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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민족이다.”
<예레미야서의 말씀 7,23-2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백성에게
23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24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25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26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27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28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 복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14-23>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어중간은 없다>
어느 신부님께서 마음을 고쳐먹은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서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름대로 혼자서 열심히 지냈답니다.
주교님의 사목방침에 구애 받지 않고 이런저런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독불장군으로 지내는 중에 성경을 열심히 읽었는데 한 말씀이 가슴깊이 다가왔답니다.
루카복음 7장 3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신부님은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에 차있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으며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주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또한 주님은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묵시 4,15-16)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고 하였습니다. (루카 11,17)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어 주님의 눈에 들기를 바랍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행세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 안에는 예수님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가르침대로 살기는 싫다는 생각이 배어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상대를 험담하고 딱지를 붙이며 합리화시키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직 진리의 길을 가르치고 가르치는 대로 사셨습니다.
누가 흔들어도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해를 불러일으켜도 가야 할 길을 가야 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선교하지 않는 신앙인 = 전쟁 중 탈영한 군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들을 믿게 하려거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예수님은 마치 악의 세력과 전쟁터에서 싸우시는 장군과 같으십니다.
그런데 그 전쟁터에서 그분 곁에 머문다는 사람들이 “혹시 적군 아닌가요?”라고 하거나, “아군이라는 표징이 있나요?”라고 한다면 답답한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군인이라고 하면서 그분과 함께 싸우지 않는 사람은 적군이나 다름없습니다.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전쟁 중 탈영은 어느 군대에서는 사형입니다.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직무를 이어받아 세상에서 악과 싸워가며 교회라는 방주에 사람들을 태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서 의무는 하지 않고 놀고먹으며 불평만 한다면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어떠한 단체나 사회도 그 사회에 머무르려면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의무는 해야 합니다.
지난해 6월 8일, 서울 강동구 고덕역 인근에서 구급차를 가로막아 이송 중이던 환자를 숨지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최씨(32)는 사설 구급차가 앞으로 끼어들자 고의로 들이받아 사고를 낸 뒤 “사건 처리를 먼저 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최씨는 “환자부터 이송하고 오겠다.”라는 구급차 기사의 말에 “죽으면 내가 책임진다.”라며 붙잡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환자 이송은 11분이 지체됐고 80대 환자는 최적 시간을 놓쳐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씨는 수리비 명목으로 총 72만 원을 받아 챙겼습니다.
최씨는 지난 2017년 7월께에도 서울 용산구 인근에서 택시를 운행하다 사설 구급차가 끼어들자 고의로 들이받은 전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밖에도 2017년 6월부터 2019년 6월까지 4차례에 걸쳐 작은 사고에도 크게 다친 것처럼 행세해 보험사로부터 1700여만 원의 보험금을 받아 챙겼습니다.
2015년과 2016년엔 피해 운전자에게 직접 370여만 원을 치료비 명목으로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최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고, 최씨는 형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했습니다.
검찰에서는 2심 때 2년 징역형은 너무 가볍다며 7년을 구형하였습니다.
이렇듯 대한민국이란 커다란 한 사회에 살기 위해서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사회에 피해를 주고 결국 사회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이 박탈당합니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그 사회가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더 완전한 행복의 나라를 원하십니다.
1920년대 후반 매사추세츠주의 법정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사건은 부둣가를 거닐던 사람이 로프에 걸려 차갑고 깊은 바닷속에 빠진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허우적대면서 도와 달라고 소리치다가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그런데 몇 미터도 못 되는 거리에 젊은이 한 사람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와줘요. 난 헤엄칠 수 없어요.”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수영에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익사자의 가족은 그 사람을 신고했습니다.
하지만 법정은 “부둣가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어떠한 법적 책임이 없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렇듯 사회에서는 그저 남에게 의도적으로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하늘 나라에서는 더 큰 의무가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무관심으로 누군가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더 적극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책임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지옥이라는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배에 타서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다면 그 배에 머물 수 있는 자격이 얻어질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세상에 선교하러 오셨습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사명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배에 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선교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교회 전체에 사기를 떨어뜨리는 탈영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화 ‘명량’(2014)에서 열네 척밖에 배가 없는데 수백 척의 일본 배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몇 명이 탈영하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려워서 떠나겠다는데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그들의 목을 칩니다.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랑이라는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습니다.
선교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가 누군가에게 당하고 있는데 팔짱만 끼고 있는 자녀는 잘못이 없을까요?
그것 자체가 부모를 괴롭히는 사람을 긍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영혼을 구하기 위해 악의 세력과 전쟁 중이시고 우리는 그 배에 함께 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 팔짱만 끼고 구경했던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기준의 문제로다>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앞을 향하여 있습니다.
내가 동쪽을 향하여 서 있으면 동쪽이 내 앞이고, 내가 서쪽을 향하여 서 있으면 서쪽이 내 앞이며, 앞으로 향하여 있다가 뒤로 돌아서면 이젠 뒤가 내 앞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앞에 있던 사람이 내가 뒤로 돌아서면 내 뒤에 있는 것이고, 반대로 내 뒤에 있던 사람도 내가 돌아서면 내 앞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인데 오늘 독서에서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기준으로 하면 내 앞이 앞이지 다른 무엇이 앞이 아니고, 무엇이 내 앞에 있거나 옆에 있거나 뒤에 있는 것이지 내가 앞을 향하여 있거나 뒤를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에서 앞뒤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분명 하느님일 거라 생각이 되어 다른 성경 번역들을 찾아보니, 영어 성서는 “turned their backs, not their faces, to me.”라고, 공동번역 성서는 “나에게 등을 돌리고 나를 외면하였다.”라고, 개신교 성서는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 하였다.”라고 각기 번역을 하였으며 그 공통점은 하느님께는 등을 돌리고 하느님 아닌 다른 쪽으로 그들은 향하여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앞과 뒤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중심일 때 내가 기준이 되고, 반대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사랑하는 그가 기준이나 중심이 되어 그 앞에 내가 있고 내 앞에 그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할 때는 늘 그를 향하여 있습니다.
처음에는 관심이나 시선이 그를 향하여 있고, 더 사랑하면 관심과 시선이 그에게 가 있으며, 더 사랑하면 존재가 그를 향하여 있고, 더 사랑하면 존재가 그 앞에 가 있게 됩니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런 경우 저는 엄마와 아기의 관계를 흐뭇하게 떠올립니다.
이제 갓 걸음을 뗀 아기가 아장아장 또는 데똥데똥 걷는데 그의 시선은 온통 엄마에게 꽂히고 얼굴은 환하고 빨리 달려가 안기려고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서는 덥석 안깁니다.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은 누구도 아기와 엄마 사이에 있을 수 없고 온전히 아기만 있습니다.
이것처럼 온전히 사랑을 하면 다른 무엇이 끼일 수 없게 하느님 앞에 내가 있고 내 앞에 하느님이 있습니다.
등을 돌리고 등을 보이는 것은 정말 할 짓이 못됩니다.
그에게 못할 짓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못할 짓입니다.
그에게서 나의 사랑을 거두는 것 같지만 실은 내 안에서 사랑이 떠나가는 것이고, 그가 내 앞에 없는 것 같지만 내게 사랑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느님일 때 더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신 분이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랑이기에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것은 모든 사랑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배반한다면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반하는 것이며, 하느님이 내 앞에 없다면 하느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 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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