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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내외가 한국에 사는 큰조카의 초청으로 한국행에 나선것은 1996년 3월 4일이였다. 큰조카가 우리를 초청한데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다. 나와 형님 조종선은 한 부모한테서 태여났지만 형님은 한국 경상남도 월성에서 태여났고 나는 중국 무순에서 태여났다. 형님이 네살나던 해 부모가 중국으로 오면서 조부모에게 맡겨놓았기에 형님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러다가 1985년 2월 내가 부모의 유골을 모시고 한국에 친척방문으로 가서야 처음 형님을 만나게 되였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였다. 1995년 5월 큰조카가 중국에 방문왔었는데 그때 안바에는 형님이 1991년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던것이다. 그번에 중국을 방문했던 큰조카는 귀국해서 우리에게 초청장을 보내왔고 그로 해서 우리 내외는 한국행에 나선것이다. 한국에 이른후 일단은 큰조카네 집에서 놀면서 지냈다. 그렇게 한달간 있다보니 조카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것 같고 또 왔던김에 돈벌이도 해야겠다 싶어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5년전에 한국에 나온 문씨아줌마한테 전화를 했더니 경기도 일산 양지마을 건영회사 빌라건설현장으로 오라는것이였다. 그곳에서 나는 주택주위에 보도까는 일을 하게 되였고 집사람은 문씨와 함께 일하게 되였다. 숙소는 지하주차장 한쪽 구석에 비닐로 둘러친 가건물안에다 널판을 깔고 한 침대에서 셋이 잤고 식사는 대부분 수제비로 끼니를 에웠다. 그렇게 한달여 고된일을 했는데 그사이 회사가 부도나는바람에 로임도 한푼 못받고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였다. 이때 마침 경남 김해시에 사는 십촌동생이 일자리를 찾아놨다기에 그리로 달려갔다. 회사는 대우건설로부터 도급을 맡은 덕준건설이 시공하는 부산ㅡ대구간 고속도로 락동강교량가설업체였다. 그곳에서 나는 직영으로, 집사람은 청소부로 일하게 되였다. 처음에는 생소한 일이여서 일손이 잡히지 않았지만 인차 적응할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물이 반쯤 찬 교각기초웅덩이에서 장목을 건져올리려고 남먼저 서둘다가 그만 용접전기에 감전되여 흙탕물에 쓰러졌다. 동료들에 의해 구조는 되였지만 나는 불법체류자 신분이여서 병원에도 못가고 이틀이나 숙소에 드러누워있었다. 회사측에서는 안전사고가 드러날가봐, 또한 불법체류자를 고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3000만원이란 벌금이 부과되기때문에 아예 눈을 딱 감고 누구 하나 들여다보지 않았다. 또 한번은 대형진공청소기를 메고 교각우를 청소하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가 그만 안전란간에 발이 걸려 5메터 높이에서 떨어지려는 순간 청소기를 내던지고 목숨을 구했다. 물론 청소기는 박살났다. 나는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보다는 청소기를 박살냈으니 해고나 당하지 않을가 근심이였다. 다행히 유소장이 눈을 감아줘서 그 일은 말없이 지나갔다. 현장에서는 일이 힘들어 때때로 담배를 피우는것으로 잠간의 휴식을 취한다. 담배는 돈이 아까와 비싼것은 못사피우고 눅거리중에서도 눅거리를 택한다. 마침 집사람이 사귄 아줌마가 담배를 도매하는데 그 아줌마를 통해 시내에서는 볼수조차 없는, 농촌에만 공급되는 《솔》표 담배를 싼값으로 한박스씩 사다놓고 피웠다. 우리는 불법체류자여서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가끔가다 경찰이 회사에 들이닥쳐 불법체류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수사하기때문이다. 그럴 때면 사무실의 기사나 반장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 경찰이 오는 날에는 나에게 해상작업(강 한가운데서 하는 작업)을 시킨다. 통통배를 타고 강심에 가서 하는 일이기에 경찰의 눈을 피하는데는 최적이였다. 숨어사는 나로서는 회사에 감사할따름이였다. 그러는 사이 락동강가교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러 일군들은 제각기 다른 일자리를 찾아헤맸다. 나도 여기저기 일자리를 수소문했는데 마침 예전 동료였던 한국인 김호문친구한테서 련락이 와 집사람을 남겨둔채 그가 일하고있는 경기도 송탄 어연리 경부고속전철 가교공사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나는 첫날부터 교각의 하자콩크리트 깨기, 철근의 녹닦기같은 힘들고 지겨운 일을 하였다. 그러다 후에는 전에 엉터리로 부려봤던 운전기술로 화물차운전대를 잡고 발전기를 싣고다니면서 용접도 하고 고압물총으로 청소하는 일도 했다. 이곳에서 일한지 얼마 안되여 집사람이 부산에서 나를 찾아 올라왔다. 다행스럽게 인차 현장함바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였는데 매일 새벽 4시부터 밤 10시가 넘도록 분주히 돌아쳐야 했다.이렇게 한달반이나 지났을가, 겨우 마음이 잡힐가 하는데 함바식당이 불경기여서 일군을 계속 쓰지 못할 형편이 되여 집사람은 일자리를 잃고 진주에 내려가 조카네가 경영하는 주점의 일을 돕게 되였다. 구정을 쇠고난 얼마후였다. 새벽에 출근을 해서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아래배가 살살 아프더니 뒤가 급해져 구석진 곳을 찾아 혁띠를 풀자마자 설사가 좔좔했다. 뭘 잘못 먹었는가 했는데 돌아보니 완전히 혈변이였다. 《에쿠! 큰일 났구나!》 순간 나는 무슨 몹쓸 병에나 걸리지 않았나 하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후부터는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잡생각만 떠오르면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였다. 만약 불치의 병에 걸렸다면 지금까지 번 돈을 몽땅 까먹는게 아닌가싶어 죽을 심정이였다. 다행히 후에 확인된바로는 일에 너무 지쳐서 치질이 도졌던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나니 금방 날아갈듯 싶었다. 한국에서의 돈벌이는 말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내가 일하고있던 회사는 한국의 IMF사태로 로임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는데다가 불법체류자를 채용하지 말라는 정부의 지시가 내려져 1998년 3월 나는 다시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그래서 하는수 없이 미군이 주둔한 송탄에서 용역에 나가 노가다판을 뛰게 되였다. 용역에서 나는 자칭 해병대출신이라는 《술망태기》 김병곤씨를 알게 되였다. 동료들이 나에게 《저 사람은 행패가 심한 난봉군이니 조심하세요》라고 귀띔해 주었지만 몸붙일곳 없이 떠도는 그가 너무나도 불쌍해 내가 잡은 세방에 그를 데려다 함께 지냈다. 하루는 그가 미군기지에 가서 일하고 일당을 받아 오는 길에 술을 잔뜩 마시고는 만취해서 집에 돌아오더니 난데없이 날보고 《간첩》이라며 파출소로 가자고 팔을 잡아끄는것이였다. 세상에! 이런 생벼락이 떨어질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다. 참으로 소웃다 꾸레미 터질노릇이였다. 밖에서는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는 초저녁이였다. 그의 등살에 못이겨 갈려면 가자 하고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불법체류자란 딱지가 붙어 일단 파출소에 가기만 하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호시탐탐 도망칠 기회만 노리였다. 택시는 장대비속에서 한시간반쯤 달려서야 수원경찰청대문앞에 도착했다. 택시는 돌아가고 차에서 내린 《술망태기》가 경비원한테 뭐라뭐라하더니 혼자서 사무실로 뛰여들어갔다. 경비원도 비를 피하려 들어간 짬에 나는 인차 택시를 불러타고 줄행랑을 놓았다. 거처까지 돌아오니 훤하게 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나는 경찰과 그 《술망태기》가 뒤쫓아오는가 하여 바깥 동정을 살피고나서 재빨리 방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만 대충대충 챙겨서 진주 조카네 집으로 도망을 갔다. 하마트면 기른 개한테 발뒤꿈치를 물릴번 했다. 일이 몸에 배인 내가 조카네 집에서 빈둥빈둥 놀다보니 오히려 팔다리가 쑤셔났다. 하루가 삼추같았다. 도저히 이대로 박혀있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라도 있을가 하여 거창 귀곡리 두메산골에 사는 외사촌동생네 집으로 갔다. 때마침 가을이 한창이여서 동생네를 도와 벼가을도 해주고 마당질도 돕고 고추가을도 거들어주었다. 일하다가 쉬는 참이면 산기슭에 올라 무르익어 떨어진 단감을 주어먹었는데 그 맛이 말그대로 꿀맛이였다. 이 두메산골에서 바람도 쐬고 일도 도우며 열흘남짓이 세월을 보냈다. 동생은 바쁜철에 일손을 도와줘서 고맙다며 송아지를 60만원(한화)에 팔아 그 돈을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는것이였다. 어려운 사정에 이렇게 돈을 내놓는 동생의 소행에 나는 가슴이 뭉클해났고 코등이 시큰해났다. 한국에서 2년 10개월을 지냈고 또 단속을 피해 이리저리 쫓겨다니는것이 진저리가 나서 우리는 귀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2년반이나 애태우며 기다린 체불금을 받아내려고 경기도 일산 건영회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회사측에서는 회사가 부도났기에 체불금을 지불할수 없으니 법적으로 해결하라는것이였다. 막무가내였다.불법체류자라서 감히 법정대응을 하지 못할것이라고 미루짐작해 으름장으로 일을 까뭉개려는 심산이였다.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의정부에 사는 이종사촌동생한테 이 사정을 털어놓았더니 자기 친구 한분이 변호사라면서 도움을 청해보겠다고 하였다. 소송을 걸려면 증빙서류가 필요하다기에 나는 정발산에 가서물어물어가며 끝내 예전에 같이 일했던 소반장을 찾았다. 맘씨 고운 소반장은 두말없이 내가 자기수하에서 일했었다는 증명을 해주었다. 그 증명을 가지고 다시 건영회사를 찾아가니 그제서야 회사측은 《1996년 4월 로임 미지급》이란 확인서를 떼주었다. 소송서류가 구비되자 변호사에게 소송을 의뢰하고 이종사촌동생을 소송대리인으로 위탁해 놓고 우리는 귀국하였다. 그후 얼마 안되여 동생으로부터 승소판결을 받았다는 전화와 함께 돈도 부쳐왔다. 이제는 귀국한지도 오래 되였지만 가끔 한국에서의 생활이 눈앞에 삼삼 떠오르군 한다. 이제 다시 한국에 갈 기회가 생기면 그때는 고속전철을 타고 나의 땀이 슴배인 교가우를 지나도 보고 고속뻐스를 타고 락동강다리도 건너볼것이다. [무순] 조종덕 만남의광장 중국연변카페 http://cafe.daum.net/cnyanbianliu |
첫댓글 삶의 애환! 이것이 어찌 님 하나만의 일이겠나요,님의 진실하고 정직한 삶의 그행로가 만인의 귀감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한국에서의 님의 땀방울 꼭 기억하겠습니다.감사드리며..!
윷놀이조씨 조까시오 당신이 뭐 시인이요? 묵묵히 지켜나 보고잇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