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에서 宋斗律을 만났을 때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그는 지금 金正日에게 보여주기 위해 국정원·검찰과 투쟁 중』
●『그는 서울올림픽 반대 운동을 자랑했다』
●『1973년 독일에서 宋斗律 부부와 처음 만나 비밀 독서회에서 활동』
● 『宋斗律, 尹老彬ㆍ許弘植ㆍ李彰均 가족의 入北 사실을 壯擧라며 入北 권유』
● 1986년 11월 대학생 부부 포섭 入北차 북한을 출발하던 날, 부인 申淑子씨, 吳씨 뺨을 때리며 『다른 사람을 지옥에 데리고 와서 어떻게 하려느냐』고 울부짖어
●『宋斗律이 내가 술 먹고 전화하는 등 귀찮게 해 再입북 권했다고 했다』
●『宋斗律과 尹伊桑은 자신들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나의 북한 탈출에 겁먹었다』
●『宋斗律의 입국은 北의 情勢 오판 탓… 진술번복은 金正日에게 자신의 투쟁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
吳 吉 男 박사
1942년 경북 의성 출생. 부산高ㆍ서울大 독문과 졸업. 1970년 독일 튀빙겐 대학으로 유학, 在獨 反韓단체인 「民建」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1980년 독일에 정치 망명. 1985년 독일 브레멘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1985년 12월 가족 대동 入北. 이후 「韓民戰」 對南 흑색선전 방송요원으로 활동. 1986년 11월 在獨 유학생 포섭, 대동 入北 지령을 받고 덴마크로 침투 중 코펜하겐 공항에서 탈출. 그해 12월 독일에서 再정치망명해 생활하다 1992년 5월 귀국해 현재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
저서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문학과 지성사, 1993)
吳吉男(오길남·61)씨를 만나기 위해 기자가 지난 10월2일 오후 그의 아파트를 찾았을 때, 그는 집에 없었다. 그날은 서울 도봉구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宋斗律(송두율·59)씨의 기자회견이 있던 날이었다.
혹시나 잠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자는 휴대전화로 그의 집 전화번호를 연신 눌러 댔다. 빈 집에 전화벨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약속 시간인 오후 6시 집에 있지 않았다. 이튿날 전화에서 그는 기자에게 그저 『미안하다』고만 했다.
한때 북한에 환상을 품고 越北(월북)했다가 탈출한 독일 유학생 출신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그는 北을 탈출한 뒤에도 왜 5년간을 독일에 남아 있었고, 함께 월북했던 가족들은 어떻게 됐는지 현재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
이튿날, 그의 아파트를 다시 찾은 기자는 가족들의 사진이 한 장도 보이지 않는 것에 놀랐다. 가족의 溫氣(온기) 없는 31평의 공간은 적막하고 더욱 넓어 보였다. 기자를 맞은 그는 우울한 표정에 넋 나간 사람처럼 불안해했다. 그는 遺書(유서)와 사진 등을 그의 知人(지인)에게 맡겨 놓은 상태라고 했다.
『가족과 書信(서신) 왕래도 안 되니, 의식이 살아 숨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고통스러워요. 가족들의 이야기를 기자들에게 반복한다는 것은 고통 자체입니다. 덴마크 공항에서 탈출에 실패해 끌려가는 꿈을 꾸다가 깨기도 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저를 원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꿈을 꾸기도 해요. 소주 두 병을 거푸 「병나발」을 불고서야 잠을 청합니다』
기자가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있었던 宋斗律씨 기자회견 이야기를 꺼냈다. 宋씨가 밝힌 「그간의 활동에 대한 자성적 성찰」을 吳씨에게 내밀었다. 그는 텔레비전으로 기자회견 내용을 보았다며 『궁색한 논리』라고 잘라 말했다.
『자꾸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빙빙 돌리니까 宋斗律 스스로 함정을 파는 거지. 宋斗律은 지금 「위대한 영도자 金正日 동지, 金日成주의적 혁명전사 宋斗律이 南朝鮮(남조선) 적후에서 얼마나 격렬히 싸우고 있는가를 보시오」라며 작심하고 막강한 국정원과 검찰에 대응해 싸우고 있는 겁니다』
그는 「송두율의 현대사상강좌 2―세계와 민족지성」(한길사 刊) 124쪽에 등장하는 「金주석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했다. 宋씨는 1991년 5월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北의 對南사업부에서는 이미 宋斗律에 대한 점검이 끝난 상태였을 겁니다. 그를 「南朝鮮 혁명가로서 신뢰할 만하다」는 결정이 난 것이고 그 증거가 金日成 면담이었죠. 北이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가진 宋을 높이 평가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金日成은 고위공작원이라든가 공작사업에 혁혁한 功(공)이 있는 사람만 초대소에서 만납니다』
宋씨는 사회과학원이 기획한 「주체철학과 현대철학」 학술토론회에 참석했으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연도 했다. 그는 그해 5월23일 묘향산초대소에서 金日成과 두 시간 가량 단독 대담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이때 金日成은 宋씨에게 「언감자국수」를 대접했다.
『北을 들락거리는 인사들은 「비밀당원」 가입』
金日成은 宋씨에게 『언감자국수를 많이 들라』고 했다고 한다.
『언감자국수는 滿洲(만주) 산악에서 金日成이 항일투쟁하면서 소위 「고난의 시절」에 먹던 음식으로 그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抗日혁명 정신 또는 金日成주의를 「領聖體」(영성체: 가톨릭에서 聖體나 聖事를 받는 것)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金日成과 宋斗律의 아주 특별한 식사를 하나의 儀式(의식)으로 봐요. 宋斗律이 자신의 저서에서 金日成과 식사를 했다고 하기에 「아! 이 친구, 영성체를 받았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가톨릭式으로 하면 聖體를 몸에 담는 것입니다. 「金日成주의자」로서 활동을 한다는 뜻이지요』
―宋씨는 國情院 조사에서 1973년 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吳박사께서는 사전에 알고 있었나요.
『1985년 12월경 제가 미림초대소에 있을 때, 宋斗律이 1973년 「南朝鮮 혁명가」로서 부인 鄭貞姬(정정희·61)씨와 入北해 보름간 머물렀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宋씨는 노동당 가입을 入北하는 사람들의 통과의례라고 주장합니다만.
『1973년 무렵에도 노동당 가입은 쉽지 않았어요. 金日成 또는 金正日이 「우리 조선노동당에 宋동무를 가입시키라」는 정도의 이야기가 있어야 「비밀당원」이 되는 겁니다. 宋씨 본인이 입당식을 했고, 北으로 轉向(전향)한 것이죠. 對南사업 총책인 許錟(허담)이 宋斗律을 특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北에 들락거렸던 許弘植(허홍식), 宋斗律의 서울大 철학과 선배로 「민족자주통일연맹」을 결성한 이창준도 비밀당원으로 노동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 1982년 자녀들을 데리고 入北한 부산大 철학과 尹老彬(윤노빈) 교수는 정식 입당한 경우이다. 尹교수는 宋씨의 서울大 철학과 선배로서 아들 둘, 딸 둘을 데리고 싱가포르를 통해 모스크바를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다. 尹교수는 미림초대소에서 3년간 살면서 「유일 사상 확립 10大 원칙」 등을 외우는 등 黨性(당성)을 검증받은 끝에 당원이 됐다고 한다. 1985년 入北한 吳씨는 1년 남짓 北에 머물며 정식 노동당 가입을 준비했었다고 한다. 그는 노동당 入黨式에 대해 기자에게 설명했다.
『입당식은 보통 초대소 접견실에서 하는데, 人共旗(인공기)는 걸지 않고 대신 金日成 초상화를 걸어 놓습니다. 宋斗律이 1973년에 방문했을 때는 對外연락부 소속 부장을 비롯, 黨 간부들이 나왔을 겁니다. 黨 간부 중 하나가 「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의 敎示(교시)를 받들고 南朝鮮 혁명가인 宋斗律 선생을 우리 땅에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라는 취지의 入黨 수락문을 낭독합니다. 나머지 간부들이 박수 치는 것을 끝으로 입당식이 끝나는 겁니다. 뒤풀이로 식당에서 술과 밥을 먹습니다』
―宋씨는 1973년 이후 북한에 18차례 들어갔다고 하는데요.
『1973년부터 현재까지 30년 동안 2년에 한 번 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혁명사업을 하는 노동당원은 최소한 1년에 한차례는 갑니다. 對南공작사업은 軍 다음으로 外貨(외화)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사업이라 철저한 보고가 이뤄집니다. 1986년 10월, 평양 교외에 있는 무밭에서 兪成根(유성근)씨가 귀띔을 해 줬어요. 兪씨는 서울大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 노무관보로 근무하다 아내 정순섭과 함께 월북해 기관지 「청맥」 편집원으로 있었습니다. 그의 말로는 朴大源(박대원·서울大 철학과 졸업)이 1년에 한 차례씩 들어온다는 겁니다. 朴大源이 왔다 갔다 한다면 宋斗律도 마찬가지로 매년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이지요. 朴은 독일의 주체사상 비밀강사이며 陸士(육사) 교관 출신인 金容武(김용무·서울大 철학과 졸업)의 후배로 宋斗律 역시 金의 후배였어요』
튀빙겐市 호적계장 앞에서 결혼식
1942년 경북 義城(의성)에서 출생한 吳吉男은 부산高를 졸업하고 1962년 서울大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한다. 재학 시절, 서울에 있는 독일문화원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서울지부장인 독일인 에리흐홀체를 알게 된다. 그의 도움으로 吳吉男은 1970년 10월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전공을 바꿔 튀빙겐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해 1976년 학사학위를 취득한다. 그 당시 튀빙겐 대학 부속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申淑子(신숙자·61)씨를 만나 1972년 11월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두 사람은 평상복 차림으로 튀빙겐市 호적계장 앞에서 증인을 세우고 市內 금은방에서 산 금반지를 교환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다. 吳씨는 지금도 그때의 실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는 『그때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 주지 못한 게 두고두고 한이 된다』고 했다. 그의 큰딸 혜원 1976년 독일 킬(Kiel)에서 태어났고, 둘째 딸 규원은 1978년 역시 킬에서 태어났다.
吳吉男은 1974년 3월부터 서독에 유학중인 한국 학생들 중심으로 결성한 親北反韓(친북반한)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民建)」에 가입해 反정부활동을 하다가, 한국 정부가 독재정치를 한다는 확신下에 1980년 3월 독일 정부에 망명했다. 독일 유학 15년째이던 1985년, 吳吉男은 브레멘 대학에서 「마르크스 노동가치설과 생산가격 이론의 再구성」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박사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43세의 늦은 나이에 쉽게 강단에 설 수 없었다.
『지방대학에서 영입 제의가 오기도 해 국내에 들어와 대학교수로 일할 것도 고려해 보았으나, 과거 反韓단체에서 활동한 경력 때문에 신변에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해 귀국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울 때 나타난 宋, 金, 尹
그때 吳吉男의 아내는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데다, 근무하던 병원에서 透析(투석) 치료를 담당하다 혈액이 감염돼 휴직상태에 있었다. 가정 형편은 어려운 처지에 처했다. 이때 그의 주변에 宋斗律, 尹伊桑(윤이상), 金鍾漢(김종한) 등 民建 회원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北에 가서 조국을 위해 경제학자로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를 한다. 吳吉男은 金鍾漢에게 박사학위 논문 출판을 위해 빌린 돈 1500마르크가 「미끼」가 돼 북한 공작원을 접촉하게 된다.
공작원을 만난 지 열흘 뒤, 작곡가 尹伊桑으로부터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하며 당신의 해박한 지식을 北에 가서 활용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그 후 金鍾漢의 소개로 東獨 주재 북한 대사관에 근무하던 공작원인 白서기관을 만났고, 그로부터 『북한에 가서 경제학자로서 일하게 되면 벤츠 고급 승용차도 제공받고, 여러 가지 연구활동이 보장되며 봉급도 많이 받게 된다』는 말을 듣는다. 吳吉男은 白서기관에게 『나는 마르크스 경제학 추종자로서 북한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북한에 가서 일해 보겠다』고 했다.
北行 직전인 1985년 11월 말경, 吳吉男은 부인 申淑子와 入北문제를 의논했으나 완강한 반대에 부닥쳤다. 吳吉男은 『우리의 어려운 살림과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과 간염을 앓고 있는 당신을 치료하려면 북한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고 설득한다. 부인 申淑子는 울면서 『당신은 언젠가 入北을 결정한 것 때문에 자신의 눈을 찔러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했으나 吳吉男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吳吉男은 저축한 돈과 세간을 처분한 돈을 모두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눠 주었다. 모든 것을 나누는 사회주의에서는 돈이 필요 없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에서였다.
1985년 11월29일, 吳吉男의 가족은 入北을 위해 짐을 北으로 부치고, 독일 북부도시 킬을 출발해 西베를린으로 갔다. 宋斗律이 북부 해안지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가 西베를린으로 온 것이다. 吳吉男은 베를린驛(역)의 「초오」(동물원이란 뜻) 레스토랑에서 宋斗律 가족과 만났다. 당시 吳吉男의 큰딸 혜원(27)과 작은딸 규원(25)은 宋씨의 큰아들 儁(준·28·막스플랑크연구소 연구원), 작은아들 麟(린·27·소아과 전문의)과 함께 눈 속에서 열심히 장난을 쳤다.
宋씨는 『北도 좀 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통일의 출구가 열리지 않는다. 吳형이 경제학자로서 활약해 주기 바란다』는 말을 했다. 宋씨의 부인은 울먹이며 『尹伊桑 선생님 편으로 필요한 물자를 보내겠다』고 했다.
對南 흑색선전 방송요원 생활
1985년 12월13일 吳吉男은 對南공작원인 백치완에게 독일 망명여권을 맡기고 대신 그들이 만들어 준 「오경현」이라는 이름이 적힌 북한 공무여권을 받고 東베를린과 모스크바를 거쳐 북한에 들어갔다.
『평양 근교에 있는 순안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무언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경제학자로서 일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우리 가족은 평양 대동강 부근의 어느 깊은 산 속에 있는 동북리 초대소에 수용됐습니다』
1985년 12월부터 吳吉男의 일가족은 고려호텔 인근 창광거리에 있는 동흥동 아파트에서 살았다. 吳吉男은 이번 대질심문에서도 宋씨에게 『宋형 덕택에 제일 좋은 아파트 배정받아 살았다』고 했다고 한다. 부인 申淑子는 한 번 걸렸던 간염으로 인해 몸은 극도로 쇠약해 있었다고 한다.
吳吉男의 일가족은 그곳에서 3개월 동안 외부와 차단된 채 소위 「밀봉 세뇌교육」을 받으면서 金日成에게 충성을 강요당하는 「인간 로봇」으로 전락했다.
吳吉男은 1986년 6월부터 그해 11월 북한을 탈출할 때까지 북한이 남한內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한국민족민주전선(韓民戰) 산하 칠보산 연락소에서 근무했다. 그는 평양市 흥부동에 있는 對南 흑색선전 방송국인 「민중의 메아리」 방송국에서 「민영훈 교수」라는 가명으로 「종속경제비판」 등을 녹음해 남한으로 送出(송출)했다.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던 吳吉男은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대동강변 눈 덮인 벌판에 나가 눈을 맞으며 울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은 입북하기 전에 나와 약속한 것과는 달리, 경제학자로서 일할 여건도 마련해 주지 않았고, 철저하게 개인생활을 통제하고 나의 요구를 기만하고 무시했습니다』
1986년 11월 초순, 「민중의 메아리」 방송국에 근무하던 吳吉男은 北의 對南공작기구 책임자인 리창선으로부터 「독일에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2명을 덴마크로 유인해 帶同(대동) 入北시키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경제학자의 환상을 안고 北으로 간 吳吉男이 對南 흑색선전 방송요원에서 끝내 「공작원」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우리의 進路(진로)를 심각하게 상의했습니다. 아내는 저에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살 곳이 못 되니 당신이 먼저 이곳(북한)을 탈출해 독일 정부에 호소해 우리를 구출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入北 전까지 독일 망명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독일 정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용소에 간 아내·두 딸… 아내는 자살 기도
1986년 11월10일, 吳吉男은 심근경색에 동맥경화증으로 초췌해진 아내 申淑子와 열감기를 앓고 있던 두 딸을 북한에 두고 독일 유학생 朴仁鎬(박인호·가명·서울大 행정학과 졸업), 李昌奎(이창규·가명, 고려大 사회학과 졸업)를 入北시키기 위해 북한을 떠났다. 吳吉男에게는 북한 공작요원 백치완 등 2명이 따라붙었다. 백치완은 대외연락부 소속의 중앙당 지도원으로 金正日과 許錟의 심복이었다.
11월21일, 그는 北에서 만들어 준 「오경현」이라는 가명의 여권을 소지하고 덴마크 코펜하겐 카스트로트 공항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게 됐다. 그는 미리 준비한 박사학위증 사본과 구조요청 메모를 공항직원에게 밀어 넣었다. 공항직원은 황급히 그를 잡아채 옆 사무실로 그를 옮겼다. 그들의 도움으로 동행한 북한 요원들을 따돌리고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吳吉男은 독일에 再정착하게 된다.
吳吉男은 북한을 탈출한 후 5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尹伊桑을 만나 북한에 있는 가족을 송환시켜 줄 것을 수차에 걸쳐 간청했다. 尹伊桑을 통해 1987년 10월과 1988년 10월, 두 차례 북한에 있는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기도 했다.
당시 吳吉男의 부인 申淑子씨는 평양市 형제산 구역 형산리 8반에 살고 있는 것으로 돼 있었다. 1991년 1월, 尹伊桑은 妻子(처자)의 육성이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 한 개와 가족사진 여섯 장을 전해 주며 『당신은 美帝의 고용 간첩이다. 은혜를 베풀어 준 金日成 주석을 배반했으므로 가족을 인질로 잡아둘 수밖에 없다』며 다시 入北해 金日成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했다.
吳吉男은 가족 송환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해 최후수단으로 한국에 들어가 당국의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하고 1992년 4월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에 자수, 그해 5월 입국했다.
귀국 전 그는 1992년 3월과 4월 사이에 독일에서 在北 가족의 안전과 송환을 위해 UN인권위원회, 국제사면위원회, 국제적십자사에 가족 송환을 歎願(탄원)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나마 1992년 6월 국제적십자사 홍콩지사로부터 在北 가족의 근황을 알아보겠다는 연락이 왔을 뿐이다.
뜻밖에도 그의 가족 소식은 1992년 10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수용소(제15호 관리소)에 수용돼 있다 탈출한 安赫(안혁), 姜哲煥(강철환) 두 사람의 증언에 의해 들려 왔다. 부인 申씨와 두 딸은 요덕수용소 대숙지구에 수용돼 있고, 申씨는 몇 차례나 자살을 기도하는 등 산나물을 뜯으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올림픽 반대 운동」을 자랑한 宋斗律
吳吉男과 宋斗律의 관계는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2년 저는 튀빙겐 대학에 있었어요. 튀빙겐은 헤겔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저는 레이벨크하임이란 곳의 가톨릭 기숙사에 머물며, 경제학 학사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때 튀빙겐에서 박사과정을 받고 있던 강돈구(前 한신大 교수)를, 철학과 후배인 宋斗律이 선배를 만나러 찾아온 겁니다』
이후 宋斗律 부부, 尹伊桑 부부, 吳吉男 부부, 鄭元植 前 총리의 동서인 강돈구 교수 부부, 東伯林(동백림·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됐던 孔光德(공광덕) 합동통신 기자 부부, 독일인 브라이든슈타인 목사 등이 모여 비밀 독서모임을 조직했다. 1974년 3월 民建이 출범하기 이전에 벌어졌던 일들이다. 그들은 民建이 출범한 이후는 民建이 발행한 잡지 「주체」를 읽으며 북한 관련 공부를 했다. 밥도 같이 해먹으며 독일의 이곳저곳을 비밀리에 옮겨 다녔다.
1982년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하고 난 뒤부터 宋斗律은 서울올림픽 반대운동에 몰두한다. 그는 서울이 올림픽을 치를 수 없는 위험한 도시라고 규정했다.
吳吉男씨의 회고.
『하루는 宋斗律이 하노버에 왔기에 「니, 뭐하노?」 물으니까 자랑스럽게 「서울올림픽 개최 반대 운동을 한다」고 해요. 독일 텔레비전에 출연하기도 하고 칼럼 등을 쓰기도 하는 방법으로 격렬하게 반대 운동을 했습니다』
『宋斗律이 부인과 함께 北에 드나든다는 것을 안 것은 1986년 6월 평양에서였습니다. 나는 이창균(칠보산연락소 고문)의 아내 오군임(북한 이름은 오덕희)과 대화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아, 宋斗律이 부인과 함께 北을 드나들었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宋斗律이 처음으로 北에 들어간 게 1991년으로 발표되었을 때도 속으로 이 친구가 거짓말을 한다고 믿었죠』
―尹伊桑씨는 民建을 설립할 때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1974년 3·1절날, 독일 본에서 데모를 한 다음에 民建을 건설했어요. 선언서는 李三悅(이삼열) 숭실大 철학과 교수가 썼고, 그 비밀모임의 주관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했어요. 나는 킬에 있었으니까 旅費(여비)문제도 있고 해서 발기인 55人 명단에만 넣었습니다. 尹伊桑씨는 발기인으로 참여했는데 나이도 많았으니까 원로로서 民建을 지도하는 역할이었습니다. 民建은 李三悅이란 순수 민주화 인사들과 宋斗律을 중심으로 한 北에 다녀온 인사들로 구성됐습니다』
―宋斗律과 尹伊桑은 어떤 사이였습니까.
『한마디로 父子(부자)관계라고 할 만큼 정신적으로 밀접했습니다』
吳씨는 1986년 2월 평양 용성구역에 있는 남조선혁명박물관에서 「유신독재 타도하여 민주사회 건설하자」는 플래카드가 유리관에 전시돼 있는 것을 봤다고 한다.
『1970년대 말 李三悅과 양승환 목사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계열이 民建에서 빠져나가 「한국민주사회건설협의회(한민건)」을 만들었습니다. 民建이 분리된 이유는 路線(노선)갈등도 있었지만 李三悅씨가 냄새를 잘 맡아요. 民建이 北의 조종을 받는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난 영문도 모르고 李三悅씨를 괘씸하게 생각했었습니다』
吳吉男의 뺨을 때리며 울부짖던 아내
―吳박사께서 1993년 출간한 「김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에서 북한을 떠나던 날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北을 떠나기 전날 밤, 우리 부부는 盜聽(도청)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밤새 「가야 한다」, 「당신과 아이들을 두고 어떻게 나만 가느냐」고 다퉜어요. 1986년 11월10일 아침, 날이 밝기 전이었어요. 공작부서인 3호청사 사람들이 나를 데리고 가려고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혜원, 규원이는 편도가 붓고 열이 나서 밤새 앓았어요. 독일처럼 가정을 방문해 응급처치해 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죠. 집을 나서는데, 작은딸 규원이가 후케파크(업기)해 달라고 해요. 날씨마저 으스스하게 추워 둘째 딸아이를 업어 주면서 아내에게 「내가 어떻게 이 귀여운 애들과 아픈 당신을 두고 떠나냐」고 했어요.
아내가 「당신 자식과 마누라의 생명만 소중하냐. 유망한 젊은 두 부부를 데려와서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면서 울먹이며 내 멱살을 잡고 뺨을 막 때렸어요. 아내는 「우리는 죽어도 그만이다. 내 딸들이 남을 속여 지옥에 빠뜨리는 파렴치범의 딸이라는 소리를 듣게 할 수는 없다」고 했어요』
吳吉男씨는 『그날 내 뺨을 때리던 아내의 손길과 떨리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며 울먹였다.
1986년 11월10일, 「운명의 날」 오전 7시30분경, 吳씨는 딸들에게 『지방공장 시찰하러 가니까 한 달 뒤에 돌아올게. 엄마 말씀 잘 듣고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아내에게는 『당신을 빼내는 데 석 달이면 충분하지 않겠소. 애버트재단도 있고 尹伊桑씨도 도우면 더 빨리 빼낼 수 있을 거요』라며 승용차에 올랐다. 초대소에서 옮겨가 이틀을 묵으며 포섭 대상자 유인 시나리오를 짠 吳씨 일행은 평양 순안공항에서 중앙당 간부들의 격려를 받으며 모스크바를 통해 東베를린으로 갔다.
동행한 공작지도원은 吳씨의 가족이 北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吳吉男의 탈출 계획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들이 東베를린에 머물 때 「金日成 사망」이라는 誤報(오보)가 독일 공영 ARD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러나 백치완 등 공작원들은 미동도 안 했다. 그들은 10월28일 吳振宇(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광복거리 건설장에 투입된 인민군들을 독려하려고 안갯길을 달리다가 전봇대를 들이받고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尹伊桑이 金日成이 사망한 것으로 알고 西베를린에서 뉴스를 확인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尹伊桑이 東베를린에 있는 據點(거점)인 구라파 총공작본부에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은 내게 놀라움이었습니다. 「북한 이야기」를 쓴 독일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도 확인전화를 했다고 해요. 「아, 이런 얘기가 총공작본부로 모이는구나」하고 알게 됐지요. 루이제 린저는 尹伊桑의 꾐에 빠져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尹伊桑은 그만큼 정치적인 과오가 큰 인물입니다』
11월13일 東베를린에 도착한 吳吉男 일행은 벤츠 승용차를 타고 포츠담을 구경하기도 하고 공작을 점검하는 등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 그들은 동독 비행기편으로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날아갔다.
코펜하겐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니까 깔끔한 인상의 駐덴마크 북한대사가 영접을 나왔다. 북한대사의 인도로 그들은 입국 심사대로 향했다. 吳吉男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작망에서 빠져나간다는 각오였다. 그는 北에서 가져온 박사학위 논문 사본이 품 안에 있는지 확인했다. 구라파 거점 총본부에서 작성한 「구조 메모」도 여권에 끼워 넣었다. 「Hilfe, Hilfe(도와달라)」라는 獨文(독문)과 「Help me, Help me」라고 쓴 英文(영문) 메모를 준비했다.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어쩐 일인지 북한대사와 백치완 지도원이 앞서서 검색대를 통과해 버리고 吳吉男이 혼자 남게 됐다. 吳吉男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항직원에게 박사학위증 사본과 북한 여권을 내밀었다. 여권에는 당시 외교부 제1부부장인 金容淳(김용순)의 수표(사인)가 있었다. 吳吉男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본 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목을 잡고 옆 사무실로 끌고 갔다.
『가슴은 방망이질 쳤고, 온몸에 식은 땀이 흘렀습니다. 찬물 한 잔을 달라고 했어요. 냉수와 찬 맥주를 주기에 단숨에 들이키고, 「독일대사관에 연락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덴마크인들은 독일어를 하니까 의사소통이 자유로웠어요. 얼마 있다가 「북한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한다」고 하기에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창문 밖을 보니 공작원 30여 명 정도가 서성거리는데 실제는 그 이상 공항에 깔린 것 같았습니다』
돌변한 尹伊桑과 宋斗律
북한 여권으로 「불법 입국」한 吳吉男은 유치장 신세를 졌다. 사실은 吳吉男의 안전을 생각한 서독대사관의 배려였다.
『목욕하고 감옥에 들어가니까 처음으로 자유를 느끼겠더라고. 가족 생각에 울고… 「자유진영의 감옥은 자유구나」라고 느꼈어요』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吳吉男은 승용차를 타고 독일 뮌헨으로 이동했다. 당시 서울올림픽의 안전 문제로 서방국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여서 당국자들은 그에게 북한의 서울올림픽 테러 企圖(기도)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1986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독일 정부는 그를 석방한다. 오갈 데 없던 그는 예전에 비밀 독서회 멤버였던 브라이든슈타인 목사 집에 잠시 머물게 됐다. 며칠 뒤 그는 무작정 하노버로 와 驛前(역전)에서 無錢取食(무전취식)하고, 하노버 市內를 유랑하다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그들은 吳吉男을 기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부랑자 기숙사로 데려갔다. 그가 들게 된 방엔 며칠 전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머물다가 권총으로 자살해,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12월28일 吳吉男은 尹伊桑과 宋斗律에게 북한 탈출 사실을 알렸다. 브라이든슈타인 목사는 자신이 東베를린에 가서 가족의 송환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나섰다. 그 무렵, 李種秀(이종수) 現 KBS 이사장이 베를린에서 김치와 쌀, 그리고 전기밥솥을 들고 와 『尹伊桑 선생만이 당신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吳씨가 북한을 탈출하자 尹伊桑과 宋斗律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들은 吳씨를 북한에 다시 보내려고 했다. 공광덕씨의 장례식에서 宋씨는 吳씨를 외면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내가 가족을 만나 한국대사관이나 한국으로 갈 경우, 자신들이 以北에 들락거린 사실들이 탄로날까 봐 몹시 신경을 썼습니다』
宋斗律과 尹伊桑은 吳吉男을 달래기 위해 하노버까지 달려온다.
『尹선생이 내게 自重之愛(자중지애)하라고 해요. 가만 보니까 독일 정부를 상대로 구출운동하지 말라는 것 아니에요… 북한관계가 있으니까. 宋斗律도 나의 거동을 살피고 돌아갔습니다. 宋씨는 얼마 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편지도 보냈습니다. 尹伊桑은 자기가 北에 가겠다고 했고 실제로 북한에 다녀오기도 했어요. 나는 한국 정부의 도움보다는 北의 가족들이 인질이란 생각에서 尹伊桑씨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市에서 주는 食費 보조금을 아껴 괴테의 「파우스트」나 독일·러시아 사전을 구입해 통채로 암기해 버렸다.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아이들 생각에 벼룩시장에서 양말, 크레용, 칫솔, 팬티, 물감 등을 사 모았다. 이렇게 모은 아이들 물건이 네 상자나 됐고, 두 차례에 나눠 東베를린에 있는 북한 대사관을 통해 가족들에게 보냈다.
1991년 1월20일, 吳吉男은 마지막으로 尹伊桑을 만난다. 尹은 북한에서 찍은 흑백 가족사진 여섯 장과 녹음 테이프를 내밀며 北으로 돌아갈 것을 회유한다. 吳씨가 『차라리 나와 가족을 맞바꾸게 해달라』고 하자 尹伊桑은 『되먹지 않은 소리 말라. 북한의 위신을 그렇게 먹칠해 놓고 고작 그런 소리냐. 자네가 다시 돌아가면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죽거든 돌아오지…』
吳씨는 國情院에서 이뤄진 宋씨와의 대질심문 사실도 언급했다. 宋씨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吳씨의 처음 入北에서 제가 그의 入北을 권유한 적이 없을뿐더러, 그의 脫北 후 再입북을 강요 또는 협박한 적도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라는 부분이 그가 문제삼는 대목이다.
吳씨는 宋씨가 기자회견에서 「吳씨와의 대질심문은 녹취되어 있으니 이를 들으면 누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한 말에 인간적인 연민마저 느낀다고 했다.
『대질심문에서 느꼈습니다. 宋斗律이가 소위 「민주인사」에 대해 배반을 했구나. 조직을 팔아먹은 겁니다. 1973년에 북한에 들어갔다는 것은 1973년에 노동당원이 됐고 北에서 모종의 협의가 돼 나온 겁니다』
吳씨는 『宋斗律과 李種秀의 관계가 막역했듯 나와 宋斗律의 관계도 그랬다』며 『내가 그에게 불리한 사실을 증언할 수밖에 없고… 서로 참담한 만남이었지, 뭐』라며 한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대질심문을 받으러 수사실에 들어가니까 宋斗律이 앉아 있더군.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먼저 주먹으로 한 대 갈겨 주고 조사를 받겠다는 심정으로 갔는데, 얼굴이 창백하게 된 그를 보는 순간, 「악마」라는 느낌보다 독일에서 함께 술 마시고 토론하던 추억만 살아났어요.
나는 「내가 죽거든 돌아오지, 하필 지금 돌아와서 이렇게 괴로운 만남을 할 게 뭐냐」고 했어요. 수사관들이 私談(사담)하지 말라고 제지하더군요. 나는 心性이 모질지 못해 누구와 말싸움하는 것을 싫어해 심지어 학술 논쟁도 안 해요. 그러나 宋斗律은 단호한 면이 있고, 對質(대질)을 하면서도 현란한 언어로 나를 흔들리게 했어요』
吳씨는 대질심문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宋씨에게 했다고 한다.
『「1980년 초부터 1985년까지 해외에서 反정부 운동하던 사람들에게 安企部에서 회유 작전이 있었던 게 사실 아닙니까. 民建 인사들 중 북한과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은 인사들은 귀국했지만, 安企部에 포착된 親北인사들은 귀국할 수가 없었잖아요. 宋형, 우리가 그런 입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 않았느냐」고 하니까 宋斗律도 인정을 했어요. 독일이란 「안전지대」에서 좀더 싸우다 들어가지 않고 全斗煥(전두환) 치하로 일찍 돌아간 사람들에 대한 원망, 비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宋斗律도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내가 다시 말했어요. 「宋형이 당시 충격적인 얘기를 끄집어내지 않았는가. 싱가포르에서 尹老彬(윤노빈) 교수, 프랑스에서 入北한 許弘植, 李彰均(이창균·서울大 철학과 졸업, 1982년 入北) 가족 등의 入北과정을 壯擧(장거)라고 하면서 入北을 우회적으로 권유하지 않았느냐. 귀국문제를 논의하다가 당신이 결국은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지 않느냐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吳형, 북한에 가지」라고 얘기는 안 했지만, 명확하게 방향제시를 한 게 아니냐고 이야기했습니다』
『入北은 1차적으로 내 실수』
―宋斗律씨의 권유가 없었다면 入北을 안 했다는 말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入北한 것은 1차적으로는 제 실수이고, 2차적으로는 宋斗律과 金鍾漢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경남 김해 출신인 콧수염 신사 金鍾漢은 야채장사를 했고, 제게 1년에 한 번 정도는 팔다 남은 과일을 들고 北독일의 킬까지 찾아왔어요. 그는 성균관大 철학과를 졸업한 남한 출신 공작원으로, 외교관 신분을 갖고 東西 베를린을 오가며 공작을 했습니다. 결국 방향제시·권유 등 「이론責」은 宋斗律, 入北 주선 등 「행동責」은 金鍾漢이었습니다. 金鍾漢은 제가 脫北한 뒤 도와달라는 전화를 하자 「개~새끼, 내가 개새끼의 새끼들과 무슨 관계가 있나」 하며 전화를 끊더군요』
―國情院 수사관들이 宋斗律씨를 어떻게 다루던가요.
『대질심문할 때 우리에게 「宋교수」, 「吳박사」라고 불러 주는 등 신사적으로 대했습니다. 宋斗律은 출퇴근 조사까지 시켰으니, 간첩 혐의자를 이렇게 수사하는 예가 어디 있나요? 國情院에는 저와 관련된 모든 조사기록이 다 있고, 이번에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리고 調書(조서)를 몇 번 읽고 도장까지 찍었어요.
내가 脫北한 뒤 宋斗律을 만나 「宋형, 내가 도망나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그가 「吳형이 그렇게 말하지 않고 北에서 토꼈다고 했잖아요」라고 정정까지 해주더라고요. 나는 永住權(영주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北이 가족만 돌려보내 주면 한국을 등질 생각까지 했어요』
―再입북을 권한 사실에 대해서는 대질심문에서 어떤 말이 오갔나요.
『宋斗律이 「吳형이 하도 술 먹고 전화를 하기에 귀찮아서 그리 했다(再입북을 권했다)」는 얘기를 했어요. 독일에 있지 말고 가족을 생각하라는 의미였다는군요』
―宋씨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한국에 살기 위해 왔으며, 추방이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했습니다.
『反語法(반어법)일 수 있어요. 宋斗律의 언어습관은 「예」에 「아니오」가 포함돼 있어요. 哲學徒(철학도)의 말이니까, 진심으로 나를 추방시켜 달라는 뜻도 되지요. 그런 사람은 아닌데 사람을 홀리는 거지요. 그래야 신비성이 더해지고 카리스마가 나오니까요』
「대통령이 청와대로 초청한 북한 공작원들」
吳씨는 정부를 비롯해 정계, 학계, 문화계 등 남한 사회 전반에 北의 세력들이 놀랄 만큼 자리를 잡고 있다고 했다. 지난 9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초청한 소위 「해외 민주인사 초청사업」의 초청대상자 가운데 1987년 派獨(파독) 광부 간첩단 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돼 입국이 불허된 김성수씨, 在美 선우학원씨 등 親北인사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吳씨는 지난 9월23일 盧武鉉 대통령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불러들인 44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다과를 베푼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중 상당수는 공작원인데…』 하며 혀를 끌끌 찼다.
『숙명女大를 졸업한 피아니스트 韓季一(한계일)은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유명한 물리학자인 故 安錫敎(안석교) 박사입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서울大 물리학과를 나온 安박사와 田珍浩(전진호) 박사를 선발해 독일에 유학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安박사의 고향이 元山이다 보니 형제들이 보고 싶어 北엘 오갔던 겁니다. 그런 安박사의 부인이 이번에 민주화 인사로 입국했던 겁니다. 文益煥(문익환) 목사의 入北을 주선한 鄭敬謨(정경모·씨알의 힘 대표), 陸士 교관을 지낸 在獨 공작원 金容武(김용무), 범민련사무총장인 임민식, 李應魯(이응노) 화백의 조카 이희세는 조사가 있을 것 같다는 낌새를 채고 들어오지 않았던 겁니다. 비밀당원 중 林秀卿(임수경)을 독일에서 대동해 北으로 간 이영준, 이항경, 이종형, 한영택 등은 이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宋씨가 법원의 사전 체포영장 발부에도 불구하고 굳이 입국을 강행한 배경이 있을까요.
『적당히 조사를 받고 넘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겠죠. 그의 입국 목적은 對南 통일전선사업의 합법적인 공간 확대였을 겁니다. 국내에는 宋斗律이 공들여 놓은 인사들, 즉 「宋斗律 파일」이 상당합니다』
吳씨는 A大 金모 교수, 宋모 교수, B大 梁모 교수, C大 朴모 교수 등이 대표적인 「宋斗律 파일」이라고 했다. 이밖에도 청와대와 政界, 學界에서 宋斗律씨 귀국과 수사와 관련하여 우호적인 발언을 한 인사들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아버지 묘소에서 왜 눈물 흘리나』
吳씨는 宋씨에 대해 『往年에 잘나가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巨頭인 마르쿠제와 하버마스의 제자였던 그의 학문적 소양이 아깝다』면서도 『宋斗律의 천사와 악마, 양면성 가운데 악마적인 面은 반드시 규탄해야 한다』고 했다.
宋씨는 교수자격시험(Habilitation)의 지도교수로 뮌스터大 사회학연구소(Institut fu¨r Soziologie)의 크리스티안 지크리스트(Christian Sigrist) 교수를 선택했다. 지크리스트 교수는 독일의 親蘇系(친소계·DKP)와 親中系(친중계·CPD) 중 親中 계열의 과격파 학자로 알려졌다.
『북한은 타고난 혁명가들을 잘 고릅니다. 宋斗律은 흡인력, 카리스마를 가진 지식인입니다. 日帝가 崔南善(최남선)을 집요하게 공략해 변절시킨 것도 그가 천재였기 때문에 그 파급효과가 컸기 때문일 겁니다. 宋斗律 사건을 보고 「北의 통일전선 공작사업이 얼마나 거대한 것이었는가, 통일전선 공작기구가 드디어 남한에 상륙하는구나」 하는 것을 국민들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나도 북한에 처음 내리던 날, 「아! 속았구나, 마르크스가 맞았다」고 외쳤어요.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는 북한은 역사의 「꼴통 守舊(수구)」입니다 오죽했으면 嚴冬雪寒(엄동설한)에 미소를 잃은 까칠한 花童(화동)들의 꽃다발을 받아든 아내가 울음을 터뜨렸겠습니까』
대질심문을 마치고 나서 吳吉男씨는 宋斗律씨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金日成·金正日주의자」라는 것을 깨닫고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했다.
『宋斗律이 아버지 묘소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화가 벌컥 났습니다. 宋斗律은 吳吉男의 가족 앞에, 민족 앞에 謝罪(사죄)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첫댓글한국에서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는 인간들은..월간조선-조선일보-씨스템클럽-한나라당입니다...이들은 태생부터 친일-친미 기회주의에 미친 놈들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주장만 하는 집단입니다...고로..월간조선이나 씨스템클럽의 글을 믿으면, 미국앞잡이의 속임수에 당하는 것이니 주의하셈
미국놈들과 친미앞잡이들인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합세해서 일으킨 IMF 국가부도위기 이후.. 실직자가 늘어나고.. 신용불량자가 넘쳐나고..길거리에서 굶어 죽고 있는 노숙자들이 넘쳐나는 대한민국...만약, 북한이..노숙자나 실직자나 신용불량자들의 인권을 비판한다면, 남북한간의 민족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첫댓글 한국에서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는 인간들은..월간조선-조선일보-씨스템클럽-한나라당입니다...이들은 태생부터 친일-친미 기회주의에 미친 놈들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주장만 하는 집단입니다...고로..월간조선이나 씨스템클럽의 글을 믿으면, 미국앞잡이의 속임수에 당하는 것이니 주의하셈
불상한 오길남의 처..마누라...동토의 왕국 북한에서 간염으로 죽엇겟지...
미국놈들과 친미앞잡이들인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합세해서 일으킨 IMF 국가부도위기 이후.. 실직자가 늘어나고.. 신용불량자가 넘쳐나고..길거리에서 굶어 죽고 있는 노숙자들이 넘쳐나는 대한민국...만약, 북한이..노숙자나 실직자나 신용불량자들의 인권을 비판한다면, 남북한간의 민족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