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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장묘문화
미국에서 곧잘 마주치는 것이 공원묘지이다. 공원묘지라고 해서 외곽이나 음산한 곳이 아니다. 주택가나 시내 상가에도 아무렇지 않게 있었다. 새벽 일찍 호텔에서 산책을 나가다 바로 옆이 공원묘지인 줄 몰랐다. 신호등이 있고 차가 질주하는 사거리 한 쪽 길가에 큰 공원묘지가 버젓이 있었다. 아주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는 말 그대로 공원이었다. 큰 울타리가 있지도 않았다. 뭐 다른 시설과 특별하게 다른 것도 없었다. 으슥한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외진 곳을 지나칠 때처럼 섬뜩한 기분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한 시설이었다. 비슷한 크기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누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살았었는지 달랑 묘비명 하나면 족하다.
도시계획을 할 때 살아있는 사람의 주택단지를 지정하듯 죽은 자의 묘지지구로 지정하지 싶다. 우리 같으면 집단으로 띠를 두르고 집값 떨어진다고 농성하며 투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공원묘지가 있어 땅값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른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있을 만한 곳이면 산 사람은 더 복을 받는다고 여기나 보다. 공원묘지라고 기피하는 혐오시설이 아니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공원묘지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피해갈 수 없는 죽음과의 하나의 연결고리인 통로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이하는 공간이었다. 가까이서 추모하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하나의 문화였다.
어찌 보면 앞서 간 고인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닦아 놓은 길을 가며 살아가고 있음에 최소한의 예의이지 싶다. 또 나 자신도 언젠가 그 길을 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와는 비교되지 않고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동서양의 차이다. 사고의 차이 문화의 차이다. 죽었다고 아주 떠난 것이 아니라 곁에 있다고 여기며 언제든 찾아가 청소하고 꽃도 놓고 대화도 한다. 실체는 없어도 그 모습만은 가슴에 안고 마음에 담고 있다. 자그마한 소도시도 동네마다 공원묘지 하나쯤은 있지 싶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있다. 이런 사고는 어제 오늘이 아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오랜 생활습관에서 보고 자라며 자연스럽게 전해오는 풍습일 것이다.
그들은 장례를 치르며 울부짖기 보다는 웃음으로 담담하게 떠나보낸다. 고인을 기리며 좋은 모습으로 보내야 떠나가는 고인의 발길도 가볍다고 여기며 그에 대한 예의로 여기고 있다. 피해갈 수 없는 의식이다. 시신에 삼베옷 수의를 입히는 것이 아니다. 방부처리 하여 살아있는 모습처럼 화장까지 하고 평소 입던 옷 중에 가장 아끼고 좋아하던 옷을 골라 입혀 관속에 눕힌다. 조문은 시신 앞에서 마지막 예를 표한다. 산자와 죽은 자가 보내고 떠나면서 마지막 좋은 모습을 기억하려고 한다. 대부분은 고별 예배에만 참석을 한다. 장지에는 아주 가깝거나 특별한 사람 몇몇만이 참석을 하여 조촐하지만 조용하고 엄숙하게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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