님 한 분 뿐이십니다. 주님 밖에 우리를 위로할 분이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어떤 위로보다 도 가장 확실한 위로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보내셨습니다. 짓밟힌 인생에게 평화와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욕심으로 무너진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버림받고 별 쓸모없다고 살아가는 상처 입은 인생을 받아주시고 축복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늘도 그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삼하 12:24-31
성경 속 다윗의 삶은 고난과 은혜가 공존하는 여정입니다. 사무엘하 12장 24-31절은 다윗이 큰 시련을 겪은 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새 아들을 얻고, 랍바를 정복하며, 백성의 사기를 크게 높이는 축복을 받습니다. 이 글에서는 다윗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 우리 삶에 주는 교훈을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성경을 읽는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가 큰 위로와 영감을 주길 바랍니다.
새 아들, 솔로몬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
다윗은 밧세바와의 잘못으로 태어난 첫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삼하12:15-23).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하 12장 2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그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셨다.” 이 새 아들, 솔로몬은 다윗 가문에 큰 축복이 되었고, 훗날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윗의 실패와 슬픔을 회복시키는 데서 시작됩니다. 솔로몬의 탄생은 단순한 가정의 기쁨을 넘어,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하시고 새 출발을 허락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큰 희망을 줍니다. 우리는 종종 잘못을 저지르고 좌절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보시고 새 기회를 주십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평화’를 뜻하는데, 이 이름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삶에 평화와 회복을 가져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용서와 새 출발의 은혜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나요?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간다면, 우리도 새 아들 같은 축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랍바 정복,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
다윗의 은혜 이야기는 개인적인 축복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12장 26-29절에 따르면, 다윗은 암몬 족의 수도인 랍바를 정복하는 큰 승리를 거둡니다. 이 전쟁은 이미 오랫동안 이어져 왔지만, 다윗이 직접 전장에 나서며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랍바의 왕관을 취하고 그 성을 점령했다고 기록합니다(삼하12:30).
이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힘을 주시고 이스라엘을 강하게 하신 결과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흔들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나 백성을 이끄는 리더로 자리 잡았습니다. 랍바의 정복은 다윗이 하나님의 신뢰를 회복하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삶에도 ‘랍바’ 같은 도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직장에서의 어려움, 가정에서의 갈등, 또는 내면의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의 은혜를 주실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해 보세요.
백성의 사기, 하나님께서 높이신 희망
랍바 정복은 다윗 개인의 승리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사기를 크게 높였습니다. 사무엘하 12장 31절은 다윗이 랍바의 백성들을 관리하며 이스라엘의 통치를 강화했다고 전합니다. 이 사건은 다윗의 리더십이 흔들렸던 시기에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의 왕을 통해 일하신다는 확신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로 확장됩니다. 다윗의 회복과 승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교회와 공동체에도 적용됩니다. 한 사람의 믿음과 순종이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누군가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할 때, 그 이야기는 다른 이들에게도 큰 격려가 됩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며 다른 이들의 사기를 북돋운 적이 있나요? 우리의 작은 간증이 누군가에게 큰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마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 미치는 힘
사무엘하 12장 24-31절은 다윗의 삶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새 아들 솔로몬을 통해 회복된 가정, 랍바 정복을 통해 얻은 승리, 그리고 백성의 사기를 통해 확장된 희망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증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실패와 고난이 끝이 아님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보시고, 믿음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공동체에 희망을 불어넣으십니다.
성경을 읽는 여러분,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해 보세요. 당신의 삶에서 새 아들 같은 축복, 랍바 같은 승리, 그리고 백성의 사기 같은 희망을 경험하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 그분의 은혜를 구한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놀라운 회복과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강재원 / 삼하 12:24-31 찬송가 330장
다윗이 밧세바와 불륜으로 낳은 자식은 죽었지만, 회개하고 새로 낳은 아들은 위대한 지헤자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의 다른 이름이 '여디디야'인데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 로마서에는,
(롬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행실이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가는 곳 마다 형통했고, 싸우는 전쟁마다 이겼습니다.
다만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교만과 나태입니다.
다윗은 이제 요압 장군이 싸워서 점령할 때, 그저 형식적인 제왕 역할만 하면 되었습니다.
적국의 왕이 쓰던 대단히 무거운 금왕관을 노략해서 자기 머리에 썼습니다.
그 무게에 짓눌렸을 것입니다.
세상 부귀 영화가 아무리 좋은 것 같아도 결국에는 그 무게에 인생이 눌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선을 마치 내가 이룬 것처럼 자랑하면 안 되겠습니다.
(기도)
1. 감당할 수 있을만큼만 부어 주옵소서!
2. 형통과 승리를 주셨을 때, 목적과 사명을 생각하게 하옵소서!
3. 지나친 탐욕을 부리다가 그 죄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자유케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사랑하사
삼하 12:24-31 / 김양재목사
날마다 살아나는 큐티 김양재 목사입니다. 오늘 큐티인 말씀은 사무엘하 12장 24절에서 31절까지예요.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의 사랑을 받은 자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여호와의 사랑을 받으면
1. 책임지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처음 보았을 때 사무엘하 11장에서는 우리아의 아내라고 나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24절에서 어떻게 부르나요?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고 해요. 이 작은 표현의 변화 안에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어요. 다윗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징벌에 순종하면서 밧세바의 슬픔을 위로합니다.
자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여인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개 후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밧세바가 얼마나 깊은 정죄감 속에 있었겠어요? 남편 우리아는 다윗의 계략으로 죽었고 간통으로 낳은 아이마저 하나님의 징계로 죽었습니다. 게다가 그 남편을 죽게 만든 장본인과 함께 살고 있어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다윗 한 사람밖에 없잖아요. 세상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상황에서 다윗만이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가 막힌 아픔을 통과한 부부에게 아들을 주십니다. 그 아들이 바로 솔로몬이지요.
25절에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고 해요. 여디디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사랑하셨다라는 의미예요. 비록 죄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징벌과 회개의 과정을 지난 뒤 하나님은 이들에게 여호와께서 사랑하셨다라는 놀라운 은혜의 인장을 찍어 주십니다. 이를 통해 다윗은 부부 간에도 아가페의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밧세바는 비록 우리아의 아내로 기록되었지만 그럼에도 다윗과 함께 구속사의 명단에 찬란하게 그 이름을 올립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수치와 아픔을 통과한 자에게 구속사의 영광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적용 질문 드립니다.
- 내 죄 때문에 주어진 징벌에 순종합니까? 아니면 피하려 하거나 원망합니까?
- 죄를 회개함으로 끝까지 책임지고 위로하는 사랑을 하고 있나요?
여호와의 사랑을 받으면
2.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26절부터는 암몬 자손의 랍바성 점령 사건이 나옵니다.
요압이 암몬 자손에 랍바를 쳐서 왕성을 점령합니다. 시기적으로 이 사건은 다윗이 한창 범죄의 늪에 빠져 있을 때 일어났어요. 다윗이 죄 가운데 있을 때였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이끄셨어요. 다윗이 회개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먼저 다윗 왕국을 견고히 세우신 후에 강권적으로 다윗을 회개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언약을 통해 그의 왕국을 견고히 하겠다고 약속하셨어요. 다윗이 범죄 중에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그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셨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자 신실하심입니다. 다윗은 전장에서 들리는 승전보를 듣고 오히려 두려워했을 거예요.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있는데, 왜 일이 잘 풀리는 거지? 그랬겠죠. 내가 죄를 짓고 있음에도 사업이 잘 되고 자녀가 입시도 취업도 턱 잘 붙는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근심해야 할 일이에요. 지금이라도 빨리 돌이키라고 하나님이 인내하고 계시는 시간입니다.
28절에 보니 요압은 랍바를 모두 점령해 놓고서 왕에게 영광을 돌리겠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충신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우리아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하고서 그것으로 다윗의 약점을 삼아 쥐고 흔드는 인물이었어요. 다윗은 평생 이런 요압에게 끌려다니며 전전긍긍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요압을 다윗 곁에 두심으로 다윗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셨어요.
우리도 능력 있고 믿음직스러워 보이며 내게 꼭 필요한 것 같은 사람을 가까이 하려 하지요. 하지만 그런 관계는 오히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존하게 함으로써 죄의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어쩔 수 없는 힘든 관계 속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외적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택자로 살아가는 내적 성결이에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 혹시 내가 죄 가운데 있음에도 무언가 일이 잘 풀리고 있습니까? 그것을 축복으로 착각하지는 않나요?
- 지금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낙태의 죄책감으로 죽음을 생각하던 자신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날마다 예수님만 따르길 원한다는 한 성도님의 큐티인 묵상 간증이에요. 4대째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났지만 진정한 회개의 의미도 모른 채 술과 음란에 빠져 지냈어요. 믿지 않는 남자친구와 음란한 교제를 이어가면서 느껴지는 죄책감을 무시할 지내던 어느 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저는 결국 낙태의 죄를 범했어요. 며칠 동안 저의 음란을 회개했지만, 자책감에 더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죽음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날 주일 예배 때 "목숨을 끊는 것은 회개할 기회를 놓치는 거예요." 라는 설교 말씀이 크게 들렸어요. 저는 그 즉시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해요? 저 좀 살려주세요." 라고 기도하며 펑펑 울었습니다. 이후 저는 매주 예배에 집을 저의 음란과 교만을 회개했어요. 그리고 공동체에서 제 죄를 고백하며 지체들의 위로를 받고 살아났지요. 또 날마다 큐티하며 회개하니 공허함을 사람으로 채우려 한 죄의 본성이 힘을 잃었어요. 믿지 않는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적용도 하고 하나님 안에서 믿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길 소망했지요. 하나님은 오랜 시간이 지나 제게 자립 신앙이 생기고 나서야 결혼을 허락하셨고 25절 말씀처럼 사랑스러운 두 자녀도 선물로 주셨어요. 하지만 제 안에는 아직도 '뭐든 열심히 하면 안 되는 게 없다'라고 믿는 성공 신화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승리임에도 그 영광을 자기가 취한 다윗처럼 저도 남편과 아이들 섬기는 것에 열심을 내며 나도 속고남도 속이는 신앙생활을 해요. 이제는 날마다 큐티하면서 내 생각과 내 계획을 내려놓고 기복신앙을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길 원해요. 저의 적용은 내 열심히 앞설 때 그날 큐티 말씀을 떠올리며 제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겠습니다.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집안을 깨끗이 정리하고 건강한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입니다.
요압의 청을 받은 다윗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랍바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암몬 왕의 머리에서 보석이 박힌 왕관을 가져와 자기 머리에 써요. 요압이 거의 다 이겨 놓은 전쟁에서 마지막 도장을 찍고 영광을 거둡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승리의 영광을 자기 머리에 얹어버린 거예요. 다윗은 과거엔 전쟁을 이긴 후 전리품 가운데 좋은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쳤어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립니다. 자신의 명예, 소유, 안일만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죄는 우리를 교만하게 몰아가고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습니다. 다윗은 외적으로는 암몬을 정복했지만, 내적인 싸움에서는 패배하고 있었어요. 외적으로 승리하고 열매가 있어도 내적인 거룩이 없으면 공허할 뿐이에요. 거룩을 잃은 승리는 허상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에 이를 수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연약하게 말씀 앞으로 나아가 내 죄를 보며 그분의 거룩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죠. 회개의 결론은 거룩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승리에 도취되지 않고 내적 성결을 사모하며 구속사를 깨달아 여호와께서 사랑하셨다라는 인장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주님 연약한 저희를 기다려주시고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죄 가운데 있음에도 일이 잘 풀릴 때 그것을 축복이라 여기지 않고 진정으로 회개하길 원합니다. 내 죄 때문에 받는 징벌과 고난을 원망하지 않고 나 때문에 상처 입은 지체들을 그릇을 닮아가며 구별된 자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특별히 이 나라의 태아생명보호법이 제정되어 낙태의 죄가 끊어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한 생명을 긍휼히 여기시고 살려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솔로몬이 태어나다
삼하 12:24-31 / 야곱
◆ 솔로몬이 태어나다(24-25)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이 성경구절은 오해하기 쉽다. 본문을 그냥 읽으면 마치 우리아의 아내로 부터 얻은 첫아기가 죽은 후에 그 대신에 솔로몬이 태어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솔로몬이 태어난 것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후 대략 10년이 훌쩍 지난 후일 것이다. 성경은 죽은 아기를 제외하고 솔로몬의 위로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세 명의 형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대상 3:5) 다시 말해서 솔로몬은 앞서 세 명의 형이 태어나고 네 번째로 태어났으니 아무리 짧게 잡아도 7년은 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밧세바의 첫 아들은 죄 때문에 죽었고, 그 뒤에 암논이 다말을 겁탈하는 사건, 그리고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고, 솔로몬은 그후에 태어난, 하나님의 용서의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아가 죽자 밧세바는 통곡을 했다.(23절) 밧세바에게 다윗은 왕이라는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를 겁탈하고 사랑하는 자기 남편까지 죽게 만든 파렴치한일 뿐이다. 이런 밧세바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다윗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재산을 충분히 챙겨준 후에 자기로부터 멀리 떠나 보내거나, 평생을 누구보다 사랑하여 상처를 치유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다윗은 후자를 선택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죽을 때까지 챙기고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것은 우리아의 아내가 다른 처와 첩보다도 더 매력적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밧세바 사건은 다윗의 평생의 오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통치자는 자신의 허물을 숨기기 위해서 이런 여자를 어떡해서든 멀리 떨어뜨려 놓거나, 아니면 자신이 회개하고 달라졌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는 상대방을 죄의 대상으로 정죄해버리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13장에 나오는 암논과 다말 이야기다. 암논은 다말을 사모하여 겁탈하고는, 외려 자신의 죄를 숨기고 싶어서 다말을 증오했다.(삼하 13장)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남편을 잃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밧세바를 내치는 것은 아주 가혹한 일임을 잘 알았다. 만일 다윗이 내쳤으면 이 여자는 이스라엘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윗의 선택은 이 여자를 모르는 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돌봐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밧세바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녀에게 보상하는 길이었다.
우리는 다윗이 끝까지 밧세바를 아낀 것을 단순히 밧세바가 다윗의 모든 처와 첩들보다 매력이 넘쳐서 그랬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오늘날에 불륜이 넘쳐나는 문화에 길들여진 시각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다윗의 회개의 빛이 바랜다. 다윗이 밧세바를 아낀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위로'(24절)가 목적이었다. 회개한 다윗의 신앙 양심이 밧세바를 끝까지 사랑하고 돌보게 한 것이다. 이런 면이 다윗의 훌륭한 점이다.
솔로몬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붙여주셨다. 이 히브리어의 뜻은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라고 한다. 참고로 '솔로몬'은 ‘샬롬’에서 유리한 말인데, ‘평화로운 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미처 징계를 받기도 전에 솔로몬이란 선물을 주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성경을 분석해보면, 솔로몬은 다윗의 회개에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용서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비정상적으로 다윗의 아내가 된 밧세바를 통해 낳은 아들 솔로몬, 그리고 그에게 ‘여디디야’라는 이름까지 주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과연 완전한 용서를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어느 인간도 이렇게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다. 오, 하나님께선 우리 죄를 사하시되 기억지 않으시고 완전히 사하신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 10:17,18)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 받은 뒤에는 혹 하나님께서 옛일을 캐실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잊겠다고 해도 섭섭한 일이 생기면 과거의 허물을 기억에서 꺼내서 이것저것 야단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정말로 완전히 잊으신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 7:19)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셨다. 코리텐 붐 여사는 여기에 흥미로운 말을 덧 붙였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낚시 금지’라는 표지판을 세우신다고 나는 믿습니다” (코리 텐 붐, ‘주님을 향한 방랑자’)
오, 형제여, 우리 주님의 완전한 용서를 믿으라.
용서를 감사하고, 사랑하심을 감사하고, 그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라.
◆ 암몬을 점령함(26-31)
(26)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성경을 그냥 읽다 보면 암몬을 점령한 사건이 솔로몬이 태어난 이후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본문은 사무엘하 11장의 전쟁 상황을 다시 이어서 설명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스라엘과 암몬 과의 전쟁 중에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을 설명하다 보니 전쟁 이야기는 미루고 수년이 지나서 솔로몬이 태어난 이야기까지 하게 된 것이고, 26절에서 다시 본래 11장에서 시작된 전쟁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암몬 자손에게 가서 왕을 치고 그 왕관을 빼앗은 사건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게 하고 한창 죄악 중에 머물러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 다윗이 빼앗은 암몬 왕의 왕관은 무게가 무려 한 달란트나 된다고 했는데, 현대 측정 단위로 환산하자면 무려 34kg이나 된다. 머리에 쓰고 지낼 만한 무게가 아니다. 잠시 써서 버티고 영광을 드러내는 정도였을 것이다.
암몬 자손의 랍바성은 함락하기가 무척 어려운 철옹성이었는데, 요압이 용케 함락시켰다. 암몬 왕 하눈은 피해의식에서 저지른 일에 대해 톡톡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의 백성들이 끌려나와서 노예로 전락했다. 애초에 좋은 의도를 좋게 받아들였다면 좋았을 것을 잘못된 판단으로 자기를 비롯한 모든 백성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래서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을 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본다는 말씀은 너무나 그럴싸하지만, 성경은 잘못된 지도자를 따르지 말 것을 경고한다.(마 7:15)
주님,
메뚜기도 짐처럼 느껴지는 나이(전 12:5)가 되어 가건만
매일매일 해야 할 일, 선택해야 할 일들이 쌓입니다.
힘을 주십시오. 지혜를 주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가 아들을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삼하 12:24 / 헵시바
5. 밧세바에게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태어나다(삼하12:24~25).
24절.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밧세바(밧수아)”는 히브리어로“짓다, 세우다”을 뜻하는“바나””에서 유래한 것으로“아들, 딸”을 뜻하는“벤”의 여성형으로“딸, 손녀”을 뜻하는 말과 “딸, 처녀, 젊은 여인”뜻하는“바트”와“맹세”을 뜻하는“사바”에서 유래한 것으로“맹세의 딸”이라는 뜻이다,우리아의 아내였다가 다윗의 아내가 된 여인이다. 밧세바는“우리아의 아내”(15절, 11:26)로 부르던 것을“다윗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우리아의 아내가 아닌 다윗의 아내로 인정하셨음음을 뜻한다.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위로하고”는 히브리어로“나함”인데“불쌍히 여기다. 위로하다, 긍휼히 여기다, 안위하다”을 뜻한다. 이 말은 단순히 정신적인 차원의 위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위로의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즉, 다윗 왕은 아이를 잃고 허탈감에 빠져 있는 그의 아내 밧세바에게 실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그녀를 위로한 것이다.“들어가”는 히브리어로는“보”인데“~안으로 들어오(가)다”를 뜻한다. 여기서는 남녀(부부)가 함께 침상에서 성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관용적 의미로도 쓰였다, 이 단어는 개역개정에서는 창세기19:31절에서“배필”이라는 말로도 딱 한 번 쓰였다.“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배필”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나”그러나 흠정역은“온 땅의 관례대로 우리에게“들어올”남자가 땅에는 없도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와 동침하였더니”은 히브리어로“샤키브”인데“눕다, 드러눕다”을 뜻한다. 특별히 이것은 남녀가 성 관계를 하려고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하”에서“솔로몬”은 히브리어로“셀로모”인데“평안, 안녕”을 뜻하는“샬롬”에서 유래한 것으로“평화로움”이라는 뜻이다. 솔로몬은 다윗과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 사이에서 넷째 아들(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로 태어났다(마1:6, 대상3:5). 자세한 것은 5:14절을 참고 할 것,“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는 히브리어로“아하브”인데“좋아하다,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사랑하다, 연애하다, 사모하다”을 뜻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솔로몬을 사랑하셨을까? 이것은 솔로몬의 출생이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의 아내의 태를 여사 아들을 낳게 하셔서 하나님과의“화목”관계가 회복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단 를 보내어 이 아이의 이름을 재차“여디디야”라고 지어주신 것(25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그런데 이같은 솔로몬은 실상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 넷째 아들이다(5:14; 대상3:5).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이 앞서 죽은 아이(18절)의 바로 다음에 태어난 것처럼 기술된 까닭은 아마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①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25절).
② 다윗의 왕위를 이을 계승자로서(장자의 명분을 소유한 자) 솔로몬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장자”는“베코르”인데“태를 열다, 쪼개다”을 뜻하는“바카르”에서 유래한 것으로“초태생, 맏아들, 처음난 것, 첫새끼, 처음난자, 첫아들”을 뜻한다, 비유적으로“가장 뛰어난 우두머리”를 말한다.“장자, 또는 맏아들은 시간적으로 처음 난자를 말하기도 하지만. 민족으로 첫째에 속한 자도 의미하기도 했다(출4:22), 또한 당시에 히브리 사회는 장자의 명분은 매매하거나 이양이 가능했다. 야곱의 아들 첫 아들“에서”는 한 그릇 음식에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팔아 망령된 자가 되었다(창25:31, 히12:16). 히브리 사회에서는 장자는 여러 가지 권리를 누렸다. 모세는 일부다처제 제도화에서 장자의 특권을 분명하게 밝혔다(신21:15~17). 사랑을 받는 아내와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에게서 낳은 아들이라도 먼저 낳은 자가 차별 없이 장자가 된다. 그러나 이런 권리를 사고팔 수 있었다.
요압의 충정
삼하 12:26-31 / 잡초
휴가철을 맞이한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에 진정한 쉼을 누리는 기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벌써 휴가를 다녀오신 가정들도 있고, 오늘 예배를 마친후 휴가를 떠날 계획을 가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분들에겐 더욱 귀한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한 주간은 무척 큰 일들이 많아 매우 분주했던 주간이었습니다. 특별히 우리 평안의교회가 창립된 이래 한 주간에 3번의 장례가 있기도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전도는 어려운데 가시는 분들은 많으니 참으로 걱정입니다. 부평 화장장으로, 서산의료원으로, 대구 경북대의료원 등으로 장례를 위해 섬기신 성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지난 주간에는 임진강에서 훈련 중 4명의 장병들이 순직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JSA 즉 비무장지대 안에서 훈련 중이던 한 사병이 임진강에 빠졌는데 전우를 구하기 위해 장병들이 뛰어들었다가 모두 귀한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증언을 들어보면 장병들은 물에 빠진 전우를 구하기 위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급류가 흐르는 임진강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 사실 우리가 수영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만한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게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저 내 전우가 위험에 빠졌다고 하는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들었던 그 장병들의 순수한 전우애와,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은 수도통합병원에서 거행된 합동장례식에서 보여주었던 부모들의 의연한 모습이었습니다. 혹시나 의롭게 죽음의 길을 선택한 아들들에게 흠이 될까봐 절제된 모습으로 장례식에 임하였다는 소식은, 지난 28사단의 총기 사건때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요압의 충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시대는 참으로 충성된 사람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도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 것 같아 보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무슨 일을 해도 끝까지 헌신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기업의 기밀들을 돈을 받고 유출하려는 사람들이 국정원에 적발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성도가 되고, 나아가 제자가 되되 충성된 제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12명의 제자들을 키우셨지만, 그 중에서 가룟유다는 절제되지 못한 야망과 물질의 유혹에 넘어가 충성된 자리에 남아 있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지요.
21세기 미국교회의 영성을 주도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인 새들백 교회의 릭워렌목사는 교회 안에는 신앙정도와 헌신에 따라 다섯 종류의 교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지역주민(The Community)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같은 지역에 살고있는 주민들로서 전도 해야할 대상자들이요, 잠재적인 교인들입니다. 2. 마당교인(The Crowd)입니다. 이들은 교회에 소속감과 부담감 없이 예배에 출석하는 명목상의 교인들로서 군중과도 같습니다. 3. 교회원 (Congregation)입니다. 이들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교회원이 되어 교회의 모든 예배와 행사에 참여하며 교회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회중들입니다. 4. 헌신자 (The Committee)입니다. 이들은 교회의 사역과 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제자훈련을 통해 헌신된 위원들입니다. 5. 핵심교인 (The Core)입니다. 이들은 주로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과 교사들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교회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자들입니다.
충성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피스토스인데, 이 말은 화산이 폭발하여 뜨거운 화산재가 날아오자 모두 자리를 피했지만, 자신은 위험을 무릅쓰고 끝까지 사명의 자리를 지켰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피해가면서 너는 왜 피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저는 아직 자리를 피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며 끝까지 사명의 자리를 지킨 어느 초병의 모습이 바로 충성의 순수한 모습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충성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의 자리를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를 가리켜 충성된 사람이라고 우리는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충성된 사람의 길을 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해관계에 따라 약삭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계시는 중이십니까? 우리는 이 시대에 진정으로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죽하면, 빗나간 충성이기는 하지만 충성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사람들은 5 공화국의 실세였던 장세동씨를 떠 올릴까요? 왜냐하면 그는자신이 섬겼던 대통령을 위하여 목숨을 걸은 듯 처신했기 때문입니다.
군부의 음모로 시작된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의 문제,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발생한 수없이 많은 시민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문제, 무리한 언론 통폐합 과정에서 생긴 비리, 권력층에 기생한 부정축재자들과의 연계 등 말할 수 없는 문제들이 터질 때마다 그는 언제나 대통령을 위하여 몸으로 문제들을 틀어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을 수없이 오갔지만, 감옥에서 나올 때마다 그는 제일 먼저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의 집으로 직행해 큰 절을 올리면서 이렇게 인사했다고 합니다.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 빗나간 충정이기는 하지만 충성된 사람이 목마른 시대이기에 사람들은 그를 연민의 정으로 바라봅니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 하나만 있어도 행복하겠노라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미 사무엘하 10장에서 이스라엘은 암몬과 1차 전쟁을 했습니다. 다윗이 왕의 죽음에 대한 사신을 정성을 다해 보냈지만 암몬의 신하들이 다윗의 마음을 왜곡하고, 그 사신들에게 수염을 자르고, 엉덩볼기의 옷을 잘라서 치욕적인 모욕을 주어서 돌려 보냈습니다.
사신을 그렇게 대한다고 하는 것은 전쟁을 하자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사람이 모자라서 주변에 있는 수많은 아람사람들과 돕사람들을 3만3천명의 용병을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수적으로 부족했습니다만은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는 자신이 두 그룹으로 군대를 나누어서 만약 네가 부족하면 내가 돕고, 내가 부족하면 네가 나를 도우라고 형제 간에 우애를 나누면서 형이 동생에게 아주 감동적인 권면을 하고 있지요?
우리 하나님의 성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우리가 행동하자.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여한이 없다. 형으로써 동생에게 그렇게 신앙적인 권면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요압과 아비새의 군대, 곧 이스라엘의 군대를 승리하게 하신 줄 믿습니다. 그리고 1차 전쟁은 끝을 내렸습니다. 우기가 왔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새해가 돌아오고 왕들이 전쟁에 나아갈 때 곧 건기가 시작되면서 이스라엘과 암몬은 2차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요압장군은 승승장구했습니다. 암몬자손의 왕성 랍바를 쳐서 취하게 되었다고 26절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왕궁이 있는 성, 수도입니다. 수도를 함락했으니 이제 전쟁은 끝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자를 다윗에게 보냅니다. 왕에게 사자를 보내서 이제 우리가 전쟁을 거의 마무리 하려고 그러는데, 제가 생각하기는 이제 이 성을 내가 완전히 점령해서 거기에 이스라엘의 왕의 기를 꽂는다면 사람들이 이 성을 내가 점령한 성이라고, 이 성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영광은 다윗왕께서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저 암몬의 왕성 랍바를 점령한 사람이 누구냐고 했을 때 요압장군이 아니라 다윗왕으로 남기를 저는 원합니다. 수고는 내가 하지만 영광은 왕께서 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서신을 보냈습니다.
왕이 그 서신을 보고서 군사를 모아서 암몬자손의 왕성 랍바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요압의 마음이 얼마나 왕을 위해서 배려하는 겸손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충성이라고 하는 말을 서두로 했습니다만은 충성과 겸손은 이웃사촌과 같은 것입니다. 저 사람은 충성스러운데 교만하다라는 말은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겸손한데 충성스럽지 않다라는 말도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충성과 겸손은 언제나 함께 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언제나 충성된 뿐 아니라 겸손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겠다. 반대로 교만한 자는 내가 대적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적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대적이라고 하는 말은 의도적으로 물리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요압장군은 성경에 보면 여러 모양으로 다윗에게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역대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기도의 생활, 영적인 생활이 조금 나태해 있을 때 그 때에 사탄 마귀가 틈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항상 깨어서 기도하도록 사탄이 틈타지 못하게 깨어있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의 사람이지만, 아무리 성령의 사람이지만 영적으로 기도생활이 나태하면 그에게 사탄이 틈탈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영적인 생활에 나태하면 사탄이 틈탑니다. 장로님들도 기도생활에 소홀히 하면 사탄이 틈을 탑니다.
아무리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도행활에 소홀히 하면 사탄이 틈타게 되어 있습니다. 가끔씩 목회자들도 잘 못된 일을 하지 않습니까? 가끔씩 뉴스를 보면 기가 찰 뉴스가 나오는데 왜 그래요? 그거 영적으로 나태해서 사탄이 틈탔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고, 아무리 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영적인 생활에 나태했을 때 사탄이 그의 마음을 틈탔습니다. 역대상 21장에는 사탄이 다윗을 격동케 했다고 그랬습니다. 다윗이 기도생활에 소홀해서 사탄마귀가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다윗이 격동케 했습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게 했습니까?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열두지파에 모든 지파의 수를 계수하도록 요압장군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에 요압장군이 다윗장군에게 충고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배나 더하시기를 원합니다. 일단 왕 앞에서 왕을 계수하려고 하는 이 이스라엘의 백성의 수보다 백배나 더 많은 수를 하나님이 주실 줄로 그렇게 저는 믿습니다라는 축복과 기원의 말을 한 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왕은 어찌하여 이스라엘백성을 계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고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윗은 요압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역대상 21장 7절에 보면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괘씸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괘씸히 여겨 이스라엘을 치셨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잘못했는데, 지도자가 잘못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중요하다고 하는 말입니다. 속장님 하나가 영적으로 나태하면 그 속회가 시들시들 죽어갑니다. 지역장 한 분이 영적으로 나태하면 그 지역이 시들시들 죽어갑니다. 장로님 한 분이 영적으로 나태하면 교회가 시들시들 죽어갑니다.
하물며 목회자가 영적으로 나태하다고 하면 그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죽어가는 교회가 목사님 한 분이 제대로 오시면 교회가 생기가 넘쳐서 부흥이 일어나고, 어떤 교회는 700명이 넘는 교회가 목사님 한 분이 잘 못 와서 시름시름 교회가 죽어서 300, 200명까지 줄어들고 그랬어요.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서 한 사람 이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지도자라고 생각이 되신다면 깨어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깨어있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을 받는 사람들도 함께 죽어가는 것입니다.
다윗이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다윗의 교만함을 괘씸히 여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치셨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잘 못 범했을 때 나단선지자를 보내셔서 깨닫게 하셨는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갓이라고 하는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세가지를 골라라. 성경 66권 중에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시면서 선택권을 주신 유일한 장면입니다. 세 가지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이 백성에서 삼년동안 기근을 내가 내릴 터이니 3년동안 기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두 번째는 삼개월동안 이 나라가 전쟁에서 패배함으로 고통 속에 있을 것이다.
여러분, 전쟁에서 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 이 30절 중반에서 31절 초반에 보면 다윗이 그 성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려오고 그 가운데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벽돌구이를 하게 하니라. 무슨 이야기예요? 당시에 전쟁에서 지면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을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동안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석 달동안 노예생활을 해 보았냐는 거예요.
세 번째는 뭡니까? 이 땅에 온역이 가득하리라.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하리라. 다윗은 고민했습니다. 삼 년동안 기근을 택할 것인가, 석달동안에 전쟁에 패해서 고통을 받을 것인지, 삼일동안 전염병으로 고통을 받을 것인지, 그래도 다윗은 고민 중에 삼일동안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것이 그래도 낫다라고 생각을 하고, 내가 삼일간에 온역을 택하겠나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칠만명이었어요. 다윗 한 사람이 교만한 것 때문에 이스라엘의 무고한 7만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지도자가 되려는 자들에게 충고합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 거기서 선생은 초등학교 선생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되는 일은 참으로 책임이 있는 일입니다.
그 때에 다윗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이여, 백성을 계수케 한 자는 나인데, 어찌하여 이 양무리에게 고통을 주십니까?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는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눈물로 호소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냉정하게 그들에게 온역을 주셨습니다.
3일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합니다.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단을 쌓으라. 회개의 단을 쌓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회개의 단을 쌓았습니다. 눈물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저 7만명이 죽은 것은 바로 나의 교만함 때문입니다. 그 회개의 제단이 곧 예루살렘성전의 터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압은 이렇게 시시때때로 자신에게 있어서 왕을 향해서 때로는 목숨을 걸고 전쟁에서 충성을 하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 잘 못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이라는 신앙적인 충고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미움을 받는다면 죽음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요압은 전쟁에서도 목숨을 걸었고. 왕에게 충고를 하는 일에도 사실상 목숨을 걸었습니다. 목숨을 건 충성된 사람 요압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충성된 사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계시록을 한 번 볼까요? 다같이 성경을 한 번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을 한 번 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 중반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충성하되 그 충성의 수준을 말씀해 주셨어요. 어디까지입니까? 죽기까지 충성하라. 약삭빠르게 이해관계를 따지면서 그렇게 하지 말고 충성하는 흉내만 내지 말고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평안의 성도들이 충성된 일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주의 종을 위해서 정말 생명을 거는 성도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조금만 손해가 되는 일이 있어도 싹싹 비켜가지요. ‘누가 그랬어?’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아마 목사님이 그랬을걸요?’ 그러면서 자기에게 오는 공격과 비난의 화살을 싹싹 피해 다닙니다. 그리고 목사에게 비난과 어려움과 곤란한 것은 다 가도록 만드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제가 어떤 생각이 들어요? 저 사람은 일꾼 되기는 어렵겠구나. 함께 오래도록 하기는 어렵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어떤 어려움과 수모와 손해가 있어도 자기 선으로 다 감당하려고 할 때 저 사람과는 끝까지 갔으면 좋겠다. 저런 충성된 사람과 헌신된 사람과는 무덤까지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부목사님에게 그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담임목사에게 헌신적인 사람이 좀 되어보라. 부서에서 일하다가 애로사항이 있으면 싹싹 피해서 담임목사에게 화살 피하지 말고, 온몸으로 막을 그럴 마음을 가지고 있어보라. 저는 장로님들에게 그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당신들 선에서 온 몸으로 그 문제를 감당하라. 담임목사에게까지 그 문제가 오지 않도록 한 번 그렇게 충성해보라. 그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충성된 사람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충성을 해도 감동이 옵니다. 잘못된 충성한 사람을 보아도 얼마나 충성된 사람이 그리운지 오히려 연민의 정이 생겨요. 우리에게도 저런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물며 정상적이고 온전한 하나님의 의에 기초한 충성된 사람, 하나님을 위해서 생명을 걸기를 다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그것은 우리의 약삭빠른 우리의 삶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생명을 다해서 이 요압장군이라고 한다면 이 전쟁에서 육신의 생명을 다해서 왕에게 충성을 하고, 마지막 영광의 자리에 있을 때 그 영광을 가로채지 않았어요. 그냥 밀고 가서도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이지만, 그는 마지막 그 영광의 자리는 왕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암몬왕이 사역했던 면류관을 다윗왕이 쓰도록 했습니다. 그 왕의 면류관이 금 한달란트의 중량이라고 했습니다. 금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임금이니까 6000데나리온은 엄청난 양이지요. 한 달란트를 요즘 우리의 무게로 보면 37㎏입니다.
그러니까 그 왕관은 왕이 평소에 썼다기 보다는 왕권에 대한 왕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무슨 의식이 있을 때에만 한 번 써보고 이렇게 왕권을 상징하는 그 나라의 국보와도 같은 것이지요.
그 왕관을 다윗왕이 사용합니다. 그 왕관을 다윗이 씀으로써 암몬을 완전히 정복했다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 왕관을 요압장군이 목숨을 걸고 자기가 싸웠노라고 1차, 2차 전쟁에서 자기가 생명을 걸고 싸웠노라고 그 왕관을 자기가 쓰지 않았어요. 다윗왕에게 그 왕관을 쓰게 하고 자기는 자기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수고는 내가 하지만 영광은 주님께, 오늘날 우리가 온갖 생명을 다해서 헌신하지만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는 그 고백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대로 실천되어 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진정으로 이 시대는 충성된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이해관계에 약삭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도대체 누가 충성된 사람인가, 주님 충성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 요압은 다윗에게 면류관을 양보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했지만 면류관은 왕이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의 겸손, 그의 충성, 그 아름다움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진정으로 충성됨을 간직하게 하옵소서. 어떤 자리에서도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셔서 교만이 틈타지 않게 하시고 겸손의 자리에 서게 하옵소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충성과 겸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께서 사랑하사
삼하 12:24-31 / 이상진 목사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러한 저희가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주제인 제목은 <여호와께서 사랑하사>입니다. 사랑받는 게 참 좋죠. 사랑을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 준다고 하면 참 좋습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해 주시는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하면 더더욱 좋겠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인생이 되려면 어떻게 할지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여호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되려면
1. 연민이 아닌 회개로 위로해야 합니다.
다윗이 우리아 장군을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낳은 아이를 하나님께서 심히 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7일 만에 아이가 세상을 떠나죠. 다윗도 슬픔에 잠겼겠지만, 밧세바는 아마 더 심한 슬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자기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서 전사를 하고 다윗의 아이를 낳았지만 이 아이도 7일 만에 죽고 또 자신은 지금 자기 남편을 죽인 사람과 함께 지내고 있으니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이 아마 밧세바일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정죄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이렇게 여겼을 것이에요. 그런 그녀를 다윗이 위로했다고 합니다. 밧세바의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 다윗인데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했다는 이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위로했을까요?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그런데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잘 살아보자" 이랬을까요? 아니면 "미안한데 이제 그만 너를 놓아줄 테니 돌아가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을까요? 이미 남편은 죽었는데 다윗은 밧세바를 위로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보통 연민을 담아서 위로를 전하죠. "저런 어떻게 저런 일이 불쌍해라. 쯔쯔 "
제3자의 입장에서 보고 최대한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려고 체률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고서 위로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자신이 밧세바에게 가해자이면서도 자신이 밧세바에게 가해자이기 때문에 어떠한 위로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제3자가 아니라 가해자입니다. 당사자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에게 와서 말을 건네는 그 자체가 요즘 말로 2차 가해가 될 수 있습니다. 밧세바가 그러한 다윗의 위로를 받아들였는지 다윗과 동침하고 솔로몬을 낳았다고 합니다. 밧세바가 다윗의 위로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할 수 있었을까요?
어제 본문까지 보고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진심으로 회개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13절에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죄값은 치러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이를 데려가신 것이죠. 가장 높은 왕이지만 다윗이 지금 왕의 자리에 있지만 하나님께 책망도 받고 또 자기 아이도 죽으니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죄가 너무 중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이 다 마땅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다윗은 회개에 있어서 진심이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회개를 통해서 마음이 겸손해진 것이죠. 회개한 다윗의 가장 큰 변화는 여자 중독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밧세바에게 정착하고 다른 여자를 찾지 않았습니다.
미갈이 자녀를 낳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다윗과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다윗이 회개를 했기 때문에 밧세바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의 위로는 아마 이런 것이었겠죠.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서 정말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나의 죄를 지적하시고 죄의 값을 물으셨습니다. 회개하게 하셨어요. 이렇게 내 죄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밧세바 당신을 그저 정욕의 대상으로만 바라봤을 것입니다. 당신의 구원까지 생각하지 못한 내가 참 죄인입니다. 내 인생의 죄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내가 외면하고 살아왔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변했기 때문에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연민의 좋은 말로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다라고 고백하는 그 자체가 밧세바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밧세바란 사람도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밧세바는 다윗의 이런 회개와 겸손을 알았기에 그와 함께 한 마음으로 한 믿음으로 살 수 있었다고 하셨어요. 그녀는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한 것은 제대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다윗이 권세를 가진 왕이어서 다윗과 함께 살기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고 구속사의 여인이 된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적 사랑이 가능한 것을 이 두 사람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회개가 없었으면 이런 사랑이 불가능했을 테지만 밧세바도 하나님께서 100% 옳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 아이를 데려가셨어도 하나님께서 100% 옳으시기 때문에 마태복음 계보에 믿음의 여인으로 찬란하게 이름을 올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목사님께서 <나를 살리는 회개>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하신 영상이 있어서 다시 저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들을 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다시 들으니까 딱 저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리더라고요.
저희 부부는 빚이 있었는데, 빚을 다 해결하지 못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가 결혼 전에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했어요. 그래서 그거를 차곡차곡 갚는 중에 있었고, 빚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희가 결혼을 했거든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도 빚 갚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대부업체에서 연락이 계속 오기도 하고 집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심지어 법원에서 직원분들이 나오셔서 빨간 딱지라고 하죠. 그거를 여기저기 붙이고 간 적도 있어요. 이런 사정을 저희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얼마간의 도움을 받아서 잘 해결했습니다. 더 이상 빚 독촉은 받지 않게 된 것이죠. 그런데 제가 참 힘들더라고요. 우선은 돈이 아깝기도 하고 내가 진 빚이 아닌데 하면서 돈이 아깝기도 하고 아내가 무시가 많이 되었습니다. 아니 돈 관리를 저렇게 못하나? 아니 이렇게 기본적인 법이나 행정적인 사항을 알지 못하나? 이러면서 너무 무시가 되더라고요.
아내를 정죄하고 무시하면서 보낸 시간이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서 나몰라라 했었던 그 1년의 시간과 비슷하게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이 말씀 영상을, 설교 영상을 다시 보고 묵상이 되었는데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내였던 것 같더라고요. 저에게 얼마나 미안했을까? 또 저희 아버지 시아버지에게 얼마나 미안했을까? 스스로 정죄감이 얼마나 컸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동안 너무 가난하게 자라왔기 때문에 친정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참 많이 있었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독촉장이 날라올 때마다 갚는 돈을 보내면서 제일 힘들었던 사람이 저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내가 가장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내도 제가 돈을 갚을 때마다 아내도 저에게 미안한 마음을 물론 드러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제가 아내에게 해주었던 말들은 되게 쿨하고 교양 있는 모습으로 아내에게 해주었던 말들이 있었는데요. 그게 아내의 정죄감을 더 자극하는 말들이었던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마. 당신 빚은 다 갚았어. 우리 아버지가 다 갚았잖아.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아이 키우면서 아버지한테 효도하면서 살자" 이런 식으로 있는 자의 모습으로만 아내를 위로해서 이게 위로입니까? 더 염장 지르는 거고, 더 목을 죄는 소리이죠. 위로가 아니라 협박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빚 갚아줬으니 더 잘해라" 이런 식으로.
저는 제 욕심과 억울함으로 사실 이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내와 재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아내를 나쁜 사람이고 빚지고 결혼한 사람 이러면서 그렇게 만들어 놓고 겉으로는 괜찮다는 척 온갖 그 교양을 떨면서 저의 의를 세워 왔더라고요. 훌륭한 해결책으로 아내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제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그것 자체가 아내를 진정으로 평안케 하는 위로라는 것을 목사님의 영상, 말씀 영상을 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시야에게 주신 재앙의 말씀을 요시야가 잘 들었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옷을 찢고 통곡했기에 하나님께서 나도 내 말을 들었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옷을 찢으면서 회개의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우리를 평안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여디디야의 은혜는 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는 자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 배우자나 자녀, 부모가 나에게 피해를 끼쳤을 때 혹은 나에게 실망을 줬을 때 그가 정죄감에 괴로워한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 여전히 사랑하는 내 배우자 사랑하는 자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 재력 외모 스펙이 좋은 사람하고 또 자기 죄를 보고 회개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매력적인 배우자 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
2. 암몬이 아닌 요압을 제압해야 합니다.
26절에서 28절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솔로몬이 태어나기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있었죠. 다윗이 이렇게 죄를 짓고 있는데, 그런데 또 전쟁에서는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전쟁에서 이긴 것은 다윗이 회개해서 이긴 것은 아닌 거죠. 하나님께서는 먼저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고 다윗을 회개함으로 이끄신 것으로 보인다 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진짜 다윗은 자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내가 죄를 짓고 있는데, 또 전쟁에서는 잘 되게 해주시니까요. 이렇게 우리가 죄를 짓고 있는데도 세상적으로 잘 나가고 있다면 그건 위험한 것일 수 있다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잘 나가고 있는 그 중심에는 충신인 요압이 있습니다. 이 요압은 사실 위험한 사람이에요. 그는 다윗이 우리 아를 죽일 계략을 세운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너무너무나 충신이기 때문에 다윗의 범죄를 잘 가려주었고 다윗의 범죄를 또 잘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다윗에게는 충신이지만 다윗의 구원에 있어서는 도움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다윗의 범죄를 보고도 멈추라고 말할 줄 알아야 진짜 충신입니다.
요시야 왕이 보낸 대단한 5인방들의 5인방 그 신하들이 둘째 구역에 가서 여자 선지자인 여자 선지자에게 가서 이제 말씀을 물을 때 한쪽은 너무 대단한 사람들이고 한쪽은 너무 초라한 여인이잖아요. 그래도 그녀는 장차 내릴 재앙에 대해서 말합니다. 듣기 싫은 말이라 할지라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다윗에게는 필요한 충신인 것이죠. 나의 대적인 안먼과의 전쟁에서 늘 이기게 해주는 이런 요압 같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으면 너무 좋은 일입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우리 청소년들이 있는데, 친구를 잘 사귀어서 돈 많고 외모도 번듯하고 공부도 잘하기까지 하는 그 친구가 내 마음을 너무 이해해주고 지지해주고 있는 있다면 그래 네가 힘들면 오늘 학교 가지 마 이렇게 지지해주고 있다면 그런 친구가 내 친구라면 우리 자녀의 친구 가운데 그런 친구가 있다면 참 감사한 일이죠. 그러나 그 친구 때문에 학교 공부를 못하게 되고 친구들과의 교제가 제한이 된다면 그건 안 좋은 일입니다. 불행이에요. 우리 청소년들은 잠시 잠깐의 편안함을 위해서 그런 친구들이 옆에 있기를 바라지만 그건 참 불행입니다. 끊고 제압해야 할 요압이에요. 만약에 너무 가난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가나안의 암몬을 늘 쳐부수고 싶었다고 할게요.
그런데 어느 날 좋은 정보 있습니다 하면서 주식 정보를 주는 사람이 딱 나타난 거예요. 실제로 이 사람 때문에 돈도 많이 번 거예요. 진짜 암몬을 다 이겨버린 거예요. 그러나 그 많은 돈 때문에 주식에 중독이 되고 예배가 무너지고 가정이 파탄 난다면 그건 불행한 일이잖아요. 그러니 이 사람은 나를 돈을 벌게 해주었지만 암몬을 이기게 해주었지만 구원에 있어서는 도움이 안 되는 요압인 것이에요.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한다면서 낙태나 동성애를 옹호하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서 학교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친구가 있으면 왕따를 당한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또 다른 친구들은 정말 뭣도 모르고 그냥 동성애를 찬성하는 그런 아이들이 있어요. 우리에게 요압은 이렇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도 이혼의 암몬을 제압했어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힘든 시간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내가 이기고 내가 높아지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 저의 동기 전도사들이나 당시 교회 리더십들도 제가 이혼한 것이 맞다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혼을 결정하는 데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혼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여호 앞에 범죄가 된다 라고 그 누구도 말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암몬을 이기게 해준 대단한 요압 장군과 같은 사람들이 제 주변에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구원에 있어서는 거룩을 가로막는 무능한 요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요입을 버리지 못해요. 나를 이기게 해주는 요압에게 끌려다닙니다.
요압이 너무 대단하고 나한테 잘해주니까 우리가 끊지를 못해요. 그러면서 내 약점, 내 허물을 다 알고 있고 또 저 사람이 나에게 등을 돌린다면 내가 차지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 때문에 제압을 못하고 질질 끌려다닙니다. 다윗도 일생 동안 끌려다니며 전전긍긍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어찌하지 못하니까 솔로몬에게 죽여야 한다고 유언으로 남기고 갔잖아요. 그래도 암론 이기는 것보다 요압이 더 나쁘다는 것을 깨닫기라도 한다면, 다행이겠네요. 이걸 또 반대 입장에서 보면 내가 거룩을 가로막는 요압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부모라면 부모의 영향력으로 자녀의 구원을 가로막는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공부 공부 이렇게 한다든가 하는 거죠. 교회 예배를 막는 부모가 있을 수도 있겠네요.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과 승리와 번영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막힌다면 그건 우리가 제압하고 끊어야 할 요압입니다. 12장에서 암몬 이야기가 갑자기 들어간 것은 암몬을 이긴 것은 하나도 중요치 않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다윗은 암몬에게는 이겼지만 실질적인 싸움에서는 졌어요. 정말로 앞으로 남고 뒤로 미친 겁니다. 우리가 정말 제압해야 할 적은 암몬이 아니라 요압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요압을 찾고 말씀으로 제압할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 나에게 승리와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요압은 무엇입니까?
- 이것을 쉽게 끊지 못하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 혹시 나는 누군가에게 거룩을 막는 구원을 가로막는 요압이 되고 있지는 않나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
3. 내가 아닌 예수님께서 왕관을 쓰셔야 합니다.
29절에서 31절입니다.
다윗은 요압의 말대로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성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암몬 왕의 보석과 왕관을 가져와서 이게 한 38kg 된다고 하더라고요. 자기 머리에 올리고 전리품들을 챙겨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암몬 사람들도 다 끌어내어서 고된 일을 시킵니다. 완벽한 승리를 한 것이죠. 다윗은 죄를 지고 있었고, 전쟁은 요압이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양육에 앞서 먼저 나라를 견고하게 세워놓으려 하셨습니다. 다윗이 죄를 짓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요압을 통해 나라를 강하게 하고 계셨던 것이죠. 요압이 말한 대로 전쟁 말미에 다 이긴 이 싸움터에 가서 다윗이 숟가락 하나 달랑 놓고 오더라도 사실 다윗은 이것이 자신의 공로가 아님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내가 싸운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켜가시는 것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물론 다윗이 직접 처음부터 전쟁터에 나가서 이기고 오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인정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성경은 다윗이 처음부터 나가지 않았다는 것과 그런데도 승리를 했다라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면서 인간의 죄,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의 죄, 그러나 전쟁에서 이기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을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나의 영광의 시간이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언약 때문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늘 죄짓는 것만 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깨닫던지 깨닫지 않든지 하나님은 구원의 사역을 계속해서 이어가십니다. 내가 얻은 승리와 성공과 행복이 나의 공로로 내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승리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라면 반대로 내가 오늘 겪고 있는 고난도 다 나의 구원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것으로 이것 역시 인정되어야 합니다. 모든 때가 다 아름답다고 하셨어요. 내가 전쟁에서 이기고 하는 일이 다 잘 되고 성격이 좋고 외모가 특출나서 아름다운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아름다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니 승리를 해도 성공을 해도 하나님 앞에 겸손해하고 패배를 해도 실패를 겪어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구원으로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에 그렇게 빚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참 힘들었어요.
그래도 이 고난 때문에 저희 가정이 큐티를 정말 뜨겁게 진실되게 할 수 있는 정말 계기가 되어서 지금까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정말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삶을 살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암몬을 이기고 계심을 큐티하면서 날마다 봅니다. 마침 어제 있었던 일인데 저희 아내가 자기 큐티인 이렇게 저한테 보여주면서 "내가 우리들 교회에서 말씀의 양육을 받지 않았으면 이렇게 빼곡하게 쓰면서 큐티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보여주더라고요. 저희는 정말 말씀을 통해서 내가 내 말을 들었노라 하시는 그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이 나를 읽어가시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저 정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난을 통해 말씀이 다 이루어지니 산다는 것이 황홀합니다.
말씀이 다 이루어지니 산다는 것이 황홀하더라고요. 평안하더라고요. 내 고난이 내 죄보다 작더라고요. 말씀이 있으니 고난이 껌입니다. 말씀대로 우리 인생을 다 이루어가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안케 하시고 황홀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 어떤 승리를 성취하셨습니까?
- 그것이 나를 겸손하게 합니까? 아니면 교만하게 합니까?
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정죄감에 갇혀있는 지체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가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그저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그것 자체로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시고 내 인생 함께해 주신다라는 그 고백 자체로 위로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너무나도 달콤한 승리가 요합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요압이 우리의 구원을 가로막는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무나도 달콤해서 우리가 이 유압을 제어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가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시고 성령님께서 함께하여 주셔서 요압을 제압하고 제어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 인생의 모든 기쁨들 모든 성공들은 다 내가 얻은 것이 아니오니 예수님께 그 왕관을 돌려드릴 수 있는 저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또한 우리 인생의 모든 고난들도 구원으로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세팅 가운데 있는 것임을 믿사오니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께 다 맡겨드릴 수 있는 저희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범죄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구례제자교회 / 삼하12:26-31
다윗은 암몬왕 나하스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해 보낸 사절단이 암몬왕 하눈에 의해 수모를 당하고 돌아온 일로 인해 시작된 전쟁가운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동침을 하였고 그 일로 우리아를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범죄는 이스라엘이 번영하고 국력이 크게 신장된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되어 가고 있는 그 때 우리는 더욱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대적 마귀는 그 틈을 타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달려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2)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밧세바로 인한 죄를 짓는 동안에 다윗이 보낸 요압과 그의 군대는 암몬자손의 랍바를 쳐서 대부분의 성을 점령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몇 개의 남은 성들을 점령하면 전쟁은 끝이 납니다. 이 때 요압이 사자를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요압이 다윗에게 사자를 보낸 것은 이제 남은 성을 다윗 왕이 직접 와서 공격함으로 암몬의 함락의 영광을 취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압의 편지를 받은 다윗은 군사를 이끌고 랍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암몬의 성들을 공격하여 그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암몬의 수도 랍바를 정복한 다윗은 전리품으로 암몬왕 하눈의 머리에 쓰고 있던 왕관을 취하여 머리에 썼습니다. 그런데 그 왕관의 무게가 한 달란트, 약35kg이나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성읍에서 수많은 전리품과 함께 많은 포로를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암몬과의 전쟁이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죄악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폐하지 않으셨습니다. 약속하신 것들을 하나씩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사람과의 약속은 쌍방의 성실한 이행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편 당사자인 인간의 약속 이행의 성실 여부에 관계없이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안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범죄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행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