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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목요일 (백) 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은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특히 오늘은 전례력에서 별도로 기념하지 않는 성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는 날이기도 하다.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된 이 축일은, 609년 보니파시오 4세 교황 때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지냈다. 5월 13일에 지내던 이 축일은 8세기 중엽 오늘날의 11월 1일로 변경되면서, 성인들과 함께 순교자들까지 기억하도록 하였다. 영국에서는 중세 때부터 이날을 큰 축제일로 지냈고, 전날에는 ‘할로윈’(Halloween)이라는 전야제까지 가졌다. 오늘날 할로윈은 미국의 대표적인 어린이 축제일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 전례
말씀의 초대
제1독서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화답송 시편 24(23),1-2.3-4ㄴ.5-6(◎ 6 참조)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복음 환호송 마태 11,28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감사송 <우리의 어머니인 예루살렘의 영광>
영성체송 마태 5,8-10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초등학교 1학년생한테 숙제를 내줄 때는 선생님이 공책에 번호를 붙여가며 적어주지만, 대학생쯤 되면 아예 숙제란 것도 없다. 그러나 좋은 평점을 받아서 취직을 잘 하려면 알아서 공부해야 하는 더 무거운 책임감이 주어진다. 김광태 신부(독일 프랑크푸르트 교포사목)
11월 1(목요일)은 많은 성당에서 성시간을 거행합니다. 저녁 미사후 성시간을 거행하니 참석하여 한 시간 동안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예수님을 위로합시다. 이 날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본 후 영성체를 하고 성시간에 참여하면 특별한 은총(전대사)을 받습니다. 지난 토요일이었습니다. 고해성사를 위해 미사 전 30분인 6시 30분쯤 고해소를 향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중학생 2명이 미사를 안 하고 집으로 가려는 것을 볼 수가 있었지요. 저는 이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딱 걸렸어~~~ 미사 안 하고 어디를 가려고 해?”
“신부님, 집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죄송해요~~~”
“아니 미사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는데?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데?”
“무한도전 봐야 해요.”
무한도전이란 텔레비전에서 하는 오락 프로그램이지요. 그런데 이 오락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 미사를 땡땡이 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물어보았지요.
“미사가 중요해? 아니면 무한도전이 중요해?”
아이들은 ‘무한도전’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고해소에 들어가서 이 학생들과의 대화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떻게 무한도전이 예수님보다도 더 중요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도 이 아이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고 명령하셨던 사랑의 길과 물질과 명예가 존중시되는 세속의 길 사이에 서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 선택의 순간에서 많은 이들이 세속의 길로 나아가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습과 앞서 말씀드렸던 중학생들의 ‘무한도전’ 선택이 무엇이 다를까요? 주님을 선택하지 않는 똑 같은 모습이고, 이 모습이 결코 주님께 좋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고자 다짐하는 날인 오늘, 성인들은 과연 어떻게 사셨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은 결코 세속의 길로 걸어가시지 않지요. 그보다는 주님께서 제시하고 명령했던 사랑의 길로만 가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았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주지요.
“행복하여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사람. 이런 사람이 행복하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들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지요. 가난하고, 슬퍼하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받을 상을 언급함으로 인해서 이 세상 안에서의 짧은 삶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지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은 많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이제는 주님을 선택하면 안 될까요?
선택의 순간에서 주님을 선택합시다.
비판에 임하는 자세(‘좋은생각’ 중에서)
19세기 노르웨이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이 자자했던 올레 불.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고, 올레가 바이올린을 켜기라도 하면 악기를 바닥에 내동이치기까지 했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올레는 바이올린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자 그는 낮에는 작곡을 하여 학비를 벌고, 밤에는 창가에 서서 달빛을 군중 삼아 바이올린을 켰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던 한 음악 평론가가 우연히 올레의 연주를 듣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인해 올레는 무대에 서게 됐고, 점차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루는 신문을 읽던 그의 눈에 혹평 기사가 들어왔다.
“올레는 훈련되지 않은 음악가이다. 그는 거친 다이아몬드에 불과하다.”
그간 칭찬만 들었던 올레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한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자신의 연주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올레는 신문사를 찾아가 혹평 기사를 쓴 기자에게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물었고, 기자의 답변을 귀담아 들었다. 그날 이후 올레는 모든 콘서트 일정을 취소한 뒤 유능한 바이올린 선생님을 모시고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피나는 훈련을 했다.
6개월 뒤 그가 마침내 콘서트를 했을 때 관중들은 한층 성숙해진 올레의 연주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비판에 동요된 나머지 절망에 빠져 극복할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성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올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인(聖人)이 되는 비결>
성인(聖人) 하면 우선 드는 느낌이 무엇입니까? 저 같은 경우 일단 거리감부터 느껴집니다. 나와는 전혀 별개의 영역이나 세계에서 살아가신 분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달할 수 없는 특별하고 비범한 인물들. 성인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또 어떤 단어들입니까? 기도, 침묵, 관상, 탈혼, 고행, 극기, 오상, 단식, 거룩함, 엄숙함, 진지함, 기적, 치유, 제7궁방... 책을 많이 읽는 편이지만 제 개인적으로 손이 별로 가지 않는 책들이 성인전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도서관에 꽂혀있는 성인전들은 대체로 빛이 바래고 책장을 넘기면 케케묵은 먼지가 날립니다. 그러나 최근 시성된 성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성인품에 오르는 일은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르면 성인의 길은 누구에게나 다 활짝 열려있습니다. 성성(聖性)은 우리에게도 도달 가능한 보편적인 길이기에 어찌 보면 부족한 우리 모두도 다 시성시복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예비 성인들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성인들이 지닌 특성이 한 가지 있는데 그 특성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 특성은 다름 아닌 살아있을 때부터 성성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승에서의 삶이 전혀 아니었던 사람, ‘이건 아닌데’ 하는 사람이 죽어서 성인품에 오를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돈보스코 같은 분, 마더 데레사 수녀님 같은 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같은 분,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성성(聖性)을 확인했습니다. 살아계실 때부터 사람들은 그분들을 성인(聖人) 대하듯이 대했습니다. 성인(聖人)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은 죽고 나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성인(聖人)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저 분은 정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네, 성가정이 따로 없네, 날개만 없다뿐이지 천사가 분명해, 혹시 바보 아냐, 이 세상에 살 때부터 이런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성인후보자가 확실합니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저는 확신합니다. 성인이란 우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별세계에서 살다간 유별난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우리보다 한 3분 정도 더 인내한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친절했던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사랑했던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따뜻함을 지녔던 사람들, 우리보다 조금 더 인간미를 풍겼던 사람들, 우리보다 조금 더 영적 생활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성인들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머무는 빛인 사람들, 이제는 어둠의 세력과 결연히 단절하고 떳떳하고 당당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확실한 성인 후보자들입니다. 어렵고도 어려운 길이 성화의 길이지만, 어떻게 보면 조금도 어렵지 않은 길이 성화의 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함을 통해서, 좀 더 기쁘게 살아감을 통해서, 조금만 더 기도함을 통해서, 조금만 더 양보하고 물러섬을 통해서 우리 역시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행복하여라... (마태 5, 1-12)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이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이들! 그들이 위로를 받으리니. 행복하여라, 온유한 이들! 그들이 땅을 차지하리니."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에 따르면, 원죄는 세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 첫째는 우리가 어디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무지함이고, 둘째는 잘못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탐욕이고, 셋째는 비록 행복이 찾아지는 곳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구하지 못하는 나약함이다. 이것이 원죄 이후의 인간의 상태이고 조건이라는 것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아 나서지만 잘못된 곳 즉 탐욕을 쫓아가고 있으며 비록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을 알면서도 우리의 의지가 나약하기 때문에 작심 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주 넘어진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행복을 인간에게 되찾아 주러 오셨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우리가 행복으로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제시하셨고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가를 가르쳐 주셨다. 즉 오늘 복음은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인간에게 행복을 찾아주는 약도로서 행복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행복에로 초대받은 이들이며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예수님 한테 배우는 사람이고 그래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나는 행복한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예수님이 제시하신 행복의 비결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한번 예수님이 제시해주신 행복의 비결을 배우고 그렇게 생활하도록 노력하자. 예수님이 제시해주신 행복의 비결은 즉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여덟 개의 길이 있다. 그 중에 어느 한가지 길만이라도 제대로 간다면 행복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여덟가지 길은 서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첫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이들! 이란 말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자서전과도 같은 말이다. 즉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얼굴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하신 분이시다. 마음이 가난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실 수 있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코전 8,9) 그래서 바오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tu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5-7)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둘째, 슬퍼하는 이들이란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와 똑같이 우리의 죄 때문에 슬퍼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불행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고, 인간이 지은 죄를 보시고 우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슬퍼해야 한다. 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아무런 슬픔이 없는 사람이야 말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다.
셋째, 온유한 이들이란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온유한 그분의 모습이 하느님의 아드님의 모습이며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온유한 마음만이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은총으로 온유한 마음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가장 큰 불행은 완고한 마음이다.
넷째,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만이 거짓과 불의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것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다. 하느님의 것에 대한 주림과 목마른 사람만이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 예수님이 인간에 대한 사랑의 주림과 목마름 때문에 인간을 찾아 나섰듯이. 다섯째, 자비로운 이들이란 하느님의 공동체에서 사는 이들의 모습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고 말씀하신 것 같이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의 공동체이다. 여섯째, 마음이 깨끗한 이들이란 현실의 진리를 밝히신다. 즉 이 세상 종말에 가면 현재의 것들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마지막 날에 승리하는 자는 마음이 깨끗한 이들이다. 그들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그 도성으로 들어 가지 몫하고 흉칙한 짓과 거짓을 일삼은 자도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도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다만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뿐입니다."(묵시 21, 27)
일곱 번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란 자기 신원에 맞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해야할 일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평화를 가져다 주러 오셨다. 이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는 폭력적인 방법으로가 아닌 사랑의 방법이다. 따라서 사랑으로 평화를 건설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산 위에서 가르쳐주신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요약한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떤 생활이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진복팔단은 병들어 있는 우리의 영혼을 치유시켜주는 약이며 거짓과 탐욕과 불의로 병든 우리의 마음을 낫게 해주는 진리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이 행복관을 생활하는만큼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 자신이 될 것이며 잃어버렸던 우리의 참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행복한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러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행복의 길은 행복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일이다.
-유광수신부-
가톨릭성가 294번/ 모든 성인 성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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