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오는 날에
대한을 이틀 앞둔 일월 중순 목요일이다. 간밤부터 흐린 하늘에 종일 강수가 예보되어 야외 학습은 접고 일찌감치 도서관으로 나가기로 정했다. 도서관 문이 열릴 시각에 맞추려면 아침 식후 8시 무렵 집을 나서면 되었다. 지난번 빌려왔던 책 3권 가운데 1권은 펴보지 못하고 배낭에 챙겨 넣어 현관을 나섰다. 아파트단지 뜰로 나서니 웃비는 내리지 않아 우산은 펴지 않아도 되었다.
학생들은 방학이라 거리에 보이질 않는 외동반림로를 따라 걸으니 반송 소하천에는 쇠백로 한 마리가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흰뺨검둥오리는 금실이 좋아 번식기가 아니라도 쌍으로 붙어 다녔는데 중대백로나 쇠백로는 그렇지 않아 늘 혼자 단독 개체로 서식하며 먹이를 찾았다. 매일 아침 겨울 냇바닥에서 뭔가를 찾았는데 물고기가 아닌 수서 곤충이나 벌레를 잡아 먹으려는 듯했다.
원이대로 건너 창원 레포츠파크 동문에서 폴리텍대학 캠퍼스를 관통해 지났다. 방학을 맞은 교육단지 전문계 공업고등학교는 환경을 개선하는 공사로 뜰에 꺼내둔 폐자재를 치우느라 장비를 동원한 인부들이 수고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도서관은 고등학교 생활관과 인접한 낮은 산기슭으로 직원들이 차를 몰아 출근하는 즈음이었다. 2층 열람실로 올라 내가 자주 앉은 자리로 갔다.
배낭에 넣어간 대출 도서 가운데 집에서 펴보지 못한 이욱연이 쓴 ‘시대를 견디는 힘, 루쉰 인문학’을 꺼냈다. ‘어둠과 절망을 이기는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중국 근현대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문학가 루쉰 저작과 중국 문학에 대한 해설서였다. 루쉰은 청나라가 멸망의 길로 접어든 시기에 태어나 국민당 정부 탄생과 공산당 세력의 득세를 지켜본 사상가였다.
저장성 사오싱에서 누대 걸친 관리 집안에 태어난 그는 본명이 저우수런으로 어려서 할아버지가 옥고를 겪는 중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 소년가장으로 자랐다. 혼란기에 처한 중국에서 의사가 되려고 일본 유학을 나섰다가 몸을 고치는 길을 접고, 정신을 고치는 작가의 길로 들어 루신이라는 필명으로 ‘광인일기’, ‘아Q정전’ ‘고향’과 같은 중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을 남겼다.
일제 강점기 이육사는 생전에 루쉰을 찾아뵈어 감화받았으며 그의 사후 추도문을 남기도 했다. 루쉰은 자신이 문학가이면서도 시인은 사람 마음을 어지럽히는 이라 했다. 여기서 ‘어지럽히는 일’이란 기성 가치관, 고정 관념에 빠진 사람의 마음에 충격을 가해 굳은 생각에 파문을 일으키고 동요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낡은 생각, 고정된 인식을 흔드는 사람이 시인의 역할이라고 봤다.
서강대에서 중국문화학을 가르치는 루쉰 연구가 이욱연의 책을 독파한 뒤 최린이 번역한 로제 폴 드루아의 ‘내게 남은 삶이 한 시간뿐이라면’을 읽었다. 이 책은 프랑스 노철학자가 전하는 삶의 가치와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질문이었다. 인도 여행 명상 시인으로 통하는 유시화 산문을 읽는 느낌이었다. 대출 도서는 반납하고 조선 시대 한문 소설과 출가승이 쓴 책을 빌렸다.
점심때가 되어 휴게실로 건너가 컵라면으로 한 끼 때우고 오후는 더 분명한 학생 신분이 기다렸다. 팔룡산 터널 입구 공단 입주 업체 업무용 빌딩으로 찾아가 공무원 연금공단에서 실시하는 스마트폰 기초반 교육에 참여했다. 4월 중순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면 상록 봉사센터에서 실시하는 은퇴자 대상 정보화 교육으로 컴맹이나 폰맹에서 벗어날 기회로 삼으려 자발적으로 찾아갔다.
일전 공단 관계자로부터 문자로 안내받은 3층 강의실로 드니 개강 1시간 전으로 내가 제1착이었다. 직종을 달리한 은퇴자 2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스마트폰 교육 개요와 운영 강사진을 소개받았다. 첫 시간이라 수강생도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자기를 소개하면서 친교 시간을 가졌다. 나는 퇴직과 동시에 가르치는 직은 내려놓고 학생 신분으로 돌아갔기에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다. 24.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