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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성 찾아가는 법
위치 요녕성 영구시산하 현급 개주시 청석령향 고려성촌
조식 후 목적지인 건안성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금천정식당 사장님께서 개주에 사는 분이 바이췐에서 택시를 운행하고 있다고 일러 주었다. 그 운전기사와 70위안에 건안성 목적지까지 가기로 했다. 건안성 관람 후 안시성으로 이동하려고 2차 목적지까지 소요교통비를 상담하였으나 30위안의 차이가 났다. 우리가 제시한 가격은 220위안 기사는 250위안이다. 안시성 일정은 건안성 관람 후 다시 잡기로 했다.
원래 개인적인 일정은 바이췐 버스터미널에서 대석개행 버스(11위안)를 타고 청석관보에서 하차하여 건안성으로 입성하려고 계획을 잡았다. 건안성을 찾아가는 배낭여행객들에게 정확한 대중교통 정보를 확보하고자 했는데 일행이 생겨서 택시로 이동을 바꿨다.
약 30~40분간 이동하니 청석령 못미쳐서 청석관보가 나왔다. 청석관보를 앞에 두고 고령성촌 푯말이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건안성에 입성하게 되는 것이다.
건안성에서 1km 들어가자 본 성터가 나왔다. 건안성은 예상했던 것 보다 상당히 커 보였다. 허물어진 토성으로 성의 경계는 자세히 살펴 볼 수는 없었으나 고구려성의 지형적 특징은 자세히 나타나 있다. 건안성은 안시성과는 달리 하나의 산등성이가 성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산등성이가 중첩되어 하나의 말발굽처럼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성의 둘레는 약 5km이다. 내가 본 천리장성 중에서는 가장 큰 느낌이 들었다. 완벽한 성곽을 가졌다기에는 뭔가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성 정상에 석성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는데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확인하지 못하고 우물정만 확인하였다. 특히 성 중앙에 작은 산이 있었는데, 성 전체를 조망하고 지휘했던 점장대 있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시간상 성을 자세히 살펴 볼 수 없었다. 이번 방문은 사전예비 조사의 성격이 강해 성의 위치와 구조 등 모양새 파악에 중점을 두었다. 추후에 자세한 성 탐방을 할 예정이다.
시간은 어느덧 정오 12시에 다가서고 있었다. 처음 성을 들어 올 때 우물정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동네 노인 분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분이 우물정까지 안내해 준 것이다. 난 고마움의 표시로 중국돈 10위안과 한국담배 1갑을 드리려 했지만 한사코 안 받는다. 그런데 통역을 맡아 주셨던 우사장님이 택시운전사와 대화하다 열을 받은 채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택시요금이 70위안인데, 100위안을 요구한다고 한다. 노인네의 안내비용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운전기사와 노인 둘이서 작당하고 성 안내비용을 선수 친 것이다. 30위안 안에는 운전기사와 노인분이 지분을 얼마씩 나눠가졌는 지는 모르겠지만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일행이 초행이고 성의 지리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의논 한번 하지 않고, 자신들의 가이드 비용을 먼저 선수 친 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에 건안성에서 장기체류할 예정이어서 노인분과 계속 마주쳐야 하기 때문에 불상사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서둘러 건안성을 떠났다. 사흘 후 바이췐으로 돌아가는 중 건안성을 방문하였는데 이와 비슷한 일을 또 경험하게 되었다. 1300년 만에 한국사람과 중국사람과의 싸움이 작지만 건안성에서 재연되었다. 뒤에서 다뤄보기로 하겠다. 어쨌건 건안성은 이번 여행의 백미였다. 괘씸하지만 시간이 없어 이 운전사를 계속 쓸 수밖에 없었다. 난 개인적으로 안시성까지 택시비용으로 총 220위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택시기사는 노인 분에게 30위안을 주었기 때문에 280위안을 지불해야지만 혜성시까지 갈 수 있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도 안시성은 못가고 혜성시 터미널까지만, 이놈들 이럴 줄 알았다. 이래서 최종 목적지까지 계약을 안했던 것이다. 더 이상 이 운전기사랑 실랑이를 하기 싫어서 개주시 버스터미널까지 총 100위안에 가자고 했다. 아쉬웠던지 250위안에 안시성까지 동행하자고 한다. 더 이상 이 운전사랑은 동행할 믿음이 형성되지 않았다. 고민 고민 하다가 버스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건안성 개요
건안성은 631년(영류왕 14)에 세운 고구려 천리장성의 거점성이다. 건안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모양새가 아주 불규칙하다. 성벽은 토축, 토석혼축, 석축 공법을 지형에 맞추어 다양하게 쌓았다. 성문은 모두 5개인데(수구문까지 합치면 6개) 서벽에 수구문까지 헤아리면 아울러 4개가 집중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지형이 낮고 바다 쪽에서 쳐들어오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동쪽 골짜기를 막기 위해 동문이 있고 남벽 동쪽 끝에 작은 문이 하나 있다. 4개는 모두 토축인데 남문만 돌로 쌓았다. 서문도 동문처럼 양쪽 산정 사이를 넘어가는 고갯길인데 성벽이 아주 잘 남아 있다. 동문과 서문이 모두 토성이고 다양한 옹성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성은 고구려 건안성이라는데 학자들이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건안성은 안시성과 비사성 사이에서 가장 큰 산성으로 요동지방에서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대륙에 남은 고구려"(서길수 지음) 중심으로~>
KBS1 HD역사스페셜 세계전쟁사의 수수께기 수당전쟁 2부 중에서.....
건안성 축성의 의의
건안성은 천리장성에 축조 전에 세워진 거점성인 신성, 요동성, 안시성 들과 달리 건안성은 천리장성 축조와 함께 세워진 핵심적인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천리장성의 근간을 이루는 신성, 요동성, 안시성은 천리장성 축조 때 개축되고 보강되었다. 그리고 그 거점성 배후 성들을 축조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반면 건안성은 수나라와의 전쟁이후 다양해진 적들의 고구려에 대한 여러 공격루트를 방어할 수단으로 세워진 성이다. 특히 당나라와의 전쟁 때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건안성은 다른 천리산성들 보다. 주요한 기능을 한 가지 더 가졌다. 적군의 수륙병진을 차단하기 위해 세워진 성이기 때문이다.
당나라군은 고-수 전쟁의 여러 가지 교훈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전술을 세운다. 그 중에 가장 핵심적인 사항인 군량 보급에 있었다. 당나라군의 침입 경로로도 확인되고 유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수-당 두 나라는 원거리 장정에 대한 군량 보급 문제로 상당한 애를 먹었다. 수나라군의 식량 보급은 고구려의 청야작전, 고구려 육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게릴라 전술, 고구려 수군의 왕성한 해양활동과 거센 반격으로 군량미 보급은 원활치 못하였다. 수나라 11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진군하는데 있어서 수나라군은 기동성이 현저히 약화되어 있었고, 전력을 극대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기동성이 떨어진 수나라군을 상대로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에게 대항할 여러 전술과 전법들을 효과적으로 대응해 나갔을 것이다. 결국 살수에서 수나라군 주력부대는 을지문덕의 고구려군에게 몰살당한다. 수나라군은 어느 세계전쟁사에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대패하고 고구려에서 철수한다. 고-수 2차 전쟁은 당태종 이세민에게도 많은 교훈과 전술을 생각하게 하였다. 역시 그에게도 화두는 군량미 보급이었다. 이세민은 앞으로 발생할 고-당 전쟁에서 군량미 보급은 수군에 의존하려 했을 것이다.
(1)고-당 전쟁에서 이세민이 택한 공격은 수나라군이 이동하였던 기존의 공격루트인 회원진 주변을 따라 진군하였지만 이세민은 본진인 친정군과는 별도로 이세적의 선봉대로 하여금 통정진 쪽으로 먼저 기습 공격한다. 당황한 고구려군은 현도성을 잃고 신성에서 대치한다. 이세적 군대의 첫 번째 임무는 고구려 천리장성중 가장 핵심적인 거점성 신성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당나라군의 거점을 확보하고 군량미 확보를 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성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실패한다. 두 번째 임무는 요택을 건너오는 이세민 본진의 안전한 도하 진로를 확보해 주는 것이다. 고구려군은 이세적과 대치하다, 당태종 이세민을 요택에서 저지할 생각도 못했다. 고구려군은 당나라군이 도하한 직후 신성과 국내성에서 4만명을 급히 파견하여 요동성을 지원 나온다.
(2)이세민이 세 번째 침공 루트는 장검과 이민족 병사를 중심으로 한 1만 이상의 병사로 건안성을 공략하였다. 당나라군은 645년4월5일 신성과 함께 건안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일진일퇴의 공방전에 들어갔지만.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세민은 1차 고-당전쟁의 아쉬움을 표현한 3대 전투<신성, 주필산(안시성), 건안성>에 건안성 전투를 꼽고 있다. 이세민이 뽑은 3대 격전은 당나라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은 전투였다. 장검은 이후 안시성-주필산 전투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김용만선생님은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에서 장검의 부대가 이후 전혀 거론되지 않는 걸로 보아 고구려군과 싸움에서 와해 된 걸로 보고 있다. 이후 당태종 이세민은 건안성 공략을 지속적으로 감행한다. 비사성을 점령하고 있는 평양도행군을 불러들였다. 자치통감에 이들이 7월23일까지 건안성 주변에서 활동하였다고 전한다.
이세민의 주 공격루트는 통정진의 이세적, 요택의 이세민, 건안성의 장검. 해양방어성인 비사성에 대한 장량의 공략이었다. 건안성을 빼곤 고-수 전쟁 때 수나라와의 진군행로와 대치가 일맥상통한다. 당시 당대의 장군이자 전략가였던 영류왕, 연개소문이 건안성 축조에 왜 심혈을 기울였을까. 중원의 패자이자 당나라 최고의 전략가였던 당태종 이세민, 장검은 왜 건안성 공략에 집착하였을까? 답은 건안성을 통한 당나라군 군량미 보급에 절대적인 거점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전쟁이후 당태종 이세민은 신성, 건안성, 주필산(안시성) 전투를 3대 전투라고 회고하며 아쉬워했다. 당나라군의 최대 성과였던 요동성 전투보다, 3대 전투를 회고하는 것은 실패와 오산에 따른 아쉬움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부터 건안성이 가지는 특징과 건안성 전투의 이의를 살펴보고, 1차 고-당 전쟁에서 동원된 고-당 양국의 군인 수를 병기해 보자. 자세히 기록을 살펴보면 개인적으로 당나라에 의한 오기를 발견 할 수 있다. 이 기록에 대해 의문을 갖고자 한다.
1차 고-당 전쟁 당나라가 파견한 병력은 얼마인가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김용만지음) 중심으로~>
1차 고-당 전쟁때 당나라군은 10만(육군 6만, 수군 4만) 정예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고 하는데 <신당서>와 <책부원귀>에는 육군 10만 수군 7만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 인구는 중국 사서 기록으로 69만호를 기준으로 350만명의 주장이 있는 반면 김용만 선생님이 밝힌 500만명 설도 있다. 고구려 관리하에 있던 말갈족을 합하면 최소 400만명 이상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고구려군은 동원할 수 있는 최대 군은 약 40~50만명으로 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중국 고서에 기록된 당나라군 출병 병력은 최소 10만명에서 최고 17만명이었다. 평균 1차 고-당 전쟁에 참여한 당나라 군대는 중국측 기록으로는 15만명이고 우리는 어림잡아 30만명으로 추정한다. 고구려군 30만명 이상이 수성하는데. 아무리 정예군으로 출병하였다고 해도 육군10만명으로 고구려를 공략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도출된다. 어찌하여 수성하는 고구려군 숫자 보다 성을 공략하는 적의 숫자가 적다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김용만 선생님은 ‘고구려의 발견’과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에서 당나라군의 정확한 출병수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다만 세군데서 당나라군의 규모를 전한다. 주필산 전투에 참가한 이세민의 친위대와 이세적의 선봉대를 합친 당나라군대는 최소한 30만명(‘다시 쓰는 연개소문전’ p155)일 것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중국 고서<신당서>와 <책부원귀>(‘다시 쓰는 연개소문전’ p180)기록과 당나라군의 군량 수급을 예로들어(‘다시 쓰는 연개소문전’ p191) 15만명과 30만명의 군량미 소요기일을 통해 당나라군대 병력을 추정하였다.
당태종 이세민은 안시성 싸움이 장기화되자 오골성으로 진격하려 했다. 장손무기는 신성과 건안성에 10만의 고구려군이 있다고 했다. 당나라군은 안시성 전투 직전 주필산에서 15만명의 고구려 정규군과 대치하였다. <삼국사기>는 주필산전투에서 고구려군이 패하여 3만명의 병사를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필산의 대치선은 고구려의 패전으로 무너지지만. 12만의 고구려군은 신성, 건안성과 주변의 배후성과 오골성으로 군을 재배치 하였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림잡아 적게 보아도 약 20만명의 고구려군이 신성, 안시성, 건안성과 주변의 배후성에서 주둔하고 있다는 가설인데. 고구려군이 오합지졸이고 당나군이 정예군이라 한다 치더라도 고구려의 기상으로 본다면 20만명의 고구려군이 10만명의 당나라군대를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숫적 우세를 앞세워 공격해 들어갔을 것이다.
“170회 역사스페셜 안시성싸움 고구려는 당을 어떻게 이겼나”란 프로에서 1차 고-당 전쟁에 동원된 당나라군의 병력은 이세적 선봉대 6만명, 당태종 이세민 친위대 20만명, 수군 4만명이라고 하였다. 총 병력수는 30만명으로 보고 있다. 당태종 이세민은 1차 고-당전쟁후 피폐해진 고구려를 재침하기 위해 장손무기와 30만명 징병을 거론했다. 당나라는 고구려 멸망후 고구려 부흥운동을 진압하고자 당나라군 10만명 이상을 요동에 파병하였다. 당나라 정사 <구당서>나 <신당서>에는 이세적의 선봉대가 6만명, 장량의 수군이 4만명이라고 밝혔는데. 당태종 이세민의 친청군에 대한 명확한 숫자는 명기하기 않았다. 단지 전쟁후 10만의 군사가 출정하여 1000명 정도만 못돌아왔다고 적고있다. 육군 10만명중 이세적 선봉대 6만명, 장량 군대가 최소한 1만명, 그렇다면 이세적의 친정군은 3만명이다. 중국 황제가 직접 전쟁터로 본진을 이끌고 친정을 나서는데 호위무사가 3만명이라는 것은 뭔가 사서 기록이 맞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중국 사서에 기록으로 유추한다면 당나라군 출정 병력이 의도적으로 축소되었거나, 고구려군 방어군이 의도적으로 확대 기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기록이 두가지가 있다,
첫째 당나라군이 첫 출정할 때 이세적과 도종의 선봉대 6만명이었다. 당태종 이세민이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고 요수-요동(요평)을 건널때 이세적과 도종에게 보병-기병 4만을 거느려 후군을 서도록 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최소한 이세적의 선봉대가 요수-요동(요평) 건널때 선봉대는 최소한 2만명의 전사자가 생겼다고 추론할 수 있다.
둘째 고연수-고혜진이 주필산 전투에서 패하여 당나라군에 잡혔을 때 당태종에게 고하는 모습을 <삼국사기>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저희들이 이미 대국에 몸을 바친 이상 자기의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사오며 천자께서 빨리 큰공을 이루어 우리들이 처자와 만나게 하여주기를 원합니다. 안시 사람들이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여 사람마다 싸우고 있기 때문에 졸연히 함락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고구려의 10여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황제의 깃발을 바로 보기만 하고 사기가 꺾이고 허물어졌으며, 나라 사람들의 간담이 서늘하였던 것입니다. 오골성의 욕살은 늙고 노둔하여 굳게 수비를 못하고 있으니 군사를 옮겨야만 한다면 아침에 가서 저녁에 이길 것이요 기타 길에 닥치는 작은 성들은 반드시 제바람에 달아나고 허물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된 뒤에 그의 군기와 군량을 거두고 북을 올리면서 진군하여 앞으로 나아가면 평양은 반드시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다."
강하 도종도 말하기를 "고구려가 전 국력을 기울여 천자의 군대를 방어하고 있으니 평양의 수비는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저에게 정예한 군사 5천을 빌려주어 그의 본거지를 정복하게 되면 수십만의 군사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 시킬 수 있습니다."
정리해 본다면 당나군대는 수만이요, 고구려군은 수십만이다. 수십만의 고구려군이 이세민의 친정군과 대치하기도 힘들었다는 것인데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대치군보다 최소한 동등한 수의 군사였거나 월등히 많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러 정황으로 봐 개인적으로 당나라 30만명 설에 공감한다. 신채호선생님도 <조선상고사>에서 출정한 당나라군은 수십만명이라고 전한다. 결론적으로 중국측 사료와 당시 상황을 추정해 본다면, 이세적 선봉대 6만병, 이세민 친위대 15만~20만명, 영주도덕 장량 1~2만명, 장량 수군 4~7만명이다. 전후 당나라로 귀환한 당나라군은 17만명이다. 중국 고서 <자치통감> <신당서> <책부원귀>에서 말馬 10필중 7~8필이 죽었고 총 전사자는 2000명 안쪽이라고 한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당태종 이세민은 안시성 전투 패전과 전선의 전황(특히 군량과 혹한)이 갑자기 악화되자 급기야 요택을 통하여 도주한다. 당나라군이 주요 전투에서 잃은 병력은 둘째 치더라도 요택으로 탈출하면서 초겨을 요동의 혹한과 요택의 늪지대, 떨어져 가는 군량으로 인한 기아 등으로 많은 병사를 잃었다. 수양제와 같은 전처를 밞으면서 요택을 탈출하였을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부연하자면 당나라군 30만명이 출병해서 17만명이 살아 돌아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200리 요택에서는 풀을 베다 길을 메우고 수레로 다리를 삼고 건넜다. 바람과 눈보라에 군사들이 젖어 죽는 자가 많았다.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후회했다. “당태종은 위징이 만일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 원정을 하지 않게 했을 것이다. 위징은 직언과 극간을 서슴지 않던 시중 위징을 말한다. 당태종은 가까스로 유성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죽은 군사들의 해골을 모아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태종이 가슴 아프게 울자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는 병사가 없었다.”
이를 전해들은 중국인들은 전쟁에서 자식이 죽었으나 황제가 자식을 위해 울어 주었음에 감격했다고 한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망하고 말았으나 당태종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나라만은 보존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공으로 남았다.
크리스 피어슨(Chris Peers) 인터뷰 - 영국의 역사학자, 중국전쟁사 담당
중국의 전통은 황제의 치세에 대해 당대 대신들이 실록의 형태로 기록하고 황제의 열람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당태종은 자신에 대해 쓴 기록을 볼 것을 고집했다. 부분적으로는 자신을 보다 훌륭한 인물로 묘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뛰어난 통치자였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나은 인물로 그렸다. 고구려와의 전쟁도 그가 역사를 고쳐 쓴 예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KBS1 HD역사스페셜 세계전쟁사의 수수께기 수당전쟁 2부 중에서.....
첫댓글 고구려 역사를 재인식 시켜준 김용만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