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읽기
이들 두 사람의 이야기에 얽힌 공통점은 무엇을까.(두 사람은 프루스트와 조이스를 말한다.) 결국 둘 모두 공교롭게도 '서로의 작품을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는 1922년 2월 2일에 파리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프루스트는 결국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1922년 11월 18일에 영면했다.) 당시 두 사람은 모두 파리에서 살았고, 그들이 발표한 걸작들이 당연히 온통 '파리의 화제'였을 터인데도 왜 그들은 상대방의 걸작을 읽지 않았을까?
이야기를 다시 오늘날로 되돌려 보자.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 이들 두 작가들을 두고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공통점은 어떤 게 있을까. 문학 고전에 얼마쯤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세 가지 정도는 쉽게 떠올릴 수 있으리라.
첫째, 둘 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소설을 썼다.
둘째, 두 작품 모두 그 어떤 작품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대단한 분량을 지닌
소설이다,
셋째, 두 작품 모두 읽기 힘든 작품이어서 아무에게나 쉽게 읽히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나도 여태껏 두 작가의 걸작들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비로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부터 읽기 시작했다. 과연 익히 알려진 그대로였다. 벼르고 별러서 집어든 책이지만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책이었다. 충고대로, 나는 이 책을 읽기에 앞서『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더블린 사람들』을 먼저 읽었다. 계속하여 『율리시스』를 읽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앞선 두 작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도 난해했다.
읽기가 어려운 이유는
1.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른 서술 방식이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등장인물들의 '의식' 속에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 혹은 '하루 종일 의식을 적시고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아무 데서나 작가가 불쑥불쑥 꺼내 놓기 때문에,
독자들로서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다.
2. 수많은 다른 작품 속에 담긴 내용들에 대한 '인유' 때문에 겪는 난해함이다. 사실 제임스 조이스는 '독자의 평균적인
독서 형편'을 거의 또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니 이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숱한 문학작품들이나 음악
(주로 오페라 또는 민요)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부족한 독자들이 겪을 고충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중될 게 뻔하다.
3. 숱한 언어 유희를 포함한 '언어의 창의적 표현 기법'에 적응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여기엔 물론 원작에 쓰인
다양한 언어 유희를 적당한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번역의 근본적인 한계' 또한 포함된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여전히 독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주제'가 누구에게라도 예외없이 적용할 수 있는 '인생의 온갖 문제들'을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제는 어쩌면 '우리의 놀랍도록 다채로운 삶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싶다.
소설의 외관상의 형식은 어쩌면 극히 단순하다. 주인공인 신문 광고업자 블룸이 1904년 6월 16일 하루(이른바 '블룸스데이') 동안 더블린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겪는 일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뒤따라가는 형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블룸의 하루'가 엄청나게 드라마틱한 것도 아니다. 비록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등장하는 '오뒷세우스의 방황과 귀환이라는 구조를 빌린 형식이지만, 블룸의 일상은 영웅 오뒷세우스처럼 복잡하지 않다.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친구의 장례식에 들렀다가, 사회생활(신문 광고업)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여기저기서 만나고, 주점에 들러 술을 마시기도 하고, 해변에서 산책도 하고, 밤늦게 다시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와 아내가 깰까 봐 살며시 침대로 기어들어가 그 옆에 눕는 것으로 하루는 끝난다. 거기서 이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유명한 마지막 장이 길게 이어지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그건 바로 블룸의 아내 '몰리의 독백'이다. 몰리가 서서히 잠에 빠져들기 전에 그녀의 '의식' 속에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묘사하는 부분은 구두점 하나 없는 단 하나의 문장이다. Yes로 시작하여 Yes로 끝날 때까지 무려 4만 단어가 끝없이 펼쳐진다. 결국 이 방대한 작품을 통해 제임스 조이스가 마음껏 표현하고자 했던 건 '하루하루의 삶 속에 담긴 놀라운 인생의 풍요 그 자체'였다.
작품 속의 두 주인공인 레오폴드 블룸과 시인이 되기를 지망하는 스티븐 너덜러스(『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동일 인물이며 작가 자신의 분신)의 '눈'과 '의식'을 통해 들여다보는 세계는 가히 '요지경'이라 부를 만큼 풍성하지만, 작가가 드러내고자 했던 그런 '삶의 풍요'와 '삶의 다양한 외관과 내면'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독자는 끙끙거리며 애를 쓰는 수밖에 없다.
(의식의 흐름)
모더니즘 작가들이 사실주의적 서술 방식을 파괴하려고 접근한 방법 중의 하나가 ‘의식이 흐름’ 기법이다. 소설에서 의식의 흐름은 등장 인물의 생각, 인식, 감정의 흐름을 나타낸다. 새뮤얼 리처드슨의 서간체 소설 ‘파멜라’ 같은 예전의 작품에도 자기 성찰이 담긴 긴 구절을 발견한다.
20세기에 접어드는 시기의 소설들은 더 멀리 나아갔다. 헨리 제임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는 소재와 소재를 다루는 방식과 관련하여 더 주관적인 관점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소설에서 내적 독백이 처음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에두아르 뒤자르댕이 1887년에 출간한 단편소설 ‘월계수들이 베어져 넘어간다’에서 였다. 조이스가 1903년에 파리의 한 철도역 매점에서 그 책을 한 부 산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스타일은 심리학이 과학으로서 부상한 것과 관련지어져 있는데 실제로 의식의 흐름이라는 용어는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형이다.)가 ‘심리의 원리’라는 책에서 사용했다
의식의 흐름 작품의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큰 작품이 ‘율리시스’이다. 조이스는 등장인물의 마음을 작가의 매개없이 적접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버지니아 울프도 ‘데라웨이 부인(1925)에서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실험했다.
의식적 생각에 거의 무의식적 생각으로 흐르는 내적 심리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종종 은유적인 연상을 따라간다. 그러므로 단어와 문구가 느슨해지기도 한다. 문장을 비문법적 구조로 만들기도 하고, 정관사나 부정관사를 생략하기도 한다.
첫댓글 제임스 조이스도 어렵고, 푸르스트도 어렵습니다. 원본을 읽기로는 공부하는 청년시절이 아니고는 어렵다고 하네요.
제가 올린 요약은 한 번 훑으시면, 문학인으로서 쪼매는 알게 되는 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