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조경의 이해
제 27기 박물관 특설강좌 목요반
2003년 10월 16일(목) 15:00~16:50
정재훈(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
1. 조경이란 무엇인가
조경은 인류의 거주 환경과 국토의 자연경관에 대한 아름다움을 창조하거나 보조하는 조영예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조경을 통하여 즐거운 경관적 안식과 기능적 편의와 실용적인 이득과 정신적 사색과 신체적
건강을 얻을 수 있다.
조경은 조영되는 영역에 따라 그 양식을 달리한다. 광활한 국토에 베풀어지면서 국토계획이 되고 한정된
도시공간에 베풀어지면 도시계획이 되고 울타리 안의 주택공간에 베풀어지면 후원이 되기도 하고 마당에
베풀어지면 정원이 되는 것이다.
조경의 요소는 지형, 건물, 화목, 개울과 지당(池塘), 괴석, 조산(造山), 담장, 조형물, 다리, 도로이다.
이러한 조경의 요소들은 조영적 구상에 의하여 하나의 공간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종합적이면서
기능적으로 배치되게 된다.
조경을 구상하여 설계하고 시공 관리하는 데에는 건축이나 토목과는 다른 종합적인 예술성과 기술성이
필요한 것이다.
2. 한국전통조경의 계승이유
생명공학의 발달로 게놈(유전자) 지도가 완성되었다. 게놈지도를 통해 인간은 유구한 조상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오는 생명의 줄인 혈통이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였다. 부모로부터 우리가 태어나고 우리에게서
다시 자손이 연속된다. 어쩌면 인간은 이 생명의 연속을 위하여 고난을 극복하며 살고 있고 또 죽어 가는지도
모른다.
문화에도 유전자와 같은 고유한 문화세포의 정체성이 있다 이 정체성은 ① 우리국토의 자연환경과
② 우리민족의 생활양식과 ③ 시대성에 따라 흐르는 가치관과 ④ 사회제도의 규범과 ⑤ 인력기술의 생산조건에 따라 형성되었다. 전통의 문화적 정체성은 혈통 속에 혼혈되어 끊임없는 새로운 유전자가 결합되듯이 시대에 따라 항상 복합, 생성되는 문화의 세포분열이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자연환경이 주는
문화세포는 우리가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숙명적 자연과 같이 전통문화의 혈통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전통은 내 자신을 아는 일이다.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는 남을 잘 알 수 없다. 자기 가족을
부정하는 사람이 남의 가족을 잘 이해한다는 것은 위선이다. 자기향토와 자기조국을 잘 모르면서 세계를 잘
아는 척 하는 것은 뿌리 없는 부평초 같은 사람이다.
전통이란 새로운 창조의 가치 속에 구현되는 민족적 응집력의 기반이 된다. 우리가 오늘 세계시민이 되는
자격도 자기가 가진 정체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세계의 조경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조경의
문화부터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오늘 정보문화의 국경 없는 시대에 필자가 주체적 조경문화를 내세우는 절박한 이유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에 의하여 교육되고 취득한 내선일체 사상에 길들여진 조경문화가 지금까지 분별없이 지속되고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식민통치 정책으로 「주택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주택건축을 추진하였다. 주택대책위원회가
내세웠던 주택정책은 “주거양식이 국민생활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므로 실생활에 있어서 내선일체를 꾀하는 최 유효한 방법으로 재래 조선식 주택양식의 개량방책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란 목표를 설정하여 우리나라
전통주거와 조경을 말살하고 왜식으로 개량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왕군의 조경에서부터 사찰,
주택, 학교, 공원 등 전 국토의 조경이 왜식조경으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서울의 조선왕궁 조경이 왜식 정원양식을 철거하고 자연, 조화적 한국 전통양식으로 회복된 것도 1980년대에 와서 이루어졌다. 아직도 도처에 내선일체 사상에 의한 왜식정원의 존재는 남아있다. 우리는 이런 점을 주체의식 없이 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정원이면 어떠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정당하게 외국 조경양식으로 받아 들여 졌다기보다는 일본 문화의 졸개가 되기 위해서 조성되었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3. 한국전통조경의 특성
문화의 모태는 자연이다. 조경에 있어서는 자연 여건에 따라 그 나라의 조경양식이 달라진다.
한국의 자연관을 보자
① 한국인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연이다. 한국의 자연은 산과 들과 강과 바다가 변화 있게 전개되고 봄의 신록과 화사한 꽃의 개화, 여름의 무성한 녹음, 가을의 단풍과 탐스러운 결실, 겨울의 적막함, 나무의
고독과 설경. 따뜻하고 무덥고 시원하고 추운 온도의 변화, 맑은 청하늘을 언제나 볼 수 있는 하늘. 한국의
자연은 정말로 아름답다. 그래서 한국의 조영문화는 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인공의 구조물을 조화되게 하였다. 한국인에 있어서 인공의 미는 자연의 미에 비하여 속된 것이다.
② 한국인의 삶의 철학은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여 사는 것이다. 한국의 자연은 집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지진도 없고 용암이 분출하는 화산도 없고 위협적인 폭우를 동반한 태풍도 적고(가끔 적당하게 한 번씩
태풍이 온다) 대엉에서 밀려오는 해일도 적다. 한국의 자연은 사람에게 위협과 재앙을 주는 자연이 아니다.
농경산업시대에는 24절기를 잘 알아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 부지런히 일하면 자연을 성실한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 이런고로 한국인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문화가 되었다.
③ 한국인에 있어서 가장 깨끗한 것이 자연이었다. 그래서 한국인은 맹물을 마시는 민족이 되었다. 옛날에는 흐르는 강물을 그냥 떠 마시고 산 속이나 들녘에서 솟아나는 옹달샘의 물을 그대로 떠먹었다. 우리 국토의 전
강산에 솟아나는 모든 지하수는 깨끗한 물이었다.
④ 한국인에 있어서 가장 영원한 것은 자연이며 가장 미더운 것은 자연이고 가장 안식을 주는 것은
자연이었다. 기금도 세상일이 잘 안되면 한국인들은 산으로 간다. 정치가 민주적이지 못하면 민주산악회가
결성되어 산으로 간다. 요즘처럼 실업사태로 세상이 불안하고 명예퇴직이라도 당하면 안식을 얻으러 산으로
간다. 그래서 불교의 절이 산 속에 있다. 기독교의 기도처가 산 속에 마련되기도 한다. 그런고로 한국의 자연은 한국인의 신앙이 되었다. 산신단이나 성황당, 부락제단이나 계림 같은 신림(神林)이 그것이다. 삼국사기
조사조에 기록 된 삼산 오악과 들, 강과 바다에 신라가 제사지내는 것이 그것이다. 고구려의 왕은 죽으면 산신이 되고 들의 신이되고, 숲의 신, 강의 신이 되었기에 고국천왕(故國川王), 산상왕(山上王), 동천왕(東川王), 중천왕(中川王), 서천왕(西川王), 봉산왕(烽山王), 미천왕(美川王), 고국원왕(故國原王), 소수림왕(小獸林王)이라고
시호하였다.
⑤ 한국의 건국이념은 홍익인간이다. 이럿게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건국이념은 모든 조영에 있어서 인간을
위협하는 광대성이나 절대권력의 횡보가 적었다. 조영에 있어서 사람과의 조화성에 유의하였다. 인간척도를
기준으로 하는 조영의 아름다움이 강조되었다.
⑥ 한국조경문화의 특성은 자연순리에 순응한 자연과의 조화성을 근본으로 하여 인간 척도에 기준한
인간과의 조화성을 중시하였다.
4. 일본조경의 특성
일본의 자연은 사람에게 위협과 재앙을 주는 자연이다. 일본의 자연은 무서운 지진이 자주 일어나고 용암이 분출하는 화산의 폭발, 태풍과 폭우가 자주 오고 무서운 해일이 자주 일어난다. 이런 관계로 일본 사람은 자연의 위협을 극복하는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고 정신적으로는 자연의 재앙에 대비하는 긴장가을 가지고 살 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조영기술은 방진공법이 발달하고 자연을 인간의 손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축소지향의
상징주의 조영이 발달하게 되었다.
가장 일본적인 문화가 정립된 시대는 실정(室町)시대(1336~1573)로 선종문화가 크게 보급되어 문화의
성격을 결정지었다. 가장 대표적인 이 시대 정원은 고산수의 용안사 석정지다. 불과 50편 정도의 방장실 앞뜰에 판축 황토담을 치고, 15개의 돌로 다섯 무더기의 석립군이 흰 모래밭에 배치되었다. 한 포기의 꽃나무도 없고 한 방울의 물도 없는 정원이지만 출렁이는 바다와 험준한 심산이 있는 무한한 세계가 압축되고 응결되어
성장도 소멸도 없는 세계가 공간화 되어있다. 철선종희(鐵船宗熙)가 가산수보(假山水譜)에서 말하는 일본의
정원은 “삼 만 리 쯤 되는 것을 한 척 한 치로 축소한다.”는 명제를 알 수 있다.
일본정원속의 수목은 자연의 형태로 축소시킨 분재가 된다. 분재는 성장을 억제하고 천년의 시간을 일순으로 줄인 것이다. 분재가 되어야 석조의 응축된 공간 속에서 서로 조화되어 울창한 숲을 상징하게 된다.
일본의 정원 속에는 수목은 모두 전지되어 사람의 손안으로 길들여진 관상수가 된다. 족리의정(足利義政)은 정원수를 옮겨 심는 도중에 가지가 상했다고 젊은 정원사 다섯 명을 목 졸라 죽였다.
일본사람들은 모든 일을 긴장 속에서 한다. 그들은 열을 열심히 하는 것을 일생현명(一生懸命)이라 한다. 즉 생명을 걸고 결사적으로 일을 한다는 말이다. 일본의 정원 속에는 먼지가 없다. 일본 정원속의 길에는 옥석이
깔려있어 사람이 밟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난다. 교또의 어소에 가보면 행랑의 마루바닥을 사람이 밟고 가면
소리를 낸다. 이는 일본문화의 경계심 때문에 이루어진 조영이다. 일본의 정원에는 무사가 검도를 하듯 정좌한 긴장감이 팽배하다.
이러한 관계로 일본정원의 특성은 자연을 촉소한 인공화에 있다. 그리고 칼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긴장감이 든다. 일본 다도에 의한 다원에는 일기일회(一期一會)가 가지는 죽음 앞에 선 무사도의 긴장이 있다.
5. 한국조경의 요소
가. 지세
한국의 집터잡기에는 한국인의 자연숭배사상과 음양오행사상, 천지인의 삼재사상, 유교사상, 도교사상, 불교사상, 풍수지리사상 등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음양오행사상과 풍수지리사상이다.
음양오행사상에 대하여 살펴보자. 오행이란 다섯 가지 원기 또는 만물의 다섯 가지 정기를 말하는 것으로 화, 토, 금, 수, 목이 그것이다. 오행설은 토를 중심으로 화, 토, 금, 수, 목이 서로 상생과 상극을 하는 유기적이고도 구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전한서의 편집자로 알려진 반고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 목생화라 하여 오행의 상생관계를 말하고 있다. 화가 금을 녹이면 금은 수를 낳는다. 수가 화를 멸하고 이에 보답한다. 화는
토를 낳고 토는 수를 해하니 능히 막을 수 없다. 오행이 상위하는 소위(所爲)는 천지의 성(性)이다 중(衆)은
과(寡)를 이기는 고로 수는 화를 이기게 된다. 정(精)은 견(堅)을 이기는 고로 화는 금을 이긴다. 이것이 오행의 상극관계이다.
오행은 특정한 방향과 색 등을 의미하게 되며 이를 의미하는 바가 조영을 하는데 적용되어 방향을 정하는데 쓰이게 된다.
오행설을 음양설과 결합하여 자연의 현상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되었다. 송의 주염계는 이를
유학적으로 정리하여 “태극도설”로 만들었다. 즉 태극이 음과 양이 되고 음과 양이 변하고 합쳐져서 수, 화, 목, 금, 토가 되며 여기서 만물이 생성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음양오행사상은 인간은 대지에 매여 있는 운명적 존재가 아니다. 인위적으로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살아갈 터전을
선택함에 있어서 산의 형태와 방향에 오행의 가치를 부여하고 이것들의 상생상극의 관계를 이용하여 오행적
요소의 작용을 판단하고자 하였다.
음양오행과 십간십이지
|
수 |
화 |
토 |
금 |
수 |
십간 |
양 |
갑 |
병 |
무 |
경 |
임 |
음 |
을 |
정 |
기 |
신 |
계 |
십이지 |
양 |
인 |
오 |
진, 술 |
신 |
자 |
음 |
유 |
사 |
축, 미 |
유 |
해 |
방위 |
동 |
남 |
중앙 |
서 |
북 |
계절 |
춘 |
하 |
환절기
춘분,추분 |
추 |
동 |
색 |
청 |
적 |
황 |
백 |
흑 |
사수 |
청룡 |
주작 |
황룡 |
백호 |
현무 |
오상 |
인 |
례 |
신 |
의 |
지 |
풍수지리설은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에 나타났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풍수지리설은 크게 두 개의
원리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하나는 천지정기설기고, 하나는 인체감응설이다. 천지정기설을 천지에는 살아서 움직이는 정기로 충만해 있어 이 정기는 산맥을 타고 지하로 흐르고 있고 또 바람과 물에 실려 유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지간의 정기는 모든 땅에 고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곳에는 짙고 강하게 어떤 곳에서는
유약하게 또 어떤 곳에서는 나쁜 악기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인체감응설은 이러한 천지간의 정기에 인간은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강성대국을 건설하기 위한 국도를 정하는데 는 왕도풍수설이 있게 되고 민가의 집터를 정하는 데는
양택풍수가 조상의 유해를 지기가 성할 곳에 모시면 혈족이 번성한다는 음택풍수가 생기게 된 것이다.
풍수이론은 상지(相地) 이론이라 할 수 있다. 터를 잡는데 조건은 산과 물과 방향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좀 더 상세하게 분류하면 간룡, 장풍, 득수, 점혈, 좌향의 다섯 개로 집약된다.
풍수설에서는 산을 용이라 하여 산의 형태를 살피는데 산에는 생룡, 사룡, 귀룡, 천룡이 있으며 오행에 따라 산의 형태를 구분하기도 한다. 이중에 지기가 가장 왕성한 산을 택하는 것이 풍수설의 요체이다.
천지간의 정기는 바람을 타고 운행하는 정기를 모으는 방법이 장풍법이다. 바람이 실어온 정지를 막지 않고 또 흩어지지 않게 하는 장풍에 필요한 장치가 현의 주위에 있는 산이다. 즉 사신산으로 현무, 주작, 청룡, 백호와 조산, 안산 등이다.
장풍과 함께 득수가 중요하다. 물론 바람보다 짙은 물질임으로 물이 실어오는 정지는 바람에 실려오는
정기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득수가 장풍보다 중요시 하였다.
성국(成局)상 흘러들어오는 물을 득이라고 하고 흘러나가는 물을 파라 하는데 흐르는 물의 방향, 장단, 완급, 활협(闊狹), 곡절, 요포(繞抱) 등이 득수법의 내용이 된다.
점혈법은 어느 지점이 정기가 가장 왕성하게 모인 곳인가를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상지에 있어서 화룡점청 같은 요긴한 장소를 선정하는 것이다.
좌향은 대개 12방위로 나눈다. 죄향이란 혈의 위치에서 바라본 방위를 말하는 것으로 혈의 뒤를 등진 방향을 좌로 하여 혈의 정면을 향으로 나타낸다. 이 때 결정되는 좌향은 꼭 하나뿐이다. 좌향을 갖기까지 검토되는 향은 절대향과 상대향으로 구분된다. 전통입지에서 방향을 좌향으로 구분된다. 이는 오행, 팔괘, 십간, 십이지를
결합한 것이다. 국면이 같은 상대좌향은 절대좌향에의 음양의 중화가 구해지고 오행의 상생이 이루어진다.
절대향은 태양의 운해에 의해 결정되는 향, 시간성을 내포한다. 태양의 남중방위는 일정하여 이에서
동서남북의 방위가 결정된다. 태양의 운행에 의한 일조 일사효과, 지역에 따른 계절풍과 기후여건에 의하여
결정되는 물리적 특성과 이에 관련된 사상적 의미가 부여된다.
청룡은 목, 즉 동방이며, 백호는 금, 즉 서방이고, 주작은 화, 즉 남방이며, 현무는 수, 즉 북방에 배속시킨다. 상대향은 땅에서 출발하여 사회상을 반영하고 지표의 경사, 지맥의 방향 등에 의하여 결정된다. 지형상 시계가 열리는 곳으로 이곳 저곳의 관계가 감각적으로 확인되고 폐쇄와 개방감 등과 관련된다.
산을 바라보는 향천적인 것이나 물을 바라보고 산을 등진 배산임수하는 방향설정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음양오행사상과 풍수지리사상은 통일신라시대부터 도선국사에 의하여 정립되어졌으며 고려, 조선을 이어오면서
사회전반에 확산되어 생활화되었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은 북송의 성리학자인 주돈이(1017~1073)의 태극도설에 영향을 받아 음양오행의
풍수지리사상에 더욱 심취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조영물은 자연과의 조화를 근본으로 하여 조성되기에 이른다.
모든 조경의 터잡기에도 이러한 자연을 생명체로 보고 지세를 허물지 않고 조영하였다. 자연의 지세가 허한 곳이 있으면 자연을 인공으로 비보하였던 것이다.
나. 조원(造園)건축물
조원 공간 속에는 문, 대(臺), 루(樓), 각(閣), 정(亭), 사(榭), 당(堂), 재(齋), 헌(軒), 관(館), 전(殿), 사(詞),
엄(广), 낭(廊)과 같은 유형의 건축물이 건립된다.
① 문
문이란 공간의 영역을 표시하는 구조물로서 내외의 상징성을 갖는 건축물이다. 문은 목조로 짜여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전축으로 된 것과 석축으로 된 것도 있고, 싸리문도 있다. 왕궁의 궁문이나 성곽의 성문은 문루의 형태를 하고 있다. 담과 담 사이의 통로를 연결하는 작은 협문들은 조원공간을 깊고 은밀하게 만들어준다. 문의 형태는 검은 벽돌로 쌓은 원형의 만월문도 있고 한 개의 돌을 ∩형으로 다듬은 창덕궁 후원의 불로문도 있어
다양하다. 또 우리나라 전통건축에 달린 문에는 창호지를 발라 출입문과 창문을 겸한 문의 형식을 하고 있다.
문살을 꽃모양과 동식물, 인물 등을 묘사한 투각장식 문살과 정자형, 격자영 등 기하학적 문양을 한 문살이
있다. 이들 문살은 난간과 함께 전통건축의 아름다운 장식효과를 높여주고 있다.
② 대(臺)
중묵 명대(明代)인 1631년에 계성(計成)이 쓴 원야(園冶)에 “대라고 하는 것은 <석명(釋名) :한대 유희가
지은 자학에 관한 책>에 보면 지탱한다는 뜻이다. 흙을 견고하게 높이 쌓아서 그 위에 사람이 올라가 주변
경관을 구경하는 것인데 그 대가 사람들의 하중을 지탱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은 돌로 쌓고 그
위에 평판을 깔고 지붕을 얹은 것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누각의 앞면에 일보 정도 튀어나오게 하여 개방시켜
놓은 것도 있는데 이러한 것을 모두 대라 한다.”라고 했다. 이를 보면 바라보고 관찰하는 시설을 모두 대이다.
첨성대, 관천대는 천문을 관찰하는 대이다. 부여 백마강가의 자온대, 조룡대, 천정대, 희녀대 등이 있고
북한산성의 동장대, 서장대나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등, 적을 감시하는 대도 있다. 그리고 통신시설인 봉수대도 있다. 경치를 구경하는 자연산봉의 대로 많다. 경포대는 경관을 구경하는 누각형식의 대이다.
③ 루(樓)
루는 <설문해자(說文解字) : 한대 허신이 지은 책으로 자학에 관한 책>에 중첩하여 지은 집을 “루”라 한다고 하였다. 1865년 정학순이 쓴 경회루전도에 “경회루는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는 대이고 2층은 루이다.”라고 적으면서 주역의 원리에 의거한 우주적 질서를 조영에 반영하고 있다고 하였다.(경회루의 창건은 1412년)
경회루의 마루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루의 제일 높은 중앙단은 8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공간(3칸)인데 주역의 8괘를 상징하는 중궁으로 하였다. 그 다음 단은 12칸의 공간(3×5칸=15칸, 중앙단 3칸을 제외하면
12칸)으로 12개월을 상징하고 제일 외곽의 밑단은 24주(柱)의 공간으로 24절기를 상징하였다. 경회루의 구조가 천지만물의 형상과 천지운행의 원리와 음양오행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경회루는 조선의 가장 아름답고 장쾌한 누각건물이다.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구획 서쪽 방지(方池)속의 방형 섬 속에 세워진 경회루(국보 제 224호)는 정면 7칸 측면 5칸 (34.4×26.5미터)의 익공집으로 유연한
곡선미를 가진 웅장한 합각지붕으로 높이 4.7미터의 석주위에 세워져 있다. 기둥은 외(外)주는 방(方)주이고
내(內)주는 원(圓)주인데 4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난간은 계자난간이다.
④ 각(閣)
각은 루와 같은 높은 건물이었다. 원야의 옥우조에도 “각은 누각의 형식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22년(500) 기록을 보면 “백제 왕궁 동쪽에 높이 5장(丈)의 임(臨流)각을 지었다.”고 하였다. 이 임류각 터가 공주 공산성내에서 발굴되어 임류각을 추정 복원하였다. 임류각은 루같은 건물이다.
백제는 5장의 높은 건물을 각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창덕궁 후원에는 주합루 옆에 서향(書香)각이란 단층건물이 있고 주합루 북쪽 산록에 독서방인 의두(倚斗)각이란 소박한 민가의 별당 같은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비를 보호하는 작은 건물을 비각이라고 하였다. 원래 각은 높은 루같은 건물인데 비각처럼 작은 건물로 변하였다. 이는 한국의 석비 높이가 낮아서 그런 것이며 높게 되면 비의 보호각이 높은 걸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⑤ 정(亭)
정은 경치 좋은 곳에 휴식하기 위하여 건립한 집이다. 이규보는 사륜정기(四輪亭記)에서 “사방이 툭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것이 정자이다.” 라고 했다.
계성의 원야에서는 석명에 “여행하는 사람이 잠시 정지하여 쉬는 곳이다.”라고 하고, “정자는 만드는 형식이 일정하지 않다. 삼각, 사각, 오각, 육각, 횡규(橫圭 : 상부는 원형이고 하부는 방형인 형식), 팔각 등에서 십자에 이르기까지의 형식을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적절하게 만드는 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자나 대는 향을
정함에 풍수에 구애받지 않아도 좋다. 그렇지만 문루는 반드시 청당(廳堂)의 방향과 부합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동문선』에 실려 있는 이규보가 쓴 사륜정기를 보면 정자의 기능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자기도 하고, 혹은 앉아서 술잔을 돌리기도 하고,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며
뜻에 맞는 대로 하다가 날이 저물면 파하니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햇볕을 피하여 그늘을 찾아 옮기느라 여러번 그 자리를 바꾸게 되므로 그때마다 거문고, 책, 베개, 대자리, 술병, 바둑판이 사람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지므로 잘못하면 떨어뜨리는 수가 있다.”
필요한 도구를 실은 채 쉽게 옮겨 다닐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사륜정기의 요지이다. 이는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다. “사륜정기”에 보면 정자에는 여섯 사람이 놀고 있다. 거문고를 타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시에 능한 승려, 바둑을 두는 두 사람, 손님을 접대하는 집주인 등이 있다. 이는 고려시대 상류 민가의 정자규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자는 자연을 즐기는 가장 친근한 건물이다. 그러기에 자연 속에 동화하고자 하는 한국 사람에게는 조원
공간 안에서 가장 조원적 건물이 정자이다. 우리나라는 봄의 신록과 여름의 녹음과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이 아름답고 변하는 산과 들과 강의 절경에 정자를 많이 지었다. 정자의 배치를 보면 연못가에 배치한
것이 있고, 산마루나 언덕 위에 배치한 것과 집 뒤뜰의 한적한 공간에 배치한 것이 있다.
정자의 평면을 보면 정사각형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장방형, 육각형, 팔각형, ㄱ자형, 정(丁)자형, 다각형,
부채꼴 등이 있으나 이런 정자는 많지 않고 왕궁이거나 관아의 공간 속에 있다.
정사각형의 정자로 아름다운 것은 창덕궁의 애련(愛蓮)정(1692년 건립), 태극정(1636년 건립), 승재(勝在)정(조선 말 건립), 농수(農繡)정(1828년 건립), 괘궁(掛宮)정(숙종 조 건립) 등이 있다.
장방형의 정자로 아름다운 것은 창덕궁의 몽답(夢踏)정(숙종 조 건립), 취규(聚奎)정(1640년 건립), 희우(喜雨)정(1645년 건립), 취한(翠寒)정(숙종 조 건물)과 창경궁의 함인(涵仁)정(1633년 이건), 경남 함양군 안의면 원림리의 농월(弄月)정(1721년 건립),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정리의 거연(居然)정(1885년 건립), 충북 제원군에 있는 관란(觀瀾)정(세조 조 건립),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의 피향(披香)정(1716년 건립) 등이 있다.
육각형의 정자로 대표적인 것은 창덕궁에 있는 존덕(尊德)정(1644년 건립), 상량(上凉)정(1686년 건립)과
경복궁의 향원(香遠)정(1873년 건립), 부여읍 부소산성에 있는 백화(百花)정(1929년 건립), 영천군 신령면
화성동에 있는 환벽(環碧)정(1611년 중수), 광산군 임곡면 사호리에 있는 가학(駕鶴)정(1601년 건립) 등이
있다.
팔각형의 정자로는 용인군 외서면에 있는 봉서(鳳瑞)정(17세기 건립), 중원군 주덕면 덕연리에 있는 삼련
(三連)정(1930년 건립) 등이 있다.
창덕궁 옥류천 가에 있는 청의(淸漪)정(1636년 건립)은 초정(草亭)인데 평면은 장방형이고, 지붕은 팔각형이며, 단청을 곱게 하고, 세부 목부가 공예품처럼 아름답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은 평면이 정방형이고 지붕이
8각형인 3층의 정자형 건물을 구상의 기본으로 한 것이다. 아마도 신라에 이와 같은 목조의 정자형 건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추정할 수 있다.
정(丁)자형 건물로 아름다운 것은 경주시 양동리에 있는 심수(心水)정(1560년 건립)과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에 있는 열화(悅話)정(1845년 건립)과 강릉시 문정동에 있는 활래(活來)정(1816년 건립)이 있다. 정자형 정자로 대표적인 것은 경북 봉화읍 유곡리에 있는 청암(靑巖)정(1526년 건립)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정자
건물임으로 역사가 깊고 풍광이 아름다워 사적과 명승 제 3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정자형 정자는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 바위 위에 복원된 세검(洗劍)정이 있다. 원래 세검정은 1748년(영조 24년)에 건립되었던 정자이다. 다각형의 정자로는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가에 서 있는 부용(芙蓉)정(숙종 18년, 1776년 창건, 정조 조 개축)과 수원시 화성 용연 언덕위에 서 있는 방화수류(訪花隨柳)정(1794년 설립)이 있다. 부용정은
십자형 평면에 아(亞)자형으로 남쪽 언덕 면을 다각화한 특이한 구성이다. 북쪽 한 칸이 부용지 물 속에 뜬 것 같이 아름답다. 난간의 구성이나 창살의 무늬들이 다채롭다. 방화수류정은 편면은 아자형이고 전면이 ㅗ형으로 벼랑 위 성채에서 튀어나와 사방을 바라보기 좋게 되어있다. 원래 방화수류정은 성의 망대(望臺)와 같은
건물이다. 그런데 정자의 명칭을 붙이고 용연의 연못가에 있음이 특이하다.
부채꼴 정자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다. 청덕궁 후원의 연곳 가에 서 있는 관람(觀纜)정(20세기 초 건립)이다. 평면이 부채꼴이며 6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사이에 낙양각을 달았다.
이들 정자건물의 바닥을 보면 마루틀인 둥귀틀과 장귀틀을 짜고 그 사이에 단청판이나 장천판을 끼어 넣어 짠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이 가장 많다. 어떤 정자는 전돌을 깐 것도 있다.
정자에는 다양한 유형의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아(亞)자, 격(格)자 등 문양이 이채롭다. 정자의 천장은 연등 천장과 빗천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연등천장은 서까래사이에 앙토(仰土)한 모양대로 노출시켜 놓았다. 빗천장의 경우 초정이나 누정에서 볼 수 있는 구조인데 서까래와 평행되는 경사로 판자를 설치하여 천장을
구성하였다. 정자의 지붕은 사모지붕, 6모지붕, 8모지붕 등 모임지붕이 많고 이런 모임지붕 꼭대기에는
절병통이 설치되어 있어 지붕의 아름다움을 높이고 있다.
⑥ 사(榭)
사라는 건물은 주변경관에 조화되게 건립한 집을 말한다. 중국의 원야에서는 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라는 것은 석명에서 ‘기댄다는 의미’라고 하였으니 주변의 풍광에 의지하여 구성하는 것이다. 사는 물가에 위치하기도 하고 꽃밭가에 위치하기도 하는데 만드는 방법도 변화가 많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건물명에 사를 붙인 사례는 청덕궁 후원에 폄우(砭愚)사란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익종(1808~1830)이 공부하던 글방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층 맛배지붕의 익공집이다. 1칸은 마루이고 2칸은 방이다. 간결하고 소박한 건물이다.
⑦ 당(堂)
당이란 정침(正寢)의 건물을 말한다. 당이라 하는 집은 대개 중앙칸에 대청이 있고, 양쪽에 방이 있는 구조의 집이다. 이런 형태는 창덕궁 후원에 있는 영화(暎花)당(1692년 재건)이나 가정(嘉靖)당(20세기 초 건립)과
도산서원의 전교(典敎)당(1574년 건립)이나 옥산서원의 독락(獨樂)당(1516년 건립) 등이 그런 집이다.
원야에서는 당을 이렇게 설명하고있다.
“옛날의 당은 전반부가 텅 비어있는 부분을 당이라고 하였다. 당(堂)이란 당(當)이다.<당(當)이란 바름(정(正) 또는 주(主)를 뜻한다. 즉 주택에 있어서 정침(正寢)을 가르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앙에 위치하며 남향을 한 가옥을 말하는 것으로 당당하게 높이 드러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⑧ 재(齋)
재라는 건물은 선비들이 수신하는 간결한 집으로 대체로 방과 마루가 있으며 외진 곳에 한적하게 건립되어
있다. 원야에는 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재를 당과 벼교하여 보면 기를 갈무리하여 들이어서 정신을 수습하게 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숙연하고 경건함을 갖도록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숨어서 수신하고 은밀하게 처신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 양식이 활짝 펼쳐지거나 눈에 잘 뜨이는 것은 좋지 못하다.”
서원의 재실 건물이 다 그러한 것이다 창덕궁의 낙선재 건물도 왕궁의 건물이지만 현판이 붙어있는 단청하지 아니한 소박한 집도 왕이 수신하는 재실의 건물이었다.
⑨ 헌(軒)
헌이란 집은 높고 활짝 트인 장소에 드러나게 건립한 집이다. 원야에서는 이렇게 말하고있다.
“헌의 양식은 옛날의 수레와 유사하여 높은 곳에 올라 의기양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헌은
마땅히 높고 활짝 트인 장소에 건립하여 빼어난 경치에 보탬이 되게 한다면 서로 어울릴 것이다.”
이를 보면 헌이란 건물은 재란 건물과 반대적인 기능의 의미도 있다. 의기양양하게 드러내 놓고 뽐내는
그런 건물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동헌 건물도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청덕궁 후원 속에 헌으로 명명된
건물은 기오(寄傲)헌이 있다. 이 집은 1827년에 건립된 소박한 집인데 왕자 익종이 독서하던 집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 단층 팔작 기와지붕에 3칸은 방이고 1칸은 마루이며 민도리의 민가형 건물이다.
⑩ 관(館)
관이란 건물은 임시 거추하는 건물이었다. 객관이 그것이다. 요즘 만하는 여관과 같은 것이다. 원야 보면 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돌아다니다 잠시 기거하는 곳을 관이라 하여 다른 주거와는 구분되어 통용된다. 현재에는 서방(書房)도 또한 관이라 칭하고 객사는 가관이라 부른다.”
⑪ 전(殿)
전이란 집은 왕이나 왕비 또는 선왕과 대비가 거처하는 궁 건물과 왕과 왕비의 신위와 영정을 모신 집을
말한다. 사기에 전이란 명칭을 제일 먼저 쓴 것은 진시황이었다. 현존하는 조선왕조의 궁궐건물 중에 전은 치조(治朝)의 정전(正殿)과 편전(便殿), 연조(燕朝)의 왕과 왕비의 침전, 대비의 침전, 그리고 혼전(魂殿)과 영정을 모신 선원전이 등이 있다.
사찰에 부처님을 모신 건물은 전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를 모신 집을 대웅전, 아미타여래를 모신 집을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 극락전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집을 비로전 또는 대적광전이라고 한다.
약사여래를 모신 집을 약사전이라 하고 미륵불을 모신 집을 미륵전 또는 용화전이라 한다. 관음보살을 모신
집을 원통전이라 하고 문수보살을 모신 집을 문수전, 지장보살을 모신 집을 지장전이라 한다.
전이란 건물의 이름 중에 가장 높은 이름인데 건물의 크고 작은 규모와는 관계가 없다. 12평 정도에 불과한
신라왕들의 신전인 숭신전, 숭덕전, 숭혜전이 있고 이들 건물은 민가의 사당규모보다 약간 큰 건물이다. 전은
원래 조원의 건물에서 빼는 학자들도 있으나 왕궁의 조경이나 종묘같은 신궁의 원림이나 능의 원림과 사찰의 사원을 다룸에 있어 전도 조경 영역의 건축이 된다. 전의 지붕을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맞배지붕, 주심포집과 다포집, 그리고 장대한 기단 위에 건립된 것이 대부분이며 모두 단청을 하고 있다. 전의 향과 정문의 향은
대부분 같이 한다.
원야에서 문루 설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림에 있는 가옥은 방향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단 문루는 청당의 방향에 따르도록 해야 하는데 그 형세가
적합한지 고려하여 세우는 것이 좋다.”
⑫ 사(詞)
사는 사대부의 가묘와 공적으로 찬양해야할 충신열사의 신위를 모신 사당과 각 서원에는 학덕이 높은 학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있다. 가묘를 두는 것은 성리학이 들어와서 주자가례에 의해서다. 최초의 가묘는 고려 말
정몽주에 의해 집안에 세워졌다. 아산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 있는 곳인데 이곳에는 국가에서 대대적인 조경공사를 실시하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선열의 정신을 이어받는 교육도장으로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숭유사상에 의하여 가묘제가 일반화되었다. 그리하여 중인 계급 이상에서는 후원에
단독건물의 사당을 짓고 제사공간이 생기게 되었다.
⑬ 엄(广, 눈썹 집)
엄이란 집은 바위를 의지하여 반 지붕의 형태로 지어진 눈썹 집이다. 원야에서는 “옛날 사람들은 비위에
의존하여 지은 집을 엄이라 한다. 대개 바위의 형세를 이용하여 집의 형태가 이루어지나 완전한 집의 모양을
이루지 못한 가옥을 엄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엄이라는 집은 마애불이나 동굴입구의 보호시설로 반 지붕으로 처리한 것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집을 눈썹지붕의 집이라 한다. 북한산 승가사의 마애불도 반 지붕의 건물이 설치되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⑭ 낭(廊)
랑이란 정단 좌우와 중문에서 시작하여 외곽을 둘러서 있는 긴 건물이다. 때로는 집과 집 사이를 연결하여
굴곡을 이루거나 갈짓자를 이루기도 한다. 왕궁의 정전화랑이나 사찰의 불전회랑 등이 있고 창덕궁에는 편전에서 침전까지 비를 맞지 않고 갈 수 있는 회랑이 있다. 원야에서는 “낭이라고 하는 것은 무(廡)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온 건물로서 굴곡이 있고 길이가 긴 것일수록 뛰어난 것이다. 옛날의 구부러진 낭(곡낭, 曲廊)은 모두 곡척의 굴곤을 가지고 있었음에 반하여 현재 내가 짓고 있는 낭은 갈짓자의 굴곡을 가진 것으로 지형에 따라
만곡을 이루며 지세에 따라 굴곡을 이루고 있다. 어떤 낭은 산허리에 서려 있기도 하고 어떤 낭은 물가에 닿아 있기도 하다. 또 꽃밭을 지나고 골짜기를 타고 넘어서 구불구불 끝없이 낭이 이어지게 한 곳이 있으니 오원
(寤園)의 전운(篆雲)랑이 바로 그와 같은 양식을 취하고 있다. 내가 윤주(潤州)의 감로(甘露)사에 있는 높고
낮은 낭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노반(魯班)이 건축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라고 하였다.
다. 화목
한국의 조원 속에 배치된 화목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전지하거나 인공적 기교를 가미한
나무를 심지 않았다. 이는 일본과 비교해 아열대성 수목이 많아 상록수가 많은 일본의 식생과는 다른 것으로
기후적인 영향도 컸다.
수종을 보면 나무 자체가 상징성을 가진 것도 있다. 은행나무는 공자와 연관된 것이라든지, 괴목은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말하는데 왕궁과 관련이 있는 나무라든지 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은행나무는 문묘는 향교, 서원, 유학자의 공부하던 곳에 많이 심어져 있고, 괴목은 왕궁 궁문 안에 많이 심어져 있다. 괴위(槐位)는 삼공(三公)의 자리를 상징하는 것이며, 괴신(槐宸)은 왕궁을 상징하는 것이 모두 그러한 연유에서이다.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 수록된 화목의 품격을 논한 것도 있다.
조선의 선비들을 송, 죽, 매, 란, 국, 연을 좋아하였다. 민가에서는 감, 대추, 모과, 배, 살구, 밤, 포도 등
과일나무를 좋아하였다. 과일나무는 조상의 제상에 올라가는 제과와도 관련이 있다. 화목은 그 지방의 기후와 토질에 맞는 것이면 다 좋은 것이다. 수형에 있어서는 직간으로 자라는 수형보다는 사간으로 자라는 수형을
좋아하였다. 배식에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배식을 하였는데 길가에 심은 경우 바위는 담장이나 어떤 구조물과 조화를 이루어 심은 것이 있고, 화계나 단을 조성하여 심은 것이 있다.
원림을 조성함에 있어서는 사람이 심었는데 인공의 배식 같지가 아니한 배식을 좋아하였다. 연못 속의 섬에는 소나무나 대나무, 백일홍 같은 것을 심기도 하였고, 종묘나 묘역의 연못 속 섬에는 향나무를 심은 것도 있다.
제사와 관련된 곳에는 향나무를 심었다. 민가의 마당에는 배식하지 않았다. 화목에 있어서 수림을 조성하는
것을 좋아 하였으며 화포나 일년초의 화단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화목에 관한 문헌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수목들은 느티나무, 버드나무, 배나무, 잣나무, 모란, 매화, 오얏꽃, 복숭아꽃, 소나무, 대나무, 산수유, 철쭉, 차나무, 인상, 은행나무, 뽕나무, 박달나무 등이 보일다. 특히 조선시대 조경과
관련된 문헌들에서 화목의 기르는 방법과 품평과 괴석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양화소록은 강희안(1417~1464)이 쓴 책으로 화목의 기르는 방법과 품평과 괴석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지봉유설은 이수광(1693~1629)이 쓴 책으로 미화, 모란, 장미, 영산홍, 동백, 창포, 오죽 등 19종의 화훼에
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촬요신서는 방흥생(1374~1446)이 쓴 책으로 화목과 목본의 재식 시기와 접목 관리요령 등이 기술되어 있다.
한정록은 허균(1569~1618)이 쓴 책으로 치농편에 택지 정하는 것 식수, 양어에 대한 방법을 알 수 있다.
산림경제는 홍만선)(1643~1715)이 쓴 농가의 백과사전 같은 책인데 여기에는 꽃을 기르는 방법 등이
기술되어 있다.
색경은 박세당(1692~1703)이 쓴 농서인데 과수와 원예에 대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택리지는 이중환(1690~1752)이 쓴 인문지리서로 사람이 살만 한 곳으로 사민총론, 팔도총론, 복거총론으로 나누어 썼는데 특히 복거총론의 사람이 살 수 있는 여건을 지리, 생리, 인심, 산수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순인화훼잡설은 신경준(1712~1781)이 1745년에 쓴 조경식물 44종이 수록된 책이다.
물보는 이재위(1770~1826)가 쓴 책으로 초목부, 화훼편에 37종의 화목에 대한 한명(漢名)을 한글로 곁붙여 놓았다.
물명보는 유희(1775~1837)가 쓴 책으로 조류, 초목, 토, 석, 금, 화, 수에 대한 박물서이다.
임원경제지는 서유구(1764~1845)가 쓴 책으로 임원십륙지라고도 하는데 이 책은 상택지, 점기총론, 지리,
수토, 생리, 정지(井池), 종식(種植), 구거(溝渠) 등이 수록되어 있고, 조경관계 식물 65종의 재배법도 기술되어 있다.
라. 수, 천(泉), 지당(池塘)
물은 흐르고 고이고 넘치는 것이 순리임으로 개울을 만들거나 폭포를 만들고 연못을 만들었다.
조원 속에는 정보다는 천을 구하였고 천이 솟아야 생명이 있는 지세로 보았다. 샘이란 고대부터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물의 공급처이기에 중요하게 여겼고 신령스럽게 보호하였다.
한국의 모든 조원 공간 속에는 샘이 있다. 개울에 물을 막아 소, 담을 형성한 것도 있고 인공적인 연지를 만든 것이 있다. 지당은 직선과 곡선을 이용한 것이 기본인데 경주 안압지 같은 것은 직선과 곡선의 절묘한 배합을
볼 수 있다. 월성의 해자에서는 지형에 따라 다각형의 못이 연속적으로 성 둘레에 조성된 것도 있다. 백제의
부여 정림사지 앞의 연지는 방형이며 이러한 방형은 조선시대 와서 기본을 이루었다. 연못에는 타원형, 방형,
장방형 등이 있다.
연못에 물을 넣는 기법은 다양하다. 편면으로 넣는 기법, 잠겨들게 한 것, 밑에서 솟아오르게 한 것, 폭포로
떨어져 들어가게 한 것 등이 있다.
연꽃을 기르게 한 것, 그림자를 드리우고 수면을 고요하게 한 것, 연못 속에 괴석을 두어 변화를 준 것, 한정된 공간에 수초나 연을 심은 것 등이 있다.
서양처럼 하늘을 향하여 쏘아 올리는 분수는 만들지 않았다. 이는 물의 순리를 역이용한 것으로 자연의
순리에 어긋난 것으로 보았다.
계간(溪澗)에 보를 막아 계담을 조성한 윤선도의 보길도 세연정 계담은 특이한 착상을 엿볼 수 있다.
마. 괴석
고려 이전까지 괴석은 돌부리를 지맥에 묻어 평(平)치, 군(群)치, 첩(疊)치, 특(特)치 등의 기법으로
배치하였다. 평지는 한 면만 좋은 돌을 흩어놓은 기법이며, 군치는 여러 개의 돌을 모아 놓은 기법으로 작고
큰 것의 조화가 요구된다. 이러한 군치의 기법이 일본의 고산수식 치석으로 발전한 것인지도 모른다. 안압지의 치석은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첩치는 여러 개의 돌을 포개놓은 것을 말한다.
특치는 어떤 면에서 보아도 아름다운 돌을 하나만 놓은 것을 말다. 우리나라의 자연석 놓는 기법은 세우는 것보다는 눕혀서 안정감을 주는데 특색이 있다.
조선시대에 오면 석분 위에 괴석을 심어서 배치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이 괴석은 경(景)석 같은 기능으로
삼신산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많다. 낙선재 후원에는 괴석을 받친 석분에 소영주(小瀛州)라 새긴 것도 있다.
이는 이 괴석들이 방장산, 영주산, 연래산이라 상징한 것을 알 수 있다.
바. 조산(造山)
축경(縮景)식의 상징주의 조원에는 조산이나 가산(假山)이 많이 조성된다. 신라의 동궁 원지인 안압지는
축경식 원(園)으로 무산 12봉의 가산이 조성되어 있다.
별서나 민가의 연못에도 무산 12봉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고문진보의 관원단구좌무산병풍 시(詩)의 주(註)에 보면 무산 12봉의 명칭은 망하(望霞), 취병(翠屛), 조운(朝雲), 송만(松巒), 집선(集仙), 취학(聚鶴), 정단(淨壇), 상승(上昇), 초운(超雲), 비봉(飛鳳), 등용(登龍), 성천(聖泉)이라고 했다. 이는 송옥(松玉)의 고당부(高唐賦)에 나오는 초나라 양왕이 운몽(雲蒙)에서 선녀를 만나 운우지정을 나눈 사랑의 고사에서 연유된 것이다. 조산은
대개 선산을 상징하고 있다.
사. 담장
한국의 원에 있어서 자연의 원림 속에 담하나 둘러치면 원내(苑內)가 되었다. 담은 대단히 중요한 구역적
개념을 주는 영조물이다.
담에는 돌담, 흙담, 바자울, 꽃담, 전담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담의 축조에 있어 경사지는 직각으로 꺾어서 단을 지워 조성되었다. 민가나 사찰 서원에는 다듬은 돌로 담을 조성하지 못하였다. 중국이나 일본담은 경사지에 지형에 따라 연속된 담이나 중국에는 용처럼 굴곡진 담도 있다. 원의 담에는 창을 내거나 월문(月門)같은
문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아. 기물(器物)
원(苑)의 기물로는 수조(水槽), 석상(石床), 물레방아, 단(壇), 대(臺) 등이 배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연지 속에는 배를 띄우기도 하고 조각물이 배치되기도 하였다.
자. 보도(步道)
보도는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계단을 만들거나 산세를 허물고 길을 내는 일은 좋아하지 않았다. 직선보다는 굴곡진 길이 많고, 넓었다가 좁았다 하는 변화를 주어 지형에 맞게 조성되었다.
원의 보도 가에 배수구를 설치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비원(秘苑)속의 보도는 산길처럼 지형에 따라 설치되었고 배수구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경사진 곳은 돌아서 갔음으로 계단이 설치된 곳이 적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