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 2 / 오철수 시인
다. 있었던 일이 환기하는 바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합니다.
있었던 일은 곧 이야기입니다. 시간적으로 펼쳐진 체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나희덕의 「종점 하나 전」도 시간적으로 펼쳐진 체험 이야기입니다. 그 시간적으로 펼쳐진 체험이 어떤 의미 있는 감흥을 주어서, 그 감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있었던 일이라는 그 과정의 면면에 근거하여 표현합니다. 때문에 시인의 시선은 항상 ‘있었던 일이라는 과정(이야기)’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물상이나 풍경을 대상으로 할 때는 대상의 장면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있었던 일은 ‘일’이라는 사건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사건 이야기 다시 말해서, 사건의 시간적 전개 과정이 중요합니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큰형님이 호도 캐러 가자한다 ‘하하, 형님도 호도가 고구맙니까’ 염색한 머리 밑에서 허옇게 돋아오는 머리칼 쓸어 올리며 구부정하니 여윈 큰형님이 그냥 빙긋이 웃으며 망태기 하나 괭이 하나 들고 앞장을 선다 추석에 성묘 왔던 사람들이 사과 과수원 울타리로 넉넉히 둘러둔 밤나무 호도나무 섞어 둔 숲에 숨어들어 알밤 너덧 말 실히 털어 가는데도 ‘넵 둬라. 다 여기 연고 있는 사람들 아니겠냐.’ 하더니 다람쥐란 놈들 실히 한 가마니는 물어 갔으니 반은 찾아와야겠단다 산비탈 몇 곳 괭이로 헐어 내어 두어 말 망태기에 담으며 나는 신이 났다 이곳저곳 더 욕심냈더니 그만 가잔다 ‘반만 건지면 됐다’ 다람쥐란 놈 욕심은 많고 머리는 나빠 제 먹을 것보다 몇 곱절 물어 간다고 한다. 그래 놓고는 어디에 다 묻어 두었는지 몰라 겨울에 굶어 죽기도 한다는데 하하, 그런 어리석음 덕분에 다람쥐가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나 그렇게 땅 속에 물어다 묻어 논 것들이 싹을 틔워서 도토리 숲이 퍼져 갔다나 구부정하니 앞서 내려가는 형님 머리 위로 흰 구름 한 자락 여유롭다 ― 문학철 「호도캐기」 전문 있었던 일을 들려줍니다. 있었던 일 그 자체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있었던 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그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있었던 일로 들려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있었던 일이 삶에 대한 의미 있는 깨달음의 감흥, ‘호도를 따야한다’는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던 삶을 반성하게 하는 사상 감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깨달음의 감흥 때문에, 그 깨달음의 감흥을, 그 체험 이야기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있었던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위의 체험이 어떤 시적 체험을 주었기에 이와 같은 시를 쓰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는 여지껏 ‘호도를 따야 한다’는 세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나는 여지껏 ‘떨어진 호도는 주워야 한다’는 세계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형님이 말합니다. “호도 케러 가자.” 그래서 나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하하, 형님도/ 호도가 고구맙니까”.
그러나 큰형님은 “그냥 빙긋이 웃으며 망태기 하나 괭이 하나 들고 앞장을” 섭니다. 호도를 캐러 갑니다. 그리고 진짜 다람쥐란 놈들이 물어다가 쌓아 둔 “산비탈 몇 곳 괭이로 헐어 내어 두어 말” 캐냅니다. 따지도 않고, 줍지도 않고 캐냅니다. 내가 여지껏 가지고 있었던 ‘호도를 딴다’는 이미지가 와장창 무너집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됩니다. 호도를 ‘딴다’와 ‘캐낸다’의 경험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세계관의 차이는 무엇인가? 혹시 나는 나의 경험적 이미지를 객관으로 절대화시켜 살지 않았는가? 그 결과 더 넓은 세계 이해로부터 멀어지지는 않았는가?
이처럼 ‘호도를 딴다’는 이미지가 나의 객관성이고 과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객관성과 과학, 그 이미지에 위배되면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미지가 어쩌면 내가 선택한 주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말입니다.
퍼뜩, 오래 전에 읽었던 베이트슨의 생각이 떠올라 그 책을 찾아봅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객관적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주관적이다. ‘자각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뇌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모든 자각은 이미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발을 밟혔을 때 내가 경험하는 것은 그에 의해 내 발이 밟힌 사실이 아니라, 밟히고 나서 얼마 후에 뇌에 전달된 신경 보고와 함께 재구성된, 그에게 발은 밟힌 것에 대한 나의 ‘이미지’인 것이다. 외계의 경험은 항상 어떤 특정의 감각 기관과 신경 통로에 의해 전달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에 대한 나의 경험은 주관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일 수 없다. 우리의 문명은 객관성의 환상 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 베이트슨 『정신과 자연』 (까치) 44/5쪽 요약〉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이처럼 경험의 주관적인 이미지에 대한 반성 없이 그것를 객관이라 믿고,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김수영 「절망」 중에서) 나는 나를 내세웁니다. 나의 객관이라는 그 믿음으로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닫아 버립니다. 그리고는 하나의 이미지만을 큰 문, 바른 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비난과 야유도 스슴지 않습니다. 그게 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할수록, 알밤 너덧 말 실히 털어 가는데도 “넵 둬라. 다 여기 연고 있는 사람들 아니겠냐”, “반만 건지면 됐다”라고 말하는 큰형님의 말씀이 참으로 향기롭습니다.
저만치 “구부정하니 앞서 내려가는 형님” 모습! 그 향기의 비밀은 “여유”입니다. ‘전부 아니면 전무’가 아니라 ‘얼마쯤’입니다. ‘호도를 딴다’는 이미지는 자기를 반성하지 못하는(반성할 수 없는) 것에서 존재의 절대화를 이룹니다. 그러나 ‘호도를 캔다’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에 ‘절대’를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에 의해 이미지화된 것입니다(“넵 둬라. 다 여기 연고 있는 사람들 아니겠냐.”) ‘내가 심고 길렀으니 내가 거둔다’와 ‘모두가 심고 모두가 길렀으니 나누어 가진다’는 페러다임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 차이로 ‘나’와 큰형님이 있습니다.
큰형님에 속한 페러다임의 우위는 우화 같은 다음 이야기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다람쥐란 놈 욕심은 많고 머리는 나빠 제 먹을 것보다 몇 곱절 물어 간다고 한다. 그래놓고는 어디에다 묻어 두었는지 몰라 겨울에 굶어 죽기도 한다는데 하하, 그런 어리석음 덕분에 다람쥐가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나 그렇게 땅 속에다 묻어 논 것들이 싹을 틔워서 도토리 숲이 퍼져갔다나.”
이 이야기에서 2-1=1이 아닙니다. 2-1=1±α입니다. α의 역동적 창발성이 ‘관계’의 세계를 이룹니다. 형님의 페러다임은 α를 중요시하고, 나의 페러다임은 2-1이라는 실체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니 자동적으로 “여유”의 자리가 사라집니다. “여유”의 자리만큼의 겸손도 사라집니다. 겸손이 사라지는 만큼 따뜻함이 사라집니다(기계적이 됩니다).
하여, “하하, 형님도/ 호도가 고구맙니까”와 “그냥 빙긋이 웃는 형님”의 모습이 대비됩니다. 그리고 빙긋 웃는 형님의 미소가 나를 감쌉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치유입니다. 그런 사상 감정, 깨달음의 감흥이 일어납니다. 내가 체험한 일이 바로 그런 깨달음을 담고 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체험 이야기를 중심으로, 내가 느꼈던 그런 생각들이 더 잘 느껴지도록 들려주는 것입니다.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있었던 일이 나에게 의미 있는 감흥을 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하냐 하면, 의미 있는 감흥이 잘 드러나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방법으로 그렇기 때문에 있었던 일이 선명하게 시의 물질적 재료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제는, 있었던 일이 환기하는 바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 ‘시 창작 강의 노트, 나를 바꾸는 시 쓰기(유종화, 새로운눈, 201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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