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마다 안양천으로 산책하러 나가는데 어느 한 곳에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1살짜리 반려견을 잃어버렸는데 찾아주면 큰 사례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안양천 변 행사장에 말티즈 잡견을 데리고 왔다가 잃어버렸단다.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는다는 내용을 A4 용지에 복사해 여기저기 붙이는 것은 여러 차례 보았어도, 그렇게 대형 플래카드를 내거는 것은 처음 보았다.
오죽 속이 탔으면 그렇게까지 하나 싶어 부디 그 강아지가 되돌아오기를 빌었다. 오래전인 20대 시절 나도 케리라는 애완견을 잃어버리고 몇 날을 울먹였던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개장수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남의 개를 훔쳐 가던 시절이었다. 어찌 그런 해괴한 짓들이 성행했었는지.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개를 방안에서 기른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내가 중년일 때는 강아지를 키우며 그의 치료비로 적지 않은 돈을 쓰면서 남들이 알까 봐 쉬쉬하기도 했었다. 헐벗은 이웃에게는 인색하면서 짐승인 강아지에게 돈을 쓴다는 게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개나 고양이가 우리와 형태가 다를 뿐이지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아프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으레 병원에 데리고 가 치료를 받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강아지를 가족의 일원으로 여기다 보니 걱정도 그만큼 비례하는 게 사실이다. 얼마 전에 우리 강아지 용이에게 호르몬 계통의 쿠싱이라는 병이 나타났다고 하여 약 처방을 받았다. 10살 된 용이가 별다른 일이 없으면 몇 년 후에는 내 앞에서 무지개다리를 건널 게 뻔하다. 이렇게 용이와 이별할 것을 생각하면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용이를 쓰다듬으며 부디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슬픔과 비탄, 고통과 근심, 절망은 사랑하는 것에서 생겨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사람을 포함한 어떤 대상에든 애착을 두지 말라고 하신다. 형성된 것은 무엇이든 사라지게 마련이므로 그냥 지긋이 응시하란다. 다시 말해, 6근(眼耳鼻舌身意)의 대상인 6경(色聲香味觸法)을 쫓다 보면 온갖 괴로움을 겪게 마련이라며 정신을 바짝 차려 희노애락에 빠지지 말리고 하신다.
하지만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 한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모든 감각기관은 좋은 것을 추구하고자 난리이기 때문에 여간 절제력을 갖추지 않으면 휘말리고 만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 강아지 주인도 주인을 잃은 생명체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그렇게 찾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잃어버린 강아지에게 애착하는 바람에 그렇게 절절한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랑이지 싶다. 그게 뭐라고 그것에 걸려들기만 하면 그토록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지….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이중적으로 되고 만다. 좋은 동시에 그 끝이 어떨지 두려워지는 것이다.
플래카드를 보고 다시금 온갖 상념에 사로 잡혀본다. 두렵다고 삭막하게 살 수도 없고, 마냥 사랑하는 기쁨에 넋을 잃었다가는 호되게 패대기 당할 것 같고. 그래서 오늘도 외줄 타는 심정으로 조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