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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걸 부정하는 크리스천은 없다. 그러나 자신들이 듣고 싶은 얘기로 각색을 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성령의 증거는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네 교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의 증거 역시,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신학자들의 주장 뒤에 숨어서 무능하고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얘기를 좀 하고 싶다.
감자꽃 - 권태응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위의 시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였으며 시인이었던 권태응 시인이, 창씨개명에 반발해서 지은 시이다. 정겹게도, 우리 영성학교 근처의 충주 탄금대공원에 그의 시비가 있다. 필자가 이 시를 다시 읽어드리는 이유는, 성령의 은사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성령의 사람이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는 1분짜리 영접기도를 하면 성령이 자동적으로 들어오신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나 변화, 능력과 열매가 없다. 그래서 벌거숭이 임금님처럼 홀랑 벗고 다니면서, 자신은 훌륭한 옷을 입고 있다고 대단한 착각에 빠져 살아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교회에서 은사가 사도시대에 모두 끝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 비중은 소수이며,
오히려 많은 성도들은 그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를 일반적인 모든 교회의 문제로 전제하는 것은 교묘한 속임수입니다.
인용한 시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은사의 표적이 자신에게 혹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다면
다 가짜이고 귀신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성령의 은사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성령의 사람이겠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열매로 분별되는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쳐도 그로인하여 결과가 악하다면 그것이 과연 성령의 역사일까요?
무당도 병을 고치고 신부나 중도 치유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입니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위의 구절은 믿음의 증거를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우리네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령의 은사나 능력은 AD1세기에 끝났다는 신학자들의 주장 뒤에 숨어서 옹색한 변명과 자기합리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신약성경은 사도들과 사도들이 직접 가르친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던, 이른바 사도시대에 초대교회의 교인들을 향하여 쓴 책이다. 그런데 그 책의 내용이 당시의 초대교인들에만 한정된 말씀이었다면, 이년 천이 지난 이 시대에 유대인이 아닌 우리가 굳이 읽어야 할 필요가 무엇이 있을까? 우리네 교회지도자이나 신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더 이상 성경책을 읽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들의 버전대로라면,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은 종말이 올지라도 유효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의 말씀과 신학자의 주장중에서, 누구의 말을 더 믿고 있는가?
신학자의 주장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학자의 주장을 반대하는 신목사님이 정답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런 부분이 신목사님의 글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분법적인 오류를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또 위와 같은 견해를 가진 신학자와 목회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문제로 교단간, 목회자간에도 논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한국교회 전반의 문제로 전제하는 오류를 간과하면 글을 분별하지 못하고 속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초대교회 시대가 지난 후에는 성령의 은사와 기적의 역사가 교회 공동체에서 집단적으로 일어난 적은 없었다. 또한 수많은 거짓예언자들과 거짓치유자들과 거짓축사자들이, 우리네 주변에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그런 성령의 은사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성령의 은사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듣고 지키려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거짓예언자와 거짓 은사자들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양들을 유혹하고 해치고 있더라도, 성경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비틀어서 판단하는 죄가 얼마나 큰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말해서 우리네 주변에 거짓 은사자들이 널려있는 이유는, 교회가 악한 영들이 지배하는 좀비들의 정체나 공격을 알아채고 쫓아내는 분별력과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들이 무능하고 무기력한 탓은 하지 않고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고 성경말씀을 비틀어서 가르친다면, 자신들이 미혹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의 표적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고 싶다.
거짓은사자들이 존재를 아시는 군요. 그러므로 성도들은 거짓은사자와 진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해야만 하는 입장입니다.
그 분별은 생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또 함부로 판단하게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성경에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들이라.
너희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되리니,
사람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7장 15절 16절
그들의 열매로 거짓선지자들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열매란 병 고침이나 형통한 삶이 아니라 삶의 모습과 목회의 결과입니다.
신목사님의 삶의 모습과 목회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저는 그 열매를 두 사람 이상으로 보았고, 저와 논쟁중에 신목사님의 반응도 글로 직접 보았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두 사람이 그곳에서 치유나 위안을 받지 못하고,
힘들게 간 그곳에서 상처를 입고 저에게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르는 상태에서 같은 증언을 하는데 제가 그것을 외면하기란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증언일 뿐입니다.
직접적인 것은 신목사님의 반응이었습니다.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권면은 때로 억울하고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앞에 모두가 죄인인 우리는 그런 경우라도 온유하게 받아들이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귀신을 쫓는 증거가 있다고 하시는 분이 그런 온유함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이 치유를 받지 못한 것은 어떤 이유이며,
그들의 신상을 글로 공개하고 가혹하게 비판한 것이 좋은 열매인지 묻고 싶습니다.
위의 구절에서 말하는 ‘표적’이란 단어는 ‘세메이아’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이며, 이 단어의 뜻은 영어로 ‘signs’이며, 일반적으로 ‘징후’, ‘신호’ 등으로 번역되고 있지만, 성경에는 ‘표적’이라는 말로 번역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우리네 말로 번역하면 믿음의 신호라는 뜻인 셈이다. 즉 믿는 자에게 드러나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런 증거가 없다면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크리스천은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셨다. 더불어 예수님은 천지가 사라지더라도, 자신이 한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거라는 말씀을 복음서에 죄다 기록하게 하셨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고 있으니 기이한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의 표적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생각해보자.
증거가 없다고 믿음이 없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열매가 없다고 믿음이 없다고 해야 합니다.
한단어의 차이 이지만 이런 부분에서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비트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믿음 = 표적
위와 같은 오류의 등식을 성립하고 있습니다.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몇 사람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적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러나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줄 표적이 없도다.
마태복음 12장 38절 39절
드러나는 표적과 들이대는 표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드러나는 표적은 그들이 원하지 않아도 그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증거 삼아 자신과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1. 귀신을 쫓아내며
귀신은 사탄과 더불어 악한 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무리들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자 무섭게 귀신의 정체가 드러냈으며,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냈고 귀신들이 일으킨 고질병들을 치유하여 주셨다. 예수님의 사역을 물려받은 사도들과 제자들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귀신들을 쫓아내고 고질병을 치유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네 교회는 이러한 사역을 하지 않는다. 귀신을 쫒아내는 일도 없고 고질병을 치유하는 능력도 없다. 그리고는 귀신들린 사람이 교회에 오면 교회 문을 닫아걸고 손사래를 치거나, 교회 안에서 귀신얘기를 하면 극도로 싫어한다. 하나님이 계신 교회에 무슨 귀신이 있냐고 하거나, 성령이 안에 있는 교인들은 귀신들이 공격하지 못한다며 더 이상 귀신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들이 그렇게 하는 속내는 스스로 귀신을 분별하거나 쫒아낼 능력이 없기에, 귀신이 두렵고 무섭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잣대에 의하면, 예수님과 사도들도 귀신론자가 될 판이다. 사람들이 귀신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자유지만, 귀신들의 포로가 되어 생명과 영혼을 사냥당하고 지옥으로 끌려간다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게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귀신은 영이기 때문에 영혼불멸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초대교회 당시에 바글바글하던 귀신들이 나이가 들어 늙어서 죽어버렸는가? 그게 아니라면 은밀하게 숨어서 사람들의 숨통을 끊는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조건 기피하고 무서워한다고 능사가 아닐 것이다. 당신이 무서워하면 할수록 그들의 포로가 되어 불행하게 살다가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없다면 필시 귀신의 종인 셈이다.
성도들이 귀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러워하는 것입니다.
병치유 안수를 하다가 폭행으로 사람을 죽게 하는 경우는 최근까지도 발생한 일들입니다.
그런 뉴스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위의 예처럼 손사래를 치는 교회도 있겠지만 병원치료와 더불어 중보기도를 하는 교회가 더 많습니다.
다 사도들이겠느냐? 다 선지자들이겠느냐? 다 교사들이겠느냐? 다 기적을 행하는 자들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들을 가졌겠느냐? 다 방언들을 말하겠느냐? 다 통역하겠느냐?
고린도전서 12장 29절 30절
지체가 각자 다른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귀신쫓는 능력을 성령의 증거로 생각하여 다른 지체를 귀신의 종으로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류입니다.
열두 제자중 첫번째인 베드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께서 자기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허약함을 치유하는 권세를 주시더라.
마태복음 10장 1절
열두 제자들이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권세와 병과 허약함을 치유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이 되는도다. 이는 네가 하나님의 일들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들을 생각함이라."고 하시더라.
마태복음 16장 23절
그런데 그 이후 베드로는 사탄이라고 불림을 받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하는 권세(증거)를 가지고도 사탄에게 이용당할 수 있음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2. 새 방언을 말하며
방언은 우리네 교회에서 성령의 임재로 판단하는 증거이다.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하였을 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심으로 기도하자 방언이 터지면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언급한 방언은 성령의 은사중의 하나로서 믿는 자들의 표적이며 성령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통로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상 받아들이는 방언은 어떠한가?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방언이 성령의 임재라면 방언기도를 오래 한사람은 당연히 성령의 다양한 열매가 있으며 모든 기도마다 응답을 경험하며 각종 은사를 통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능력 있는 기도의 종이 되어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방언기도는 유창하게 하는데
오랜 신앙의 연륜에도 신앙이나 성품의 변화도 없고 체험도 없으며 신앙의 능력과 삶의 힘도 없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없는 자신만의 방언일 것이다.
성품이 변화와 체험과 신앙의 능력과 삶의 힘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증거가 될것입니다.
이것이 열매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방언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이다. 방언이란 성령과 깊은 교제로서 몰입되는 기도가 되어야 비로소 방언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몰입이 된다고? 필자도 적지 않은 시간동안 기도훈련을 거쳐 오랜 세월 기도의 강을 건넜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몰입이 되는 사람이라면 필자가 찾아가 배워야 하는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거나, 아님 자신이 지어내는 방언일 것이다. 그 증거는 새로운 방언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에 몰입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방언들은 새로운 방언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주기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일 년 내내 같은 방언만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항상 똑 같은 방언만 하고 있다면 이는 오랫동안 해온 습관으로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고 있는 방언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방언은 깊게 몰입되는 기도를 방해한다. 그냥 기도시간만 채우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말하자면 기도하고 있는 상태를 즐기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성령에 몰입되는 기도를 하면 기쁨과 평안이 샘솟듯 마련이다. 그래서 기도에 몰입되면 그 상태를 빠져나오기 싫다. 그러나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있을 수도 없고, 중보기도나 간구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다른 기도로 들어가야 한다. 하물며 성령에 몰입되는 상태를 즐기는 것도 그럴 수 없는 데, 그냥 주구장창 방언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이는 잘못된 기도의 모습일 것이다. 성령에 몰입되어 교제하는 가운데 나오는 방언이라면 분명한 성령의 열매가 있고 능력 있는 기도를 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지어낸 방언일 뿐이다. 방언은 외국어라는 뜻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방언은 새로운 방언으로 계속 바뀌어야한다. 또한 방언의 목적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기도행위를 즐기거나,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목적으로 쓰인다면 성령이 주시는 방언이 아닐 것이다.
긴 설명 필요없이 방언은 비본질입니다. 하면 좋고 안해도 그만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열매가 없는 것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문제입니다.
3. 뱀을 집어 올리며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2:14)
뱀은 사탄과 귀신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뱀을 집어 올린다는 뜻은 사탄과 귀신들과 싸워 승리하라는 의미인 셈이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바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존재조차 전혀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희생의 피를 흘린 이유도 악한 영들을 멸하시기 위함이시라고 밝히고 있다.
이 부분은 매우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그냥 넘어가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은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루시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악한 영들을 멸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악한 영들은 모두 제거 되었어야 합니다.
욥기서에서 보듯이 악한 영은 하나님의 대적이 아닙니다. 시험에 이용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혼과 생명을 사냥하는 악한 무리와 싸워서 승리를 해야,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으며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 부분도 매우 이상한 논리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6장 24절
스스로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귀신들을 이겨내고 어떤 자격을 차지한다고 하는 듯한 논리는 온라인게임에서 레벨업을 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교회에서 귀신의 존재와 그들의 공격, 공격당한 사람의 증세, 그리고 이들과 싸우는 데 필요한 기도의 능력에 대한 가르침을 들어보지 못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목회자들이 귀신을 쫒아내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보이면서, 귀신들린 사람을 교회에 데려가면 문을 닫아걸면서 손사래를 치고 있다. 마치 우리가 귀신 없는 세상에라도 살고 있는 것처럼, 귀신들을 무시하고 터부시하고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성령께서 귀신이 지구를 덮고 있을 만큼 많다고 하시면서, 교회에 많은 숫자가 운집해 있다고 하셨다. 그들은 속이는 데 천재이다.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귀신들이 몸 안에 들어가 집을 짓고 살면서 지배하고 있거나, 머리를 타고 앉아 그들의 생각을 넣어주어 마음을 부추기어 공격하고 있다. 귀신을 육안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들의 공격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 평안과 기쁨과 자유함이 성령이 계시는 증거인데 반해, 귀신이 잠입하여 공격하는 증거는 건조와 냉랭함, 분노와 짜증, 걱정과 염려, 불안과 두려움, 낙심과 절망의 생각이 들어차 있다. 또한 귀신들은 타락한 옛사람의 본성인 탐욕과 방탕을 추구하는 것을 이용하고 죄의 덫을 밟게 하여 죄를 짓게 하여 영혼과 생명을 사냥하고 있다. 그래서 분노와 짜증을 달고 살며, 탐욕스러우며 냉정하며, 음란과 불륜, 술 취함, 싸움과 분열, 이혼, 알코올중독을 비롯한 각종 중독, 정신질환, 고질병, 거짓말, 속임, 불의와 불법, 빚에 허덕이며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죄다 마음에 평안과 자유함과 기쁨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 안에 평안과 자유함이 없다면, 죄다 귀신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귀신의 종이 아닌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교회 마당만 밟는다고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귀신의 종이라는 증거만 있다면 귀신에게 속아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싸워야 대상은 바로 죄이다. 구체적으로 죄를 추구하는 죄성을 지닌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부인을 해야 하며, 죄를 부추겨서 죄의 덫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악한 영들과 피터지게 싸워 승리해야 한다. 그러나 육체를 벗어버리지 못한 이상 자기의 생각을 부인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며, 천사와 동급의 영적 능력을 가진 악한 영들과 싸워 이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가슴에 새겨서 죄를 추구하는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고, 죄를 짓게 만드는 악한 영들을 물리쳐서 승리해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가슴에 새겨지게 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성령이 내주하는 영적 습관이 필요한 이유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고 하시니
마태복음 10장 25절
위 말씀에 부자는 재물을 신뢰하는 자 입니다. 재물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신뢰하는 자는 스스로 죄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시작은 악한 영의 유혹 이지만 죄를 완성하는 것은 자신입니다.
그 뱀이 여자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반드시 죽지는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의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되는 줄을 하나님께서 아심이라.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음직하고 보기에도 즐겁고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인지라.
그녀가 거기에서 그 열매를 따서 먹고 그녀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니, 그가 먹더라.
창세기 3장 4절 5절 6절
보입니까?
악한 영은 우리 스스로 죄를 짓도록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악한 영은 유혹을 하고 나서 사라지고, 여자가 스스로의 의지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악한 영과 싸움은 죄의 유혹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죄의 완성이르게 되므로 진짜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완성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주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주의하는 것이 곧 자기 부인입니다.
악한 영은 유혹과 부추김과 환경을 조성하고 나서 우리가 죄를 스스로 완성하는 것을 원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하나님께 고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악한영의 의지로만 우리가 죄를 짓게 되었다면 그것은 죄가 완성되지 못하고 허물이 되어버립니다.
4.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고
이 말의 뜻은 독약이나 농약을 들이켜도 몸이 상하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귀신들의 상징동물이 뱀이며, 뱀은 독으로 자신의 먹잇감을 사냥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독은 귀신들의 공격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들의 공격을 잘 알고 지혜롭게 피하며, 귀신들을 쫒아내는 영적 능력이 있어야 그들의 공격에서 안전하게 영혼과 삶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귀신들의 공격은 죄의 덫을 놓고 덫에 걸려들게 하는 게 그들의 계략이다. 그러므로 귀신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면, 죄를 밥 먹듯이 지으면서 불행에 빠져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게 그 증거이다. 그래서 귀신들의 공격을 당해 해를 받는 기본적인 모습은 죄를 짓게 되어 불행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들의 공격을 알 수 있는 것은 특이한 느낌이나 현상이 아니라, 자신이 죄를 짓는 지의 여부를 날카롭게 살펴보아야 한다. 미움, 시기, 질투, 술취함, 교만, 탐욕, 조급함, 불경건, 절도, 살인, 음란, 불륜, 싸움, 분노, 쾌락 등의 생각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으며, 염려, 걱정, 불안, 두려움, 공포, 의심, 낙심, 절망 등의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귀신을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악한 영의 공격에 무지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죄를 짓고 시험에 들어 불행에 빠져서 고통에 울부짖는 크리스천들이 주변에 허다한 이유이다.
이 말씀은 두가지의 의미가 모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나무를 한아름 거두어 불에 놓으니
그 열기로 인하여 독사 한 마리가 나와 그의 손에 달라 붙은 지라.
사도행전 28장 3절
바울사도가 지중해의 몰타(멜리테)섬에 표류하였을때 그가 바다뱀에게 물리고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바다뱀의 독은 동물들의 독중에 가장 센 독으로 분류됩니다.
이런 기적은 믿음이 드러나는 표적입니다.
드러내는 표적이 절대로 아닙니다. 드러내는 표적은 나를 내세우는 것이 됩니다.
육의 생과 사를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며,
그로인하여 우리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소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왕국의 소망을 가진다면 세상에서 줄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이 옵니다.
위에 열거한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모두 이 세상을 사랑함에서 비롯되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속에서 있으므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서로 위로하며 하나님의 왕국의 소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5.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악한 영의 일반적인 공격이 바로 질병을 주거나 아프게 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모든 질병이 악한 영의 공격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악한 영들은 모든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 필자가 오랫동안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그들이 질병을 일으키거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을 주는 현상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모든 정신질환과 대부분의 고질병들이 악한 영들이 일으키는 질병이라고 보면 된다. 알다시피 정신질환은 완치가 거의 불가능하고 고질병도 치유가 어려운 병을 일컫는다. 성경을 읽어보면 귀머거리, 맹인, 간질, 디스크 협착증에 걸린 사람들이 죄다 귀신들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없는 지적 장애도 악한 영들의 소행이 허다하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질병으로 나타나는 현상의 치유에만 몰두하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정체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몸을 쇠약하게 만든다.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것은 각종 질병에 걸리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지만 조금 다른 문제이다. 쇠약하다는 것은 몸이 건강하지 못해 면역력이 약해 늘 질병에 시달릴 수 있으며, 특히 신경을 쇠약하게 만들어 고통을 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몸이 쇠약한 원인이 영양이나 운동부족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물론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거나 운동이 부족한 사람들도 육체가 쇠약해질 수 있다. 그러나 악한 영이 몸에 침투해서 몸의 기능을 떨어뜨리거나 쇠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은 성령의 사람들은 귀신들을 쫓아내고, 귀신들이 일으킨 질병으로부터 낫게 하는 영적 능력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기적과 이적이 사역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 정신질환자들이나 고질병 환자들을 데리고 가면, 유명한 전문병원을 소개해주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성령이 함께 하고 있다고 떠벌이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몸과 마음의 병이 낫는 것이 모두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너는 또한 젊음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추구하라
디모데후서 2장 22절
젊음의 정욕은 곧 건강한 몸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몸으로 인하여 죄를 완성하게 된다면 아픈 것이 백배좋은 것입니다.
네 손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잘라 버리라.
두 손을 가지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 속인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리라.
마가복음 9장 43절
병 치유는 그 열매에 따라 가치가 다른 것입니다.
말씀에서 불구자가 더 낫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아프고 실패하는 것이 모두 귀신의 소행이 아닙니다. 그에게 복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돈이 많고 잘되고 몸이 건강하면 교만하기 쉬운 것입니다.
위 말씀은 비유가 아닙니다. 진실을 알려주신 부분입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이런 일들을 자신의 뜻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구한 다면 잘못 구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이런 성령의 능력이 없다면 믿음의 표적이 없다는 증거인 셈이다.
다시 한번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다 사도들이겠느냐? 다 선지자들이겠느냐? 다 교사들이겠느냐? 다 기적을 행하는 자들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들을 가졌겠느냐? 다 방언들을 말하겠느냐? 다 통역하겠느냐?
고린도전서 12장 29절 30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들이 다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각 사람이 서로의 지체가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에 따라 가진 은사들이 다르니
예언이면 믿음의 분량대로 예언하고
또 섬김이면 섬기는 일로, 또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또 권면하는 자는 권면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지도하는 자는 근면함으로,
자비를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로마서 12장 4절~8절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하거나
또 머리가 발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 21절
은사는 지체마다 다를 수 있으며, 그것으로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성도가 귀신을 쫓고 병치유를 한다면 교회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현실의 교회 모습은 로마서 12장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그들의 헌신을 사람은 판단하지 못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니,
즉 내 이름으로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내고 또 새 방언들로 말하리라.
그들은 뱀들을 집을 것이요, 어떤 독을 마실지라도 결코 해를 입지 않을 것이며,
병자에게 안수하여 그들이 회복되리라."고 하시더라.
마가복음 16장 16절 17절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발휘하는 능력의 핵심은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은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입니다.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고 뱀들을 집고 어떤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입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믿는 자의 표적입니다. 이런 일들로 증거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가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증거로 내세우려면 독을 일부러 마셔야 하며 이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바울 사도가 독사에 일부러 물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만 있어도 기적을 일으키는 기도를 할 수 있다고 약속하셨다.
나를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스스로가 증거되기 위해서 그런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사도들이 권세를 지녔다고 증거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는 1분짜리 영접기도에 동의하고, 주일성수를 하며 교회에서 요구하는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고 있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이 있음을 선포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을 받아 부유하고 성공하며 살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성경에 없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표적은 위의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사람이 만들어낸 교회의 관행을,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두고 믿음의 척도를 재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믿음의 표적이 없다면 성령의 사람이 아니며 천국도 당신의 몫이 아닐 것이다.
표적이란 말대신 열매가 없다면으로 고쳐야 하는 부분입니다. 표적과 열매는 많이 다릅니다.
표적보다 열매가 개념이 더 큽니다. 열매가 아닌 표적으로 천국을 판단해 버리면 은사가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지옥으로 판단해버리는 셈이 됩니다.
은사가 그것만 있겠습니까?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표적은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주기철, 손양원같은 분이 표적으로 드러난게 아닙니다.
그 분들은 자기 부인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의 현주소를 직시하고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당신을 천국에서 보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 영성학교, 쉰목사
영접기도로 구원이 끝나버린다는 주장과 교회 헌신과 충성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가진 적폐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교회와 성도들이 그런 주장을 하지 않으며, 설령 목사가 그런다고 해도 성도들이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그들은 어찌 되나요? 이분법으로 나눠야 하는데 나눠지지가 않는군요.
심판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심판에 자신의 의견인 결코라는 말을 섞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첫댓글 일부의 주장을 일부의 주장으로 반박하는 모습이기에 다시 분석을 해서 글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