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푸른 잠자리 / 최승호
사막에 가본 적은 없으나, 사막의 푸른 잠자리라고, 벽지에
써본다. 사막의 구도자는 낮이면 목이 마르다고, 사막의
밤은 춥다고, 써본다. 약대도 없이 사막을, 혼자 걷는 사람은,
모래바람이 불 때마다 쓸쓸하다고, 사막에서 문을 찾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문 찾는 그 사람이 바로 문이라고,
백지에 써보고, 읽어보고, 지우지 않는다.
- 최승호 자선시집 <얼음의 자서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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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6년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함께 고비사막에 다녀왔다.
사막에는 아무 소리가 없어 말 그대로 적멸에 드는 ‘입적(入寂)’
상태라고 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적멸의 공간이 무서웠다.
바짝 마른 동물의 허연 뼈들이 바람에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그곳은 반야심경의 공간이었다. 사막에서는 개들도 우울증에
걸렸다. 고비에서 돌아와 산과 나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비록 짧은 열흘간의 체험이었지만 시인의 예민한 감성에는
한 생애의 비중과 맞먹었다. ‘바람이 텅 빈 해골들을 박차면서’
달리던 사막에서 돌아온 뒤 6개월 동안 140여 편의 시를
써냈다.
“날이 없는 칼처럼/ 그 무엇이든 도려내는 고비의 바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 울부짖으며/ 허공을 물어뜯는
고비의 바람/ 트랙이 없다 경마도 없다/ 돈에 목을 매는
마꾼도 없다/ 발굽 없이 힘차게 달리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암컷도 수컷도 아닌/ 바람이 텅 빈 해골들을 박차면서
달리고 있을 뿐이다/ 고삐도 없이/ 채찍도 없이 달리는
바람/(중략) // 바람이 거세다/ 뼈들이 겅중겅중 사막을
뛰어다닌다”
- 바람, 부분
최승호 시인이 일찍이 시를 지향했던 건 아니다.
대학 졸업 무렵에서야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보다는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정작 시인이 되기 위해 안달하던 벗들의
시화전 패널을 만들고 삽화를 그려주는 처지였다.
춘천시내에서 유복하게 자라나다가 중학교 때 하루아침에
망한 아버지가 가출하는 바람에 소년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가정교사를 시작했고, 동생들을 건사하기
위해 동기들은 서울로 진출했지만 지방의 교대에 진학했다.
그 시절의 막막한 비애는 지금 돌아보아도 선명하다.
내내 따로 나가 살면서 한푼도 지원하지 않던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에서야 “미안하다”고 한마디 했다. 정선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너무 풍광이 아름다워 시를 쓰기에
부담스러웠다. 사북으로 자원을 했고,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흑백으로만 분류될 정도로 까만 광산과 광부, 까만 절망이
가득한 곳이어서 처처가 시의 소재였다. 사북에서 엉뚱하게도
다른 이들 대신 ‘문제교사’라는 희생양이 되어 더 깊은 오지로
발령이 났다. 영혼의 골짜기라는 그 첩첩산중 ‘영곡’에서
절망을 견디지 못해 관사를 부수고 뛰쳐나와 상경했다.
그곳에서 썼던 ‘대설주의보’에 ‘오늘의 작가상’이 주어졌고,
각광받는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서울살이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무렵 함께 살던 여인이 책들을 쌓아놓고 스스로
다비장을 치르는 참혹한 사태가 일어났다. 떠돌며 방황하기를
3년, 그를 위로해준 건 풀과 나무와 동물들의 이름이었다.
물속에서 걸어나온 시인이 계곡 옆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나는 춘천에 가면 위험해요. 가까운 벗이 술 마시고 철길에
누웠다가 해체된 적도 있고, 폭행을 당해 머리통이 사라진 채
자기 집 굴뚝 밑에 매장된 친구의 기억도 있습니다.
그로테스크한 그림들이 내 무의식에 똬리를 틀어버렸어요.
슬픈 추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서 춘천에 가면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술을 마시곤 합니다. 너무 슬프면 폐를 다쳐요.
피를 토하고 요절한 중국 시인 이하(李賀)를 내가 좋아하는
것도 불행에 대한 연대감 때문일 겁니다. 묘하게 불행이 주는
위안이 있어요. 이곳은 비애스럽기는 해도 아늑하게 치유
받는 느낌이어서 좋습니다.”
그는 멀리 남보라와 흰색 도라지꽃이 만개한 산자락 쪽에
시선을 주면서 계속 말했다. 자신의 체험으로만 시를 쓰는 건
한계에 부닥치게 마련이고, 추구하는 게 따로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경우에는 갇힘과 벗어남의 문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화두가 그것이라고 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감옥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살다 보면 고독이 뼈아플 때가 많은데, 그 고독은 등뼈처럼
평생 지고 가는 것인데, 그것은 또 그때그때 시로 쓰면 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간절한 그 무엇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언설이다. 글은 피로 쓰는 것이라는 니체의 말이
아니더라도, 시에는 체액이 어느 정도는 삼투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재능은 있는데 간절함이 빠져나가면 손끝으로 쓰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 시인들이 그림을 먼저 그려놓고
자꾸 조립하게 되는 것도 간절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너와 마주치기 전에는/ 삶이 그렇게 놀라운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었다./ 네가 나에게 창을 던졌을 때/ 작살에 찔려 허공에
버둥거리는 물고기처럼/ 눈은 휘둥그래졌고/ 세상은 놀라움의
광채를 띠게 되었다./ 죽음을 품고 햇빛을 더 강하게/ 죽음을
품고 어둠을 더 거칠게/ 그리고 낯설음을/ 더욱 낯설게
느낄 수 있는/ 回復期 병자들의 거울,/ 거울속의 해골바가지여,/
너와 마주치기 전에는/ 삶이 그렇게 놀라운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었다.
- 휘둥그래지다
폐결핵 환자 시절, 보건소에서 주사를 맞다가 거울 속에서
마주친 자신의 ‘해골바가지’에 놀라 썼다는 시편이다. 배경을
듣기 전에는 치명적인 연인을 거론하는 시편인 줄 알았는데,
무릇 삶을 놀랍고 외로운 것으로 바꿔놓는 그 대상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그는 이번 생은 그냥 시만
쓰다가 죽겠다고 했다. 거창한 행복에 대한 욕망은 없어졌다.
동네 카페의 에스프레소 한 잔, 산책길 천변의 꽃구경, 새벽에
자전거를 타면서 바람을 가르는 즐거움, 음악….
이런 것들 빼면 행복이 무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계곡 옆
평상에 앉아 가볍게 마시던 술이 늦은 밤 시인이 집필 공간으로
애용한다는 동네 카페까지 이어졌다. 행복…, 뒤로는 암전이다.
/ 세계일보 조용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