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이런 장관도 장관이 없다. 역에서 나와 집까지 가는 길. 아예 참피들이 길에 나와 제 자식들을 하나 둘 내밀고 있다. 언제는 숨어서 한마리씩 봉투에 한마리씩 넣더니. 할머니들이 6xx 때도 이런 난리는 못 봤다고 했나 어떤 놈은 감정에 호소를- 린갈을 켜지 않아 짐작을 할 뿐이지만- 어떤 놈은 어디 쑤셔 넣을 구멍이 있나 살펴 어떻게 해서든 쑤셔넣는 난리통이다. 이 꼴이 싫어 공원을 돌아 가는 길을 택했는데 이제는 이 길도 이 꼬라지가 되어 버렸다. 거지라면 적선이라도 하지, 참피 새끼들은 어떻게도 못한다. 약간 주춤한 틈을 타 내게 서넛의 참피들이 다가온다. 내 서류가방 틈새 어떻게 해서든 제 자식들을 들이미려는 심산인지는 몰라도 내가 가방을 올려버리자 이제는 내 주머니를 노린다. 순 날강도가 따로 없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들 얼어죽을 처지일 테니 다들 필사적인 것이다. 보온재가 될 만한 것은 지자체에서 환경 미화라는 명목으로 수거해 버리고 박스조차도 참피들이 살든 말든 간에 노인들의 수레에 실려 사라져 버린다. 그들 또한 벼랑 끝 처지인 것이다.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다들 발만 동동 구를 뿐 역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자 승무원들이 방패처럼 생긴 것을 가져와 참피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한다. 그 틈을 타 인도로, 육교로 사라지는 사람들. 나도 그 틈에 끼여서 사라져본다. 혹여나 가방 틈새나 옷 틈새에 오물이 묻을까 조심하며. 승무원들이 살상하는 것을 기피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참피 애호파들의 격전의 파도 때문이다. 처음에는 말까지 통하는 생물을 이렇게 대해도 되는가에서 시작해 말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자신을 표현하는가까지 해서 참피를 준 인류로 승격시키자는데까지 나가는 데 사람들은 지쳐벼렸다. 이기적이고, 무슨 일만 있으면 똥부터 싸제끼는 그들- 사람이든 참피든간에- 과는 어울리기 싫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러했다.
몇 년간의 지루한 싸움 끝에, 그들은 돈을 받아냈다.
그들은 이내, 보호센터라는 명목으로 참피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어유, 불쌍한 것. 이제 내가 지켜줄게. 하면서.
그래도, 사람들은 안심했다. 일단 내 눈앞에서 안 보이니까. 그들은 경기도 어딘가 창고 같은 곳에 참피들을 가족씩 한 칸 씩 집어넣었다. 처음에는 그것만 해도 감사하던 녀석들은 이내 불만을 드러냈다. 좁다, 자들의 몸이 커지니 더 큰 곳으로 옮겨달라, 이 밥은 이제 질린다, 더 좋은 밥을 달라, 자들을 잃어버렸으니 찾아달라. 보호소 사람들은 참피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호로 무장하고 있었고 불쌍한 것을이니 하며 그들의 요구를 여과없이 들어주기 시작했다. 개나 고양이도 그렇게는 안 들어줄 것을. 참피에 대한 불문율 중 하나는 그들이 사람이 아니란 것을 확실하게 하라는 것이다. 선을 지키고, 생명권이 있고, 인권이 있고 하는 의외로 간과하기 쉽지만 말이 통한다는 그 하나로 지키기가 쉽지 않은 것들. 그들은 그네들의 요구에 점점 지쳐갔다. 사회보호xx에 있다가 그리로 옮겨간 사람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나왔다 했던가. 상한선이 없는 참피들의 요구. 외외로 그 모든 것은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 사회단체, 정부 집단, 공xx. 이 모든 것이 얼기설기 얽혀서 이루어낸 이형적인 단군이래 존재하지 않던 존재하지 않을 이형적인 수용소. 처음에는 민간의 기부까지 합쳐 꽤 윤택하게 돌아가던 집단이 이제는 돈에, 인력에 허덕이게 되었다. 일x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간다던 그 말이 참피에게도 예외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내 그들은 해결책을 내 놓았다. 자실장들을 입양시키자. 성체는 어려우니까 10년- 평균적인 참피의 수명이 그정도니까- 만 살게 하다 안락사시키자.
봄이 되자 그들은 자실장들을 데리고 길거리로 나왔다. 교육도 무엇하나 입력되지 않고 그저 세상에 나온 자실장들은 밥, 옷, 집, 세레브. 그들의 요구만을 짓껄일 뿐이었고 그들이 담겨온 케이지에 린갈은 장착되지 않았다.
그들이 그토록 분노하던 샵과는 달리 인적사항도 적지 않은 채 무수한 자실장들이 수많은 사람들 손에 들려갔다. 간혹 어린 아이들이 제 부모에게 하나만 데려가자고 졸랐으나 그들은 저 자실장들은 아픈 아이들이니 샵에 가 멀쩡한 아이들을 데려와 기르자는 말과 장난감으로 아이들을 현혹시켜 데려가고는 했다. 실로 맞는 말이었다. 어찌되었던 간에 인간의 기준으로 멀쩡한 아이들은 아니었음에.
그 해, 데려가진 자실장들의 생존율은 99%도 되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 집에서 생존한 기간을 따지면 70%도 되지 않았다.
정부의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나머지 30% 와 그 새끼들 그 부모들의 박멸의 공약으로 내세웠다. 어찌보면 기치창검으로 내세웠다고 할 수도 있을 정도로 후보들은 참피들을 공공의 적으로 내몰았다. 그것보다 효과적인 여론 몰이는 없었으니까. 애초에 한국에는 없던 생물체. 일본에서 들여온. 외래의.
이 모든 단어만으로도 국민들을 선동하기에는 충분했고 그들은 일제히 구제를 당하기에 이르렀고, 살아남은 몇몇 소수도 산을 속속들이 아는 산악인들에게 단백질원으로 잡히어 갔다.
그리하여, 한국에는 새로운 후보의 도약과 함께 참피가 모조리 경질되었다.
첫댓글 탄탄한 설정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