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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캠퍼스의 잔디밭 위로 낙옆이 쌓여져 있다. 벤치에서 보면 지저분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낙엽을 치우지 않는다. 윤성일의 앞쪽으로 햇살이 비스듬히 뻗쳐나가 그림자가 건너편 도서관의 1층까지 닿았다. 각도가 점점 낮아져서 이제 곧 건물 전체가 그늘에 먹힐 것이다.
“윤선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윤성일이 머리를 들었다. 정소영이다. 경제과 동급생, 그러나 윤성일이 군 입대 관계로 3년 휴학했기 때문에 3학번이 늦다. 옆쪽 자리에 앉은 정소영이 볼우물을 만들며 웃었다. 눈이 가늘어지면서 흰 이가 드러났다. 칼을 대지 않은 자연미, 날씬한 체격, 경제과뿐만 아니라 상경대의 히로인이다. 복학한 지 한 달도 안 되었지만 정소영 주변의 이야기는 다 들었다. 원체 유명한 계집애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소영이 슬슬 윤성일 주변을 맴돈다. 이쪽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반작용 같다.
“윤선배, 내일 강의 없죠?”
정소영이 묻자 윤성일은 머리만 끄덕였다. 2시간짜리 강의가 미뤄졌다. 정소영이 다시 묻는다.
“내일 시간 있어요?”
“뭐하게?”
“나하고 놀게.”
“뭐하고?”
“산이나 가요. 바다도 좋고.”
“너.”
호흡을 고른 윤성일이 똑바로 정소영을 보았다. 정소영의 콧등에 조그만 점이 한 개 찍혀져 있다.
“남자 많잖아?”
“누가 그래요?”
“애들이 모이면 네 이야기만 해.”
그러자 정소영이 풀썩 웃더니 눈은 흘겼다. 요염하다. 여자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아버지가 주유소를 세 개 갖고 있는 졸부 집안이라던가? 정소영은 소형 BMW를 타고 다니는데 차는 학교 앞 주차장에 놓는다. 학교 안까지는 휘젓고 다니지를 않는 것이다. 정소영이 지그시 윤성일을 보았다.
“그래서요? 내가 남자 많으면 윤선배하고 데이트 못해요?”
“그거야 니 맘이지.”
“윤선배 맘은?”
“싫어.”
“왜?”
“뻔하지. 난 너 노는 것이 싫거든.”
“그래서 난 선배가 좋은데.”
“말장난 말고 난 가봐야겠다.”
윤성일이 벤치에서 일어서자 정소영이 따라 일어섰다.
“내가 저녁 살게요. 선배.”
“귀찮아.”
“술도 살게.”
발을 떼던 윤성일이 주춤 멈추고는 정소영을 보았다. 정색하고 있다.
“내가 몇 년 더 살아서 아는데 이 세상에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일이 있어.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말이다.”
이제 정소영은 시선만 주었고 윤성일이 말을 이었다.
“넌 괜찮은 애야. 이쁘고 몸매도 좋고 머리도 좋고 성격도 출중해. 하지만 내 스타일은 아냐. 난 싫어.”
머리를 저은 윤성일이 몸을 돌리더니 발을 떼었다. 정소영은 잠자코 윤성일의 뒷모습을 본다.
잠시 후에 정소영은 조금 전에 앉았던 벤치에 기대앉아 핸드폰을 귀에 붙이고 있다. 햇살은 더 낮아져서 그림자가 건물 지붕까지 닿았다. 주변은 이미 가을 그림자로 덮여져 있다. 정소영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난 이런 경우 처음이야.”
호흡을 가눈 정소영이 말을 이었다.
“정말 예상 밖이라구.”
“어떻게 되었는데?”
웃음 띤 목소리가 수화구를 울렸다. 전세희다. 정소영이 대답했다.
“넌 싫대. 내 스타일이 아니래.”
“....”
“아유 쪽팔려.”
“대놓고 그래?”
“그래, 이년아.”
핸드폰을 고쳐 쥔 정소영이 퍼부었다.
“너때메 이젠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되었어. 소문나면 어떡하니?”
“소문 낼 사람이 아냐.”
“이 기집애가 괜히 일을 만들어서....”
“너도 절반은 마음이 있었잖아?”
웃음 띤 목소리로 전세희가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냉큼 받아들였지.”
“시끄러! 이 기집애야.”
정소영은 전세희와 중학교 동창이다. 고등학교 때 갈라졌지만 자주 만나온 몇 안 되는 친구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번 프로포즈는 전세희의 사주에 의한 작전이었다. 나름대로 꽤 뜸을 들여 분위기를 조성했다가 시도했는데 채어버렸다. 그때 전세희가 말했다.
“자, 처음부터 말해. 니가 어떻게 접근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 말야.”
“시끄러! 얼굴 뜨거워서 말하기도 싫어!”
“내가 오늘 술 살게.”
그랬다가 전세희가 말을 바꿨다.
“아니 오늘 저녁에 만나자. 카프리에서.”
그날 저녁, 영등포 시장 뒤쪽의 삼겹살 식당에서 윤성일과 박기춘이 삼겹살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고 있다. 식당 안은 손님으로 가득 찼고 떠들썩했다. 환기가 되지 않아서 매운 연기가 자욱하게 덮여져 있다. 소주잔을 든 박기춘이 윤성일을 보았다.
“두 달 되었냐?”
“뭐가?”
“연락 끊긴지.”
“두 달 반.”
해놓고 윤성일이 제 잔에 술을 채웠다.
“정확하게 76일.”
“시간까지 재지 그래?”
“76일 11시간 반.”
“어휴.”
머리를 저은 박기춘이 한 모금에 소주를 삼키고는 더운숨을 뱉었다.
“이젠 나도 누군지 보고 싶다.”
윤성일이 머리를 돌려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누구를 찾는 것 같은 표정이다. 두 달 만에 퇴원하고 가을 학기에 복학한 것이다. 윤성일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어디서 갑자기 불쑥 나타날 것 같어.”
“집에 찾아가보지 그래?”
박기춘이 묻자 윤성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영의 어머니와 동생이 사는 18평형 아파트 앞까지 세 번이나 갔던 것이다. 그러나 쳐다보기만 하고 돌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대신 기억은 또렷해지는 거야.”
“시발, 시 쓰네.”
“무슨 사정이 있어. 그래서 날 피하는 거다. 그 사정이....”
“결혼을 했던가.”
이제는 박기춘도 마음 놓고 약을 올린다. 윤성일이 놔두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민해졌던 윤성일의 반응이 무디어진 이유도 있다. 윤성일이 말을 이었다.
“외삼촌이 자살한 것하고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해.”
“지기미.”
다시 박기춘이 투덜거렸다.
“올 여름 날씨가 더웠던 것 하고도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집하고는 연락을 하고 있을 거야.”
그러자 박기춘이 길게 숨을 뱉었다. 그동안 용역회사를 시켜 김가영의 집안을 샅샅이 조사시킨 것이다. 김가영의 외삼촌 정재호가 고시원에서 자살한 것도, 그 이유가 치킨집이 망했기 때문이라는 것까지도 안다.
“돈 벌러 간 거야.”
불쑥 박기춘이 말했을 때 윤성일이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박기춘을 향한 눈동자의 초점이 멀다. 박기춘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리면서 말을 이었다.
“정황상 그 이유밖에 없어. 용역회사 놈들도 그런 의견이야.”
그것을 윤성일도 들었다. 수백 가지의 경우를 예상했는데 그것이 가장 유력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김가영의 외삼촌 정재호가 아파트를 담보로 6천만 원을 빌렸다가 자살한 것도 알아내었다. 그 6천만 원을 누가 만들었는가? 그 상환 시점과 김가영의 실종이 겹치고 있다. 모두의 머릿속에는 거의 똑같은 생각이 맴돌고 있는 것이다. 김가영이 그 6천만 원과 관계가 있다. 이윽고 윤성일이 말했다.
“곧 밝혀지겠지. 영원히 숨을 수는 없어.”
“그럼,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다시 술잔을 쥔 박기춘이 말을 이었다.
“핸드폰에 위치 추적까지 되는 세상이야. 통화내역을 알아볼 수도 있고, 경찰에 신고만 하면 몇 시간도 안 걸린다구.”
그렇다. 그러니까 더 화가 나고 더 기운이 떨어진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 오늘 장회장님 따라 나갈 수 있겠니?”
이성희가 부드럽게 물은 순간 김가영은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시선을 준 채 놀란 표정은 짓지 않았다. 밤 10시 반, 방에서 장기태의 시중을 들다가 이성희가 대기실로 불러낸 것이다. 대기실에는 둘뿐이어서 조용하다. 그때 이성희가 말을 이었다.
“네가 싫으면 안가도 돼. 장회장도 마음 상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고.”
그러나 그 말을 누가 믿겠는가? 오늘까지 장회장은 세 번째 찾아왔다. 한 달 동안 세 번이다.백사장은 두 번, 천회장도 두 번이지만 장회장의 파트너로 굳어지는 중이었다. 그것은 팁 값의 다소(多少)에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백사장, 천회장은 각각 머리 올린 값으로 5백, 3백을 내놓았고 그 다음부터는 1백씩 주었지만 장기태는 1천에 5백씩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때 이성희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오늘밤 나가면 3천 받을 거다. 그럼 그중에서 2천은 내가 빌려준 돈 갚아주면 좋겠는데.”
그러더니 곧 머리를 저었다.
“아니, 싫으면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 있을 때 말야. 나 앞으로 이런 이야기 안할게.”
“갈게요.”
저도 모르게 김가영의 입 밖으로 그렇게 말이 나왔고 그 다음 순간부터는 술술 이어졌다.
“위선 떨지 않겠어요. 이차 예상하지 않고 여기 왔다면 거짓말이죠. 나가겠습니다.”
“고맙다.”
이성희가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네 인생은 앞으로 전혀 달라질 거다. 지금부터 말이다.”
헬스장 안으로 들어온 윤정수가 런닝 머신에 올라가있는 윤성일을 보았다. 윤성일도 앞쪽 거울에 비친 윤정수의 시선을 받고는 인사했다.
“아버지, 오셨어요.”
“어.”
딱 한마디 대답에 얼굴도 무표정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분위기가 된다. 다른 때는 입도 벙긋 안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지난날 이야기다. 윤성일은 다시 시속 6키로의 속력으로 뛰기 시작했고 윤정수는 자전거 위에 오른다. 저택 별채의 헬스장에는 어지간한 헬스기구가 다 있다. 50평 규모의 면적에 10여 가지의 헬스기구가 벌려져있고 옆쪽에는 샤워장과 탈의실이 붙여진 것이다. 오전 6시 반이다. 헬스장 안에는 트랩을 달리는 윤성일의 발자국 소리가 울리고 있다. 윤정수가 밟는 자전거 페달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때 윤정수가 윤성일의 옆모습에 대고 말했다.
“네 형들이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윤성일은 뛰기만 했고 윤정수의 말이 이어졌다.
“나도 겪어 보았지만 돈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야. 어지간한 인격은 절제를 못한다.”
“....”
“지금 네 형들이 그 꼴이다. 내가 너한테 뭘 어떻게 해줄까 사람까지 고용해서 알아보는 모양이고 저희들끼리도 서로 견제하는 것 같구나.”
머리를 돌린 윤성일은 윤정수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 형들한테 나눠 주세요.”
윤성일이 뛰면서 말했다.
“전 돈에 관심 없어요. 아버지.”
“그것이 내가 너한테 남겨주려는 이유다. 이놈아.”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윤정수가 말을 잇는다.
“돈 욕심이 있는 놈은 큰 돈을 운용하지 못해. 넌 오늘부터 매일 오후5시에서 7시까지 나하고 같이 일해야 된다. 박전무가 알려줄게다.”
그리고는 윤정수가 페달에서 발을 떼었다. 얼굴이 땀으로 덮여져 있다.
눈을 뜬 김가영은 소스라치면서 온몸을 웅크렸다. 자신이 알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 기척을 느꼈는지 어깨에 걸쳐졌던 팔에 힘이 실려지면서 몸이 끌려갔다. 장기태다. 그 순간 어젯밤 장기태와 엉켜졌던 장면이 머리를 스치면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깨었냐?”
곧 귀에 장기태의 목소리가 울렸다. 장기태도 알몸이어서 이제 둘의 몸은 빈틈없이 붙여져 있다. 하복부에 어느새 장기태의 뜨거운 기둥이 닿았고 귀에 거칠어진 숨결이 부딪쳤다.
“아침 7시도 안 되었다. 한 번 더 안아야겠다.”
김가영의 귀에 대고 말한 장기태가 몸 위로 오른다. 창밖은 환하다. 그러나 조용하다. 이곳은 장기태의 청평 별장이다. 이층 침실에서 어젯밤 청평 호수가 내려다 보였었다.
“아아.”
갑자기 장기태의 낭심이 몸 안에 들어왔으므로 김가영은 신음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뻗어 장기태의 어깨를 움켜쥐었고 두 다리로 장기태의 하반신을 감았다.
“아아아아.”
다시 탄성을 뱉은 김가영이 허리를 흔들었다. 뜨거워진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것이다. 이제 김가영은 몰두했다. 몸에 맡긴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첫댓글 즐감요
감사합니다
오늘도 기분좋은 아침을 맞게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굿,,즐감,,,
잘 읽고 갑니다^^
^^
즐감요~
감사히 잘봤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
늘 감사합니다.
즐감 하고 감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