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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예레 26,11-16.24
복 음 : 마태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주님의 전사戰士
-삶은 전쟁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삶은 전쟁이다’,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삶의 원리입니다.
하여 믿는 이들은 모두 삶의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주님의 전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물론 새벽 인터넷 뉴스를 보며 새삼 깨달은 진리입니다.
‘연일 기록적 더위-기후변화와 전쟁서 지고 있다.’ 는 최근 계속되는 더위에 대한 뉴스에,
‘2차 미중 무역전쟁 본격화. 미중 9월에 정면충돌 가능성’이란 뉴스가 톱기사로 나와 있었습니다.
새삼 삶은 전쟁이란 진리를 실감합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되는 온갖 형태의 전쟁입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수도생활 역시 전통적으로 영적전쟁이라 정의합니다.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인 수도자들입니다.
주님의 전사인 수도자들은 싸우다, 즉 기도하다, 공부하다, 일하다 전사해야
비로소 이상적인 주님의 전사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순교자들 모두가 주님의 전사로써 믿음으로 싸우다 전사한 분들입니다.
얼마 전 신선한 감동의 기억도 잊지 못합니다.
칭찬도 용기입니다. 수도원 첫 수련자로 첫 서원을 한 수도형제의 농장 일하던 모습입니다.
첫 서원을 한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농장 책임 수사와 완전무장 준비된 모습으로
힘차게 농약 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을 산책 중 목격했습니다.
“첫 출발이 좋습니다!”
저절로 터져 나온 격려의 말이었습니다.
며칠 전도 아침 식사 후 웬 젊은이가 신들린 듯
방충망 모자를 쓰고 고추밭에 영양제를 살포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수도형제였습니다.
바로 전 여기에서 하느님 찾는 순수한 열정을, 주님의 전사로서 기본적 자질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수한 열정’과 ‘적절한 긴장의 깨어있음’은 주님의 전사인 우리 수도자들의 기본적 자질입니다.
사실 우리 수도형제들 모두가 주님의 전사로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가며,
영적전쟁의 양상은 기도와 공부, 일이란 세 분야에 걸쳐서 매일 반복됩니다.
영적전쟁하면 떠오르는 자작 애송시 담쟁이가 생각납니다.
요즘 산책하다 보면 발견되는, 수녀원 담장을 온통 덮고 있는 담장이를 보고 아주 예전에 써놨던 시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작년 가을/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힘차게/하늘 향해/담벼락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가을 서리 내려/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제자리 삶에도/지칠 줄 모르는/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하늘 향해 타오를 뿐/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행복이요/충만이요/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초록빛 영성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1998년, 20년 전 써놨던 시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삶의 영적전쟁터에서 주님의 전사로서 ‘하루하루’, ‘늘 새롭게 파스카의 삶을 시작하는’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 수도형제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분명해 집니다.
오늘 복음은 두 구조로 이루어지며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영주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헤로데의 정체가 불분명한 반면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전사로서 하느님 중심의 삶이 뚜렷합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충언忠言하다 순교하니 바로 전사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바로 순교의 전사戰死입니다. 주님의 전사로 살다가 장엄한 순교의 전사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아마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순교의 전사에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며
주님의 전사로서 당신의 신원을 재확인하며 장차 순교의 전사를 예감했음이 분명 합니다.
주님의 전사, 세례자 요한의 대를 잇는 예수님이요,
무수한 성인들과 오늘의 우리들 역시 그 뒤를 잇는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 말 그대로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였습니다.
평생 삶 전부가 영적전쟁이었고 주님의 승리의 전사로서 초인적 삶을 살다가 전사한 성인입니다.
평생 아르스 시골본당에서 44년 동안 극히 가난하고 겸손한 사제로 살았고,
매일 300명이 신부님을 찾았으며 죽는 전날까지
매일 11시 미사 이후엔 16시간 동안 면담고백성사를 주었다 합니다.
매년 방문객들은 2만여 명 이상이었다 합니다.
정말 전설적인 신비로운 주님의 전사로 살다가 69세로 전사한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일당백의 불세출의 주님의 전사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주님의 전사로서 확고한 신원의식 덕분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다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오늘 장면에서는 예레미아의 승리이지만 결국은 순교의 전사로 생을 마감한 주님의 전사, 예레미야입니다.
그러고 보니 세례자 요한, 예수님, 예레미야. 모두가 주님의 전사戰士로 싸우다가 전사戰死한 분들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승리의 하느님의 전사로 우리의 영원한 모범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영적무장 시키시어
‘주님의 전사’로 삶의 영적전장 터에 파견하시며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반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장래희망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대통령, 장군, 과학자, 선생님, 소방관 등등의 장래희망을 이야기했지요.
그때 저는 “신부요.”라고 저의 장래희망을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놀려대는 것입니다.
“너는 남잔데 어떻게 신부가 되니?”
(신랑 신부의 ‘신부’로 생각했나 봅니다)
“네가? 너 같은 애가 어떻게 신부님이 될 수 있어?”
(그렇게 모범적이지 않았던 제가 신부님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나 봅니다)
“신부님은 결혼할 수 없어. 그런데 너 여자 좋아하잖아.”
(여학생들과 친했던 저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의 적극적인 반대로 크게 위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장래희망을 이야기하라고 할 때, 다른 친구들처럼 과학자, 선생님 등으로 평범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의 장래희망을 숨기다보니 실제로 신부님이 되고자 하는 희망이 점점 줄어들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님 되는 것이 가장 멍청하고 바보스러운 선택으로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고등학교 때에 하나의 특별한 사건으로 다시 신부님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고
지금 현재 초등학교 때의 장래희망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남들의 시선에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다면 저의 꿈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남들이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들의 시선에만 신경쓰다보면 스스로를 속이는 모습으로 살게 되면서
거짓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헤로데 영주를 만납니다. 사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의로움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의 말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귀 기울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맞아들인 것을 비판하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뒤에, 헤로디아 딸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건네주게 됩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한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남들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한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다 보니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복음의 시작에도 나오듯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라고 말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남들의 시선에만 신경 쓴 행동이 스스로를 더욱 더 힘들게 만든 것입니다.
남들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시선이 중요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은 자신의 올바른 신념을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기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을 지닌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데를 억누르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도덕한 이들은 덕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거룩함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에게 정결함은 오히려 적수이며, 방종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를 못합니다.
인정 없는 자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며,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은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나약한 헤로데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그 반대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기 죽음을 허용하고 의로움을 이룹니다.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왕관이 됩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따르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릅니다.
악인의 혀는 거짓을 꾸미며 속임수를 쓰지만, 의인의 혀는 진실을 말합니다.
악인의 혀는 불의를 증언하고,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증언합니다.
악인의 혀는 자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침해하지만, 의인의 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폭군의 혀는 의인의 피를 부르고.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외치고 있습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며,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그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마치,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사실,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곧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표현한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일입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의로움으로 울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성령의 불혀가 되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이 한 몸을 태워 세상의 어둠을 태우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 앞에서 당당 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한 사기꾼이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전화를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 이 계좌로 돈을 송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공개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거액의 돈을 보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답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같은 방법으로 못 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보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러낼 수 없는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못을 범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마음, 양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일잔치에 흥을 돋구어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헛된 약속을 하였고,
소녀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올 것”을 청했습니다.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하려고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평생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은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은 분입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시는 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마르1,7)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앞세웠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왕인 헤로데에게도 할 말을 다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막시 밀리안 콜베).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1베드2,19).
자기를 포장하는 허세를 부려 위신, 체면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은 그것뿐 아니라
마음의 자유를 잃게 되고 근심, 걱정,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마태 14, 10)
헤로데의
한 순간 유희를 위해
요한 세례자가
어처구니없는
희생을 당합니다.
꺼리낌 없는
사람의 욕망이
참으로 어이없고
무섭기만 합니다.
욕망의 끝은
언제나 파멸뿐입니다.
아마 사람보다도
더 잔인한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생명과 참으로
먼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명으로
돌아가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영원한 삶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공장에서 마음대로
찍어내는 기성제품이
결코 아닙니다.
생명을 키우는 사람과
생명을 지키는 사람과
생명을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이웃을 이용하거나
이웃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생명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에서
다시 시작합시다.
목숨을 살리는
그것이
참된 삶임을 믿습니다.
빼앗기는 열정을 막아라
전삼용 요셉 신부
어떤 사람은 역사에서 큰 업적을 남기고 어떤 사람은 평범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태어나지 않느니만 못하게 살다 가기도 합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요?
분명 태어나면서 부모나 환경의 영향이 작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큰일을 이루어내는 사람들에겐 무언가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에너지의 한계를 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에 쏟을 에너지를 다른 곳에 절대 쏟지 않습니다.
애플의 전설 스티브 잡스는 다시 일에 복귀했을 때
이전 모든 자료들은 다 폐기하고 자신의 방을 매우 단순화했습니다.
페이스 북의 저커버그는 옷 고르는데 신경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한 가지 옷만을 입습니다.
미국 주식왕 워런 버핏은 다른 것에 정신 팔지 않기 위해 TV와 컴퓨터 등을 사무실에 두지 않고
그의 모든 시간을 신문과 책을 읽고 명상하는 데만 씁니다.
우리나라 이선희 씨도 콘서트가 있을 때는 목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의사소통할 때는
수첩에 글로 적어서 한다고 합니다.
성공한 누구든지 이 정도로 자신의 에너지 분산을 막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 시간과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 살았지만 저에게 거머리는 여전히 꿈에 나타날 정도로 끔찍한 동물입니다.
피를 빨아먹으며 살 속으로 파고 들 것 같은 느낌 때문인지 어렸을 땐 더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거머리 치료법도 있는 것을 보니 거머리가 크게 위해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거머리에게 피 조금 빼앗기는 것을 몸서리치게 싫어했으면서도,
지금은 피와 같은 시간과 에너지를 여기저기 흩뿌리며 살아온 것 같아 후회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피 빼앗기는 것은 두려워하면서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데는 무감각했습니다.
모든 에너지는 쓰는 대로 소진됩니다.
공부하는데도 에너지가 소진되고 게임을 하는데도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게임을 하여 공부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더 생기는 경우는 없습니다.
에너지는 분명 한계 지워져 있습니다.
그러니 나의 에너지를 빠져나가게 만드는, 내가 애착을 둔 모든 것들을 끊지 않으면
한 가지분야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성과를 거두기란 불가능합니다.
구원만큼 우리가 에너지를 쏟아야하는 것이 있을까요?
구원은 마치 산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들에 있는 이들은 도시로 들어가지 말고 산으로 올라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산을 오를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젖먹이 아이가 있거나 임신한 여자라면 어떻게 그 급박한 상황에서 산을 오를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이를 배거나 젖을 먹이는 엄마는 불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상징적인 표현인데 이 세상 것에 애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노아의 홍수 때처럼 빗물이 들이닥칠 때 노아의 방주까지 다다르지는 못할 것이란 뜻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에너지가 빼앗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살모사의 새끼가 어미를 먹어치우듯 우리 에너지가 내가 집착하는 것에 의해 빼앗깁니다.
그렇게 힘이 분산되면 구원이 힘들어집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님께서 매 맞으시며 고통당하실 때
군중들 사이로 한 여인이 지나가는데 그 여인이 안고 있는 어린 아기가 사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그 여인은 그렇게 세상 것에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수난 당하시는 그리스도께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이지는 않으려 했습니다. 가끔은 그에게 찾아가 조언도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 것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먼저 아내에 대한 애착이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딸이 춤을 추자 헤로데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게다가 왕국과 사람들에게까지 묶여있기 때문에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요한의 목을 치라고 합니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세상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에너지는 부족하게 됩니다.
이런 애착은 결국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에너지의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 에너지를 이 세상 것에 집착하며 거기에 다 써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에너지를 오로지 주님께 쏟기 위해 나의 힘과 지성과 시간을 빼앗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마지막에 끊어야 하는 것은 애정입니다. 사람과의 애정도 많은 에너지를 잃게 만듭니다.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먼저 끊지 않으면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헤로데가 진정 자신의 가족을 사랑한 것일까요?
이용당한 것입니다. 먼저 끊지 않으면 올바른 데 써야하는 에너지도 빼앗기고 맙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