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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연과사람들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개그맨
세계 4대 해전 중 이번에 소개해드릴 칼레해전이 아마 가장 생소한 해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3대 해전과는 달리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진 계기(?)가 없었다고 할 수 있으니...(살라미스 해전은 영화 ‘300’으로 간접적이나마 알 수 있고, 트라팔가 해전은 넬슨 제독이라는 걸출한 제독을 배출하였으며, 한산대첩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모두들 잘 알고 계시겠죠?^^)
하지만 이 칼레 해전을 다룬 영화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영화 ‘골든 에이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스트리아 영화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역을 맡아 열연한 영화입니다.(사실 평점은 별로지만 해전을 이해하는 역사적 배경 이해에는 도움이 되실겁니다.^^)
먼저 칼레해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시대상황 인식이 필요합니다.
요즘과 같이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종교분쟁이 지구 곳곳에 벌어지는 것을 생각한다면 과거 신앙이 절대시 되던 중세 유럽에서는 종교 갈등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 하시겠죠? 당시 유럽은 각 국가들간 혼인으로 인한 동맹을 비롯하여 혈연, 지연, 종교 등 모든 나라들이 서로 얽혀 있는 복잡한 정세였습니다. 거기다 1517년 독일의 성직자였던 마틴 루터가 95개의 반박문을 내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초석이 되었으며, 그 후로도 구교와 신교도간의 종교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와중에 영국 해적은 스페인의 상선을 계속 공격하여 상당한 부를 취하였고, 이에 스페인이 영국에 해적을 소탕하라고 압력을 가하지만 영국은 오히려 해적에게 작위를 내리죠^^;
결국 스페인은 영국 침공을 결정하게 되고 칼레해전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간략한 감이 없진 않지만 그 당시 복잡한 국제관계 및 종교 갈등이 있었습니다.^^
본론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더 칼레해전 발발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6세기에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힘이 강한 나라였으며, 신대륙인 아메리카 대륙에도 많은 식민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식민지를 통해 축적된 부를 통해 더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힘을 키우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국왕인 필립 2세는 신실한 구교신자였으며 영국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이 터키와 신교와의 전쟁에 전력을 다하고 있을 때 영국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드레이크를 보내서 스페인의 배들을 노략하도록 도와주었다.
(드레이크와 당시의 해적선입니다. 당시 영국에선 해적을 장려하여 국가 이익을 올리고 있었기에 해적이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공기업 직원’이라 할 수 있었죠^^ 요즘 소말리아 해적들이 상당한 부를 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해가 잘 가실 겁니다.)
엘리자베스여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헨리 8세의 종교를 계승하였고, 유럽 대륙에 있는 신교 국가들, 즉 네덜란드와 같은 곳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사실 헨리 8세도 처음에는 구교도였으나 로마 카톨릭에서 자신의 이혼을 허가해 주지 않자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특히 네덜란드의 신교도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거리가 멀지않았기 때문에, 네덜란드에 있던 스페인 세력이 영국의 큰 위협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그 당시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주변의 플랑드르 지역에 강력한 군대를 주둔해 놓은 상태였죠.
앞에서 언급했듯이 영국은 해적을 통한 사략선 사업으로 해적 행위를 장려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부를 모았습니다. 이 때문에 필립2세는 1580년 7월부터 영국선박을 감시하고 서인도제도와 대서양에서 계속해서 노략질을 한 드레이크를 벌하라고 영국에 압력을 넣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오히려 드레이크에게 작위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영국군을 네덜란드로 파견해서 스페인에 대항해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을 도왔습니다.
스페인의 왕인 필립 2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가 죽고 나자 영국 침략 계획을 세웠습니다.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던 메리는 스페인을 등에 업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정권을 전복시키려다 오히려 처형됩니다. 필립 2세는 로마의 도움을 얻고자 영국 침략 계획을 종교전쟁으로 과장하여 명분과 지지를 얻게 되어 침략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587년에 드레이크경이 카디즈항으로 들어와서 필립 2세가 침략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스페인 전선들을 대부분 침몰시켰는데 이 전선들에는 이미 많은 보급품들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이런 물품들도 다시 준비하기위해 시간을 더 늦추게 됩니다.
(영화 ‘골든 에이지’에서 메리의 참수 장면입니다~)
스페인의 영국 침략 계획은 애초에 전설적인 제독이었던 산타 쿠르즈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는 아일랜드를 먼저 점령하고 그 후에 영국으로 전진하자고 제안하였으나, 그가 죽고 난 후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고 후에 메디나 공이 다시 계획을 세웠습니다. 메디나 공은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해전 경험은 다소 부족하다는 약점이 있었고 이는 칼레해전에서의 패인 중 하나가 됩니다. 필립2세의 계획은 그의 함대를 네덜란드에 있던 지상군인 파르마 공의 군대와 합해서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필립 2세와 측근들은 강력한 스페인 지상군이 영국에 내리자마자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죠.
한편, 영국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스페인 내부에서 정보를 모으는데 주력했습니다. 영국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하였는데 특히,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던 월싱험은 그의 사람을 스페인 왕궁에 심어놓고 첩보활동을 벌이도록 하였습니다. 영국 고문서들을 보면 그가 스페인이 침략하기 1년 전부터 이미 침략 계획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영국은 침략 계획을 알게 된 직후 방어 전략을 세웠고 네덜란드의 신교도들과도 협력관계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동시에, 영국은 전선들의 구조를 변경하고 많은 배를 건조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한 스파이가 영국 정부로 보낸 편지내용에는 ‘130척의 배가 영국 침략을 위해서 준비되었으며 돈 알론소디 리바가 스페인 지상군 총 사령관이 되었다고 정확히 적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파르마 공에게 함대가 언제 도착할 것인지 알리기 위해서 한 스페인 배가 스페인 함대가 출발하기 전에 네덜란드로 떠났다‘ 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사실 스페인 함대를 위해서 출병에 참여한 이탈리아 선장의 편지를 토대로 쓰여진 것이었습니다.
스페인 함대는 리스본항을 출항하여 오늘날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의 영토인 플랜더스 지방으로 향하였습니다. 이곳에서 파르마 공의 지상군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출항한 후 심한 폭풍 때문에 스페인 함대는 예정된 시각보다 더디게 영국쪽으로 북상 하였습니다.
7월 중순에 스페인 함대는 영국해협의 서쪽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7월 30일경에 스페인 함대는 영국 영토인 콘월지역에서 목격되었고 이때 영국 함대는 플리머스 항에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함대와 스페인 함대가 처음으로 교전을 치른 후에 하워드 제독은 영국 함대를 네 개의 분대로 나누고 한 분대는 자신이 한 분대는 드레이크 제독이, 한 분대는 호킨스 제독이, 그리고 나머지 한 분대는 마틴경이 이끌도록 하였습니다. 영국 함대는 스페인 함대와 몇 차례 교전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스페인 함대의 함포를 소모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습니다. 메디나 공이 파르마 공에게 서한을 보내어서 함포와 탄약을 준비해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함대와 반대로 영국 함대는 탄약 및 마실 물, 음식 등을 근처 항에서 계속 조달할 수 있었고, 이러한 안정적인 군수 보급은 승리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습니다.
8월 6~7일경에 스페인 함대는 파르마군과 만나기로 한 칼레앞바다에 정박하였는데, 스페인 함대는 이곳 바다의 수위가 낮고 배의 크기 때문에 포구에 정박하는 것이 어려워 앞바다에서 정박한 후 파르마군을 작은 배로 실어 나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영국 함대 또한 스페인 함대 근처에 정박하였습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은 칼레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사람을 파르마 공에게 보내었으나 파르마 공의 군대는 몇 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최근 밝혀진 스페인 역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그 당시 파르마 공은 이미 이 침략 계획이 실패한 것이라 여겨서 그의 군대를 내륙으로 이동시켰다고 하네요.(현명한 판단인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결전의 날인 8월 6일이 되자 남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왔으며 이는 영국 함대에 큰 이점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페인 함대가 영국 함대쪽으로 이 바람 때문에 나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죠. 자정 즈음에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의 전선 사이로 불을 붙인 작은 배들을 보내자 스페인 선원들은 곧 자신들의 배가 폭발할 것이라고 여겨서 배들을 잇고 있던 줄을 잘라버리고 출항하였습니다. 이에 함대의 전형은 흐트러지고 혼란스러워져 스페인 함대를 무찌를 기회가 영국 함대에 찾아왔고, 메디나 시도니아 공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동안 영국 함대는 칼레항 근처에 있는 그라블린 항에서 많은 스페인 전선들을 침몰시켰습니다. 스페인 전선들은 영국 배들에 근접하여 올라탄 후 전투를 벌이려고 했으나, 익히 이 전술을 알고 있었던 영국 함대는 먼 거리에서 함포사격을 하고 스페인배의 접근을 피했습니다. 영국 전선들은 집중적으로 함포사격을 하였고 스페인 전선들은 영국 함대와 플랜더스 지방 사이에 끼인 상태가 되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서 스페인 함대는 이곳을 떠나 북쪽으로 북상할 수 있게 되어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무적함대라는 스페인 함대는 칼레해전 전에 이미 영국 해군에 따라 잡혔다고 보는 시각도 많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지난 레판토 해전의 승리에 대한 명성으로 왕좌의 자리에 있었지만 큰 덩치와 느린 선회 속도로 이미 그들의 함선은 옛 영광에서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반면 헨리 8세 이후 쇠락하던 영국 해군을 해군성의 존 호킨스가 다시 살렸는데 최신예 전선인 갈레온선들로 4년 동안 11척을 추가로 건조하였습니다.
아래 보시는 갈레온선들은 폭이 좁은 대신 길이를 더 늘려 더 많은 포를 탑재하였고 기동성 측면에서도 스페인의 갤리선보다 뛰어났습니다.
스페인 해군은 레판토 해전에서 거둔 승리의 여운과 기존 갤리선들을 모두 교체하는데 드는 천문학적인 비용으로 갤리선으로의 교체를 못하고 전쟁에 임하게 되었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스페인 함대는 영국 해협으로 다시 남하하여 오려고 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계속 북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메디나 시도니아 공은 침략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미 무기와 음식도 바닥이 난 상태였습니다. 시도니아 공은 결국 퇴각하여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거쳐 다시 모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당시 스코틀랜드 왕이었던 제임스는 스페인 군이 스코틀랜드 항구에 입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제임스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터였기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신임을 어기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으로 향하는 길에 스페인 군인들은 심각한 음식 및 물 부족에 시달렸으며 태풍 또한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굶주린 스페인 선원들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에 정박하여서 먹을 것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이를 미리 예상한 엘리자베스의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도륙되었고 메디나 시도니아 공은 9월 13일이 되어서야 반절 남은 함대를 이끌고 산탄더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칼레 해전이 끝난 후 영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은 1604년에 런던 조약이 조인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영국은 계속해서 네덜란드의 신교 세력을 지원하였고 스페인 선박들을 갈취하여서 부를 쌓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스페인 무적함대의 명성 또한 시들어 갔고 스페인 무적함대의 몰락은 스페인의 해양력에도 큰 영향을 주어 점차 힘을 잃어갔다. 스페인이 힘을 잃어갈수록 영국은 힘을 얻었습니다. 영국은 1600년에 동인도회사를 차렸는데 이는 영국제국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1604년에 스페인 외 유럽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버지니아라는 식민지를 세우게 되었는데 버지니아라는 이름은 처녀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를 기념하고자 지어졌다고 합니다^^
출처: https://blue-paper.tistory.com/578 [Blue Paper]
출처: https://blue-paper.tistory.com/578 [Blue Paper]
해전사 스페셜 : 칼레 해전
영국을 대영 제국,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한 칼레 해전에 대해 다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이해하기 쉬우시도록 당시의 역사를 잠깐 다루고 해전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뤄 볼 것입니다.
그럼, 역사 속으로 함께 하시죠!
VS
펠리페 2세의 초상 - 베첼리오 티치아노 作 /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영화 골든 에이지 中)
15세기 말,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가 시작되고, 그 무렵의 유럽은 200여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교회와 교황을 신적인 존재에서 인간으로 격하시켰다.
그로 인해 타락한 종교를 뒤집어엎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각지에서 종교개혁의 바람이 일으켰고,
그렇게 1555년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루터의 종교 개혁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이를 인정하므로
진정한 개혁의 폭풍이 몰아쳤다.
뒤를 이어 예정설을 주장하는 칼뱅과 위그노(그의 추종자)들도 개혁의 깃발을 올리며
그렇게 신교와 구교로 기독교는 분열되었다.
그러던 중, 영국은 1509년 헨리 8세를 새로운 왕으로 맞이하게 되는데 그는 형 아서가 돌연사함으로 인해
형수와 결혼하는 것으로 왕권을 다졌다. 그는 형수이자 부인이 된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5명의 아이를 가졌으나
메리 공주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사내아이들은 사산된다. 그것이 부정한 결혼 때문에 신이 저주를 내린 것이라 생각한 그는
성경의 레위기 말씀에 따라 자신의 결혼이 부정하기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이 계속 발생하는 것이므로
이혼을 강력하게 교황에게 요구했다.
이혼을 요구한 진짜 이유와는 다르게 성경 말씀을 근거로 교황에게 요구했으나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전임 교황의 특면장에 의해 성사된 결혼을 자신이 뒤엎을 수 없다고 하며 그 요구를 거절한다.
(이 역시도 표면적 이유였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로스 5세는 캐서린의 조카였기 때문에
교황은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헨리의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
헨리의 형 아서와 캐서린이 이른 나이에 결혼하여 둘 사이에 관계가 없었으며,
그러므로 캐서린은 순결한 여인임을 증명하기도 하는 등 정치와 종교 간에 분란이 일자 헨리는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로마 기독교와의 이별을 선언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수장령”(스스로가 국가와 교회의 수장이다! 라고 선포하고 제정일치 사회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렇게 국교회(성공회)를 만들고 헨리는 그 우두머리의 권한으로 기존의 수도원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문을 닫게 하는 등 종교적 폭압을 통해 완전히 교황청과는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 후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분열은 점점 심해져갔고, 그 뒤를 이어 메리 튜더(블러드 메리) 여왕이 즉위하면서
소강상태에 들어가는데, 그녀의 치세에서 칼레를 프랑스에 빼앗기에 되고 영국의 국민들은 대단히 비통해한다.
그러나 그 아픔도 잠시,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열린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한 칼뱅 파 신도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날 학살된 신교도들의 피로 파리의 강은 피로 물들었고, 피에 광기에 젖은 이들은 이 날을 계기로 수만 명을 학살한다.
이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 학살을 기념하며 메달을 만들기도 하였고,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는 학살 소식을 듣고
사악한 무리들이 세상을 떠나 지옥으로 가는구나! 하고 즐거워하며 침실에서 자다 일어나 춤을 추었다고 할 정도이니
이 당시 종교가 얼마나 신의 뜻과는 멀어져 있어 세속화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자,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불안해졌다.
신교도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영국은 스페인, 프랑스와 적대국이 되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펠리페 2세는 신의 대리인을 칭하며 이교도들이 이 대륙에 더 이상 발붙이고 살지 못하게 하겠다! 라고 외치며
네덜란드(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었음)에 군대를 파견,
신교도 8천명을 종교재판에 회부해 “합법적”으로 학살하였다.
이를 본 네덜란드인들은 이를 계기로 폭압을 멈추라며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이 때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그 유명한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파견하는데,
이를 본 영국은 이들이 네덜란드를 제압한 후에 저 함대의 뱃머리를 영국으로 돌려 우리 땅의 신교도들도 학살할까 당황했고,
신교도보다는 가톨릭(구교)세력에 우호적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가 자신의 영토에서 추방당해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는데, 메리 여왕은 펠리페 2세의 두 번째 부인이기도 했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살려두면 스페인과 내통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이전에 펠리페 2세와의 사랑에 빠져 1556년,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에 파병하는 행동으로
칼레를 프랑스에 빼앗기는 과오를 저지른 전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처형해 버린 후 군대를 네덜란드로 파병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스페인은 완벽한 적대국으로 사이가 틀어져버린다.
(처형당하는 메리 여왕 / 영화 Elizabeth: The Golden Age (2007) 中)
그러던 중 1581년, 네덜란드는 독립하였고 펠리페 2세는 이것이 영국이 네덜란드를 지원했기에
우리 식민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 선전포고를 감행한다.
그 이전에도 종종 충돌이 있었기에 영국 스페인 전쟁 기간을 1567 ~ 1604년까지로 공부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또 다른 역사를 바꾼 해전인 레판토 해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화에서는 칼레 해전을 다루기로 하였으므로, 레판토 해전은 다음에 논하도록 하고 넘어간다.
이 시기는 해전사에 있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일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선박 내구도가 증가하였고, 적 함선을 침몰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정밀한 조준사격이 가능한
함포를 배에 장착할 수 있게 된 때문이었다. 이러한 범선을 통해 해전의 양상이 기존과는 많이 달라졌는데
(기존의 노선 시대의 해전의 양상은 본 기고의 이전 화인 살라미스 해전 편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실 것이다)
범선이 전장에 출현하게 되면서 전략과 전술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를 적절히 보여준 전투가 바로 칼레 해전이라 이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으로 지정한 것이 아닐까 한다.
영국은 스페인에 대해 공격적으로 압박하는 해양 전술을 추구했는데, 위로는 여왕부터 아래로는 해적들까지도
스페인에 대한 약탈을 장려하였다. 육지로 치면 치고 빠지면서 약탈하는 게릴라 전술과도 같은 것이 되겠다.
이것을 통해 적대국의 화를 돋우면서도 전략물자를 뺏어오는 일거양득의 전술로 이득을 보자
당시 노예무역상에서 해군위원회 의원으로 진출한 호킨스(John Hawkins)의 제안으로 선체가 낮은 대신 항해하기 유리하고
현측에 함포를 장착할 수 있는 전투함을 건조하게 되는데, 이렇게 함대를 꾸린 영국은 본격적으로
1585년, 7천여 명의 병력을 네덜란드에 파병하고 드레이크 공(Sir Francis Drake)에게 지휘권을 준다.
그리고는 스페인 영역에 대한 해군공격을 허가함으로 드레이크는 29척의 함선과 2300명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신세계 공격을 시작한다. 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에 공격을 가해 상당한 성과를 얻은 후
그들은 1586년에 귀국하는데, 이것이 가지는 전술적인 의의는 현지 군인들과 공조하여 침공지역 연안의 수심이 깊은
항구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로 대표된 반란 세력을 지원하는데 주로 사용되었으며,
이것은 나중에 무적함대의 영국 침공이 실패하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렇게 영국은 정치, 종교적인 측면에서 스페인과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게 되었는데 반란을 지원하면서
네덜란드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변모하면서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의 뒷배를 봐주고 있는
영국을 공격함으로 네덜란드의 지배권을 회수해오고자 했다.
그러면서 영국의 신교도들까지 모두 제거해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영국 침공에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동원하여
치게 되는데, 그의 요구에 따라 1586년 3월, 산타크루즈 제독은 영국 침공을 위한 함대 편성에 돌입하는데,
그의 견적에 따르면 최소한 50척의 대형 갤리온(범선)과 100척의 무장 상선,
그리고 40척의 대형 수송선, 연안 게릴라 작전에 사용할 320척의 소형 보조선과
25,000명 이상의 선원, 6만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보고하였다.
이는 기존의 수십 년간의 해전 경험에서 나온 지극히 현실적인 견적이었으나,
이는 당시 스페인의 자원동원 능력을 초과하는 수준이었기에 칼레가 위치한 플랑드르 근해에서 네덜란드에 주둔 중이던
파르마 공작이 이끄는 4만의 병력과 그가 소유한 함대를 전력에 병합하기로 하고 무적함대는 약 2만의 병력을 수송해
스페인의 상륙작전을 엄호하고 파르마 공작은 그를 보조하는 방법으로 영국의 함대를 괴멸시킨다는
작전을 수립, 시행하기에 이른다.
( 『사진: Elizabeth: The Golden Age (2007) 영화 中 』 )
1587년, 스페인 무적함대의 출동 소식을 전해들은 영국 해군은 이 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드레이크 경이 이끄는
전투함 16척과 경무장함선 7척으로 전대를 구성한 후 출격하였다.
이 때 드레이크는 카디즈 만을 급습하여 스페인의 함선 37척을 나포하고 불태우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렇게 한참동안 이베리아 반도 남서 지역에서 다수의 소형선박들을 나포하고 화물을 약탈하는 방법으로 보급을 진행하며
게릴라 전술을 펼친 끝에 계획대로 스페인 무적함대의 출격을 1년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다가 결국 펠리페 2세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으로 산타크루즈 선장에게 아직 전투준비가 완벽하게 되지 않았음에도
“그대는 유능한 지휘관으로 수차례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짐은 그대를 믿는다.” 는 말로 격려하며 전장으로 출진명령을 내린다. 이를 거절할 수 없었던 산타크루즈 선장은 전쟁을 준비하던 중에 사망하고 마는데,
그의 뒤를 이어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Duke of Medina-Sidonia)이 총사령관을 맡게 되었으나
그는 해전 경험이 부족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총 130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무적함대를 이끌고 리스본 항을 출항하게 되는데,
출항하면서 한 스페인 장교는 교황청의 특사에게 “우리는 기적을 바라면서 항해를 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을 볼 때
전쟁의 시작 전부터 총사령관이 죽는 것을 비롯, 전투에 임하는 수병들의 불안요소가 있었음에도
무리하게 전쟁을 시작한 스페인의 욕심이 패배를 부른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칼레 해전 이전 아르마다(스페인 무적함대)의 이동 경로 및 전술지도]
시도니아 공작이 이끄는 무적함대는 대형 갤리온 20척, 무장 상선 44척, 수송선 23척, 소형 보조선 35척,
그리고 갈레아스선과 갤리선이 각각 4척씩 있었고, 여기에는 2,431 문의 함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 중 중포는 1100문) 승조원은 8,500명이었고 병력은 19,000명이었는데 이들은 레판토 해전에서 사용했던
“적선의 현측에 접근해 백병전을 수행하는” 전술을 사용하려 했으나 이에 맞서는 영국 함대는 하워드 경(Lord Howard)와
드레이크 경이 지휘하는 2개 전대의 전투함 68척, 소형 함선 약 50척으로 구성되어있었고,
또 다른 2개의 전대에 속한 53척의 전투함이 도버 해협 근처에서 파르마 공작의 군대가 영국 해협을 횡단하는 것을 견제하고 있었다. 영국 함대는 중포 1600문으로 무장했으며, 스페인의 전투함보다 속력이 빨랐으며,
지휘관들의 전쟁수행능력, 포의 성능과 포병들의 실전 경험에 있어서도 스페인에 한참 앞섰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그 위용이 어마어마했다. 정박한 항구 주변으로 초승달 모양으로 진형을 형성한 그들은
양 날개(측면)에 갤리선을 배치하고 취약한 보급선은 중앙의 뒤편으로 배치한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 이미 규모가 어마어마해 질릴 만도 한데, 영국은 전면전으로 맞부딪히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미리 파악하고
소규모로 병력을 분산 공격하는 작전을 채택한다.
그렇게 게릴라전으로 소모전을 계속하자 스페인 군대는 영국군을 “루터 파의 겁쟁이들” “
햇병아리같이 겁이 많아 싸우지 못하는 바보들!” 이라며 조롱했다.
이에 발끈한 영국군은 전면공격을 감행, 2시간이 넘게 맞서 싸웠으나 마침 풍향이 스페인군에 유리하게 변하면서
무적함대의 초승달 진형에는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간 소모전을 벌였지만 7월 23일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도
대포를 수없이 주고받았지만 실질적인 피해는 없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스페인에 유리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은 파르마 공작의 보병전단이 영국 본토에 상륙하는 것을 지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스페인의 무적함대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았다고 생각해 한번 제대로 맞붙어서
영국 겁쟁이 놈들을 깨부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군 측 대장이었던 드레이크는 오랜 해적 활동으로 풍향과 조류의 변화에 민감하여 정세를 파악할 줄 아는 인물이었고,
적인 스페인 사령관은 풋내기에 불과했다. 이를 파악한 드레이크는 7월 25일, 스페인 함대를 영국 해협의 북쪽으로 유인했고
이로 인해 정박할 만한 항구를 찾기 못한 스페인 함대는 표류하게 되는데,
여기서 더 혼란을 가중시킨 요인은 기존 계획대로 파르마 공이 플랑드르 연안에 병력을 상륙했어야 하는데
아직 아무런 연통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파르마 공작의 보병전대는 아직 항구를 뜨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그들이 수송선으로 사용하는 작은 배들은 돛이 없어 풍향과 날씨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으며,
플랑드르 연해의 수심은 매우 얕아 홀수가 높은 아르마다(무적함대)는 해안에서 2KM 떨어진 지점까지밖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병력을 싣은 배들이 바다 한가운데로 나올 수밖에 없는 기형적 구조가 되고 말았는데
이것은 펠리페 2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전략적인 결함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도움으로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희망이 생긴 네덜란드 군은 파르마 군의 행동양상을 지속적으로 감시했고,
이를 부담스러워한 파르마 공작은 네덜란드로 선회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거짓 계략을 흘리는 방법으로
유인책을 쓰고자 했으나 네덜란드군은 그것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이 계속 흐르고, 27일이 되자 파르마 공의 병력을 싣은 배가 칼레 항에 닻을 내렸지만
정박할 만한 다른 항구를 찾지 못했고 (좋은 항구들은 앞서 네덜란드 군과 공조해 이미 영국군이 영향권 내에 확보했던 터라
스페인군은 플랑드르 연안에 수심이 좋은, 대형선이 정박하기에 적당한 항구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정상적인 전투함이 싸우기에는 좋은 위치가 아니었고, 네덜란드 반란 세력의 지휘관 낫소(Justin of Nassau)가 이끄는
쾌속 평저선이 스페인의 함포 사정거리 밖에서 파르마 공작의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페인군은 평저선이 부족했기에 아군이 공격당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7월 28일 야간에 영국 함대는 닻을 내리는 작업을 진행 중이던
스페인 무적함대에 8척의 화선(火船)을 출격시켜 공격을 감행한다. 이 때 드레이크 경의 기도가 아직 전해진다.
“주여, 이곳에 다신 스페인의 배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도록 제게 시간과 목숨을 주십시오.” 기도를 마치자,
그에 응답한 것인지 갑자기 칼레 항에 폭풍이 몰아치게 되는데, 이 바람을 영국군은 “프로테스탄트 바람” 이라고 부른다.
해전에서 바람이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독자 여러분들도 다 알고 계시듯이,
영국 함대가 위치한 방향으로 진격하고자 했으나 역풍으로 그것이 어렵게 된 스페인 군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거기에 더해 영국 해군은 더불어 심리전을 진행한다.
그 내용인 즉슨, 이탈리아의 유명한 기술자인 지암벨리(Giambelli)를 고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앤프워프의 지옥불로 유명한 화선을 개발해 스페인군을 괴롭히는데 일조하던 사람이었기에 스페인군은
그 무시무시한 소문만으로도 작열하는 화염 속에서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사기가 저하되는 것으로 인해
전력의 손실을 가져왔던 것이다.)
자정 무렵, 정박 중인 스페인 함대를 정박지에서 떠나게 하고자 지암벨리가 탑승한 화선이 출항했다는 정보를
스페인 함대 측에 흘리는 데 성공한 영국군은, 칠흑 같은 어둠을 아군으로 하여 스페인군의 코앞까지 화선을 보내는데 성공한다.
영국군들의 화선이 다가오자 스페인군은 공포감이 극대화되며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화선이 다가온다! 저것이 우리들의 함대로 접근하면 우리는 지옥 불 속에서 살이 타는 고통을 느낄 것이다!” 라며
두려워하여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각 선박을 이끄는 함장들의 독단적 판단 아래 닻줄을 자르고 대열을 이탈함에 따라
지휘권이 먹히지 않게 되자 대혼란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전 함대를 동원하여 공격을 감행한다.
대혼란 속에 전투를 시작한 스페인 함대는 8시간 가까이 지속된 전투 중에, 무적함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수많은 병력을 잃고 퇴각하게 된다. 영국군은 가지고 있던 화약을 모두 사용하여 더 이상 전투의 진행이 어렵게 되어
더 공격하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는데, 당시 풍향이 남풍이었기에 북쪽으로 퇴각한다.
영국군은 물러나는데 성공했으나, 무적함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돌아 귀국할 때까지 전투로 파손된 보급품,
그나마도 불량한 나무통으로 인해 식량이 부패하고 식수가 오염되어 기아와 갈증,
그리고 해상에서 가장 공포를 가져오게 된다는 괴혈병을 비롯한 각종 전염병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지휘관인 메디나 시도니아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명령했지만 이미 사령관 = 무능한 자 로 낙인찍힌 상황에서
그 누구도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로 인해 항명하고 아일랜드 항구에서 식수와 식량을 구하려고 정박하던 배들은 중간에 난파되어
내부 혼란으로 인해 또 수많은 함선과 병사들을 바다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 아르마다의 패배. 루터버그 作 』
패주한 무적함대는 9월 말이나 되어서 귀국했는데, 44척을 잃어버렸고, 전투함 64척 가운데20척을 잃었다.
그 외에 귀국하는데 성공한 전투선들도 본래의 임무수행이 현저히 곤란할 정도로 심한 손상을 입었고,
수천 명의 승조원과 수많은 전투병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으로 이 전투는 스페인의 완패로 끝난다.
칼레 해전에서 영국군이 이길 수 있었던 승리 요인은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드레이크의 기도가 불러온(?)
개신교의 신풍(Protestant God’s Wind)이라고 부르는, 강한 폭풍을 동반한 바람이 첫째로 전투를 영국군에 유리하게 만들어주었고, 둘째로 영국군은 보급품을 지원받는데 유리했다. 그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는 엘리자베스로부터
왕위 계승권을 제안받자, 스페인 함대가 스코틀랜드 연안에 정박할 수 없게 항구를 봉쇄하는 것으로 화답한 것이다.
그 다음은 무기의 화력 차이, 병력의 질의 차이였다.
스페인 군은 장거리에서 공격 가능한 컬버린 포를 21문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영국군은 153개를 가지고 있었으며,
중거리포도 스페인군이 151개를 가지고 있었다면 영국군은 344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화력 면에서 압도적이었기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스페인의 패배 요인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는 전략상의 결함이라 할 수 있겠다.
산타크루즈가 짠 견적에 한참 못 미치는 병력으로, 파르마 공작의 군대와 함께 영국을 침공하면 될 것이라고 오신한 것.
그리고 둘째는 노선 시대의 전법을 그대로 사용(레판토 해전에서 사용했던 초승달 전법)해 변화하는 해전의 흐름에 역행한 것이다.
셋째는 평저선이 부족했기에 파르마 공작의 지원군이 무적함대의 수송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적함대를 아예 만날 수 없도록 드레이크가 게릴라전을 펼친 것도 있지만,
전투 와중에 보급품을 싣고 있던 나무통들이 파괴되면서 군수품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게 된 데도 있다.
칼레 해전은 장시간 해군력을 발전시켜온 영국의 힘이었다. 영국은 헨리 8세가 왕위에 있던 시절부터
앞으로는 해전이 세계정세에 큰 변혁을 가져올 것을 예측하고 미리 해군을 양성하기 시작했고,
엘리자베스의 즉위와 동시에 그녀는 전투 함대를 발전, 새로운 전법을 고안하는 등 발전을 꾀했다.
무적함대는 구식 전법을 사용하여 패배하였다는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고, 이를 통해 해전은 새로운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충각 전술은 현측 포격전으로 변화하였고, 함대가 기존에는 가로로 전열하여 규모가 크게 보이게 만드는 것에서
세로로 바꾸어 포격에 용이한 모습으로 전열이 변동되기도 했다.
전쟁사적으로는 고대의 해전에서부터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백병전을 더 이상 해전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이때부터 2차 세계 대전에서 잠수함과 같은 비대칭전력의 출현까지 500년 동안은 해전의 승패를 가르는
주된 요인은 어느 나라의 화력이 더 우세한가? 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전투 이후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칼레에서의 전투 후 반신불수의 상태로 항구에 버려져있던 스페인의 잔존 함대들을 완파할 수 있던 기회를
영국 해군은 가지게 되는데 이를 위해 1598년, 드레이크 경이 이끄는 83척의 전투함과 60척의 수송선,
그리고 19,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다시 한 번 출병하였으나 원래 목적이던 스페인의 잔존 함대 격파가 아닌,
공을 세우기 위해 리스본 점령이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리스본을 점령하는데도 실패하고,
돌아오면서 계획대로 스페인의 잔존 병력을 해치우려 했으나 시기가 너무 늦어 무적함대를 완전히 격파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만다. 이 때 도망간 스페인 병력들은 수리를 마치고 재정비하여 각각 1596년과 1597년에 다시 영국 침략을 시도하지만
폭풍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후 1604년까지 국지전을 벌여오다가 양국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5년 후인 1609년에는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에도 휴전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한참 후 1648년에 웨스트팔리아 조약(Treaty of Westphalia)으로 네덜란드가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전쟁 영웅 드레이크는 어찌 되었느냐고요?
칼레 해전 이후 두 차례 포르투갈 원정을 나갔으나 실패했다는 것은 바로 위에서 다루었고,
그의 개인의 인생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그는 위대한 뱃사람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행복하지 못했다.
두 번 결혼했지만 자녀를 얻지 못했고, 말년은 원정 실패로 비참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뛰어난 역사가 존 스토는 드레이크를 평함에 있어
“어느 누구보다 항해의 모든 면에 있어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으며, 또한 그는 완벽한 기억력과 뛰어난 관찰력,
타고난 말솜씨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천부적인 그의 재능이 영국을 해상 국가로 발돋움시킨 원동력이 되었고,
칼레 해전의 승자로 만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의 말솜씨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을 품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는데, 일례로 여왕 앞에서 4시간 동안이나 항해에 대해 설명했는데,
여왕은 너무 지루했던 나머지 “너무 재미없어서 검으로 당신을 베어버릴 뻔 했잖아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역사학자 존 실리는 영국을 성장시킨 세 개의 산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엘리자베스와 스페인의 무적함대, 크롬웰의 전쟁과 평화, 오렌지 공 윌리엄 3세의 성공 사례”
이들의 공통점은 강인한 리얼리즘, 끊임없는 국익에 대한 관심,
견고한 네셔널리즘, 그리고 외교에서 빛을 발한 특유의 지혜다. 라고 말이다.
H.D.F 키토는 1588년의 영국을 기원전 480년의 아테네와 매우 유사하다고 서술하는데, 그 내용을 보자면,
“어느 방향을 보든 그들은 가슴 설레는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에게 해 연안의 작은 도시국가인 아테네가
대제국 페르시아를 무찌름으로써 얻게 된 번영과, 작은 섬나라 영국이 대강국 스페인을 저지함으로써
해상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것은 같은 맥락이었다.
이처럼, 칼레 해전의 승리는 영국이 후일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을 저지함으로써 대영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게 했다.
무적함대를 격파한 드레이크와 칼레 해전의 이야기는 영국의 민간 설화를 다시 쓰게 할 정도로 유명한 전설이 되었고,
후일 이를 바탕으로 한 수많은 서사시와 문학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보통의 지휘관들은 죽어서 더 유명해진다고 하는데, 드레이크는 살아서도 그 명성을 다 누렸으며,
아르마다(무적함대)를 패배시킴으로써 영국은 국교인 성공회를 지키는 데 성공했고,
유럽 최강국과 맞붙어 이김으로써 유럽의 신흥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에 반해 스페인은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식민지들을 잃고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정말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북해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가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이 위대한 승리로 인해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는데 성공하고
위대한 국가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 전투는 세계 해전의 역사에서 기념할 전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두 번째 세계 4대 해전, 칼레 해전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다음 연재에서는 많은 분들이 기다리시는
우리 대한민국의 이순신 장군님께서 출현하시는! “한산도 해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